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기는 꿈


뭔가 마감일이 되면 시간에 쫓기는 꿈을 종종 꾼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한참 전에 기고문 하나를 요청 받았었다. 마감일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휙 지나서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목요일 밤에 글을 쓰고 금요일에 한번 더 살펴보고 수정한 후에 보내야지 생각했었다. 목요일 저녁에 일을 마치고 글을 쓰려고 사무실에 갈 생각이었는데, 그날 회의가 하나 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무실에 가면 무조건 회의에 참여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 회의는 내가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고, 회의에 참여하느라 글을 못 쓰면 이래저래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피로가 확 몰려왔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 씻고 누웠는데,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 새벽에 깨서 사무실에 갈까 더 잘까 하는 고민을 한참 했는데, 결국 잠을 선택하고 말았다. 최근에 일이 좀 힘들었고, 계속 잠이 모자라서 많이 피곤했다는 생각을 하며 잠을 선택한 나 자신을 변호했다. 


금요일 밤에 무조건 글을 써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금요일 저녁 회의가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집중해야 할 회의였고, 머리를 많이 써야 할 회의라서 좀 힘들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니 너무 배가 고팠고, 피로감이 컸다. 회의 중간에 한 친구 연락이 왔었다. 회의 중이라는 정해진 문장을 문자로 보냈는데, 나중에 답이 왔다. 추어탕 먹으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고. 회의가 너무 늦게 끝나서 추어탕을 먹으러 갈 상황은 안 되겠지만, 일단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그 친구가 전화를 받으면 그 친구 집으로 가서 놀고, 만약 전화를 안 받으면 사무실에서 글을 써야지 생각했다. 첫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다. 그래 글을 써야 해. 그런데 너무 배가 고팠다. 편의점에 가서 김밥이라도 사올까 싶었다. 편의점으로 걸어가면서 두번째 전화를 걸었다. 이 친구가 전화를 받으면 친구 집에서 맛있는 걸 먹고, 안 받으면 그냥 김밥을 먹으며 글을 써야지 생각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편의점에 거의 다 와서 잠시 고민했다. 마감일은 토요일이다. 토요일 낮에 한 세시간 정도 집중해서 글을 쓰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긴 회의도 했고, 너무 힘든 하루였으니 그냥 맛있는 것 먹고 놀자. 이런 날 편의점 김밥이라니.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는데, 이번에는 받았다. 본인 집으로 오라고 뭔가 만들어 놓겠다고 했다. 얼른 짐을 챙겼다.


아침 나절에 잠을 깼다가 너무 피곤해서 다시 잠이 들었다. 그때 몇 개의 꿈을 꾸었는데, 그 중 두어 개가 마감에 쫓기는 꿈이었다. 마감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나는 빈 문서 창을 두고 단 한 줄도 못 쓰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왜 그런지 몰라도 글을 쓸 수 없었다. 결국 기고문을 청탁했던 분에게서 왜 아직 글을 안 보내느냐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괴로워하다가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깨고 나서 생각이 들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인가? 원고료 언급이 없었으므로 아마 원고료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언론에 보내는 기고문이라 잘 써야 한다. 그냥 대충 쓸 수는 없었다. 대략 이런 흐름으로 써야지 하는 얼개는 잡아 놓았었다. 그런데 폰으로 미리 조금 써보려고 하니 미리 구상했던 아이디어가 생각보다 별로라고 여겨졌다. 아마 여기에서부터 스트레스가 시작된 것 같다. 


암튼 점심 무렵에 사무실에 나왔고, 두어시간 동안 여러 자료들을 뒤지며 다시 글을 어떻게 구성할 지 고민했다.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뚝딱 해줄건데 뭐 그리 힘들게 하냐는 친구의 말이 떠올랐지만, 내 자존심은 인공지능에게 글을 맡기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맨 처음 구상했던 아이디어로 글을 한 번 써봤는데, 역시나 뭔가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그대로 쭉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거의 쉬지 않고 두드려서 분량을 채웠는데, 다시 읽어보니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 글을 그대로 두고 다시 맨 처음 구상했던 글을 열었다. 이건 이거대로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감 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다른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국 완성한 글을 보내기로 했다. 


외국인이 되는 꿈


며칠 전 꿈에서 나는 일본인이었다. 게다가 젊은 사람이었다. 꿈에서 거울을 보았는데, 젊고 잘생긴 남성의 얼굴이 보였다. 꿈에서 깨면서 그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꿈 속의 친구들이 나를 일본인 이름으로 불렀다. 느낌으로는 흔한 일본인 이름 같았다. 그 거울을 보는 장면에서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꿈 속의 나는 친구들과 어딘가로 여행을 떠났었다.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기념하는 여행 같았다. 아마도 졸업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행지에서 혼자 산책을 나갔다가 낯선 여성과 마주쳤고, 친구들을 버려두고 그 여성과 다시 다른 곳으로 떠나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었을 때 내가 일본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적은 많았지만, 외국인이 되었던 기억은 없는 것 같았다. 확실하지 않았지만 명확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또 생각해봤다. 젊어지거나 어려진 꿈은 많았다. 이건 기억나는 것만 해도 수십번이었다. 그럼 혹시 성별이 바뀌어 여성이 되는 꿈을 꾼 적은 없었나 하고 생각해보았다. 그것도 없는 것 같았다. 역시 명확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외국어를 듣고 말한 기억은 제법 있었다. 영어가 제일 많았고, 일본어와 중국어도 있었다. 인도네시아어로 대화를 나눴던 꿈도 기억났다. 그런데 이번에 일본인이 되었던 꿈에서는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 같았다. 예전에 외국어를 사용했던 꿈에서는 우리말을 쓰다가 특정한 시점에서만 외국어를 사용했고, 그게 외국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했었다. 이번에 일본인이 된 꿈에서는 나 자신이 일본인이라서 굳이 일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 내가 그러니까 일본인인 내가 알아듣고 말할 수 있으니 한국인인 내 기준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영화 [뷰티 인사이드]의 우에노 주리 등장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인종, 성별, 연령 모두 변한다. 할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어린아이가 되기도 하고, 여성이 되기도 하며, 외국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날 일본인 여성이 된 우진을 여주인공 이수가 찾아오는데, 이때의 우진을 맡은 배우가 우에노 주리였다. 상대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안 이수는 일본어로 묻는데, 오히려 우진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또 말은 일본어로 했다. 말할 때는 일본어로 하고, 들을 때에는 한국어로 들어야 한다. 이 설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우진은 한국인이고 일본어를 공부한 적이 없어서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우진이 일본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한국어로 말하지 못화고 일본어로 말한다. 이게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초능력자가 되는 꿈


