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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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는 것은, 별로 기쁠 일이 드문 인생의 순간에 있어서, 가끔 누리는 아주 큰 기쁨이다. 그럴려면 지식 및 정보 습득이라던가 소기의 목적을 의도하지 않아야 하고, 아무 시, 아무 날에 아무 곳에서나 빠져드는 책읽기여야 한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은 독자로 하여금 꼼짝 못하고 빠져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다음 순간 지구가 무너진다고 해도, 그 무엇도 책장을 넘기는 일에 제동을 걸 수 없게끔 만드는 기술 같은 게 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런 문필력을 소유한 사람들의 소설을 읽고 나면, 뭐랄까, 향수병도 아니고, 상사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병 하나를 앓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나는 저런 소설 하나 써보고 죽었으면 하는 병이다. 몇 달전 히라노 게이치
로의 <달> 이후로 이런 소설을 또 만났다.

처음으로 돌아가, 이 책을 소개해 준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때마다 꺼내 읽으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위안을 주는 책이야' 라고. 그러면서 이 책이 폴 오스터의 작품 중, 가장 역작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 두가지만을 우선 말하고 싶다.

첫째, 이 소설은, 작중 역사학자 비버(주인공 포그의 아버지임이 밝혀진)가 쓴 소설 '캐플러의 피'를 통해, 미국 역사에서 인디언의 멸망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캐플러의 피'에서 나오는 종족은 주인공 포그와 그의 삼대째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인디언의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의 핏줄이 인디언이었거나, 혹은 인디언과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냈던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백인이면서도 은연중에 이런 역사 의식을 드러내는 폴 오스터가 약간은 이채롭게 느껴진다.

둘째, '주인공 포그가 여러 가지 여정을 거쳐 결국엔 어떻게 되었는가'를 즉물적인 시각에서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사랑하는 여자와는 헤어지게 되었고, 둘, 에핑이라는 노인의 아들이라고만 알았던 역사학자 비버, 그런데 이 비버와 좋은 시간을 함께하고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에까지 다달아 지내던 어느날, 비버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고, 비버는 몇 달후 저세상으로 가야 했다. (어머니, 외삼촌,
에핑이 죽은 후, 하나 남았던 혈육마저 포그를 떠난 것이다.)

셋, 비버로부터 어느 정도의 유산을 물려 받게 되었음에도 그것 마저도 여행 중에 도난 당한다. 위의 셋을 통틀어서 결론을 내자면, 주인공 포그에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얘기는 한없이 우울하며 절망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은 어떤지, 과연 <달의 궁전>이라는 이 이야기가 우울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의 매력은 바로 '절망'을 '삶의 아이러니'로 바꾸어 풀어내는 데 있다. 우연의 엇갈림으로 짜여지고, 군데군데 희망을 가장한 여러 변수가 기다리고 있는 뒤틀린 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독특한 인식의 방식과, 불운한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그 태도에 이 소설의 매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한 이 이야기가 장엄한 목소리로 타이듯 '젊은이여, 희망을 가져라' 투가 아님을 말해야 겠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빈털터리가 된 주인공이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그는 가 보는 데까지 다 가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연과 우연으로 얽힌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유유히 즐기기로 그리고, 그 안에서도 이야깃거리를 발견하리라고 맘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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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3-2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완벽한 미국 서사의 모형이지~ 싶다...
 
소박한 삶
레기네 슈나이더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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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본 <시사 매거진 2580>의 내용 중 하나는 우리 서민들의 일확천금의 꿈에 대한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시작은 요즘 텔레비전 광고 중에서 모 신용카트 회사의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유행을 언급한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는 꿈을 꾼다. 그것이 설령 꿈에서 그칠지언정.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서도 나왔지만 연봉 2300의 어느 평범한 가장이 한 달에 30만원씩 적금을 붓는다고 했을 때 그 가정이 한국 사회에서 부자가 될 가능성이란 아주 희박한 것이었다. 한편 얼마 전 주택복권에 억대의 돈이 당첨된 사람이 지금은 그 돈을 흥청망청 탕진하고 파멸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부자의 삶은 행복한 것일까. 즉 돈이 많으면 행복할까.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자. 보잘 것 없는 수입을 가지고도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높은 소득을 올리고도 불행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은 소득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이 책은 말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을 위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라고.

