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산토 -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
마리- 모니크 로뱅 지음, 이선혜 옮김 / 이레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몬산토'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어이없게도 어린시절 문고판으로 읽었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이란 책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책의 부제가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란 단어를 듣고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읽기 전에는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GMO가 나쁘다는 건 귓동냥으로 여러차례 들어왔던 터였고, 세계 최대의 종자회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GMO 특허권을 쥐고 있다는 얘기도 얼핏 들었었다. 어디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 한번 보자 하는 마음에 책을 집어들었는데,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날 줄은 미처 몰랐다. 

앞서 어이없게도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떠올린 얘길 했는데, 책을 읽으며 '몬산토'가 무슨 뜻인지 무척 궁금했다. 다행히도 앞부분에서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줄만한 얘기가 나온다.  

   
 

 독학으로 화학자가 된 존 프랜시스 퀸은 1901년, 5,000달러의 대출을 받아 자그마한 회사를 설립하면서 자신의 아내 올가 멘데즈 몬산토를 기리기 위해 상호를 몬산토로 정했다. 몬산토 케미컬스 컴퍼니는 최초의 인공감미료인 사카린을 제조하여 조지아에 위치한 신흥기어인 코카콜라에 전량 판매했으며......                     30p

 
   

그러니까 몬산토는 창립자의 아내 가족의 성이었던 것이다. 그 이름이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악독한 회사,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의 이름이 되었으니, '몬산토'라는 성을 쓰는 가족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계속 어떻게 해서든지 소개 글을 잘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도무지 어떻게 써야할지 알 수 없었다. 몬산토의 추악한 면을 아주 자세하게 또 아주 효율적으로 잘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을 첫 글자부터 마지막 글자까지 모조리 옮겨 적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것 자체로 몬산토라는 악랄한 이름의 요약본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프랑스 녹색당 총수 니콜라 윌로라는 분이 쓴 추천의 글을 보면, 이 책을 읽은 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모든 감정이 요약된다고 했다. 내 경우에는 조금 말을 바꿔서 '어떻게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나?'로 이 책을 요약하고 싶다. 그만큼 충격적인 책이다. 아니 더 충격적인 사실이 또 있다. '회사의 영업실적에 방해가 되는 소송에 대처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는' 몬산토 조차도 철저하게 사실로만 기록된 이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자 마자 10만부가 팔려나가고, 저자인 마리 모니크 로뱅이 '레이첼 카슨 상'을 받는동안 아무런 대응을 못했다는 것이다. 즉 이 책은 몬산토가 철저하게 숨기고 싶은 추악한 면들을 파헤치고 있지만, 몬산토가 전혀 문제제기를 못할 정도로 사실만을 담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충격이고, 이 뛰어난 저자가 미처 파헤치지 못한 더욱 추악한 이면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번째 충격이다. 

앞서 인용했듯이 '사카린'을 만들어 '코카콜라'에 팔아서 돈을 벌던 몬산토는 '폴리염화페비닐(PCB)'이라는 강력한 발암물질이 함유된 윤활액을 팔아서 어마어마한 돈을 번다. 이때 몬산토가 PCB의 유해성을 잘 알면서도,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저지른 행동들을 보면 정말 치가 떨린 정도로 화가난다. 사람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몬산토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건 바로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 일 것이다. 베트남 전에서 아주 대단한 악명을 떨친 바가 있다. 얼마전에는 미군기지에 고엽제를 불법 매립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며칠동안 언론의 탑뉴스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소 성장호르몬(rBGH)'을 제조하여 인간을 위험에 빠뜨렸고, '라운드업(Roundup)이란 제초제로 역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건 역시 몬산토가 만들어서 팔고 있는 GMO일 것이다. 그리고 몬산토가 이 GMO를 갖고 남미의 여러나라들과 인도 등 흔히 제3세계라고 말하는 나라의 농민들에게 저지른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동들이 이 책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있다. 화가 나고 또 화가 나고 또 화가 나지만, 이 책을 끝내 손에서 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몬산토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갖고 싶어서였다.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책의 말미에 박상표 선생의 글을 읽으며 헛웃음이 나왔다. '몬산토 코리아는 2007년까지 국내 종자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다가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신흥시장에 주력하는 바람에 지난해 간발의 차이로 2위로 밀려난 상태'라고 했다.(이 책이 2009년 출간되었으니, 지난해는 2008년이다.) 