이건 몇 달 전에 꾸었던 꿈인데, 당시에 글을 써야지 생각했었지만, 잊고 안 썼던 것 같다. 꿈 속의 나는 아주 짧은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었다. 강풀 작가의 타이밍이란 만화에서 강민혁 이라는 인물이 10초 전으로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나오는데 아마 그 인물에서 영향을 받아서 꿈 속의 능력이 나온 것 같다. 정확히 10초라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호감이 있는 어느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뭔가 말이 계속 꼬이고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실수를 할 때마다 계속 시간을 되돌려서 벌써 수십번을 말을 걸고 있는 중이었다. 단순히 내 말실수 뿐 아니라 말을 하는 중에 이 여성이 거절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그냥 확 시간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같은 장면에서 수십번째 반복 중이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어떻게 말을 해도 이 여성은 계속 거절할 거라는 것을 깨닫고 시간을 되돌리길 포기했다. 예상대로 여성은 거절했고 나는 깨끗이 승복했다. 이 장면은 아마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거 어느 특정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시간의 제한이 없고 횟수의 제한도 없다. 이 주인공이 잠깐 짝사랑 했던 먼 친척(?)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거절당하자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신청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특정한 시점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는 능력은 비디오 테이프나 카세트 테이프를 뒤로 감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 이렇게 쓰면 비디오 테이프와 카세트 테이프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 느낌을 알 수 없겠구나. 영화 [테넷]의 인버전과는 약간 비슷한 느낌일 수 있지만 개념 자체가 다르기는 하다. 


이 능력은 방금 저지른 결정적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지만, 그게 실수라는 것을 깨닫는 시점이 중요할 것이다. 너무 늦게 깨달으면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나버릴테니. 그리고 실수를 바로 잡으려 되돌렸음에도 다른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꿈 속 데이트 신청 장면처럼 계속 돌리고 또 돌려도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거겠지. 생각보다 썩 좋은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써먹을 일이 많을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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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나는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을까? 무슨 근거로? 무슨 자신감으로? 뭐가 그리 잘나서? 이상하게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보다 더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사실 어렸을 때 꿈은 책방 사장이었다. 지금은 안다. 책방 사장은 결코 마음대로 책을 읽고 사는 직업이 아닌 것을. 오히려 책방 경영과 생계 문제 라는 이중고에 부딪혀 훨씬 더 책을 읽기 어려운 직종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튼 어렸을 때 내 꿈은 서점 사장이었다. 어느 작은 시골 동네의 조그마한 책방 사장. 얼마나 낭만적인가 라는 생각을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했었다. 바보였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이던 당시까지는 도서 대여점이라는 가게들도 동네마다 두세개씩 있었다. 가끔은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과 도서 대여점을 같이 하는 가게들도 있었다. 그 당시에 조금 고민을 했었다. 도서 대여점 사장을 할 것인가? 비디오 테이프랑 도서를 같이 빌려주는 대여점 사장을 할 것인가? 그 고민의 뒷 배경에는 그 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난립했던 만화방과 무협 소설 및 무협 만화 양산소 시스템이 있다. 내가 한창 현실 감각 없이 대여점에 대한 고민을 했을 했을 무렵에는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왔던 판타지 소설(글로는 소설이라고 쓰지만 읽을 때는 쓰레기 라고 읽어야 한다.)들이 있었다. 암튼 그 90년대 초중반 무렵에 나는 현실 감각과 무관하게 내가 어느 조그만 시골 동네의 서점 주인 혹은 도서 대여점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이것도 조금 웃긴 이야기인 것 같다. 동네에서 나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 나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그냥 감은빛 이라는 덧이름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어느 정도 쓴다는 인식이 어느 정도 깔려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건 그 이야기를 전달한 화자의 착각일 뿐일 것이고, 대중적으로 나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인간이다. 아주 가끔 강의 요청이 들어오는 정도. 암튼 최근에 의외의 인물들에게 글을 엄청 잘 쓰신다면서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40년 가까이 글을 썼고, 20년 이상 남의 글을 고쳤던 입장이라 글을 못 쓰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글을 잘 쓰는 것과는 1대 1로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서 절대 긍정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그리고 최근의 나는 아주 긴 시간의 훈련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글을 못 쓰는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특정한 주제로 글을 써 달라는 청탁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시급하고 꼭 필요한 일인지는 내가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주제로 아주 참신한, 사람들의 흥미를 끌만한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이 없다. 몇몇 주제에서는 그렇다. 다른 주제에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런 태도가 부담스럽다. 뭔가 내가 글을 쓰면 다를 거라는 그런 기대가 느껴져서 부담스럽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나라고 특별히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돈으로 타락한 천박한 사회에서는 돈이 있으면 특별한 방법이 생기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대한민국 전체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도 거의 손에 꼽힐만큼 가난한 사람이라 아무런 방법이 없다. 사실 그런 것은 알고 있다. 유명한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훨씬 더 준비를 안 하고 특정한 분야에 지식을 전달하지 않아도 엄청나게 많은, 정말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돈을 받는 다고 했다. 그래서 잠깐 동안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나는 강사료가 거의 없어도 강의를 거절하지 않고 다 한다. 단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빈 말이라도 거의 무조건 다시 다른 강의를 청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건 내가 기후위기, 환경, 에너지, 자원순환 분야 다양한 이야기 꺼리로 강의를 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 30퍼센트 정도 약속을 지킨다는 느낌이다. 나는 거의 매번 내 강의에 만족한다. 물론 매번 조금씩 아쉬운 부분은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그리 크게 변하는 요소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현 상황에 대한 진단은 중요하다. 나는 어느 특정한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특화된 어떤 중요한 위치를 가진 강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람이겠지.


