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리스 러브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한희선 옮김 / 창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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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에 설탕이 없다. ‘사랑’이 들어갈 자리에 ‘인생’을 넣어도 된다. 시대에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여기 열 명의 여자 각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자들이 안고 있는 특유의 고민과 질병에 공감한다. 질병은 여성에게 인내의 한계를 알려 주는 신호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어느 것 하나 행복한 앞날이 펼쳐지겠구나 하는 느낌으로 끝나는 것이 없다. 하지만, 당신의 결단에, 서툴게나마 품어보는 용기에 동지로서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평화롭게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왔다고, 누가 자부할 수 있나, 전쟁이 없는 게 곧 평화는 아닐 거다. 

평화와 행복을 가장하지 말자고, 껍질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오자고 말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

그녀의 냉장고 _ 골다공증

도회에 사는 스물다섯살의 아름다운 여자, 그런데 골다공증이 있단다. 그것은 흡사 그녀가 사는 방처럼,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사람들의 눈을 끌지만, 냉장고 문을 열면 안쪽에는 커다란 공허함-인스턴트 냉동 식품 외엔 먹을거리가 없다. 살 찌면 안 되니까.-이 가득 들어 있다.

나는 말야 어릴 때부터 점점 못생겨지는 엄마의 모습을 봐왔어. 게다가 아빠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어. 엄마는 일도 취미도 없이 매일 텔레비전 앞에서 뒹굴며 과자 따위를 먹을 뿐이었지. 점점 엄마의 얼굴이 변했어.

그런데 당신이 온 거야. 처음 봤을 때 어쩜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나 했어.

그녀란, 골다공증을 앓는 여자의 열 살 연상 새엄마.

추하거나 약하거나 쓸모없는 것은 매장된다. 그 원인이 뭐든 간에. 그것이 도태다. 그녀는 결코 도태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틀림없다. 지방을 쌓아두지 않을 것, 동성에게도 이성에게도 매력적인 여성이 될 것. 나도 그렇게 해온 것이다. 장난이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

새엄마는 아름답고 상냥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행복을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나날을 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열심히 하는 남자’는 변함없이 일에 열중해서 젊은 아내나 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남편에게 젊음으로만 어필했었는데, 나는 ‘젊음’을 잃어가고 있다. 열 살 어린 딸의 냉장고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냉장고에도 제대로 된 것이 들어 있지 않다.


돌고래 요법 _ 돌발성 난청

그 여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담임을 몇 번이나 했었지만, 어느 반이나 반드시 그런 아이가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교풍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아이나, 어떤 계기로 성적이 오르지 않게 된 아이. 그리고 부모에 대한 반발심으로 일부러 공부를 안 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 여자는 지금은 그런 아이를 도와주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고 느낀다. 이렇게 귀가 안 들리게 된 후 비로소 노력하라는 말의 잔혹성을 알게 되었다.

억지로 착한 사람인 척 하는 바람에 무리가 갔다. 그래서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것이리라. 그녀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래서 자진해서 외톨이가 되어 고독한 일상에서 평온을 찾았다. 타인과 관계하지 않으면 자신의 약한 면을 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름 하늘색 _ 알코올 의존증

일류 고등학교의 열등생인 주인공은 알코올 의존증이 심하다.  현에서 최고 명문인 이 학교에 모인 우수한 아이들이 그녀를 친구로 보아 주는 것은 그녀의 소꼽친구 사키가 있기 때문이다. 사키는 귀엽다. 사키는 사람이 좋고, 센스가 좋다. 그들은 장장 13년간 소꼽친구다. 사키와 같은 고교에 들어가기 위해 중학교 때는 죽어라 공부했다. 우리 집은 아빠가 없다. 어려서는 할머니에 의해 키워졌다. 할머니가 이모집으로 가시게 되고, 엄마와 둘어서만 생활하게 되니까 처음에는 좀 쓸쓸했다. 하지만 가족애로 묶여 있던 부분이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방이야 어질러져 있다 한들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니고, 열여덟에 그녀가 그 나이에 이렇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엄마도 술을 아주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때때로 같이 반주를 마셨기 때문이다. 마시는 동안에 시시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재미있게 느껴지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평형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을 자각한다. 그녀에게는 류이치라는 남자 친구가 있다.

