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 때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릴 때 손자병법에 나오는 '배수의 진'에 대해 읽었다. 그 후 '배수의 진'은 내 생활태도 중 하나로 굳어졌다. 예전 글(http://blog.aladin.co.kr/idolovepink/4433998)에서도 짧게 쓴 적이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나는 중요한 일을 미루고 미루다가 막상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시작하곤 했다. 특히 시험공부를 그렇게 했는데, 친구들에게는 늘 '배수의 진'을 들먹이며, 그래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다고 떠벌리곤 했다. 뒤는 강이고, 앞과 좌우는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더는 도망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잠재력을 모두 끌어낸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는 멋져 보였다. 그리고 평소 공부를 게을리하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대학 때는 심지어 시험기간에조차 공부를 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집회 가느라 수업도 자주 빠졌으면서, 시험기간에는 또 술집이 한가롭고 조용해서 술 마시기 딱 좋다고 남들 도서관에 있을 때 나는 술집에 있었다. 그러면서 시험은 평소 실력으로 치는 거라고, 시험 치기 1시간 전에 딱 핵심내용만 훑어볼 거라고 큰소리를 치곤 했다.
공부뿐만이 아니다. 일하면서도 기획안이나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때에도 미리 쓰지 않고, 늘 마감까지 미뤄뒀다가 막판에 집중해서 처리하곤 했다. 원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건 인쇄물로 남는 거라서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많고, 늘 보내놓고 나면 아쉬워하는 처지라서, 원고만큼은 '배수의 진' 전법을 쓰고 싶지 않은데, 달마다 마감일이 닥쳐서야 원고를 쓰기 시작하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한번 굳어진 습관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어제 원고 마감을 두 개나 해야 했다. 하나는 어제까지였고, 또 하나는 벌써 마감이 지난 원고였다. 둘 다 대략 주제와 소재를 정해두긴 했지만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상태였다. 그 전날 저녁에 고민을 많이 했다. 약속을 취소하고 글을 쓸 것인가. 약속된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밤 새 글을 쓸 것인가. 그런데 결국 둘 다 이뤄지지 못했다. 약속을 갔다가 갑자기 다른 술자리로 이동했고, 거기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도저히 글을 쓸 상태가 아니어서 그냥 잠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어제는 마음이 엄청 급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글을 써야 했다. 점심 먹은 후에 짬을 내어 하나를 완성하고, 퇴근 전에 시간을 내어 다른 하나를 완성했다. 두 글 모두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으나, 시간은 없었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무척 힘들었다. 어쨌거나 해냈다는 성취감과 조금 더 잘 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다음 달에는 꼭 미리 써놓고, 충분히 다시 살펴보고 보내야지 마음먹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다.
※ 주말엔 따뜻한 아랫목에 배깔고 엎드려 하루종일 읽고 싶었던 소설책들 쌓아놓고 읽었으면 좋겠다!(그러나 집안 일들도 해야하고, 애들과도 놀아줘야하고, 나가야 할 일정도 있고......)
요건 다락방님을 비롯한 몇몇 알라디너들의 글을 읽고 구매했는데,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다. 과연 언제 읽을 수 있을까?
이것도 재밌다고 소문난 책이었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언제 읽을까?
흐 집에가서 책장을 살펴보면 읽고 싶어서 사모은, 그러나 아직 첫 장을 펼치지도 못한 소설들이 잔뜩 있을텐데, 겁이 나서 살펴볼 엄두가 안난다. 하나씩 천천히 읽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