최근에 아무생각없이 본 영화에서 또 GMO 얘기가 나왔다. <언노운>이란 영화는 결국 식량과 종자의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은 두 세력의 이야기다. 한쪽은 몬산토와 같은 거대한 국제종자기업이다. 다른 한 쪽은 NGO와 민중들의 편에 선 선량한 과학자이다. 이 영화를 보고 한가지 확인 할 수 있었던 건 역시 거대종자기업과 과학자 그룹과 국가가 한 편에 서서 그들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미로 본 영화 한편이 다시 한번 냉혹한 자본의 위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영화에서 처럼 전 세계 농민들을 구원해줄 과학자가 어디 없을까? 만약 있다면 이 한몸 바쳐 암살자들로 부터 구해줄 용의가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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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08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이 격노하실 정도의 책이라고 하니 장바구니로 담아서 사서 읽어야 겠네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을 벌이는 놈들에 대한 책이라니 리뷰만 읽어도 화가 치미는 저의 감수성!!

결국은 민중이 우매하다고 비웃으며 이런 일을 벌이는 집단이 한 두 집단이겠습니까? 감은빛님처럼 민중의 집단지성이 발달하며 계속적인 움직임을 벌일 때 반드시 격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악의 집단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은지라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은빛 2011-06-09 13:26   좋아요 0 | URL
인간의 목숨을 돈보다 하찮게 여기는 놈들이라서, 화가났습니다.
잘 몰랐는데 '몬산토'를 다루는 책들이 여럿 있더라구요.
하나 하나 찾아서 읽어볼 생각입니다.

blanca 2011-06-0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환경 관련 책에 하도 이 몬산토 얘기가 많이 나와 고유명사에 젬병인 저도 기억하고 있는 아주 악독한 기업이에요. 저는 GMO가 그냥 건강한 일반 옥수수 종자도 오염시킨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어요. 번식력이 대단하다고 하더라구요. 감은빛님,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감은빛 2011-06-09 13:30   좋아요 0 | URL
옥수수 뿐 아니라 대부분의 GMO들이 일반 종자를 오염시키며,
그뿐 아니라 토양에도 영향을 미쳐서
전혀 상관없는 다른 종의 유전자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습니다.
섭취했을 때, 인체에도 영향을 준다지요.

중요한 건 과학자들이 제대로 검증을 안하고,
그냥 특허를 내준다는 거예요.
이 부분을 지적했다가, 나중에 보복을 당하기도 하구요.

귀를기울이면 2011-06-0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매트릭스의 영향인데, 전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이 세상은 6번째 세상이고 저런 인간들은 세상의 버그이고, 버그때문에 인류(또는 자연)는 멸망할 것이고 다시 박테리아나 원시인 상태에서 제7세계가 시작하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죠.(피라미드는 제5세계의 흔적? ㅋ) 아내를 기념하는 순정이 어떻게 인류를 위협하는 탐욕이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얼마전 '제1권력'이란 책을 읽었는데 그때 느낌이 지금 감은빛님 느낌같았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것같아 많이 관심이 가네요. 리뷰 고맙습니다~

감은빛 2011-06-09 13:36   좋아요 0 | URL
네오는 그럼 언제 나타나나요? ^^

<제1권력>이란 책,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어제 도서관 갔다가 <나쁜 기업>을 훑어보는데,
거기에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기업들이 엄청 많이 나오더라구요.
당연히 '몬산토'도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양철나무꾼 2011-06-0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몬산토를 읽으면서 잠시 결의를 다졌었는데...그러고 까먹고 말았었네요.
그랬었죠, 언노운도 몬산토스러웠었죠~^^

감은빛 2011-06-09 13:38   좋아요 0 | URL
전여농 사무국장의 말씀을 들어보니,
이미 '몬산토 코리아'가 잠식해 들어와서 하는 짓들이 많더라구요.
남의 일이라고 방심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비로그인 2011-06-0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몬산토.

언젠가 이 책 읽고 좀 분노하면서 페이퍼를 남겼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슈거 블루스, 패스트푸드의 제국.. 그런 책들 읽으면서 흥분하던 스물 몇의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돈에 의해 쫒겨나는 농부들, 토종 식물들. 어떤 해가 될지도 모를 그런 먹을거리가 이 땅에도 쏟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더라고요..

감은빛 2011-06-09 13:40   좋아요 0 | URL
아, 바람결님이 분노하면서 남긴 페이퍼, 읽고 싶어집니다.
나중에 시간날 때, 꼭 찾아보겠습니다.
'몬산토 코리아'의 행태로 보아, 조만간 그런 일들이 벌어질 것 같더라구요.
한미 FTA가 체결되면 더 가속화되겠지요.

비로그인 2013-06-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서야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감은빛님의 리뷰가 보이니 반가워요^^*

감은빛 2013-06-12 10: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른님.
저는 이 책 읽다가 홧병날 뻔 했습니다.
지금쯤 다 읽으셨나요?
화를 잘 조절하시면서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반갑게 인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얄라알라 2021-11-1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예전에 써주신 리뷰인데 오늘 저 알라딘 마법사가 추천해주었어요. 감은빛 님께서 자세하게 써주신 덕분에 ~^^

감은빛 2021-11-23 15:3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북사랑님. 아주 오래전에 쓴 글에 댓글이 달려서 의아했는데, 추천 마법사 덕분이군요. ^^

북사랑님 덕분에 저도 이 부족한 글을 다시 한 번 읽었습니다.
 