우리 사회는 한마디로 돈을 버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믿음을 전파하는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대중 매체이다. 싸구려 잡지에는 부유층에 대한 얘기가 넘쳐 나고, 그들이 사는 멋진 집과 멋진 차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호화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가 공공연히 나온다. 이것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중 일부는 매체의 위력에 발맞추어 폼나는(?) 인생을 연출하기 위해 살아가고자 애쓸 것이고, 그러다 보면 개개인의 부채는 점점 늘어나며 그 끝은 파멸의 길일 것이다. 끝도 없는 소비 세계에서의 만족에 한계점이라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만의 소비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 그 스타일이 이 책에서 말하듯 소박함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풍요로운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으로 '소비'에 대한 자신만의 방식을 정립하고, 보다 소박한 삶을 선택함으로써 내면적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여유로워지는 길을 찾아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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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기와 삶 읽기 1 -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바로 여기 교실에서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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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한혜정이라는 이름의 이 사회학자이자 여성학자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한때 신문을 열독해서 읽는 취미를 가졌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되었던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대문 모 아파트 옥상에서 네명의 여중생이 비관 동반 자살을 했던 것이다.

그때 처음 그 사건에 대해서 조혜정 교수가 쓴 칼럼을 인상 깊게 읽었었던 것이다. 그 후에 찾아 읽은 조혜정 교수의 이 책 시리즈. 난 그의 이 책을 읽고 단순하고도 속된 말로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런 류의 주장을 피력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학자가 한 열 명만 더 있어도 우리 나라 학계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겠지.

나는 안타깝게도 이 책을 대학 시절에 읽지 않았다. 만약 그 시절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나의 생활에서 글읽기와 삶 읽기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졸업 후에 알았더라도 이 책을 읽고 많이 느끼고 반성하며 삶에 적용시켜 보도록 노력하였으니 정말 나는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두 가지의 경향으로 읽어 낼 수 있다. 하나는 일반 문화 읽기의 사회학적 저서로서, 또하나는 책읽기 방식 지도서로서 말이다. 특히, 나는 조혜정 교수의 한 학기 강의 진행과 학생들의 발표 및 회의 내용 기록 부분을 가장 흥미있게 읽었다.

이 책의 제목은 왜 '삶 읽기 글읽기'인가? 산업 사회에 들어서면서, 더더욱 우리는 문자 매체와 많은 연관을 두며 살아가게 되었다. 삶의 한 방식이기도 한, 이 읽기 행위가 대한민국 우리 삶에서는 이상하게 굴절되어 있다. 이 부분을 조혜정 교수는 식민지성과 관련지어 이야기한다. 그렇다.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모순되게도, 어릴 적부터 공부를 위한 말과 생활을 위한 말을 분리시키며, 삶과 따로 노는 지식이 공식적 지식으로 군림하게 된다.

어느 교육학자가 입시 위주 교육을 극복하기 위한 세미나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부터 아이들은 시험 답안에 '밥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항에 동그라미를 치도록 가르치지만 실제로 밥 먹기 전에는 손을 씻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또한 학생들은 반복적인 공부 과정에서 엄청난 의지력과 참을성도 기르고 극심한 경쟁심도 갖추게 되며 자기 속의 소리를 듣기보다 항상 남(특히 입시 출제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를 보는 기술을 배운다. 이런 모든 능력은 거대 규모의 생산 공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산업 역군이 가져야 할 가장 필요한 자질인지도 모른다. 상관의 마음을 잘 읽어 내고 경쟁심을 늦추지 않으며 시키는 일을 아무리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꾸역꾸역 해 내는 인내심을 가진 탈 정치화된 인력 양성의 차원에서 말이다.