고등학생과의 섹스에만 연연하는 삼류대학생 류이치. 처음에는 그의 바보스러움에 질렸지만 요즘에는 그런 그에게 편한함을 느낀다. 사실 주인공은 우월감을 남자 친구에게 갖고 있다. 당연히 자신이 훨씬 머리가 좋은 좀더 나은 인간일 거이다. 해서, 이 남자는 절대 사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만나게 해도 둘이 사랑에 빠질 일은 없다. 그래서 그를 친절히 대할 수 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그녀는 공부에 대한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머리가 나쁘다.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필사적으로 공부하고자 했던 마음을 포기하니 갑자기 주위를 냉정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구나. 이런 사람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기업에 취직하거나 관료가 되어 나라를 움직이는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묘하게 감탄했다.

그들이 사회라는 체스를 두는 사람이고 그녀나 류이치 같은 인간이 체스의 말이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돈을 잔뜩 써서 면밀하게 마케팅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만든 상품을,  같은 인간이 ‘이것 굿인데,’ 라고 말하면서 사들이고, 그렇게 해서 경제라는 녀석이 발전하는 것이다.

사키는 최고로 강한 체스를 둘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째서 친구가 되어버린 걸까. 어째서 좀더 빨리 깨닫지 못했을까. 좀더 빠른 시기에 그래서 고교 입시 때 떨어졌다면 지금의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키가 그녀를 보는, 먼 나라의 굶주린 아이를 보는 듯한 눈.

같은 여자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인 그녀는 평생 사키의 친구로 남을 수 있으니까.

 

저울 위의 작은 아이 _ 비만

'나'는 화려한 동급생들과 친구 되기에 성공했고, 패션 잡지를 매번 샅샅이 읽으면서 공부햇다. 조금씩 체중을 줄이고 화장품과 구두를 사들였으며 남자와 잘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배웠다. 친구 미나미는 남자들이 말하기를, 별로 미인(비만 타입)은 아니지만 아주 상냥하고 성격이 좋다. 그애와 있으면 남자들은 안심을 한다. 도회적인 타입의 여자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려면 구실이라든지 데이트 코스 같은 걸 생각해야 하지만, 그녀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들어주며, 화를 내거나 짜증내는 일이 거의 없고, 언제나 만나도 그녀는 기분이 좋다.

미나미는 말한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과 재미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그걸 즐기지도 않고 굶고 있다니.” “있지 정말 재미있어. 세상은 인기를 끌고 싶으면 살을 빼라고 여자들을 부추기잖아.하지만 마르든 뚱뚱하든 미인이든 추녀든 인기 없는 여자는 인기 없어.” “맞아 나한테는 내가 없으니까.”

“있지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 다들 사랑을 받고만 싶어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긍정해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귀엽다고 말해주길 바라지. 난 그걸 해주는 거야 단지 그것뿐이야.”

그녀는 생각한다. 살이 찌더라도 미나미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게다가 미나미도 그저 ‘인기가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뭔가를 넣지 않으면 그녀는 그저 껍데기 뿐이다. ‘내가 없다’는 말은 그런 의미일까. 그들은 자각을 못했지만 병들어 있다. 누가 우리들을 선별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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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자격증이 필요해요]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엄마 자격증이 필요해요 - 엄마학교 Q&A
서형숙 지음 / 큰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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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1월 7일 받은 첫번째 서평도서] 

본성은 느긋한 사람이었는데, 오랜 직장 생활 탓인지 느긋함이 없다. 느긋함이 없다는 것은 육아에 있어서 쥐약이다. 짧은 시간 안에 여러 가지 것들을 해결하려고 동동거리는데, 그야말로 선택과 포기를 잘 배합해 버무려 살아가는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1년쯤 전에 엄마학교를 읽은 적이 있다. 책 내용이 유익하고 새겨 들을만 했던 건 사실인데, 사실 생경하게 와닿지는 않았다. 고학년의 좀 자란 자녀를 둔 부모에게 지침이 될 만한 말들이 많았다고나 할까. 당시 돌쟁이를 두고 있었으므로.

이 책은 유아에서 저학년의 아이를 둔 부모에게 더 직접적으로 잘 들리는 내용이랄까.

상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엄마가 육아고민을 질문하면, 필자가 답변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그래서 문제도 답변도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읽으면서 전반적으로 들었던 생각은 이 세상엔 똑같은 아이가 없구나! 저마다 다른 아이들. 아이에게 어떤 패턴이 있어서 그에 맞는 반응을 보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엄마가 당혹해하면서 걱정을 하는데, 걱정을 쌓아둘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저마다 다르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면, 제자리를 찾는달까.