하나. 낮술 그리고 술 

화요일, 그러니까 5월의 마지막 날 아침,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아침부터 비는 내리고,
늦게까지 마신 술은 아직 깨지 않은 듯.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다.

바람에 묻어오는 비 냄새가 좋다.
빗물 받이에 똑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좋다.
비를 맞고 서 있는 저 나무처럼 흠뻑 젖어보고 싶다.

5월의 마지막 날.
돈 나갈 일은 많은데,
들어올 돈은 없다.

좋았던 기분이 금새 우울해진다.
걱정해봐야 답은 없다.
그냥 계속 기분만 가라앉을 뿐.

이런 날엔 낮술이나 한잔 하고 싶다!

마침 그날 저녁에 술 약속을 해놓았던 한 선배가 이 글을 보았다. 그 선배는 '점심 맛난거 먹고, 저녁에 일찍 만나서, 많이 마시자'는 댓글을 남겨주셨다. 평소 아무도 신경안쓰는 내 페이스북인데, 마침 그 선배가 이 글을 읽은 건 좀 신기한 일이다. 

솔직히 진짜 낮술이 마시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냥 기분이 그랬다는 뜻이었다. 전날 마신 술이 아직 덜 깨서 머리가 멍한 탓도 있었고, 여러모로 기분이 그랬다. 비와 통장잔고와 일터의 상황 등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낮술을 한잔(정말 딱 한잔!) 마시게 되었다. 

오전 내내 일터의 좀 복잡한 상황을 놓고 논의가 있었는데,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야기는 길어져서 점심시간을 훌쩍 넘겼다. 결국 일단 논의를 마무리하고 밥을 먼저 먹기로 했는데, 비도 오고 뒤늦게 나가기도 귀찮아서 시켜먹기로 했다. 자주 먹는 중국음식점에 식사를 주문하면서 사장님이 '이과두주'를 한 병 시키셨다. 딱 한 잔씩만 먹을 분량. 배를 채우기 전에 먼저 독주를 부었더니, 캬~!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오후 업무를 마치고 퇴근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선배를 만나러 갔다. 선배는 나를 배려하여 '컨디션'까지 챙겨놓고 계셨다. 그리고 열심히 또 즐겁게 술을 마셨다. 

둘. 전집 강매 

아마 두 달쯤 된 것 같다. 큰 애가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일주일에 1권씩 그림책을 보내주기 시작했다. 대신 한 달에 만원을 내라고 했다. 대형 출판사에서 내는 전집 시리즈 였다. 아마 어린이집들과 출판사측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어린이집은 부모들에게 생색내기 좋고, 부모들은 싼 가격에 정기적으로 책을 받아서 좋고, 아이들은 일주일마다 새 책을 읽어서 좋을거라고 생각했을 게 뻔하다. 

문제는 책이 정말 별로라는 거다. 지금까지 아이가 받아온 책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봐도 아무런 내용이 없다. 대체 왜 이런 쓰레기 같은 책을 만들었을까? 나무가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쓰레기 같은 허접한 책을 한 달에 만원이나 주고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다. 나와 아내는 돈을 안내고, 책을 안받기로 합의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큰 애였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책을 받는데, 혼자 책을 받지 않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너무너무 책을 받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냈고, 아이가 받아 오는 재미도 없고, 내용도 없는 책을 억지로 읽어줘야 했다. 

가장 화가 나는 건, 아직 어린 아이들이 전집 강매의 희생양이 된다는 사실이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스스로 양식있는 교육자라면 이 점을 깨달아 줬으면 좋겠다.

셋. 우리 아빠 어딨어? 

해마다 봄, 가을이 짧아지는 느낌이다. 올해는 유난히 더 봄이 짧았던 것 같다. 5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마치 여름 날씨같은 더위가 이어졌다. 낮에 땀을 흘릴며 돌아다니다보니, 긴 머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머리가 예쁘게 길러지지 않고, 자꾸만 삐쳐나오는 모양새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예전에도 몇 번이나 머리를 길러보려다가 이쯤에서 포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덥수룩한 옆머리와 뒷머리가 영 거슬려서 동네 남성전용 미용실을 찾았다. 숫기 없고, 불친절한 젊은 남자가 운영하는 곳이다. 가위질 솜씨가 좀 있는 것 같고, 머리를 자르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약간의 친절함과 사교성만 갖추면 좋을텐데.... 

긴 머리가 좀 지겨웠고, 여름이라 시원하게 잘라달라는 표현을 썼다. 그런데 다 되었다는 남자의 말을 듣고 거울을 보니 앞머리와 윗머리가 너무 짧았고, 뒷머리는 그에 비해 또 별로 짧지 않았다. 아, 나는 이런 스타일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이미 짧게 잘라버린 머리를 다시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감고 거울을 보니 무척 낯설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다. 한 일주일쯤 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을 길렀는데, 짧은 머리에 수염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서 깔끔하게 면도를 해버렸다.