아. 글도 말도 다 쉽지 않다. 나는 글을 잘 쓴다는 칭찬도 제법 많이 받았지만, 말을 참 잘 한다는 칭찬 혹은 비아냥을 많이 들었다. 나는 확신했다. 상대적으로 순간 기억력이 좋아서 남들의 말들을 잘 요약하고 전달할 수 있으며, 여러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상대적으로 잘 기억해서 틀리지 않게 요약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그런데 그 능력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지금의 나는 그 정도의 능력이 없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기억력이 좋아서 특정한 이슈를 만들어 낼 수 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최근에도 들었다. 글을 잘 쓰는 양반이 현실은 왜 그렇게 사냐고? 글을 잘 쓰지도 못하고 현실도 그리 잘 살지 못하는 늙은이를 너무 괴롭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더니, 약간 화를 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멀어졌다. 나는 이미 늙었다. 그냥 좀 내버려 둬라. 글을 쓰고 싶기는 하지만 그리고 언젠가는 쓸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지만, 내 나이가 점점 늘어날 수록 그 가능성은 점점 낮아질 수 밖에. 그냥 냅둬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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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11 1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이라는 아이디처럼 글에도 삶에도 감은빛님만의 색깔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감은빛 2026-08-15 19:59   좋아요 0 | URL
늘 멋진 말씀을 남겨주시는 잉크냄새님.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 2026-08-12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글 잘쓰시는 분들 보면 넘 부럽더라구요^^

감은빛 2026-08-15 20:00   좋아요 0 | URL
저도요. 부럽습니다!!

페크pek0501 2026-08-13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 글에 만족하는 이가 드물고, 많은 이들이 지금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을 거라고 봐요. 무엇을 좋아해서 계속하는 사람은 이미 그쪽으로 재능이 있는 거라는 걸 어디서 읽은 듯합니다. 글을 쓸수록 더 어려워지는 건 참 이상한 일이죠.^^

감은빛 2026-08-15 20:01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정말 그래요. 예전에 한때 제가 글을 좀 쓴다고 착각했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참 글 쓰는 것이 어렵구나 하고 매번 느낍니다.
 
테세우스의 배 그래비티 픽션 Gravity Fiction, GF 시리즈 9
이경희 지음 / 그래비티북스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 표지가 독특해서 일단 꺼내 펼쳐봤다. 그리고 제목도. 아테네 인들이 긴 시간동안 테세우스의 배를 보존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목재가 낡고 썩어서 새로운 목재로 교체하곤 했다는 이야기.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나 테세우스의 배는 처음 보존을 시작했던 때의 목재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새로운 목재로 교체했는데, 그렇다면 그 배는 과연 테세우스의 배가 맞는 것일까? 만약 교체되었던 낡고 썩은 목재들을 모두 모아 다시 배를 만든다면 어느 쪽이 진짜 테세우스의 배일까? 당신은 어느 쪽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것인가? 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이 소설은 그 질문들에서 출발한다.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의식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도록 만든다.


한국어 제목은 [테세우스의 배] 이지만, 책 표지에 적힌 영어는 Theseus's paradox 이다. 외국에서는 이 표현이 정식 명칙인 것 같고, 우리는 여기서 역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인 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 뒷표지에는 Cyberpunk is now 라는 문장이 크게 쓰여있다. 이 책의 장르가 사이버펑크임을 명시한 것이다. 사실 사이버펑크 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데, 그냥 머리속으로는 신체 개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고, 괴상하게 생긴 기계 신체가 덕지덕지 달린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을 읽어보니 역시나 기계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다. 그리고 온 몸이 기계로 대체된 사람이 기계가 되기 전의 그 사람과 동일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제도도 등장한다. 그걸 증명하지 못하면 기계가 되기 전에 가졌던 재산과 가족관계 등을 모두 인정받지 못한다고 한다.


주제와 접근방식은 정말 좋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좀 아쉽다. 이 책에 대한 다른 100자 평들과 글들을 훑어보니 '클리셰 덩어리'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좀 과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로 이야기가 너무 뻔하기는 했다. 한 편으로 조금 더 정교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과 다른 한 편으로 너무 손쉬운 소재만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도 결말이 궁금해서 책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결말은 조금 허무하기는 했지만,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해보니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아니 가장 무난한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끝나는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묘사도 조금은 아쉽다. 특히 이 소설이 사이버펑크라고 크게 써놓았는데, 미래의 공간 배경에 대한 묘사와 기계로 신체를 대체한 여러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적어서 아쉬웠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머리 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상상해보려고 하는데, 구체적인 묘사가 적어서 막연하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다양한 교통수단들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는 부분이 적었던 점이다. 마천루라는 초고층 건물들 안에서만 생활하고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미래 생활을 말하면서 건물 안에서는 주로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수직, 수평 이동을 한다고 했고, 건물 밖으로 나올 일이 생기면 건물 간에 연결된 튜브카를 탄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게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다른 교통수단들도 등장했는데, 역시나 묘사가 별로 없었다.


등장인물들을 살펴보자. 우선 너무 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인 주인공을 보자. 주인공 석진환은 거대 재벌 그룹의 회장이다. 상식적인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을만한 부를 가진 것으로 나온다. 정략 결혼을 통해 딸을 낳아서, 아내와 딸이 있는데, 사고로 모두 죽었다. 그리고 본인은 그 사고로 크게 다쳐서 신체 대부분을 아니 전부를 기계로 대체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옛날 영화의 주인공인 로보캅은 뇌를 제외한 모든 신체가 기계인데, 진환은 뇌 마저도 기계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노 머시기를 통해서 뇌세포를 1대1로 기계로 바꿨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의 신쳬가 계속 바뀌는데, 맨 처음 신체는 군용 스펙으로 키가 2미터가 넘고, 두꺼운 철판이나 콘크리트도 때려부술 정도의 팔다리를 가진 것으로 나온다. 이야기의 중간쯤에는 일반 사람 체격이지만, 총알을 튕겨내는 몸체를 가진 신체로 바뀌고, 맨 마지막에는 실리콘인가 뭔가 사람처럼 부드러운 살결 같은 외관의 신체로 바꾼 것으로 나온다. 아마 필요에 따라 여러 신체를 바꿔 끼운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갈아탄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이 이야기의 악역은 석진환의 배다른 여동생 석미진이다. 온갖 불법적인 짓들을 통해 거대 재벌 그룹을 일으킨 진환의 아버지가 러시아계 여성을 통해 얻은 딸이며, 금발에 파란 눈이다. 이야기의 공간이 한국이다 보니 평소에 금발을 갈색으로 염색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남성인 진환보다 체격이 더 크고 힘도 좋은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안하무인에 아무것도 거리낌 없이 막나가는 인간이다. 사람 죽이는 것을 벌레 죽이는 것 정도로도 여기지 않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한 사람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또 죽이기를 수십번 반복하는 것으로도 나온다. 아, 이 소설에서는 마침애 인류가 죽음을 극복했다며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이 나온다. 이 재벌그룹 안에서 진환이 주도하는 인공장기와 인공신체 사업을 주도하는 기업과 미진이 주도하는 손상 신체를 되살리는 기업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두 사람 갈등의 시초다.