그리고 다정한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게 말하고, 아이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고, 아이에게 말할 때는 정확하게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지혜. 그리고 아이가 이해했는지 확인해 보기.
그런 엄마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러다 잘못되지 않을까 미리 걱정하는 거,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는 거, 서두르고 화내고 하는 것들.

 

 

 

나름 위로 받았던 것들. 친구 중에 아이들 데리고 공연, 전시회, 여행을 많이 하면서 아이들과 유익한 경험을 많이 하는 친구가 있는데, 항상 이 친구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었다. 아이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가 통해서이기도 하지만, 난 고작 어쩌다 주말에 동네 낙성대 공원에 데리고 나가는 게 전부라서.

저자는 아이를 다 키워 놓고 보니, 어린 시절 너무 뭘 보여 주겠다고 끌고 다닐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단다. 아이들 일곱 살 아홉 살 때 네덜란드에서 1년을 살았는데, 아이들은 그것도 잘 기억을 못 한단다. 여행이라는 것이 아이 본성대로 움직이기 보다는 짜인 일정에 따라야 하기에 적합한 일이 아니라, 그저 아이들에게는 그 장소, 내용이 아니라 엄마 아빠와 함께 했던 느낌만 강하게 남을 뿐이라고.

차라리, 날마다 함께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집 앞에 나가 저녁 노을을 보는 것.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미술 학습이라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
말대꾸 하는 아이에 관한 것이었다.  마음을 열고, 아이가 ‘대답’할 기회를 주라는 요지였는데, 반대로 아이의 그릇된 대꾸는 고쳐 줘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서점에 가서 “필요한 책 있으면 사줄게.” 했더니 아이가 집에 있는 책도 많아 묻힐 지경이라면 한마디로 “됐다.”고 했단다. 그러던 아이가 이책 저책 살펴보다가 그 사이에 맘에 대는 책을 발견한 것. “엄마 이 책” 하는 아이에게 책 읽겠다고 골라낸 게 기특해서 얼른 사줬다는 것. 필자는 그러지 말라고 조언했다. 아이가 엄마에게 던진 말에 책임을 지게 해야 한다고. 그래야 돼먹지 않은 아이의 대꾸가 사라진다고. 아무리 책을 사겠다고 해도 곧바로 반색하지 말라고 한다. 아이가 엄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시간이 필요한 일.
“책 넘쳐 싫다고 한 걸로 아는데.... 오늘은 그냥 가자. 다음에도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그때 사주마.” 이렇게 말하란다.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주되 아이가 명료하게 자기 뜻을 정확히 밝히도록 엄마가 도와야 하고, 그럴려면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된다는 실례이겠다. 흠~ 

 

엄마는 아이에게 징검다리가 되어 줘야 해요. 징검다리는 평평한 길에는 있지 않고 꼭 험한 길에만 있지요. 물길, 진길, 자갈길에 징검다리가 있으면 편하게 길을 갈 수 있어요. 엄마의 역할과 아주 비슷해요. 아이가 어려워 할 때, 잘 못할 때, 그때만 징검다리가 필요해요.

아무 때나 아이 앞에 나타나 이것 해 주고, 저것 가르쳐 주면, 아이가 튼실하게 크지 않아요. 마음대로 하게 두었다가 부족한 게 보이면 그때 한돌 한 돌 아이가 건너오도록 길을 놔주면 되지요. 엄마도 아이도 서로 편히 지내는 법이에요.


아이를 기르다 보면 기쁨도 많지만 넘을 산도 많을 거다. 늘 새롭게 겪는 사건 사고가 발생을 하겠지. 저자는 그걸 다 걱정거리로 돌리지 말고, 느긋하게 즐겨보자는 이야기로 들린다. 달콤하면서도 미묘한, 그것이 바로 인생이기에.  



틀린 글자

 

93쪽 11째줄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아요->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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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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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 온다 리쿠가 ‘나, 머리 겁나 좋아! 이야기 구도를 이렇게 겹겹이 이중 창문으로 된 액자(이런 게 실제로 있나? 모르겠으나) 소설도 만들 수도 있어. 메롱~’ 하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제대로 구도를 이해하며 읽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도 않으면서 되돌아가 그림을 맞춰 보며 따져볼 노력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은, 죽죽 흘려 읽으면서 나름 온다 리쿠의 문체로 충족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연극의 이라는 장르에 수반되는 그러니까, 극작가와 같은 항상 더 나은 작품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해줘야 하는 창작 직종에 전념하는 사람들의 비애랄지, 배우가 오디션을 앞두고 갖게 되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랄지,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 자체에 대한 삽화들을 작중 인물의 입을 빌어, 온다 리쿠만의 어투로 들려 주는데에서 그만, 재미를 다 보았다고 생각했고, 이것으로도 난 족하다 라고 여겼다.


