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다락방님 글에 댓글로 남긴 적이 있는데, 내 알라딘 블로그 주소는 팝 가수 핑크에게 보내는 사랑고백이다. 이 블로그를 만들었던 2004년의 나는 그만큼 핑크에게 빠져있었던 것이다. 2004년을 떠올리면,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폭력 사건으로 인해 다니던 학원을 그만두는 걸로 한 해를 시작했다. 낯선 서울 땅에서 혼자 좁은 고시원에 처박혀 시간을 보내기만 했다. 패배감, 상실감, 좌절감, 자기 혐오로 미칠 것 같은 시간들이었다. 하루종일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날도 여러날이었다.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찾아보기까지 얼마나 오래 그런 시간을 보냈을까?
단언컨데 우울증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건 분명 이유가 있는 침몰이자, 침잠이었다. 나 자신에게로 깊이, 더 깊이 빠져들었던 날들. 당시에 좁은 고시원 침대에서 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만화책을 보고, 옆방 여학생이 남자친구를 데려와 내지르는 교성에 짜증을 내다가 게임방에 가서 밤새 게임을 하곤 했다. 당시 나는 부산 깡통시장에서 산 일제 씨디 플레이어가 하나 있었다. 책을 제외하고는 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딱 씨디 크기만한 플레이어로 핑크, 알라니스 모리셋, 크랜베리스, 나탈리 임부를리아, 로렌 크리스티, 데비 깁슨, 셰릴 크로우, 코어스, 셀린 디온, 머라이어 캐리, 샤니아 트웨인, 시네이드 오코너, 사라 맥라클란, 비요크, 사라 브라이트만, 포 넌 블론즈, 에이스 오브 베이스, 야끼다, 조안 오스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브리트니 스피어스, 티엘씨, 브랜디, 모니카, 데스티니스 차일드, 알리야, 바넷사 칼튼, 미쉘 브랜치, 켈리 클락슨, 에이브릴 라빈, 에반에센스 등을 들었다.
이 시절 특히 즐겨 들었던 노래는 핑크의 <Don't let me get me> 였다. 노랫말을 정확하게 해석하지는 못했지만 한구절 한구절이 모두 내 이야기인 듯 느껴졌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건 언제였을까? 아마 아직 학교를 졸업하기 전의 어느 시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이 날이 아마 핑크에게 푹 빠진 첫 날이었을 것이다.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 순간, 주변 풍경이 좁고 지저분한 자취방이 아니었던 걸 보면, 아마 부모님 집에 잠시 다녀가는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구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핑크의 라이브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핑크는 반주가 시작되자 갑자기 무대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 상태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노래 가사가 I'm lyin' here on the floor 로 시작한다.) 잠시 그렇게 누워서 노래를 부르다가, 서서히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문득 일어난 후에는, 무대 위를 방방 뛰어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환상적인 무대 매너에 완전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누워서 노래를 시작했다는 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바로 <just like a pill> 였고, 뒤이어 부른 노래가 <Don't let me get me> 였다. 두 곡 모두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중에 핑크를 검색하면서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알아냈다. 한때 정말 자주 들었던 노래, <what's up>을 부른 포 넌 블론즈의 린다 페이와 핑크의 일화는 제법 재미있었다.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가수를 찾기 위해 전화번호부를 찾아보고, 매일 전화하고, 심지어 찾아가기도 하면서 설득해 같이 음반 작업을 했고, 그 2집 앨범이 어마어마한 히트를 쳤다는 이야기. (내가 처음 듣고 바로 반해버렸던 두 곡 모두 그 앨범에 들어있는 곡) 핑크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 지 알게 되고, 린다 페리와 핑크가 얼마나 친해졌는지를 읽으며 한때 좋아했던 가수와 최근 좋아하는 가수가 서로 이렇게 깊은 인연이었다는 이야기가 또 신기했다.(나중에 알게된 핑크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불화에도 린다 페리가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저 두 곡 외에도 <Family Portrait>와 <Get the Party Started> 등의 2집 수록곡들을 다 좋아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좋아했던 건, 내 처지를 노래하는 듯한 <Don't let me get me> 였다. 난 하나에 빠지면 정말 미친듯이 빠지는데, 노래 한 곡을 수없이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점점 시간이 흘러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 노래를 들을 여유가 없어지고, 그렇게 좋아했던 핑크의 노래를 찾아 들을 여유조차 없는 삶을 살아가다가 문득 핑크의 노래를 듣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모르는 노래라도 그 특유의 목소리를 못 알아볼 수는 없다.
미국 드라마 글리에 등장해서 더 반가웠던 <Raise Your Glass>와 저번에 다락방님의 글에서 만난 <Just Give Me a Reason>는 최근 자주 듣는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