이 두 남매 외에 가장 비중이 높은 등장인물은 여울이라는 사람이다. 진환이 불치병에 걸린 아버지를 살려보려고 전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의료, 생명과학 분야 기술들을 섭렵하고, 그중 가장 뛰어난 연구소나 기업을 사들이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다. 그때는 아직 미혼이었던 진환이 여울에게 빠져들어 둘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들이 과거 시점으로 나온다. 그리고 현재 어떤 무리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며 갈 곳이 없었던 진환이 의지해서 찾아가는 사람이다. 여러모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지하세계에 어지간한 대기업 연구소보다 훨씬 더 기술력이 뛰어난 인물들과 설비가 있고, 진환을 그들에게 연결해서 새로운 신체를 구매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이 여울이라는 인물 역시 신체 대부분을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원격 조정하는 자신의 대체 신체를 사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에서는 이 이야기 전체의 최종 승자로 나온다. 다 좋은데, 조금 더 정보를 주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아마 작가가 마지막 반전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덜 주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독자 입장에서는 감정 이입을 할 기회가 적은 인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 다음으로 비중있는 인물은 현석이다. 석진환 회장의 심복으로 등장한다. 배다른 동생이 장악해버린 회사에서 단 한 명 믿을 수 있는 인물이자, 개인적인 일들까지 모두 처리해주는 가장 의지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이 인물이 조금 더 많은 비중을 가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여울이 등장한 이후로는 비중이 확 줄어버렸다. 그러다 되살아난 진환 때문에 다시 조금 비중이 늘어날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비중이 더 늘어난 것 같지는 않다. 마지막 모습은 너무 뻔한 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족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의 동생들, 즉 삼촌들은 세트로 등장한다. 이 거대 재벌 기업에서 지분으로 따지면, 진환, 미진과 거의 대등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너무 손쉽게 제압당해버리면서 그다지 존재감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다만, 그들이 갖고 있었던 차명 지분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그룹 내 권력 다툼 결말을 결정지을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이 부분도 이 이야기가 너무 뻔한 이야기로 느껴지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나머지 인물들은 거의 비중이 없는데, 꼭 소개하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 있다. 다섯명이던가 여섯명이던가 다수가 다수의 몸을 함께 사용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름이 아니라 그냥 '교수'라고 불린다고 한다. 처음 여울이 진환에게 소개할 때는 아직 어린 여성의 신체를 가진 사람인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중에 다른 인격들이 자꾸 튀어나와 여러 차례 말하는 주체가 달라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인물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어쩌다 여러 인격 혹은 여러 존재가 되어버린 진환이 결국에는 이 인물처럼 함께 공존하는 결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물은 신체도 여럿이고 그 신체들을 공유하는 인격도 여러 명인데, 어째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비슷한 개념이 떠올랐다. 하나의 몸에 여러 영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군령자' 라는 존재인데, 이영도 작가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등장했다. 이 군령자는 죽음을 회피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령자의 몸에 흡수되거나 자의로 합류하면 계속 몸을 옮겨 다니며 계속 살아가는 개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역사 속 위인으로 분류될만한 여러 인물들이 의외로 군령자의 영들 중 하나로 나오는 부분에서 의외라는 반응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를 들면 아주 용맹한 장군이 죽음을 앞두고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자." 라는 유혹에 빠져 군령자의 몸에 합류를 한다던가, 어떤 훌륭한 성취를 이룬 과학자나 예술가가 평생의 업적을 이루기 직전에 죽음을 앞둔 상황이라면 영이 되어서라도 그걸 이루고 싶어서 군령자에 합류한다던가 이런 개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긴 시간을 살아온 군령자는 그만큼 수많은 영을 거느리고 있기에 어떤 영들은 그 하나의 몸에서 거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수라는 인물은 각자의 장점이 필요한 순간 서로 몸을 옮겨 다니며 활약할 기회가 충분하리라. 아, 지금 막 생각났는데, 워쇼스키 자매가 오래 전에 제작했던 드라마 시리즈 [센스8]도 8명의 주인공이 짧은 시간 동안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몸을 공유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나온다. 이들은 처음에 서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서로 몸이 바뀌기도 하는데, 나중에는 이런 능력을 활용해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자신들과 적대하는 세력에 맞서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배우 배두나는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 무술인으로 등장하는데, 무기를 든 다수의 적들을 상대할 때면 어김없이 배두나가 등장해 적들을 쓰러뜨린다. 또 남미쪽 인물 중 카 레이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적들에게 쫓기는 상황이면 반드시 이 인물이 등장하여 경이적인 실력으로 자동차 추격전을 펼친다. 주인공 일행이 8명이나 되다보니 매력적인 인물들이 많고, 이 8명이 서로 몸을 바꿔가며 위기를 극복해간다는 설정이 신선해서 즐겨 봤었는데, 세번째 시즌까지 찍은 후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막대한 제작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이야기가 펼쳐지는 도시는 평택인데, 이 미래 시대의 평택은 평택혁신도시라고 불리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지만, 우리나라의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 같은 느낌이다. 책 속 설명에 의하면 북미 관계가 개선되면서 미군 기지가 축소되고, 그 자리에 한미연합군사연구소가 들어서고, 이 연구소를 중심으로 첨단 기술들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시험하는 공간으로 신기슐에 대한 모든 규제를 면제하는 특구라고 했다. 그런데 이 설정이 좀 과하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는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경찰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중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잔인한 살인극들이 등장하는데, 공권력의 개입은 아예 없다. 마지막에 검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래서 국가 권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싶기는 한데, 여러모로 우리나라가 배경인데, 이렇게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어색하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우리나라 모습이 아니라 첨단 기술에 대한 대부분의 규제가 사라진 좁은 영역, 특구라는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라는 단서를 잊지 말아야 조금 억지로라도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 특구 안에서 온갖 더러운 방법으로 악착같이 돈을 끌어모았다는 진환과 미진의 아버지 덕분에 그들이 비정상적인 재력과 권력을 손에 쥐었다는 부분도 전제조건으로 달아놓아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설정들이 너무 손쉬운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이 이야기가 뻔한 이야기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인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진환의 존재는 두 번 더 등장한다. 즉 막판에 진환은 세 명이 된다. 이 세명 중 누가 진짜 진환인가? 우리는 과연 누구를 진짜 진환이라고 인정할 것인가? 여기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등장한다. 의식이 계속 이어져 온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기계 몸을 가진 진환이 진짜 진환인가? 소설에서는 이 인물에게 컨티넘이라는 단어를 쓴다. 그리고 사고를 당한 시점의 진환의 의식을 백업해 놓은, 그러나 신체는 없이 메모리 칩으로만 존재하는 의식(몸이 없으니 인물이라는 단어를 쓰기가 어색한 느낌)이 진짜 진환일까? 이 녀석의 장점은 가장 완벽한 기억을 갖고 있다는 부분이며, 그래서 메모리로 불린다. 그리고 기계로 완전히 대체해버런 진환이 가졌던 원래 신체 부위들을 모두 가져다가 다시 소생시킨 진환이 존재한다. 이 진환은 그러나 기억이 아예 없다. 마치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 모습으로는 이 인물이 가장 완벽한 진환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차명 지분이 담긴 태블릿을 열기 위해서는 신체 인증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미 기계 몸으로 바뀐 진환은 이 신체 인증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암튼 이 진환은 보디라고 불린다.