이건 개인 취향일 것이다만, 이렇게 작가가 쓰고 있는 이야기의 모티브로 보여 지는 것이 구체화해서 이야기 내부 속에 유사 연극의 형태로 있고, 사실 그 결말 또한 기승전결을 갖춘 단순하게 똑 떨어지는 구조가 아니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결말을 낼 수도 있었을 법했지라고 독자들에게 손안의 카드를 다 내보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에 사실은 좀 질색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만이 치열하게 고뇌해야 하는 수고로움 같은 것을 소재로 과대 포장해서 독자들에게 선사해 주고 있는 게 있는 거 아냐! 싶은... 그렇다. 이건 복잡한 걸 즐기지 못하는 개인 취향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가 싶은 순간,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뒤집으며 독자를 다시 미궁에 빠져들게 한다. 그런 모호한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온다 리쿠가 의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옮긴이의 말에 내심 아리송하고 미진했던 느낌에 대한 혐의를 완전히 풀어주지도 못하겠다.

116

‘남는’ 연극 말이야. 실제로 왜 이런 시시한 연극이 남아 있는 걸까 하고 젊을 때는 나도 생각했어. ‘우리 마을’이나 ‘인형의 집’ 같은 것. (중략) 하지만 역시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지. 대체로 단순한 구도가 남는 거야. 다른 말로 하자면 여백이  있는 것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 말이지.

119

오디션이라는 게 항상 그렇지. 받기 전에는 정말로 싫은 게 오디션이야.

긴장해서 불안에 떨며 구역질을 할 정도로 계속 열에 들뜬 사람처럼 비일상적인 상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지. 너무 싫어서 도망치고 싶어 내 경우는 그래.

하지만 끝나면 아쉬운 걸, 사랑스러운 거야.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 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헤어진 연인처럼 끊임없이 끝난 오디션을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 오디션을 받고 싶어지는 거야.

120

다들 화장술이 뛰어나고 옷 입는 센스도 좋아져서 얼굴 생김새가 미인인가 아닌가보다는 총체적인 인상이나 패션 감각이 더 중요해지고 있지.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빼어난 미인이라는 이미지가 없어졌지.

121

오늘날 아름다움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아. 아름다움과 야심도 비례하지 않아. 오히려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의 야심이 더 굉장하지.

383

당신, 자신의 일이 끝났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본 적 있어? 아직 없겠지. 아직 젊고, 한참 물이 올라 있는 이 때가 자신의 일에 대한 반응을 느끼는 시기지. 언젠가는 체력이 다해 사고력이 떨어지고 자신의 직업에서 은퇴할 때가 오겠지. 그런 때의 일을 아직 상상해본 적 없겠지?

하지만 늘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있어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 만드는 것 하나하나가 남들의 평가 대상이 되고 그것이 다음 일을 얻는 기준이 되는 사람. 항상 고갈을 두려워하는 사람. 항상 만들어내는 일을 괴로워하는 사람. 세상에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어.

정말, 생각할 때마다 무서운 직업이에요. 주문을 하면서 몇 번, 보면서 몇 번. 내용의 질이나 평가가 노골적으로 관객수에 필적하죠.

분명 오랫동안 글을 쓰다보면 나름대로 기술은 늘 것이고 약간의 요령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새로운 것을 쓰기 시작할 때의 공포는 커지게 마련이죠. 전작을 능가하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부담은 점점 크게 다가오지요. 무엇보다도 스스로 기대하는 작품의 수준이 점점 높아져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힘들어진다고 해요. 