그래도 시원하게 잘 잘랐다고 생각하고(아니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내는 큰 애를 데리고 친구를 만나러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엔 작은 애랑 놀아주면 된다.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를 만났는데, 녀석이 평소와 달리 아빠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다. 평소에는 나만 보면 아주 좋다고 웃고, 온몸을 들썩이며 어서 안아달라고 보채곤 했는데, 오늘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흘끔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유모차를 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아이는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며 아이 이름을 불렀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본다. 평소 잘치던 장난도 쳐보고, 이런 저런 말을 걸어봐도 계속 반응이 없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모습이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덥수룩하게 긴 머리에 수염까지 길렀던 아빠가 갑자기 완전히 바뀐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못알아보는 것도 당연한건가. 

집 앞에서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접어서 들고 계단을 올랐다. 평소엔 아이를 안으면, 녀석도 나를 껴안으며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토닥 하는데, 오늘은 그것도 없다. 집에 들어서서 가방을 벗고 옷을 갈아입는데, 녀석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낯선 사람과 단 둘이 있다는 사실때문인 것 같았다. 우는 아이를 안고 아무리 아빠라고 얘기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장난도 쳐보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마치 '우리 아빠 어딨어? 우리 아빠 내놔!' 라고 말하는 것처럼 뭐라고 옹알이를 해가면서 울었다. 얼굴을 안보면 조금 낫겠지. 이 더운날 아이를 등에 업고, 반찬을 만들었다. '제철 꾸러미'에서 보내준 아욱과 뽕잎을 씻고, 다듬어서 살짝 데친 후에 참기름 넣고 무쳤다. '제철 꾸러미'가 나물이나 야채를 보내줘서 좋긴 한데, 씻고 다듬는데 손이 많이 가서 조금 귀찮다. 나물을 맛있게 무치는 건 자신있는데, 나물을 씻어서 다듬는 건 정말 귀찮다. 등에 매달린 아이의 울음은 서서히 잦아들다가 멈췄다. 반찬 만드는데 집중하다가 문득 너무 조용해서 보니, 어느새 잠들어 있다. 대충 반찬 만들기를 끝내 놓으니 다시 아이가 깨서 울기 시작한다. 아이를 내려서 품에 안고 밥을 떠먹이면서, 부지런히 내 입에도 밥을 퍼넣었다. 아이는 울면서도 밥은 받아 먹었다. 먹으면서도 자꾸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누군데 나한테 밥을 주나 하는 표정이다. 한참을 받아먹다가, 어느정도 배가 찬 모양인지 밥을 외면하고 다시 울기 시작한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좀 더 먹었을텐데, 기분 탓에 더 안먹을 모양이다. 

자꾸 우는 아이를 달랠 길이 없어서 결국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머리를 잘랐더니, 아기가 아빠를 못알아보고 자꾸 울어요' 한참 후에 예정보다 조금 일찍 출발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좋아하는 동요를 틀어주기도 하고, 안고 방안을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은 이 상황에 익숙해진 듯 울음이 줄어들었다.  

아이는 엄마와 언니가 돌아오고 나서야 평소처럼 활발한 장난꾸러기로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나를 경계하고 낯설어하는 느낌은 남아있었다. 요 아빠도 못 알아보는 녀석아! 며칠이나 지나야 다시 아빠를 알아볼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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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6-0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이집이 연계되어 전집을 제공한다니...좀 안타깝네요.
저도 아이들 책을 단행본으로 읽힌 이후부터 전집을 보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대량으로 묶어서 저리 내용도 없는 책들을 읽힌다는 것 자체가 어이없어요.
사실, 이런건 학부모의 권리로 요구하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직도 전집이 좋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머리 잘랐다고 못알아 보고 우는 아이가 너무 귀엽네요..ㅎㅎ
그걸 어르고 달래는 감은빛 님도 수고하셨네요~ㅎㅎ

감은빛 2011-06-07 13:01   좋아요 0 | URL
전집도 어떤 건 그래도 좋아보이는 것도 있잖아요?
이번에 제가 언급한 건 정말 쓸모없는 전집이더라구요.
무슨 일관된 주제도 없고, 각 권마다 특성도 없고.
초기에 우리 아이는 안받기로 했을 때, 조금 얘기해봤지만,
어린이집 입장은 오히려 좋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좀 더 얘기하려면 서로 감정을 상하게 될 것 같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중입니다.

설마 우리 아이가 머리모양 바뀌었다고 못알아볼줄이야~!
그래도 하루 지나니까 다시 알아보더라구요. ^^

따라쟁이 2011-06-04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머리카락 짧은 남자는 반대 입니다. ㅎㅎㅎ
어깨에서 토닥토닥 하는 아이의 손이 자꾸 생각나서 씩 웃었어요.