일단 의식을 백업 받아놓은 메모리는 제쳐두고, 원래의 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계 몸의 진환이 진짜 진환일까, 아니면 기억은 없지만 원래 신체를 그대로 갖고 있는 진환이 진짜 진환일까? 처음에는 너무 당연히 컨티넘으로 불리는 의식이 이어진 진환이 너무 당연히 진짜라고 생각했지만, 막판에는 정말 그게 너무 당연한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이 지점에서 이 이야기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싶다. 그리고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소설 초반에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실제로 인류가 노화라는 현상의 원인으로 밝힌 유전자 텔로미어를 유지하거나 복구하는 기술들이 개발 중이라고 들었다. 언젠가는 인류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또는 이 소설에 나온 것처럼 점점 기계로 신체를 대체하는 미래가 올 수도 있겠지. 그런 미래가 되면 이 소설은 일종의 예언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 현재의 과학기술들도 아주 오래 전에 SF 소설에 나온 개념들을 살린 것들이 여럿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갖고 SF를 읽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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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8-13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류가 노화와 죽음을 극복하는 때가 오면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저는 죽어야 할 나이에 이르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지금 백살까지 사는 것도 긴 인생인데 그보다 더 길어진다면 사는 게 고역일 듯합니다.

감은빛 2026-08-15 20:02   좋아요 0 | URL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페크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신체를 바꿔서 엄청 긴 수명을 살아가는 것처럼 나와요. 구체적인 나이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내 몸을 빌려 드릴까요
사토 아유코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나 자신을 누군가에게 빌려 준다는 의미


이 책을 다 읽고 꼭 글을 남기고 싶었다. 글을 쓰려고 마음 먹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쓰지 못한 이유가 있다. 마야는 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려고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질문에 답을 찾기에는 몇 가지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우선 성별의 한계가 있겠다. 나는 현재 중년 남성으로서 젊은 여성의 생각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두번째는 시공간의 한계다. 이 소설은 1996년 "가와데 문학상"을 받았다. 90년대 중반 일본의 이야기다. 나도 물론 90년대 중반에 청춘을 살았지만, 일본과 한국은 여러 상황이 많이 달랐을 것이다. 요즘은 SNS와 각종 영상 등을 통해 각 나라의 사회상황과 문화를 훨씬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일본 문화를 직접 수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세번째로는 계급 혹은 계층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약간 억지로 일반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주인공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대학인 도쿄대학을 다니고 있다. 비록 마야가 보디 렌탈을 통해 돈을 벌고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내용은 없다. 아마 굳이 보디 렌탈이란 방법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대학을 다니며 생활하는데 큰 무리는 없을 것 같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알바를 통해 용돈을 벌 수 있다. 실제 작중에서 마야는 그 용돈 벌이의 목적과 보디 렌탈의 고객 모집을 위한 목적으로 바 같은 곳에서 알바를 한다. 암튼 공부도 잘하고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반면 나는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고, 공부를 그리 잘 하지도 못했다. 그저 이름 없는 지방 대학을 겨우 졸업하고 시민운동 판에 뛰어든 가난한 활동가일 뿐.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태생적인 한계라는 것들은 다 핑계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르다. 이 지구에 약 80억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면, 그들 모두 각자 다른 생각을 한다.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결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각자 모두 이렇게 다름에도 불완전하게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쨌든 마야의 삶을 들여다보며 상상해보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토 아유코 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일터에서 가까워도 한동안 가지 않았던 알라딘 중고서점을 그날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별 생각없이 책들을 살펴보다가 정보라 작가의 책 하나를 고르고 우연히 집어든 책이 [도쿄대학 살인사건]이었다.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 문구에 비운의 천재 작가라고 적혀 있어서 구매했었다. 이 책은 약 1/3 정도 읽었는데, 진행이 좀 느리고 생각만큼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사토 아유코 작가의 가장 유명한 책이 바로 이 [보디 렌탈] 이라고 하길래 [도쿄대학 살인사건]을 덮어두고 이 책을 먼저 읽고 싶어졌다. 이 소설의 원제가 바로 [보디 렌탈]이고 우리나라에 처음 출간된 판본도 이 제목으로 나왔다고 한다. 이후 다시 출간된 책이 지금 제목으로 나왔다. 암튼 이 책을 구하기 위해 알라딘 앱에서 중고 책을 검색했다. 세 곳의 매장에 이 책이 있었고, 그 중 하나를 골라서 2만원 어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배송료 2,500원을 아끼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인데, 평소 다른 온라인 쇼핑이라면 이런 짓을 하지 않겠지만, 책에 대해서는 늘 이렇게 한다. 그래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책이니까. 


