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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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이 책은 1969년작 페터 빅셀의 단편집 <아이들의 이야기>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이 책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다. '동화'의 좁은 의미의 정의는 동심의 세계를 그린 이야기란 뜻이라면, 이 이야기는 넓은 의미의 정의 쯤 될 것이다. 천천히 읽어도 단편 7개를 모두 읽어내는데 2시간도 안 걸린다. 하지만 이 책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초등학교 다닐 적에 같은 반이었던 한 남자애를 생각했다. 우리반 모든 아이들이 그 친구를 은근히 따돌리기 일수였다. 심지어는 선생님도 가끔 그 친구를 아이들 앞에서 무안을 주었다. 놀라운 건 그런 정체모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항상 같은 태도로 선생님께 질문을 하고, 친구들에게 엉뚱한 행동을 보이곤 하는 그 아이 모습이었다. 그 당시에는 나도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대하듯 그 친구를 무시했던 것 같다. 사실은 잔손재주가 많은 아이였고, 말재간도 좋았고, 노래도 잘 불렀는데...

그런데 지금 와 생각을 해 보니, 같은 반 친구들이 그 친구를 암암리에 따돌렸던 행위는, 그 친구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를 전복시키려는 듯한 스스럼 없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일종의 방어 작용을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식이라는 걸 신념으로 알고, 기존의 체계 질서에서 벗어나는 혼란스러움을 싫어하며 살아가는 현대의 우리 모습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절망적인 실어증에 빠지거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확인하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거나' 하진 않았겠지. 쳇바퀴처럼 나날이 똑같이 꽉 짜여진, 정말 전형적인 일상을 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한 나에게 어릴 적 그대로의 모습을 한 그 친구가 짠~하고 나타나 '너는 여전히 그렇게 재미없게 살고 있니' 라고 말하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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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산 1
가오싱젠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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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 읽기에 쉽지 않은 책이다. '나'로 시작하던 서술이 어느덧 행위 주체가 그녀로 옮겨지고, 또, 당신('나'의 분신이며, 상상 속의 '나'이기도 하다.)으로 이동한다. 중반쯤을 읽다가, '나'로 시작하는 1인칭 시점과 당신으로 시작하는 2인칭 시점이 교차로 반복되어 장을 꾸려가고 있음을 정말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 게다가 분량도 만만치 않다. 삼백 페이지 남짓되는 책이 두 권에 이른다.

나는 이 책이 여행기 소설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다시 말해, 이 책이 2000년도 노벨 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골라 읽게 된 것이 아니라, 특별히 멋진 중국 여행기 소설을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이 갖는 문학적이거나 정치적인 위상에 대해서는 메스컴과 미디어들과 학계 충분히 할말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더이상 덧붙일 지식이 없다.

다 읽고난 이 소설의 실체는 문학 종합 선물 상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국 원시림으로의 여행을 꿈꾸게 하는 여행기로서, 문학을 사랑하고 그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들려 주는 문학 이론서로서, 중국 지역 특히 서남부 지역의 풍물 및 설화 민요 소개집으로서, 보편적 남녀의 애정 행각 행각을 다룬, 연애 소설로서, 각각의 장르가 한 소설에서 제 목소리들을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폐암 선고를 받았던 어떤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그러나 폐암이 진단이 오진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곧 죽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많은 이승에서의 삶이 남아있다는 것에서 깨달은 바가 있어, 이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남은 앞으로의 새로운 삶에 대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그리고 여행의 목적지는 영산 곧 '영혼의 산'이다.

이야기는 주로 영산을 찾아가는 노정의 길에서 엮어진다. 어린 시절의 회상을 넘나들고, 여행길에 만난 소수 민족들과, 원시 종교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부분의 장에서 보여진 책 제목이기도 한 '영산'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하얀 얼음의 세계 같은 상태, 즉 완전한 고독'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 세계 말이다.조정권의 '산정 묘지'가 라는 시가 연상되었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 얼음처럼 빛나고, /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를/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던 그 시구 말이다.