뭐.. 건강히 잘 계시는건. 저의 똑똑한 스마트 폰 덕분에 확인했고. 여름에도, 일에도, 한숨에도 지지 마세요 ^^

감은빛 2011-06-07 13:02   좋아요 0 | URL
앞머리가 유난히 짧아져서 좀 기분이 상했었어요.
주위에서도 다들 너무 어려보인다고 한마디씩 하구요.
그래도 뭐 며칠 지나니까 조금은 익숙해지네요.
금방 길겠죠. ^^

루쉰P 2011-06-05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술에 어린이집 전집 강매에 자신의 아이가 몰라보다니...이거 왠지 삼중고를 겪으신 듯해 마음이 짠한데요. 어린아이 책은 전집보다는 낱권으로 좋아하는 책들을 부모님들이 골라서 읽히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헌책방에서 일을 할 적에 가장 많았던 책이 어린이 전집이에요. ^^;; 거의 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판형은 커서 일할 때 얼마나 애를 먹였는지 모릅니다.
흠..하여튼 이 놈의 국가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요.
아이가 아빠를 못 알아 본다니 이거 염려가 많이 되는 데요. 저도 그래서 긴머리를 고수하고 있어요. 혹시나 우리 가족이 저 못 알아 볼까봐요. ^^

감은빛 2011-06-07 13:05   좋아요 0 | URL
전집은 정말로 아이들이 커버리고 나면 애물단지가 되곤하죠.
좋은 단행본은 두고두고 물려주거나, 아이가 커서도 볼 수 있지만,
전집은 딱 나이가 지나버리면 거들떠보지도 않거든요.

저도 왠만하면 긴 머리를 유지하려고 애씁니다만,
해마다 여름이면 짧은 스포츠 머리가 부럽기도 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6-0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는 시력이 나쁜데 가끔 머리 다 깎고 안경 쓰면 ..ㅎ 이상하게 변해 있을 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최대한 머리 깎기를 늦추기도 합니다.

아이가 참 귀엽습니다. 보채는 아이를 달래고, 반찬까지 만드시는 감은빛님은 좀 멋지게 느껴지네요~

감은빛 2011-06-07 13:1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저두 그래요!
눈이 나빠서 안경을 벗고 있으면 잘 모르겠더라구요.
처음에 어떻게 깎을지 물어볼 때, 설명이라도 잘 해야하는데,
다른 데서는 말을 잘 하는데, 유독 머리 깎을 때는 어리버리하게 되더라구요.

저의 피곤한 일상을 멋지게 봐주셨네요. 고맙습니다! ^^

 

하나. 쥐

이틀 전 새벽이었다. 잠결에 발을 뻗다가 극심한 고통에 잠을 깼다. 왼발 종아리에 쥐가 났다. 무릎 아래가 마비 된 느낌이다. 종아리가 아파서 미칠 것 같은데, 혼자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애들이 깰까봐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끙끙대며 몸을 뒤틀었다. 아내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은데, 깊은 잠에 빠져서 도와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리를 쭉 뻗어서 발을 몸쪽으로 당겨주면, 빨리 낫는데, 아프니까 혼자 하질 못하고 계속 끙끙댄다. 종아리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고통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에야 다리를 쭉 뻗고, 발을 당겼다. 한참 후에 거의 고통이 사라졌다. 땀을 닦고 다시 누워 잠을 청했다.

 

아침에 깨보니 종아리에 힘이 줄때마다 다시 아팠다.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절뚝절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고작 쥐가 난 정도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다니. 그놈의 쥐 때문에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여전히 아파서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다시 절뚝절뚝 다리를 절면서 출근했다. 종아리의 고통은 오후가 되어서야 많이 좋아졌다. 그렇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히 발을 내디딜때마다 약하지만 아픔이 느껴졌다. 자다가 새벽에 쥐가 나서 고통을 느낀 적은 많았지만, 그것 때문에 이렇게 오래 고통을 느끼고, 다리를 절면서 걷기는 처음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둘. 쥐

작년 가을 G20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두사람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징역 10개월과 8개월 그리고 벌금으로 각 200만원과 100만원을 물렸다. 웃자고 한 짓에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다. 그들이 그린 쥐 그림의 원 작가인 영국의 그래피티 작가 뱅크시의 팬사이트에도 '한국의 쥐에게 자유를!' 이란 비판이 올라왔다고 한다. 참 나라꼴이 우습다.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씨는 영화평론가 황진미씨의 남편이라고 한다. 황진미씨가 이번에 3차 공판을 보고 와서 쓴 글을 보니, 우리나라는 법정에서도 코메디를 다 하는구나 라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정부기관과 사법기관과 입법기관이 서로 앞다투어 국민들을 웃겨주시는 나라에서 개그맨이란 직업은 참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봤다. 뉴스만 보고 있어도 어이없는 실소가 픽픽 터지는데, 굳이 개그 프로그램까지 찾아서 볼 이유가 없잖은가.

