시를 읽다가 문득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시를 쓸 줄 모르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시를 음미할 줄 모르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아는 시인들이 제법 있어서 그 분들이 새 시집을 내면 예의상 읽어줘야 할 것 같아서는 아니다. 새 시집 소식을 접하면 궁금해서 사서 읽는 편이다. 소식을 접하지 못하면 몰라서 못 읽겠지. 나중에 우연히 시집을 발견하고 어! 이런 시집도 냈어? 왜 몰랐을까? 라고 생각하겠지.
요즘은 시 공부를 하는 아이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시집을 구매한다. 아이는 종종 학교 과제를 이유로 서너권씩 시집을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사줄수 밖에 없겠지. 시집 제목을 부르라고 하고 주문한다. 그리고 시집들이 도착하면 아이보다 먼저 주르륵 훑어보고, 각 시집마다 한 두 개 가량 마음에 드는 시를 여러 차례 읽어 본 후에 아이에게 준다.
이번에 아이가 사달라고 한 시집들 중 한 권이다. 첫 번째 시와 두 번째 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내가 출판사에 있을 때, 우리 출판사에서 낸 시집은 전부 표제작을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게 옛날 방식이고 이젠 그러지 않는 방식이 점점 늘어나는 것인지 몰라도 이 시집의 경우 저 제목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이라는 시는 이 시집에 없었다. 즉 표제작을 제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제목은 이 시집에 실린 두 번째 시의 첫 부분이었다. 암튼 앞의 두 시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주르륵 넘기며 몇 개의 시를 빠르게 훑어보고 아이에게 넘겼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더 읽어야지.
시집 제목과 표제작 이야기를 꺼낸 김에 언젠가 이 서재에 쓴 적이 있는 이야기를 다시 재활용해보자. 박영희 시인의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의 경우 표제작을 어떤 시로 정하느냐에 대해 시인과 출판사의 의견이 갈린 경우인데, 나중에 박영희 시인은 이를 두고 많이 아쉬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본인이 표제작으로 생각해둔 시는 오래 전에 이 서재에 소개한 적이 있는 [아내의 브레지어]였다. 제목이 아내의 속옷이라서 출판사에서 반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출판사는 다른 제목(출간된 시집의 제목)의 시를 표제작으로 고집했고, 출판사의 고집을 꺾지 못한 시인이 그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서재에 시를 소개하고, 그 시에 대한 짧은 글을 엮은 글을 열개 남짓 적었었다. 더 부지런했다면 계속 적었을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조금밖에 못 적었네. 암튼 그 열개 가량의 글 중에서 알라딘 이웃들이 가장 뜨거운 관심과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준 글이 바로 저 [아내의 브레지어]라는 시를 소개한 글이었다. 박영희 시인은 아내의 브레지어를 빨았던 이야기를 시로 적었지만, 나는 아내의 브레지어 뿐 아니라 팬티 그리고 면생리대 까지 빨곤 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적었더니 여성 이웃분들께서 한마디씩 적어주셨던 것이다.
비슷한 소재로 그 다음으로 많은 알라딘 이웃들이 관심을 주신 글은 서정홍 시인의 [작업복 팬티]라는 시를 소개하고 과거 내 작업복 팬티 이야기와 군대에서 훈련 나갔을 때 팬티가 모자라서 겪었던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암튼 이 글을 쓰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저 '시와 함께 읽는 추억' 카테고리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여유가 생긴다면 또 다른 시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 봐야지.
밥 맛 떨어지게 만드는 식당
저녁 8시에 온라인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집에서 접속하면 주위가 산만해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야근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회의 시간을 기다렸다. 7시가 되어 배가 고파져서 회의 전까지 간단히 뭘 먹고 들어와야지 생각했는데,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별로 없어서 딱히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사무실 근처 김밥 집에 들어갔다. 김밥과 라면을 주문했다. 평소 점심 때는 빈 자리가 없고, 가끔 저녁때 지나가면서 보면 김밥을 포장해가는 손님들로 꽉 차곤 했는데, 오늘 따라 웬인일지 식당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나처럼 김밥과 라면을 드시고 계신 여성 한 분 밖에 손님이 없었다. 김밥을 포장하는 손님은 끊길 듯 이어지는 듯 했으나, 매장의 빈 자리가 많은 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음식이 나와서 먹기 시작할 무렵 주방 쪽 맨 앞자리에 삐딱한 자세로 앉은, 방금까지 자전거 라이딩을 하다 오신 듯한 민망한 옷차림의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주방에 계신 제일 연세가 많은 여성 분에게 반말로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암튼 뭔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뭐라고 하고 있었다. 대화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는 그 두 사람이 이 가게 사장 부부인 것처럼 보였다. 오늘 따라 저녁 시간인데도 유난히 손님이 없어서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 짜증인지, 투정인지, 시비인지 모를 남자의 기분 나쁜 태도가 너무 거슬렸다. 손님을 앞에 두고 대체 뭐하는 짓인거지. 나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탁 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젓가락을 던져서 그 남자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으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간신히 참았다. 빨리 먹고 나가야지 싶었다.
그 남자는 쉴새없이 입을 놀리며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었고, 나는 옆 테이블에서 나와 같은 메뉴를 드시고 계신 여자 분은 어떤지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나처럼 기분 나빠하시는 눈치가 보이면 한 마디 할까 싶었는데, 그 분은 묵묵히 식사를 하고 계실 뿐, 불편해 하는 낌새가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있다가 그 남자가 뭔가 명령조로 언성을 높였다. 주방에 계신 두 명 중에 한 분과는 아까부터 계속 반말로 대화하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어쩔줄 몰라하면서 가만히 계셨다. 그 남자는 같은 명령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언성을 높였고, 급기야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때리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화가 났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인간이 약자를 괴롭히는 인간이고,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건들건들 몸을 움직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내 고개를 돌려 내 눈길을 피했다.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는데, 그 말을 들었던 여성 분은 딱히 겁먹거나 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게 장난인지 그냥 입버릇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는 아니건가 싶었다.
그 남자는 이후에도 계속 건들거리며 이런 저런 말들을 내뱉았고, 나는 계속 신경이 쓰여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기분 나쁜 상태로 억지로 그릇을 비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계산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시선을 주방으로 향한 채로 계속 건들거리고 있었다.
8시에 시작한 온라인 회의는 9시 반이 되기 전에 끝났다. 나는 일을 마무리하고 이 글을 후다닥 두드렸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얼른 퇴근하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