이 소설이 "가와데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결정된 그 회의는 무려 4시간이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고 한다. 통상 문학상의 수상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사전에 심사위원들이 대략 그 범위를 좁혀 놓고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 토론을 이어가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문제작이었다는 뜻이겠지. 이 책의 맨 뒤에 수록된 두 편의 해설과 옮긴이 후기에서도 반복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본의 평론가 진노 토시후미는 이 소설을 포함한 사토 아유코의 작품들을 "초현실주의 실험"으로 보며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김미현 평론가는 "하루키의 경쾌함, 뒤라스의 관능성, 쿤데라의 위악성이 혼합된 묘하고 대담한 소설"이라고 말했다. 옮긴이 김진욱은 사토 아유코가 "성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그렸다고 언급했다.


이 책을 한 번 완독하고 두번째로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을 한 내 솔직한 마음은 생각만큼 재미있지도 않고, 생각만큼의 문제작도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이 30년 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겠지. 그럼에도 김미현 평론가가 말한 것처럼 하루키와 뒤라스와 쿤데라를 불러올 정도는 아니다. 아, 확실히 경쾌함이 있고, 관능적이고, 위악성이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잘 어우러져 있는가?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의문이 든다. 요컨대 핵심은 이거다. 이 글의 맨 앞에서 내가 던진 질문이자 독자들이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떠올릴 질문, 그래서 대체 왜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를 빌려주는 걸까? 그것도 젊은 여성이 돈 많은 중년의 남성들에게 고액의 돈을 받으며 남들이 매춘이라 부를 행위를 하는 것일까? 확실히 돈 때문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육체적인 쾌락 때문도 아니다. 뭔가 이 사회에 대한 환멸과 저항을 표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럼 왜일까? 책을 덮은 후로 꽤 긴 시간을 생각해봐도, 나로서는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진노 토시후미는 매춘을 "상실을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내 몸이지만, 이 몸이 내 신체라는 감각을 상실하는 것. 이것을 위해 보디 렌탈 이란 행위를 하는 것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이 일본인 평론가는 작가인 사토 아유코가 우연한 계기로 신체감각을 상실할 계기로 매춘을 선택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이 해설은 아마 일본에서 출간된 96년 판본에 실린 글일 것이다. 사토 아유코는 2008년 [꽃들의 묘비]라는 작품을 출간하며 자신과 언니가 친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신체감각의 상실을 위해 매춘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김미현 평론가는 글에서 보디 렌탈의 이유를 딱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텅 빈 그릇이 되어 그 속에 허구나 망상, 유희 만을 담기 위해 의식이나 반성, 이성 따위 자의식을 몸에서 파낸다."는 문장을 썼다. 그리고 이 평론가는 소설 후반부에 마야가 유일하게 가학 충동을 느껴 먼저 유혹하는 우치다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결국 마야가 "완전한 물건이 되기에는 그녀의 자의식이 철저하게 제거되지 못했기에 분열을 일으켰다."고 표현했다. 이어서 "물건이 스스로 물건임을 모르면 진짜 물건일 수 밖에 없다." 라며 "자신이 물건이라는 자의식이 있다면 그때부터는 이미 물건이 아니다." 라고 했다. 우리 마야는 자의식조차 없는 물건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빌려주는 삶을 살았지만, 결국에는 자의식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옮긴이의 말에는 아사히 신문의 서평에 실린 마야의 목적도 소개하고 있다. "그녀가 노리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정신적 치유" 라고 했다. 이어서 "자신의 몸을 남자들의 욕정의 기호로 삼아 철저히 세련되게 만들면서 거꾸로 그 같은 욕정의 세계에서 정신을 이탈시킨다는 식의 '야릇한 치유법'" 이라고 적어놓았다.


이 소설에는 마야의 과거에 대한 내용이 거의 없다. 현재 대학생이면서 남몰래 부유한 중년 남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고 살고 있고, 그 고객인 여러 남자들과의 이야기들이 옴니버스식 구성처럼 등장한다. 마야가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는 그 과거를 알 수 없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작가인 사토 아유코가 왜 이런 작중 주인공인 마야의 삶을 빌려 이런 이야기를 쓴 것인지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어려서부터 친아버지에게 당한 성적 학대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지옥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지워버려야 했을 것이고, 자신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로 선택한 것이 사물처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실 작가는 비운의 천재 작가가 아니었다. 가족이란 이름의 괴물에게 학대 당한, 너무나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했던 부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자의식을 철저하게 지워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던 경험이 나에게도 있다. 여기 알라딘 서재에 글로 여러 번 썼었고, 언제나 군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꼭 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군에 입대할 당시에 나 스스로 인간이라는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만약 내가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한다면 도저히 그 생활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낱 미물이며, 감히 인간 따위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온갖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만약 그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탈영을 했을 것이다.