 

이 일의 여파로 쥐그림 티셔츠가 제작되어 판매된다고 하고, 출판계에서는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알라딘과 인사회(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는 '어떤 쥐에게도 자유를'이란 제목으로 5월 30일부터 6월 20일까지 참가도서가 판매될 때마다 500원을 적립하여 지지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뭐 큰 도움은 안되겠지만, 티셔츠도 하나 사고, 책도 살 생각이다.

 

쥐 그래피티3차 공판기 – 와우 개콘 돋는 밤! 황진미


어떤 쥐에게도 자유를 - 알라딘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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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02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셔츠 구매도 못 했는데,
한줄 지지글이라도 남길 수 있게 되어 정보를 주신 감은빛님께 감사드려요~ ^^

감은빛 2011-06-03 10:37   좋아요 0 | URL
티셔츠는 트위터에서 살 수 있더라구요.
아직 판매하고 있습니다.

공감해주시고, 지지댓글도 남겨주셨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죠! ^^

cyrus 2011-06-02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쥐20과 관련된 쥐 나는 에피소드가 공감이 갑니다. 요즘은 안 그러는데
예전에는 저도 잘 자다가 갑자기 쥐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참 그 때의 고통은,, ㅎㅎ 숙면을 취하다 갑자기 잠을 깨어버리는 바람에
짜증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는 종아리의 고통이 생각이 나네요 ^^;;

감은빛 2011-06-03 10:39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도 생생한 고통을 기억하시는군요.
한번 쥐가 나기 시작하면 좀 자주 그렇게 되더라구요.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1-06-03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03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6-05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와 쥐의 평행 이론 잘 보고 가요. 육체와 정신은 둘이 아니요. 하나라는 학설이 의학계를 지배한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쥐에 대한 스트레스가 몸으로 와서 다리에 발병을 한 것은 아닌지 과감하게 추측을 합니다. ^^
열성적인 활동가이다 보니 더 마음에 크게 쥐들의 역겨움이 느껴지실 거에요. 휴~ 정말 많이 보고 배워요. ^^

감은빛 2011-06-07 13:11   좋아요 0 | URL
호~ 그래서 쥐가 난 거였군요.
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몰랐는데,
루쉰님의 설명을 듣고나니 이해가 갑니다! ^^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가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위정훈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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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우리 동네엔 낮은 동산이 하나 있었다.(지금은 그 자리에 지방법원과 경찰청이 들어섰다.) 그 동산에서 뛰어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편을 갈라서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전쟁놀이를 하기도 했고, 돌을 던지며 싸움을 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피가 나기 마련이었다. 특히 돌싸움을 하다가 두 번은 머리통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돌아갔고, 한번은 눈두덩에 돌을 맞아서 얼굴 반쪽이 피투성이가 된 채 돌아가기도 했다. 전쟁놀이에는 딱히 목적이나 이유는 없었다. 그냥 심심하기 때문에 우리는 피를 흘리며 싸웠다. 멋지게 나뭇가지를 휘두르고, 발로 차서 상대방을 쓰러뜨리거나, 내가 던진 돌에 상대편 누군가가 맞아서 비명을 지르면 그저 좋아할 뿐이었다. 왜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전쟁놀이를 했던 걸까?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떠오른 질문이다.

 

요즘도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한다. 다만 이제는 직접 몸으로 싸워서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나 게임기 앞에 앉아서 손가락만 움직여서 전쟁놀이를 한다. 직접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화면 속의 캐릭터들이 피를 흘리거나 죽어갈 뿐이다. 아이들이 게임을 통해 입는 가장 큰 부상은 아마도(장시간 손가락을 놀리느라)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정도이거나, 손목이 아픈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몸을 다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분명히 있다. 내 경우에는 해가 지고나면 함께 놀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버리기 때문에 더 놀고 싶어도 돌아올 수 밖에 없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컴퓨터(혹은 게임기)만 있으면 게임이 가능하므로 오랫동안 이 놀이에 매달리게 된다. 부모의 눈만 피할 수 있다면,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붙들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제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렸다.

 

이 아이들은 왜 전쟁 게임을 하는 걸까? 몇 해전 학원에 몸담고 있던 때에, 우리 반이었던 아이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게임을 하냐고? 아이들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냥. 재미있으니까! 라고 답했다. 뭐가 재밌냐고 물었더니. 선생님도 해보면 안다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나도 해봤다. 정말 재밌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으니까.