390

건물 내부의 정원은 도시의 모형.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축도. 사람들은 늘 둘러싸이고 싶어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고 관리당하고 안전하고 기분 좋은 장소로 도망치고 싶어한다. 그러는 한편 사람들은 둘러싸여 있다는 것에 폐쇄감과 고독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이 모이는 장소로 나가 많은 사람들 속의 한 사람임을 화인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내부 정원은 항상 ‘보여지는’ 운명에 있다. 애당초 사람의 시선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공간인 것이다. ‘보여진다’는 의식은 늘 허구를 갖고 있다. 내부 정원은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쌍방에게 연기를 강요한다. 그러므로 허구는 내부 정원 밖으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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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설 2008-11-05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머리 겁나 나뻐~ 이러면서 못 읽겠습니다 ㅎㅎ

icaru 2008-11-10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미설 님은 좀 다르게 느껴지실 지도 모르죠~ 저 작가가 쓴 것 중에서는 별로였음다^^
 
알파걸들에게 주눅 든 내 아들을 지켜라 - 자신감 없고 의욕도 없는 우리 아들 '기 살리기' 프로젝트
레너드 삭스 지음, 김보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똑소리 나는 알파걸들을 물리치고 남자아이들이 승리하게 하자! 내지는 단순히 남과 여는 다르니까 분리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책으로 받아들이면 정말 곤란하겠다.

성장기 아이들에 국한한 이야기이다. 아들이 딸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여자아이들에 비해 학습면에서 뒤쳐지며 성인이 되어서는 목표를 상실하고, 기운 빠진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고, 아들들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고 똑똑하게 키울 수 있을까 대안을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남자 아이들이 학습 면에서 여자 아이들보다 뒤쳐지는 이유를 몇 가지 들고 있다.

첫째는 신체적인 특징- 뇌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 여자 아이들보다 2년 정도 늦게 트인다는 얘기다. 이것과 연관되는 것이 남자아이에게 조기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학습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할 우려 있다. 이것은 남녀 공학을 지양하자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 책에도 유사한 설명이 나와 있지만, 저자의 또 다른 책 <남자 아이 여자 아이>라는 책을 보면, 남녀의 뇌 구조가 다를뿐더러 청각과 시각에서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는 실험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가령 퀴즈를 푸는 뇌의 부위는 남학생의 경우 대뇌의 원초적인 부위인 해마를, 여학생은 가장 진화된 대뇌 피질을 사용한다고 한다.

청력에 있어서는 여자 아이들이 놀라울 정도로 민감해 남자 아이와 무려 10배 정도의 차이가 난다고. 그래서 남자 교사의 보통 목소리가 여학생에게는 꾸짖음으로 들릴 수 있고, 여자 교사의 목소리는 남학생에게 중얼거림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 시각 역시 남학생은 움직이는 것을 잘 관찰하지만, 여학생은 색조의 미묘한 차이까지도 구별해 낸다고. 

게다가 여자아이들은 이를테면, 교사나 어른들에게 칭찬을 받고, 기쁘게 해 주고자하는 욕구를 갖지만, 남자아이들의 경우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또한 책으로 얻는 지식은 경험으로 지식을 얻고 호기심을 충족하려 하는 남자 아이들에게 맞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는 환경을 영향을 들 수 있다. 환경호르몬이 위해성은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에게 치명적인 점. 또한 주의력결핍과잉행동(ADHD)의 경우 남자 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데, 이 때 아이 뇌를 망치지 않기 위한 대비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아들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을까요?  

1. 조기 교육을 시키지 마라. ( 물론, 소수의 머리가 일찍 트인 남자아이들은 스스로 자극을 원할 것이고, 아이가 수준이 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읽기 쓰기 산수 등의 인지 교육을 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저자는 유치원도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보내지 말라고 한다.

2. 밖에서 맘껏 뛰놀고 경험을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하라. ( 자연을 많이 접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최상이겠지만, 안 되면 다른 대안이라도,,, 수영이나 태권도 같은 체육 수업도 좋고.)

3. 공학이 아닌 남학교에 보내라. (이 부분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공학이더라도 분리 수업을 한다는지 하는 대안도 있을 것이다.)

4. 좋은 남자 모델을 제시해 줘라. ( 아버지가 좋은 모델이 되어 줄 수 있겠지만, 굳이 아버지가 아니어도.... 아이는 부모만 키우는 게 아니라, 온 마을이 키운다지 않는가!)