최근 나는 부쩍 이 갑갑한 직장 생활을 하루속히 접고 싶단 생각을 한다. 다 접고 여행을
떠났으면 하는 간절함. 언제나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기만 한 꿈이다. 어쩜 이 여행기 소설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 '여행이 낯선 곳에 자아를 열어 두는 행위라면, 삶 그 자체야 말로 여행이다.'라고. 사소한 일상이라도 여행지에서의 낯선 떨림처럼 대하라는 큰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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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 - 세상을 보는 글들 4
애너 퀸들런 지음, 임옥희 옮김 / 에코리브르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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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비슷한 부류의 책들을 읽게 되는 것 같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고, 얼마 안 있어 이 책 <독서가 어떻게 나의 인생을 바꾸었나>라는 책을 읽었으니, 그래서 두 책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역시나 두 책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먼저 공통점은 이 책에서 추천 도서라고 올라온 목록 중에 어느 것도 건질만한 게 없었다는 것이고, 북디자인이 둘 다 예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라 하면 다치바나의 '나는 이런~'은 실용서 위주의 독서를 권장하고, 논픽션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뜸에 대해 주로 이야기를 했다면, 에너 퀸들런의 <독서가~ 어떻게>는 주로 문학 작품을 읽어오면서 행복감을 느꼈던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나는 그다지 속독을 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이 책을 출퇴근길 30~40분을 할애해서 삼일 만에 다 읽었다. 그만큼 평이하고, 담담한 필치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의 서평을 써주신 분들 지적대로 이 책의 총 페이지가 130페이지 넘지 않는다는 것(중간 중간 저자의 추천 도서 책표지 삽화가 들어가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백페이지 남짓의 내용이다.)도 빠르게 읽히는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책이 심각하고 진지하게 정독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가볍고 평이하게 읽어달라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무언의 주술이 있었달까. 다소 선동적인 냄새가 풍기는 이 책의 제목과 달리 내용은 그저 미국의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평범한 독서 경험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자는, 앞으로 작가가 되기를 희망할지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작가가 되려고 한다면 너무 잘 쓴 책부터 읽지 말라는' 작은 교훈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의 독서평 같은 걸 올리기 전에 대략 다른 사람들이 올린 서평을 훑어보니, 이 책의 오역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도 든다. 오역으로 이해되는 데에는 미국과 우리 나라의 정서 차이가 크다는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스럽게 여져졌던 부분은 오역의 문제가 아니라, 책의 소제목이 시작되는 부분에 한 페이지 전체에 걸쳐 나오는 삽화였다. 이 삽화는 저자가 앞부분부터 뒷부분까지 내내 언급하고 있는 추천 도서인 작은 아씨들'이나 '오만과 편견', '호밀밭의 파수꾼', '앵무새 죽이기' 이다.

그런데 이렇게 앞부분에 한 페이지씩이나 차이하고 시선을 집중시키는 책의 삽화는 다음에 이어지는 저자의 이야기들과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 저자가 추천하는 책에 대한 소기의 홍보 효과를 가져오기 위한 상업적 전략이었는지...나는 그 덕분에 앞의 삽화와 글 내용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중간중간 읽어 온 페이지를 되짚어 보기도 하였다. 이것은 속독할 책을 정독하도록 유도한 셈이니, 이것 또한 이 책의 편집자의 아주 생뚱한 배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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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박유하 지음 / 사회평론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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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아주 평범하게 초, 중, 고등 교육을 마친 나로서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이 과히 좋지 않았다. 그것이 선입견이든, 무엇이 되었든간에 말이다. 나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보고 배운 바 때문이었는지,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소위 민족주의적인 경향들을 키우며 지금껏 지내왔다. '우리 고유의 전통은 소중하고, 또 지켜 나가야 할 맥과 같은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그런 고로, 일본에 대한 선입견이 더더욱 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 데 대한 궁색한 변명을 하자면, 나는 가까운 예를 지금껏 내가 읽어온 우리의 문학에서 찾아 보고 싶다. 박경리의 <토지>라든지, 박완서의 몇몇 작품(그 여자네 집 외), 그 외 작가들의 굵직한 유수의 작품에서 일제 시대의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로 겪었던 비극적인 가족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를 읽고, 잠시 울분에 잠기지 않은 적이 없던 사람 있었을까. 박유하 씨가 말하듯 김진명의 민족주의 삼류 소설 운운은 제쳐 두고라도 말이다.

어제 저녁 텔레비전 프로에서 한민족 리포트를 보았다. 일본에서 대가로 불리우는 바이올린 제작자인 진채현이라는 칠십대 노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일본은 장인 지향의 나라라고 했던가. 그런데 재일 교포로서는 진채현씨가 바이올린의 대가가 되기까지 쉽지 않은 인생살이가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도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이라고 하면 아무리 배우고자 하는 기본 자세가 된 사람일지라도 수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채현씨는 예외적으로 모든 대가에게 있을 법한 스승이 없다. 혼자 책 읽고, 만들면서 혼자 터특한 기술이기 때문이었다. 박유하 씨는 일본에서 아주 운좋은 재일 한국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을 읽을 때는 전적으로 글쓴이의 의견에 동조에 따라가 보자, 하는 게 내 지론이다. 그런데 이번만큼 책을 읽으면서 나의 그 지론에 갈등을 느낀 것은 또 간만이다. 그 만큼 나의 일본에 대한 반감의 골이 깊었었나보다. 하지만 불쾌하다거나, 시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은 결코 아니었다.