 

왜 인간은 전쟁을 하는 걸까? 이 책이 근본적인 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 유형의 인간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의 ‘의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아이들이 전쟁 게임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또 파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열심히 전쟁놀이를 했던 이유는 어른들의 전쟁을 따라하는 놀이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전쟁 놀이를 가르쳐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티비이거나 만화책이거나 오락실이거나 어른들 중 누군가였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간접경험일지라도 전쟁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회. 이것은 무서운 사회일 것이다. 티비나 만화책이나 컴퓨터 게임을 통해 일상적으로 전쟁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쟁(혹은 폭력)이란 매우 친밀한 어떤 개념이자, 수단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당연히 분쟁지도가 될 것이다. 1945년부터 1991년까지(그리고 뒤쪽에 1995년까지 4장의 지도가 더 있다.)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분쟁지도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전쟁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던가!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인 히로세 다카시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일인 대안언론’이라고 불린다는 저자의 다른 저작에도 관심이 생겼다. <원전을 멈춰라>는 읽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어서 읽어야 할 것 같고, <체르노빌의 아이들>에도 관심이 생긴다. 훌륭한 저자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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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5-30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젠장. 왜 전쟁을 하는겁니까!
그런 말 있잖아요.. 남자들이 넘쳐나면 전쟁이 난다는...
그런데 정말 여자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전쟁이 나지 않을려나요? 음.

잘 모르겠네요. 왜 전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여 하는건지.

감은빛 2011-06-02 11:29   좋아요 0 | URL
저도 궁금해지네요.
여자들만 사는 세상에서는 전쟁이 없으려나요.
여자들 중에서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나,
전쟁(혹은 폭력)을 통해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언제나 위정자들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민중들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으니까요.

루쉰P 2011-06-05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자들만 있는 세상은 전쟁이 나지 않은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하네요. 여자들의 본성은 아이들을 키우는 마음이 있기에 소프트 파워가 강하다고 하더라구요. 예를 들어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어머니가 강하게 혼내도 아이들은 자신을 품어서 낳아준 어머니와의 생명적 끈 때문에 그 마음을 이해하는데 아버지가 어머니처럼 혼내면 아이들에게는 상처로 남는다고 하더라구요. 전 항상 여자가 위대하고 어머니가 위대하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전쟁 반대에 열성적인 것도 어머니들이 많아요. ^^

감은빛 2011-06-07 13: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대개 군대 문제로 고민할 때도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달라지죠.
아버지는 군대는 꼭 갔다 와야 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이왕 갈거라면 해병대를 갔다 와라~ 이런 식이더라구요.
어머니는 물론 아들이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봐 걱정하시구요.
 
독단과 퇴행, 이명박 정부 3년 백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전국교수노동조합.학술단체협의회 엮음 / 메이데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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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맺어준 인연

지난 주말 예전 일터 동료의 결혼식에 갔다가,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한동안 못 만났던 터라 나는 곧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약간 낯이 익다는 느낌만 받았는데, 그쪽에서는 먼저 알아보고, 큰 애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새 많이 컸다고 말을 건네며 웃는 그 얼굴을 보고, 그제서야 생각났다. 그날 촛불의 기억들도 함께 따라왔다.

2008년 봄 촛불집회는 개인적으로 무척 독특한 경험이었다. 바로 작년까지만해도 늘 집회나 시위의 주최측이었다. 특히 ‘광우병 수입 쇠고기 반대’라는 같은 주제를 놓고 벌어졌던, ‘한미FTA 반대 촛불 집회’의 경우 주최측으로서 음향장비를 옮기고, 설치하고, 참여자들을 섭외하거나, 홍보하고, 현장에서 여러 가지 돌발사항에 대비하여 늘 자리를 지켜야했다. 그런데 직업활동가를 그만두고 첫 해에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로 촛불집회가 벌어진다고 하니, 부담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4살이었던 아이와 아내와 함께 참여했던 촛불집회 초기에 그 분들을 만났다. 주말에 결혼했던 동료의 선배부부라고 했다. 정성스레 싸오신 김밥을 나눠주시기도 하고, 거리행진때는 함께 걷기도 하고, 집회를 마치고 함께 늦은 식사를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동료를 통해 소개받았지만, 나중에는 우리끼리 촛불집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 점점 경찰의 진압이 과격해지기 시작하면서 거의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내와 아이는 더 이상 나오지 못하게 하고, 주로 나 혼자 나갔다가 밤을 새고 곧바로 사무실로 출근하여, 책상에 엎드려 잠시 눈을 붙이곤 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결혼식장에서 마주친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면서 우리가 인연을 맺게 된 건 전적으로 이명박 정권 덕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008년의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아마 만나지 못했을테니까 말이다. 자연스레 요즘 읽고 있는 책 『독단과 퇴행, 이명박 정부 3년 백서』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독단과 퇴행 