이제 작가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작품 자체만 놓고 몇 가지만 더 얘기해보자. 일단 확실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리고 정말 너무나도 자극적인 주제다. 다만 글에는 섹스 묘사도 없고 야릇한 분위기조차 없기 때문에 포르노라고 부를 수는 없다. 마야가 말하는 보디 렌탈이란 개념 자체가 그렇듯이 이 글에서 중년 남성들이 마야를 빌려서 하는 여러 행위들은 철저히 차가운 시선으로, 감정을 배재하고 그저 이런 일이 있었음을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구체적인 묘사를 배제한다. 그리고 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해괴한 짓을 너무 당연하게 또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처럼 이 소설 전반에 상당한 블랙 유머와 해학이 깔려있다. 소설 초반에 와타나베 조교수가 강의에서 한 말인 "인간은 똥과 오줌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말은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정말 독특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상식적으로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주제를 너무 거리낌 없이 던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글이 경쾌하고 거침이 없기도 하며, 그러면서 또 위트와 해학을 갖춘 글이다. 앞서 김미현 평론가의 평가는 틀린 것은 아니다. 다만, 계속 말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뭐라고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이 소설의 결말은 좀 많이 아쉽다. 그리고 전체적인 구성도 아쉽다. 병렬적으로 여러 구매자들의 이야기를 배치한 것은 장점도 있지만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전체적으로 큰 줄기의 이야기가 너무 약하다. 앞서 언급한 그 우치다 이야기가 이 소설 전체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일텐데, 이 부분이 좀 아쉽다. 


이 이야기에서 이어서 생각할 거리들도 제법 많다. 일단 요즘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파파카츠"가 이 책에서 묘사된 보디 렌탈과 매우 유사하다. 부유한 중년 남성이 젊은 혹은 어린 여성이랑 놀고 돈을 지불하는 방식. 결국은 이것도 매춘이고, 원조교제와 다를 바 없는 행위일텐데, 거창하게 방과후 동아리 활동을 뜻하는 '부카츠' 라는 단어를 파파랑 붙여서 신조어를 만들었다. 우리나라 식으로 이해하려면 조건 만남이라고 해야할까?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청춘시대] 에서 강이나 라는 캐릭터가 중년의 남성들을 만나면서 원하는대로 돈을 펑펑 쓰는 생활을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니 최근에 본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젊은 여성들이 이 파파카츠로 돈을 벌어서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자신의 '최애'에게 갖다 바치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일본에는 젊은 여성이 남성에게 자신을 빌려주는 또 다른 형태가 있더라. 바로 렌탈 여친이라고 부르는 것, 우리 말로 여친 대행 서비스 라고 하면 되려나? 일본 드라마 [내일,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 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드라마로 시즌 1을 보았고, 시즌2는 앞 부분만 조금 보다가 말았다. 원작 만화가 있다고 알고 있다. 나무위키 설명에 의하면 이 만화에 렌탈 여친, 파파카츠, 소프랜드, 딜리버리 헬스 등 불법과 합법 사이를 오가며 통용되는 매춘 행위들이 총 망라된다고 한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곧바로 이 드라마를 떠올렸다. 이 책이 나왔던 96년에는 책 내용이 충격적인 문제작이었겠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류의 매춘이 너무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과 이 드라마를 연결해서 글을 하나 쓰고 싶었는데, 드라마를 가볍게 보고 넘겨 버려서 내용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그때 디즈니 플러스를 딱 한 달만 구독해서 볼만한 영화나 드라마를 짧은 시간에 몰아서 보았기 때문에 더 기억이 안 나는 듯하다. 다시 보려면 다시 구독을 해야 하는데, 돈이 좀 아깝다. 혹시 [무빙]의 후속 시리즈로 강풀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한 드라마가 디즈니 플러스에 나오면 그때 다시 구독할 예정이라, 그때 다시 보고 글을 쓸까 싶은데, 어쩌면 그때쯤 되면 이 드라마가 디즈니 플러스에 없을 지도 모르겠다. 


사토 아유코는 2013년에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알코올을 병용한 급성약물중독이라고 나온다.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힘겨웠을 작가의 삶을 감히 생각하면 참 뭐라 할 말을 찾기 어렵다. 그래도 열심히 작품 써준 덕분에 이렇게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 고맙다고 표현하고 싶다. 자, 이제 꽤 오래 방치해뒀던 [도쿄대학 살인사건]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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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이다. 벽을 주제로 쓴 6편의 단편 소설을 담고 있다. 4편은 SF임을 확실히 알 수 있지만, 두 편은 잘 모르겠다. 이런 류의 주제별 모음집은 수록 작품들의 편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단순히 취향으로만 봐도 그렇고, 구조와 밀도를 생각해도 그렇다.

첫 소설인 듀나 작가의 [아레나]는 이 책의 첫번째 자리를 차지할만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미국의 코믹스나 영화 같은 곳에서나 나올 법한 초능력자들이 엄청 많은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K팝 아이돌 문화를 엮었다. 초능력자 아이돌이 공연도 하고 악당들도 물리친다. 그 장면들은 드론으로 촬영되어 전 세계로 영상을 퍼뜨린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다 드론이 찍을 수는 없는 일. 카메라의 사각지대에서 일어난 일이나 잘 보이지 않는 장면들은 각색되어 다양한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소설 속에서 반복되는 초능력자들의 전투 장면들은 초기에는 사실이 거의 대부분 발표되었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은 그저 하나의 선택할 수 있는 재료 중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재미를 위해 양념을 치고, 이미지를 미화하고 몇몇 중요한 사실을 감추기도 했지만, 사실의 큰 덩어리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전투와 오락을 구분할 수 없게 되고 회사마다 쌓아놓은 비밀들이 많아지자 사실은 점점 존재감을 잃었다.˝(본문 33쪽)

수십명의 초능력자 무리가 주인공이 일하는 회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전투가 끝나자 회사의 작가들이 살아남은 초능력자들에게 다가가 인터뷰 하면서 처음엔 사실을 묻고, 그 다음엔 생각을 묻고, 마지막으로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말았으면 하는지를 묻는다고 했다. 이렇게 회사에 고용된 작가들이 만드는 공식 세계관이 있는가 하면 전세계 팬들이 각자 만드는 팬픽들도 있다.

