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구나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맹렬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처절하게 울던지 멀리서도 길을 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발을 멈추고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개월수까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대략 두 돌 가량 되지 않았을까 싶은 아기. 옷을 보고 여자아이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빠는 아이를 달래려 애쓰지 않고 그냥 걷고 있었는데, 아이는 목청을 높여 점점 더 심하게 울었다. 그 몇 발짝 뒤로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손을 뒤로 뻗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몇 발짝 뒤에 대여섯살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킥보드를 밀고 엄마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그 네 가족의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 속에 저장되었다. 그 가족을 스쳐지나가면서 보니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이동했다. 오직 아빠 팔에 안긴 아기만이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아기의 울음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혼자 아기를 돌보던 밤, 이유도 모르고 계속 울기만 하는 아기를 달래려 애썼던 밤, 아기가 말만 할 줄 알아도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분명 기저귀도 갈았고, 분유도 먹였고, 트림도 시켰는데, 안아서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보며 아빠로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말이 통하는 아기가 우는 이유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건 생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고집의 문제라 여겨진다. 내 경우에는 이럴 때는 인내심의 한계까지는 어떻게든 달래고 참지만, 한계에 닿으면 단호하게 대했던 것 같다. 아까 길에서 마주친 가족이 했듯이 더는 달래려 애쓰지 않고, 들어주지 않고, 울던 말던 그냥 무시하는 것. 그럼 아이는 지칠 때까지 울다가 스스로 지쳐 울기를 포기한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무척 마음 아픈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아이마다 상황마다 대처는 다를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다. 최후의 방법이었다. 다른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써봐도 안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경험을 쌓는다. 다음에 같은 일이 반복되면 처음보다는 훨씬 더 일찍 울음을 그친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한 번 겪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우는 아기를 보고 이제 사춘기를 벗어나는 아이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가 고만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큰 아이는 뭐든 처음 경험이라 다 서투르고 힘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둘째를 키우면서 훨씬 수월했던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작은 아이는 고집이 너무 쎘다. 한번 울면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애들 엄마가 장기 해외 출장을 가고 없었던 기간 동안 매일 밤마다 작은 아이는 잠투정을 심하게 했다. 그게 잠투정이었다는 건 한참 후에야 짐작했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아무 이유도 모르고 애가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서 걱정도 많이 했다. 다음날 아침 반차를 쓰고 병원에 데려갔다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그날 밤에 또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어디가 아프지 않으면 이렇게 울까 생각하기도 했다. 목이 터져라 우는 아이 때문에 내가 넋이 나가 있을 때, 큰 아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혼자 놀던 장난감을 치우고, 양치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내 곁으로 와 내 다리를 안았다. 큰 아이가 무척 대견했지만, 한 편으로 미안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울음을 그칠 생각이 없는 작은 아이도 미우면서도 미안했다. 


당시로서는 끔찍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빨리 아이들을 재우고 천기저귀를 빨고 삶아야 하고, 분유병도 씻어서 삶아야 하고, 어린이집에 가져갈 물품들도 챙겨야 하고 할 일도 많았는데, 아이를 재우는데 그렇게 한 두 시간을 써버리면 다른 일을 할 체력도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새벽 늦게 기절하듯이 뻗었다가 다시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아이 둘을 깨워서 준비를 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이 크고 난 후엔 문득 그리운 시간처럼 느껴진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겠지. 만약 다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면 여전히 끔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갔다. 한때 같은 단체에 있었던 후배 활동가 한 명이 sns에 전쟁 같은 한 주를 지냈다고 적었더라. 특히 어버이날은 하루 밖에 없는데, 부모님 댁은 두 곳이라 어쩔수 없이 이번에도 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적은 부분을 읽으면서 여전히 여성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체감했다. 그 친구는 당당하고 똑똑한 활동가였다. 그런 친구도 결국 여성이라는 한계를 깨닫고 올해에도 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적었다. 여기서 약간 이혼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의 여유를 느꼈다. 나 역시도 아직 부부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면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몰론 내 경우에는 부모님이 아주 멀리 계시니 명절이나 연휴가 아니면 방문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니 양가 부모님이 모두 서울에 있는 그 친구의 경우와는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혼한 후로 해마다 5월이 되면 확실히 마음이 가벼움을 느낀다. 더는 처가댁에는 방문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 집은 너무 멀리 있어서 방문을 못한다고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몸이 편했고, 몸이 편하니 마음도 편했다. 대신 아이들이 없는 우리 집은 너무 쓸쓸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혼자라서 편한 것이 있다면 혼자라서 힘든 일도 있는 법이다.


아, 대통령이 바뀌는 날이구나. 5월도 금방 휙 하고 지나가 버리겠지. 내일이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두 활동가의 단식이 30일차가 된다. 오늘은 저녁 문화제 이후 철야 농성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오늘은 늦게까지 할 일이 많았다는 걸 뒤늦게 생각해낸다. 에휴!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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