이 정부를 설명하는 단어로 ‘독단’과 ‘퇴행’만큼 적절한 단어도 없어 보인다. 촛불에서 흔히 부르짖었던 ‘독재’는 솔직히 너무 오버였고, ‘폭력’은 노무현 정권때도 덜하지 않았으니, 그리 변별력이 없다. 아! 가장 적절한 단어를 뽑으라면 아마 ‘아둔함’이 아닐까도 싶은데. 뇌 용량이 2메가 밖에 안되어서 그렇다는 2MB는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도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지난 3년간의 이명박 정권에서 있었던 숱한 일들을 총 정리한 책이다. 무려 18명의 교수님들이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렸다.(아, 문화연대 최준영 사무처장은 교수가 아니구나!)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 몇 명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읽었지만, 역시 교수님들이 쓴 글이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긴 누가 쓰더라도 이 주제에 대한 글은 쉽게 읽히지는 않을 것 같다.

강정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서 새삼 이 땅의 전쟁 발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경제에 대한 글들은 솔직히 이해못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많았다. 노동 분야에서는 김성희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비정규직에 대한 몇몇 지표들을 통해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달았고, 정치분야 배성인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이 정권의 일관적인 비민주적 태도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인권, 언론, 교육 분야 글들을 분개해가며 읽었고, 여성과 문화 분야는 조금 어렵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환경 분야.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이어서 대부분은 알고 있던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해가며 읽었다. ‘일괄수주방식(일명 턴키 방식)’에 대한 내용은 잘 몰랐던 부분이라 자세히 살펴봤다. 물론 대충은 그러한 사정이었을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부분이지만, 새삼 확인하고 나니, 열이 오른다!

사실 그래서 자꾸만 뉴스를 외면하게 되고(얼굴만 봐도 욕이 나온다!), 일부러 신경을 안쓰게 되었던 것 같다. 욕하기 싫어서, 열받기 싫어서 일부러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사이에, 저들은 더욱 신이 나서 저들만의 세상을 만들고, 배를 불려가는게 아닌가 싶다!

책을 다 읽고 한가지 결심을 한다. 이제부터는 일부러 신문, 뉴스를 외면하지는 말아야겠다. 그리고 하나하나 다 꼭꼭 머릿속에 기억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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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5-18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이제 MB 정부 1년 반 남았습니다.
요즘 들어 레임덕 현상 나타나는 것에, 나라야 어찌 흘러가든 간에,
고소해 죽겠습니다........... 아아핫!
국민들이 사랑하는 전직 대통령 두분이나 떠나게 한 MB가
대통령 좌를 떠난 이후 어찌 되는지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오늘 뉴스에요,
세금 안 내고 버티는 전두환 씨에게 드는 1년 보안 비용이 8억이라네요.
그걸 왜 해줘야 한답니까?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감은빛 2011-05-19 17:11   좋아요 0 | URL
아직도 그만큼이나 남았네요! 에휴!
따로 코메디 프로를 보지 않아도,
저들이 늘 보여주는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지....
분명 웃을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세상이죠!

5.18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오늘 또 벌어진 농협 전산 장해(4시간)도 역시 북한 소행이겠죠?

양철나무꾼 2011-05-2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쥐벽서 티셔츠도 사야하고...
앞으로 남은 1년반 동안...이런 코미디 같은 일은 고만 하고 싶은데 말이죠~^^

이명박 정부에서 있었던 숱한 일들이 책 한권으로 정리가 된단 말입니까???


감은빛 2011-05-23 12:48   좋아요 0 | URL
그 티셔츠 대박 날 것 같던데요.
아마도 계속 코미디가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물론 누락된 사항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큰 줄기는 대체로 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쉰P 2011-05-2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좋네요. 그리고 감은빛님이 자신의 신념으로 활동하는 분이란 사실을 확실하게 알았네요. 감은빛님처럼 현장에서 직접 자신의 소리를 외치시는 분을 저는 존경합니다. 진짜에요. ^^ 전 촛불집회 때 근처에만 갔다가 소심하게 모금함에 돈만 내고 오는 그런 행동을 했어요. 뭐랄까? 진보적이지 못한 소시민이라 할까요?
감은빛이 촛불집회에 데려가 아이들이 분명 감은빛님의 마음을 알고 같이 싸워줄 공동전선을 펼칠 것이라 확신해요. 흠..부러워요.
저도 기억하려고 합니다. 평화는 망각과의 싸움이라는 고르바초프의 말을 좋아하거든요. ^^

감은빛 2011-06-02 11:32   좋아요 0 | URL
아휴, 저는 그저 촛불집회에 참가했던 수많은 시민들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 사회에는 부당한 일을 겪는 선량한 피해자가 너무나도 많아요.
그런 사람들이 받은 피해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사회가 되길 바랍니다.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이해해주실거죠? ^^

루쉰P 2011-06-02 15:04   좋아요 0 | URL
전 항상 이해를 합니다. 행동하는 지식인은 이해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