나 또한 이 책에 별 다섯을 주고 싶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학이라는 좀더 넓은 학문 세계에 진입하려 하는 대학생들이 이 책부터 읽어보고, 일찍부터 책읽기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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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김봉중 지음 / 소나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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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국이 왜 별다른가를 보여 주는 책이다. 이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역사적 이슈를 중심으로 설명을 끌어간다. 18세기 유럽 각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아메리카 땅에 이주를 하기 시작하고, 점차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미국의 북동부에 정착한다. 정착할 땅을 찾아 점차 서쪽으로 이동을 한다. 유럽은 기존의 영토에서 자국의 땅을 유지하기 위한 전쟁에 골몰하였지만 미국은 그런 영역 지키기 싸움 대신 광활한 개방지를 찾아 끊임없이 이주하고 또 정착한다. 이 점에서 변경 혹은, 국경 지대라는 의미에 프런티어 정신을 지은이는 설명한다.

미국을 이해하는 두 번째 코드 민주주의이다. 이들의 민주주의는 연방주의이다. 즉, 주권 중심이 아니라 귀족이나 봉건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한 단체가 권리를 독점하지 않는 형태인 지방 분권적인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가 성립 이유는 아메리카의 지형적 특수성이 크다. 유럽으로부터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간섭을 덜 받았으며, 유럽 국가들 사이의 분쟁 또한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초연할 수 있었다. 그리고 13개의 주마다 각기 개별적인 생활을 했고, 자기네 영역 안에서 하나의 정부를 유지해 왔지만, 각 주는 서로 비슷한 이해 관계를 갖고 공통적인 언어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수준의 문명 단계를 밟고 있었다.

세 번째 코드는 지역 정서다. 비교적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토대로 둔 잘나가는 미국이었지만, 지역 정서상으로 남과 북이 크게 달랐다. 북쪽은 상공업 위주의 경제 정책을, 남쪽은 대단위 면화 농장 같은 농업 위주의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목화 산업은 독특한 남부의 귀족 문화를 가속시키면서 노예 제도가 자리잡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부는 산업화에 따른 경제적 성장과 함께 계몽주의가 한 단계 더 진전하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남과 북에 있어서 진보의 개념이 달랐다. 북부에서의 진보란 물질적으로 풍요롭기 위해 자연에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는 동적인 의미였고, 남부는 안정적인 자연 친화적인 정적인 진보를 원했다. 따라서, 북부의 계몽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남부의 노예 제도는 미국의 건국 이념에도 위배되는것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대치하며 결국에는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네 번째 코드 미국의 다문화주의는 다분히 미국의 현재 모습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일찍이 인종, 민족, 종교가 달라서 국가간에 뼈아픈 아픔과 회한을 경험하는 경우를 무수
히 보아 왔다. 인간의 진보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는 현대만 보아도 히틀러의 인종 말살 정책, 구유고의 연방 현실, 아프리카와 남미의 인종 청소 등이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철저한 다인종, 민족, 종교로 시작했던 미국은 역사적 시험대였던 것이다. 그 역사적 시험이 성공이었나, 실패였나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사란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나 흑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본명 부정적일테고 백인들간의 갈등에 염두에 둔다면 분명히 긍정적일 것이다.

유럽에서 숱한 박해를 받았던 민족 유태인은 미국에서 가장 득세를 하고 있는 민족이다. 법률, 의학, 과학을 비롯 영화 산업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인은? 아직 미국의 주류 정치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인 특유의 근면성, 성실성, 보수적 가치관이 미국의 청교도적 전통관과 크게 어긋나지 않으므로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점차로 인정을 받고 있는 추세이다. 히스페닉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결혼 문화만을 보아도 그러한데, 이들의 50%가 백인과 결혼을 한다. 히스페닉계와 백인의 인종 구별은 점차 모호해질 것이다. 결국 문제는 흑인이다. 미국 역사에서 소수 민족들은 어려운 고비를 넘긴 후에 미국 사회에 적응했다.

