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울렸다. 맞은 편에 앉은 후배가 전화기를 꺼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나와 내 옆의 친구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후배는 황급히 술집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음악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한참 떠들어대던 후배 녀석이 자리를 비우고 나니 대화가 끊겼다. 친구 녀석은 술잔을 들어 올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건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기다리며 나도 울릴 리가 없는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테이블로 돌아오려다가,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머리가 멍해서 잠시 바람을 쐬려고 술집 밖으로 나섰다. 밤인데도 더운 열기가 확 얼굴을 덮쳤다. 담배를 피워물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저쪽에서 아까 나간 후배와 또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서너 살 어린 여자 후배였다. 학생회 일로 몇 번 얘길 나눠본 적이 있었는데, 제법 호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친구였다. 그런데 아까 한창 영양가 없는 얘길 떠들다 나갔던 후배 녀석이 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둘은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둘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가고 담배를 마저 피우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집에선 또다시 남자 후배 녀석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 후배. 원래 그렇게 조용한 성격이었던가. 남자 친구 옆이라고 저러고 있는 건가. 애초에 별로 끼고 싶지 않은 자리였건만, 이제 더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남아있던 술잔을 급히 비우고,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섰다. 깜짝 놀란 후배들과 친구에게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고 등을 돌렸다.
학교 앞 자취방은 언덕길을 이십여 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술을 한 병 사서 갈까 말까. 고민하며 담배를 빼어 물고 걷는데, 이미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벌써 제법 취했구나. 원치 않는 술자리에선 말도 별로 안 하게 되고, 괜히 술만 더 빨리 들이켜게 된다. 비틀거리는 발걸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1년 반을 만났던 여자. 2달 전에 헤어진 여자. 어지러운 정신에 그 여자와 아까 만났던 여자 후배의 얼굴이 겹쳤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인데, 왜 그 아이를 보고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난 단지 후배들을 질투하는 것인가?
결국, 소주와 과자 하나를 사서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던져놓고, 땀에 젖은 옷을 벗어서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찬물을 맞으니 조금은 취기가 가시는 듯했다.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방으로 들어섰다. 옷을 입기도 전에 잔을 찾아 술을 따랐다. 짜릿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자꾸만 그녀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가만히 눈을 내려 책을 보던 그 얼굴.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나를 의식하고 있을 텐데, 책에만 눈길을 주고 있던 그 얼굴, 간혹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넘기면서도 눈길을 계속 책에 주고 있던 그 얼굴.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지고,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 조용한 모습을 흩트리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던 바로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소주 몇 잔을 거푸 마시고, 과자를 씹고, 담배를 몇 대 피우다 보니 시간은 새벽 1시 15분. 자꾸만 전화기로 손이 가는 것을 참고 또 참았건만, 어느새 전화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 울리지 않는 전화. 울릴 리가 없는 전화. 헤어지고 며칠 후 술에 취해 새벽에 전화를 걸었고, 그 다음 날 아침 머리를 벽에 박아대며 전화번호를 지워버렸건만, 어느새 머릿속에 입력되어 버린 그 번호는 잊고 싶어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다른 번호는 절대 못 외우건만, 심지어 십 년 넘게 같은 번호를 쓰고 있는 집 전화번호도 못 외우건만, 왜 그 번호는 잊히지 않는 걸까?
참아야 해! 참아야 해! 술 기운에 전화를 하고 싶진 않아! 아니 전화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더는 유효하지 않은 말들을 함부로 내뱉지는 말자!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도 손은 어느새 전화기 폴더를 열었고, 손가락은 익숙한 그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젠장! 전화기를 벽에 던져버리고 남은 술을 입에 던지듯 털어 넣었다. 젠장! 오늘도 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이다.
==========================================================================
나는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감정적으로 가장 예민해진다. 그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런 날이면 거의 술을 한잔 마신 날이다. 어제도 그랬다. 후배 하나가 술을 사달라고 해서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 씻고, 컴퓨터를 켠 시간이 대략 1시였다.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문서 창을 하나 띄워놓고, Lady Antebellum 의 Need You Now 를 들었다. 한동안 자주 듣던 음악. 언젠가 이 노래로 글을 하나 써야지 싶었는데, 시간을 보내 딱 1시 15분이다.
Its a quarter after one, I'm a little drunk,
And I need you now.
Said I wouldn't call but I lost all control and I need you now.
이 가사를 오래 되새기며 자판을 두드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