등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이제 두 돌 지난 아들을 키우고 있고, 내년 봄에 태어날 아이도 아들이라고 한다. 두 아들의 엄마가 되는 일. 실은 당사자인 나보다 주변에서 ‘앞으로 힘들어서 어떡하느냐’며 더 걱정을 해 준다. ‘왜요, 뭐 어떼요. 잘 키울 자신 있어요!’라는 당찬 소리는 차마 안 나오지만, 부모 노릇이라는 것도 일종의 수련 혹은 배움의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근차근 배워나가면 열성엄마로 아주 훌륭하진 않아도, 어제보단 오늘이 나은 부모가 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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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5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1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 2008-11-0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만 둘인데 귀담아 듣고 갑니다.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요.

icaru 2008-11-04 20:07   좋아요 0 | URL
아.... 저의 미래의 삶을 사시는 분이시군요~
이 책 읽으면서,,, 아 정말 아들들이 그렇게 전반적으로 딸들보다 덜떨어진게 현실인거야? 글쓴이가 좀 과장하는 거 아냐? 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더랬어요 ㅋㅋ

파란 2008-11-04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책을 읽지 않았지만 공학에 대한 건 맞아요. 남자아이들이 성에 대한 호기심들이 워낙 많아서 공학에서 조금 더 공부를 덜 하죠. 여자들은 그것때문에 더 하구요. 챙피하다는 말을 하더라구요. 아이들 보면..근데 이런 건 있어요. 사춘기 지나서 남자아이들이 뇌의 구조가 완성이 된다고 해요. 그래서 중학교 2.3학년부터나 늦어 고1부터 성적이 확~ 오르는 아이들의 성은 거의 남자!라고 봐요. 왜 풍문에 반에서 30등 하던 아이가 전교에서 30등으로 올랐다.는 풍문에 주인공은 다 남자에요. 그게 뼈가 있는 말이에요. 말이 제가 좀 많네요. ^^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초반부에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생일대의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그 날 밤 이후부터는 정말 숨가빴다.

제목 그대로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다.

속죄란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차원을 넘어서서 지은 죄에 마땅한 벌을 치러야 하는 것인데, 죄가 부른 운명의 질곡(전도 유망한 청년의 삶과 그의 애인의 삶마저 송두리째 아작내 버렸다.)에 비한다면, 그 벌이라는 게 약하다 싶기도 하다.

그리고 훗날에야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 댓가를 달게 받으려 했던 브리오니.

그런데 이 죄가 브리오니 단독의 작품은 아니다. 그녀는 권력 의지를 발휘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난히 강한, 그런 아직 아이였던 것이다. 과오를 저지른  주범이기는 했지만, 본인이 저지른 잘못(강간)임에도 입 다물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고, 판단력 없지 않을 법한 어른들 여럿이었건만. 이 죄는 이들의 합작품이다.

모두 3부로 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1부는 사건이 있던 하루의 일을. 2부는 전쟁터에 나간 로비의 시점에서 3부는 속죄를 구하는 브리오니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이 작가의 장점은 전문 직종 혹은 상황 묘사에 아주 뛰어난 점이다.

2부에서는 작가가 정말 2차 대전에 참전해서 낙오병으로 몸소 겪었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고, 3부에서는 전쟁중에 부상병을 간호하는 간호병으로 호된 직업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 쓴 것만 같다.
작품에서 다룰 직업군의 현장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실감나는 문체의 소유자랄까.


죄를 저지를 당시 브리오니는 제법 글재주가 있는 그러나 자신이 전지전능할 수 있는 작품 속 창작 세계와 현실 세계를 혼동하는 무지한 열두살 영국 명문가의 막내였다.
철이 들고, 자신이 언니와 그 애인에게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는 자각을 할 무렵엔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버렸던 것.  

속죄를 할 양으로 언니처럼 종군 간호사가 되지만. 속죄의 방식도 다분히 창작의 세계에서 오만했던 어린 브리오니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인간은 누구나 물질적 존재이다. 쉽게 파괴되지만 쉽게 회복되지는 않는 존재. 몸이 부서져라 부상병들의 간호 일을 하면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절절히 깨달음과 동시에, 작가가 되려는 열망을 접지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임했던 간호사의 일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으로 깨닫게 되었고, 소설가로서도 대성하게 되지 않았나! 물론 브리오니는 죽기 직전까지도 뼛속 깊에 남겨 있었던 죄책감을 안은 채 살아야했겠지만.

죽은 사람들만 억울한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어쨌든 브리오니 당신이 이겼어! 싶은 것이다.
브리오니만이 아니라, 미국인 마셜과 브리오니의 사촌 로라 커플은 입에 담을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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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8-10-0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미운 건 브리오니 부모였어요.

icaru 2008-10-13 10:31   좋아요 0 | URL
그렇죠~ 마치 건수를 찾고 있었던 사람들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