더불어 흑인들의 정치력 또한 급신장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사회의 밑바닥에 있다. 사회가 아무리 진보를 했다하더라도 검은 피부에 대한 편견은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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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소리
오에 겐자부로 지음, 김이진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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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3학년 때로 기억된다. 오오에 켄자부로오의 <개인적 체험>-이 소설은 <개인적 체험>에 앞서 2년 전 그의 나이 27살에 발표한 소설이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 그의 또다른 소설을 어렵사리 찾았던 것이다. 이 소설은 <개인적 체험>에 앞서 2년 전 그의 나이 27살에 발표한 소설이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에는 글줄을 채 읽기도 전에 벌어진 안타까운 사연(?)이 하나가 얽혀 있다. 책을 빌리던 날, 공중 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하다가 잠시 정신을 놓았던지 전화기 위에 책을 그대로 올려 놓고, 나온 것이다.정신을 차려 다시 찾아가 본 부스 안에는 책이라곤 온데간데 없었다.

책을 반납해야 하기에 나는 그 책과 같은 책을 찾기 위해 서점 안을 이잡 듯 뒤졌다. 그러나 출판사와 옮긴이가 같은 그 정장본의 책은 찾기가 쉽지 않아, 당시 국일출판사에서 <침묵의 외침>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같은 책으로 대신 들고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 측에서는 출판사와 옮긴이가 같아야 한다며 책을 받을 수는 없고, 그에 상응하는 돈으로 지불하길 원했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영원히 나의 수중에 들어오게 됐다.

최근에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었다. 오 년 전에 읽을 때도 번역자를 욕하면서 툴툴대고 읽었는데, 여전히 번역은 짜증이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동은 여전하다.

때는 1957년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신입생으로 양친이 돌아가시고 멀리 시집간 누나에게서 약간의 생활비를 보조받고 살아가는 가난한 학생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잘못 옮긴 매독 때문에 그 치료를 위해 찾아간 병원의 의사 소개로 한 미국인을 알게 되는데, 일본에서 백과 사전 세일즈를 하고 있는 그 미국인 아래 주인공 나를 비롯하여 모두 세 명의 십대 후반 소년들이 모이게 된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현재 만들고 있는 중인 보트 한 척을 완성해서 일본이 아닌 먼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는 것이고, 이 목적 아래 한 집에서 공동 생활을 하게 된다.

일본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현재는 혈혈단신의 열일곱 소년 혼혈아 타이거, 일본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에게서 태어난 가난한 한인 부락촌에서 살다가 온 오웅남, 그리고 주인공인 나와 미국인 셀베조프. 이들 사이에 공통점은 단 하나이다. 지금 발디디고 있는 이 세계를 철저하게 타인의 세계로 느끼며 현재의 공간에서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인 셀베조프는 여기서 형식상의 물주(보트는 그의 돈으로 제작에 들어갔으며,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공동의 집도 그가 집세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이고, 이 세 소년을 자비로운 휴머니스트인양 보필하고 있지만, 그는 동성애자이며 그것과 연루되어 경찰에 연행되는 일이 생기면서 공동 생활 도중에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게 된다.

그들은 보트의 나머지 제작비를 대기 위해 사업을 구상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돈벌이 일을 벌리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셀베조프가 떠나자 서서히 불행의 그림자가 이들을 덮는다. 타이거가 경찰에 의해 총상을 입어 죽고, 오웅남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며, 사형 선고를 언도 받는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오웅남. 미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타이거. 어정쩡한 입장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본인 주인공 나와 자비로운 평화 주의자인양 이들을 모두 소집했으나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회한(이들이 완성하려 했던 보트는 제작 중단으로 비바람을 맞고 낡아 부서졌다.)만 남겨주고 자기의 본국으로 훌쩍 떠나버린 미국인 셀베조프.

이들 주인공이 시사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1960년 당시에도 세계의 돌아가는 모양새와 인정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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