이제 진실 혹은 사실은 그 힘을 잃고, 그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 버리는 설정과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들만 유통되고 있었다. 이 소설의 제목 아레나는 고대 로마 시대에 검투사들이 싸우던 원형 경기장을 말한다. 소설의 첫 문단에서 2033년 7월 14일 대구 도시철도 공사장에서 진홍색 젤리로 가득찬 지층이 발견되고 끔찍한 전염병인 적사병이 유행하고 남한은 이제 전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독특한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적사병의 원인인 프로스페로 생태계는 소수의 살아남은 생존자들을 초능력자로 만들었다고 나온다. 아레나는 이렇게 초능력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소이고, 대한민국이란 나라 전체가 관중석으로 고립된 경기장처럼 전세계로부터 고립되어 거대한 아레나가 되었던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남성은 청소년기에 강한 초능력으로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자 강한 히어로였지만, 성인이 되면서 회사 경영진이 되어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회사 경영은 다른 동료들이 하고, 그는 그저 앞에 나서서 웃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제 초능력자들의 전투에도 나서지 않는다. 성인이 된 그와 동료들은 경영자와 중간 간부가 되고, 다시 어린 청소년들이 나서서 전투를 한다. 이런 시스템도 한국의 케이팝 아이돌과 그 기획사의 문화를 가져다 썼다. 현실에서도 각 기획사마다 연차가 오래된 아이돌들은 더 이상 무대에 오르지 않고 회사 중간 간부가 되거나, 얼굴 마담이 되는 것 같다.

듀나의 이 짧은 단편은 흥미로운 소재와 다양한 초능력을 지니고 또 사연을 품은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책을 처음 펼쳐든 독자들의 마음을 뺏기에 충분한 매력을 가졌다. 이 정도의 설정으로 이렇게 짧은 이야기만 펼치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중편이나 장편으로 다음 이야기를 계속 써주거나 연작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 소설인 아밀 작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은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4차원을 다룬다. 3차원 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인간이 4차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궁금했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고 해도 인간인 우리가 그걸 잘 느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음악, 그 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다룬다. 읽다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잠깐 생각났다.

세번째 소설은 이산화 작가의 [깡총]이다. 맞다. 깡총 깡총 뛰어다니는 그 동물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그 동물 덕분에 멸종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 이야기 왠지 익숙하지 않나? 그렇다. 이건 호주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가져와 더 흥미로운 설정을 덧붙였다. 긴 싸움을 이어가는 두 종족의 싸움이라는 설정도 좋고, 연구자와 사냥꾼이라는 두 인간 주인공의 조합도 좋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이 기가막히게 좋았다. 이 책을 통해 이산화 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큰 발견이다. 이 소설엔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마틴 옹의 [얼음과 불의 노래]에 나오는 장벽과 같은 길고 높은 벽이 나온다. 사이비 종교에 미친 광신도 집단도 나온다.

이서영 작가의 [월담하려다 접천]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처음 소개한 듀나의 [아레나]에서 남한 전체가 고립된 상황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서울이 하나의 고립된 섬 같은 상황이다. 벽에 갇힌 도시 같은 느낌. 여기 서울은 전능하신 방패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뭐든 방패님의 말씀을 따라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다. 방패님에 대한 정보는 전혀 나오지 않는데 내 느낌에 한 사람의 독재자인 것 같지는 않고 소수의 엘리트 고위 공직자 집단이거나,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 독재국가에선 사람들이 특정한 지역의 출산센터에서 태어나 유아센터, 초등센터, 중등센터, 고등센터를 옮겨 다니며 자란다. 주인공은 역촌동 출산센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같은 출산센터에서 태어나 같은 유아센터 등을 함께한 친구는 나오지만 부모나 가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공동 시설에서 다함께 자랐으리라. 어렸을 때 북한에 대해 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를 탁아소에 맡기고 공동 작업장에서 일을 해야하고 아이도 탁아소에서 공동으로 자란다. 방패님의 말씀을 통해 평생 서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듣고 그렇게 믿고 살아왔는데, 코딩을 통해 우연히 외부 네트워크의 존재를 알게되어 접촉했다는 이야기. 후반부에 갑자기 이야기의 규모가 너무 커지는데 비해 적절한 묘사가 이뤄지지 않아 아쉽고, 결말이 좀 많이 허무하다. 방패님이란 기묘한 느낌의 독재자 이미지가 재미있고 신선했는데 갑자기 너무 큰 이야기를 흘러가버려서 많이 아쉽다.

이유리 작가의 [무너뜨리기]는 마음의 벽 아니 서로를 허물없이 생각하는 어떤 경계를 다룬 소설이다. 작중 7년차 부부인 남녀 주인공이 더는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지 않게 되고, 방귀도 아무렇지도 않게 뀌게 되는 상황에서 남자가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는데, 리빌딩이란 이름의 일종의 최면 치료 같은 것을 받는다.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제법 괜찮았다. 그런데 후반부에 갑자기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좀 황당하게 끝난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소설은 정보라 작가의 [무르무란]이다. 아마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모티브로 글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고대 흔히 우리가 신석기 시대라 부르는 돌도끼와 돌칼을 쓰던 시절의 이야기. 선조로부터 지혜를 벽화를 통해 배워 익히고, 이 시대의 지혜를 또 벽에 새겨 후대에 남기는 삶을 다룬다. 사냥에 대한 장면을 기대했으나 묘사가 안 나오고, 주술의식에 대한 묘사는 길게 나오는데 그 장면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소설집 [저주 토끼]를 통해 읽었던 정보라 작가 다운 글이란 생각은 들었지만, 생각보다는 크게 와닿는 지점이 없는 소설이었다.

여섯 작품 모두 저마다 다른 위상과 층위의 벽을 상정하고 이야기를 펼친다. 듀나 작가와 이서영 작가가 고립된 국가와 도시를 둘러싼 벽을 그렸고, 이산화 작가는 인간이 만든 인공물로서 거대한 장벽을 그렸다. 아밀 작가는 차원의 벽을 상정했고, 이유리 작가는 심리적인 벽을 가정했다. 정보라 작가는 유일하게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암벽을 주제로 글을 썼다.

다양한 이야기 꺼리들이 여러가지 다른 주제로 생각을 넓혀주는 기분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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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6-24 0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듀나님은 오래전부터 sf소설을 쓰신분인데 아직까지도 작품활동을 하시는지 몰랐네요.저도 읽어봐야 겠네요^^

감은빛 2025-06-26 17:43   좋아요 1 | URL
단편을 여기저기 많이 발표하셨던데요.
확실히 필력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