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산책을 나섰다. 골목을 벗어나 작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폐타이어를 재활용한 고무가 깔린 놀이터를 밟으며, 발암물질을 비롯한 온갖 화학물질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아이들이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 흙을 한번 밟아볼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집과 학교 그리고 학원을 오가면서, 골목길과 큰길 어디에서도 흙을 밟아볼 기회는 없다. 아이들이 만나는 나무는 매연에 찌든 가로수가 유일하고, 아이들이 만나는 동물은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과 산책 나온 강아지들뿐이다. 주말에 어디 도시 외곽으로 나가야 비로소 자연을 만나고, 다양한 생명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한번 뿐인 그 기회조차 매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쁘고 피곤한 직장인으로서 휴일에는 방콕하고 싶은 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딴 생각을 한참동안 하다가 아이들을 불러 손을 잡고 집으로 향하면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층 빌딩은 없지만 단층 주택들이 하나둘 허물어지고 4~5층 빌라로 다시 지어지면서 점점 시야에서 하늘이 가려지고 있었다. 문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가 무척 낯설게 느껴지면서, 점점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는 이 삶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어느 행사에서 한 여성이 이렇게 인사말을 시작했다. “영화 워리를 보면 생명이 없는 지구에” 여기까지 얘기하고 잠시 말을 끊은 그 분은 대부분 사람들이 무슨 영화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더 덧붙인다. “제가 발음이 좀 안 좋습니다. 월! 이! 를 보면 쓰레기 밖에 남지 않은 지구에서 월-이가 작은 새싹 하나를 발견하여 지켜내는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라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처음에 ‘워리’라고 듣고 무슨 개가 나오는 영화인가 생각했던 나는 월! 이! 라고 강조해서 발음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아이들과 함께 본 그 애니메이션을 떠올렸다. 쓰레기를 치우는 로봇 월-이가 탐색로봇 이브(월-이는 ‘이바’라고 발음한다)를 만나 함께 작은 새싹을 지켜내고, 지구를 떠나 오랜 세월을 거대한 우주선에서 생활해 온(그래서 걸음도 걷지 못하게 퇴화되어 버린) 인류가 다시 지구로 돌아오도록 하는 모험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그리고 최근에 또 다른 애니메이션을 하나 보았다. 흙이라곤 단 한 줌도 없는 도시. 나무는 모두 플라스틱이고, 배터리를 넣으면 다양한 색깔의 조명을 보여주며, 심지어 노래방 기능까지 갖고 있다. (마치 요즘 생수통을 배달하는 것처럼)집집마다 산소통(생수통과 똑같이 생겼다.)이 배달되고, 산소를 파는 회사 사장은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그런 도시에 살고 있는 주인공 남자 아이는 이웃집 누나를 좋아하는데, 그 누나는 ‘살아있는 나무’를 보고 싶어 하고, 나무를 선물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혼할거라고 말한다. 주인공이 엄마에게 ‘살아있는 나무’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엄마가 답하길 “그런 지저분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걸 뭐하려고 찾니?” 라고 말한다. 바로 [로렉스]라는 영화 속 얘기다.

 

 

 

 

 

 

 

 

 

 

 

 

 

 

 

 

 

[로렉스]와 [월-이]의 세계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지구에 인간을 제외한 생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로, 세로, 높이가 대략 1m쯤 되어 보이는 정육면체로 압축된 쓰레기 덩어리들이 웬만한 고층빌딩 보다 더 높이 쌓여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월-이]의 지구는 충격적이다. 살아있는 생명이라곤 바퀴벌레처럼 생긴 벌레 하나 밖에 없는 지구. 움직이는 것은 쓰레기를 압축해서 쌓고 있는 로봇 월-이 뿐이다. 물론 [로렉스]에서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인간 외에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없는 인공물 속에서 살고 있지만 한 여자 아이를 제외하고는 자연에 대한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도 [로렉스]의 세계에서 한 100여년 후쯤의 미래가 [월-이]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모든 인공물들은 자연적으로 분해되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로 남는다. 인공물 밖에 없는 세계는 곧 모든 물건들이 쓰레기가 된다는 얘기. 거대한 쓰레기 처리장이 되어버린 지구는 로렉스의 세계로서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더 무서운 건, 지금 이 상태로 간다면 저 낯설어 보이는 [로렉스]의 세계가 바로 얼마 후의 우리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일상에서 자연을 접하지 못하고 자란다. 머지않은 미래의 아이들이 ‘살아있는 나무’가 뭔지 모르는 그런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새싹’을 지켜내어 생명이 돌아온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두 영화 모두 이야기의 중반 이후는 바로 작고 여린 ‘새싹’을 지켜내기 위한 모험으로 그려진다. 생명 혹은 자연을 상징하는 이 작은 새싹은 황량하고 삭막한 그래서 생명이 살 수 없는 별이 되어버린 지구가 다시 크고 작은 생명체로 가득 찬 초록별이 되리라는 희망을 뜻한다. 이미 생명이 다 사라져버린 땅에서 또다시 생명을 키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사막화가 진행되는 땅에 나무를 심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들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니, 작은 씨앗 하나에, 작은 새싹 하나에 매달려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잃어버리기 전에 지켜내는 것.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리를 지금 인류는 모르는 듯하다.

 

 

[로렉스]를 다 보고나서 큰 아이는 인형놀이를 하다가 나쁜 어른들로부터 ‘새싹(씨앗)’을 지키는 상황을 연출했다. 역시 아이들은 쉽게 그런 이야기를 흡수한다. 나는 아이가 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나 역시 그 나쁜 어른들 중의 하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을까? 작은 생명도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아니 그보다 나는 먼저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아이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아빠가 자랄 때는 매일 동네 뒷산에 가서 놀다오곤 했어. 키 큰 나무가 많은 숲이 우거지고, 그 속에 다람쥐와 청서가 살았어. 아름다운 목소리를 뽐내는 이름 모를 새들이 그 숲에 살았어. 그리고 골짜기를 따라 작은 개울이 흘렀고, 쪼그만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가재와 개구리와 미꾸라지가 살았지. 아빠는 숲 속을 뛰어다니고, 골짜기에서 물장난을 치고, 가재와 미꾸라지를 잡고 놀았단다. 그런데 너희는 하루 종일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또 다른 학원으로 옮겨 다니고,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속에서만 살고 있구나. 아빠가 미안하구나! 이렇게 생명이라곤 없는 죽은 도시에서 살게 해서 미안해!”

 

 

해마다 새로운 도로가 뚫리고,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새로운 마트가 생기고, 사람들은 자꾸만 회색 도시를 넓혀가고 있다. 자연은 점점 더 줄어들고, 사람들은 자꾸만 도시로 모여든다.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가 겪어 온 급격한 변화들을 생각하면 아이들이 겪을 변화는 또 얼마나 클 것인지 쉽게 예측되지 않는다. 혹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아닐까? 무섭다! [로렉스]의 세계와 [월-이]의 세계가 현실이 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 뱀발 하나

 지난 달 모 매체에 실었던 글이다.

※ 뱀발 둘

 이 글에 대한 편집장님의 평은 "글이 정교하지 못하다!"였다.

※ 뱀발 셋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글에 대해 한계를 많이 느꼈다. 역시 아직 나는 한참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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