시종일관 박유하 씨가 독자들에게 외치는 메시지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본사람들이 잔인하다고 말하기 전에 너 자신이 그렇지 않았는가 돌아보고, 우리만의 고유의 것이라는 것에 대해, 과연 그것을 고수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왜곡하고 비난해야 하는가를 반문하라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과거에 일본의 침략과 그들의 만행을 잊자는 것이 아니다. 왜 그랬는지를 보고 앞으로의 우리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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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여행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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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속의 소제목들이 유독 정감어린 책이다. <거울 위의 여행>, <땟국>, <괘종 시계>,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등등 '작가의 말' 서문을 보면 이 책은 지난날 작가가 내놓았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를 많은 부분 개작하여 다시 내놓은 책이라고 한다. 1950년대 '나와 아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얽히고 설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책. 작가 김주영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 글은 이십대 후반기를 넘어 삽십대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나에게 마저 많은 추억거리를 회상하게 한다.

작가와 나 사이에는 삼십년 가량의 세대 차를 두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 추억거리란 예를
들면, 내가 기억도 못하는 아주아주 어릴적 갖고놀던 퍼즐조각이며, 조립용 플라스틱 구슬과 막대기 같은 갖가지 장난감과 책들, 못입게 된 세네살적 옷가지 등등의 잡동사니가 그득하던 다락을 떠오르게 한다. 그 시절 우리들은 엄마가 계시지 않을 때면 그 속으로 올라가 해질녁까지 아주오랜 시간을 보내다 내려오곤 하였었다.

둘째의 추억거리는, 주인공이 반친구가 교실 마루 바닥에 난 구멍 속으로 떨어뜨린 돈을 찾아 주기 위해, 들어간 마루바닥 그 밑에 컴컴한 속에서 반아이들이 떨어뜨린 동전, 자, 연필 콤파스 등등을 보게 된다. 흡사 보물 창고를 연상시키던 그 교실 마루바닥 밑을 탐험한 이야기는 어릴 적 연필모으기에 유난을 떨며, 교실마루바닥을 뜯으면 그 속에 많은 몽당연필들이 숨죽이고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들... 하던 어린 시절의 나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또하나의 이야기, 주인공의 당시 가난한 시절엔 유독 육성회비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많아서(육성회비를 못내는 것이 선생님께 죄스러워 어떤 아이들은 돈을 잃어버린 걸로 가장하는 일도 벌리곤 한다.) 한번쯤은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교실 풍경이 나온다. 누구나 선생님으로부터 돈을 가져간 아이로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유독 주인공은 그렇게 선생님께 교무실로 따로 불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선생님의 그런 추궁에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하던 소년.

이들 형제는 이렇게 땟국물 뚝뚝 흐르는 앳된 어린아이에서 회한 많은 어른들의 아픔도 읽어낼 수 있는 나이에 이르는 중간 과정에서 참 많은 일들을 벌이고 또한 겪어내게 된다. 1950년대였던 당시 사상범으로 발각되어 형사들에게 무자지하게 잡혀가던 이발소 주인 설영도 아저씨, 설영도 아저씨의 연인이던 최영순 선생님마저도 종적을 감춘 일. 그리고 그 두 사람과의 주인공이 얽힌 그림 액자에 관한 이야기.

그림 액자 때문에 술도가에서 고두밥을 지키던 우직한 삼손 아저씨 장석도가 지서에 잡혀가 빨갱이로 몰려 애꿎은 고문을 당한 일. 빨갱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억측과 풍문들. 그리고 삼손 아저씨와 주인공 형제 간의 의리. 특히 삼손 아저씨가 그 고장을 어느날 홀연히 떠나게 된 일은 독자인 내 맘 속에 작은 파문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남의 집 살이를 해가면서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따사롭게 홀로 두 형제를 길러낸 주인공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가난한 그 시절을 애닯고도 그윽하게 보여 주고 있다.

생각해 보면 작가에게도 독자인 나에게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머물다가 가곤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뒷모습은 때로는 아름다웠고, 때로는 많은 아픔을 주었다. 아마도 우리는 수많은 이별과 그에 얽힌 추억들을 통해, 슬프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밀려오는 울음을 목구멍으로 밀어내야 하는 그런 어른으로 성장을 하게 되는가 보다. 그리고는 가끔 이렇게 '거울 속으로의 여행'을 통해서나마, 이별하였던 사람들을 작은 소리로 호명하며 불러내 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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