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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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는 주변의 다른 발칸 공산국가들보다도 더 엄격한 공산 체제의 나라라고 한다. 역자의 후기를 보면 작가 카다레는 '혹독한 공산 체제하에 비참하게 일그러져가고 있던 알바니아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그는 실제로 알바니아 출생 프랑스 망명 작가이다.) 새롭게 조국을 창조하기 위해 인간의 형법 중 가장 비인간적이라 할 약식 재판과 고문, 연좌법이 횡행하는 공산 체제에 맞서 사라져가는 옛 관습법을 들이대어 만든 것이 이 소설이라고 말했다.

즉, 비인간적인 공산주의는 한 가문의 일원이 다른 가문에게 살해당하면 피로써 복수하는 관습만도 못하다는 요지이다. '피에는 피'라는 이 카눈의 법칙은 누구의 피도 등가로 취급되기에 어느 헌법 체계보다도 '민주적'이고, 피를 잃거나 거두어들이지 않는 법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유혈을 일으킬 수 없게 만들어, 더더욱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얼핏 냉정해 보이는 관습법을 통해 공산주의와 대적하고 있다는 것은, 이 소설 속 오로쉬성 대공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정부들이 쓰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왕국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까? 그러나 오로쉬는 여전히 건재합니다.'

작가 카다레가 만든 주인공 그조르그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연상시킨다.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에 의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운명에 내몰렸듯이,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왜 상대방의 가문에 대해 증오심을 갖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상대방의 가족의 일원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내몰린다. 피가 피를 부르듯, 피의 관습법에 의해 30일간의 휴전이 끝나면 주인공은 상대 가문의 죽음의 표적이 된다.

카눈이라는 관습법의 지배 아래서는 자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날 주인공 그조르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자유로운가?'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한 대답을 찾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힘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위안을 삼기도 한다.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은 삶이 조용하고 평안하다 할지라도 그런 삶은 그렇기 때문에 무미건조하며 무의미하리라. 차라리 이런 위업을 안고 가는 사는 삶이 하루하루 계절들이 그 속에 전율이 동반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복해지는 것일'거라고.

<부서진 사월>은 개인적인 나의 취향에는 별로 부합하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 이유는 이 소설 속에 나오는 관습법에 적용이 되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였고(여자와 성직자는 이 관습법에서 제외된다. 즉, 이런 슬프고도 기이한 운명의 주체적인 주인공이 결코 될 수 없다.), 남성 우월주의적인 사회의 일면을 소상히 담고 있는 배경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자 주인공(이 소설 속의 모든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디안에게, 독자인 나는 막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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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특별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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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내놓은 작품인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 로맹 가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자기 앞의 생>에서 나오던 주인공 꼬마 모모나, 한때는 예쁘고 젊어 '궁둥이로 벌어먹고 살았던' 뚱뚱하고 늙은 유태인 로자 아주머니, 맹인인 하밀 할아버지, 여성과 남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롤라 부인으로 등으로 미루어 짐작턴데 이 소설집, <새들은 페루~> 또한 가엾은 사람들의 배신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알라딘에서 이 책을 사고, 반년이 흐르도록 차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새들은 왜 하필 페루까지 가서 죽었는지, 어쨌는지, 받아들이기 기꺼운 사연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막상 책을 잡고도 끝까지 읽어내는 데 또한, 한 달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 작가는 왜 이렇게 씁쓸한 입맛이 도는 열여섯 편의 단편 이야기들을 지어냈나, 너무 지나친 페이소스다. 마치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봤을 때의 느낌과 많이 일치한다. 물론 이 책은 앞의 영화처럼 잔인한 미학으로 승부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 영화는 이 소설의 내용에서 착안한 듯한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벽-짤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이다. 벽을 통해 흘러나오는 (혼자서 흠모하던) 옆집 여자의 환락에 차오른 듯한 신음 소리가 사실은 비소에 중독 되어 죽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영화에서도 위중한 병을 앓고 있는 누나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자인 남동생이 맛있게 라면을 먹는 장면과 이 신음 소리를 오해하여, 이 소리를 듣고 자위를 하는 옆집에 사는 네 명의 청년이 하나의 씬에서 처리된다.

각설하고, 이 책 속의 단편들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다. '인간, 그것도 허영과 위선적인 면모를 갖는 인간이라는 종에 깊이 천착한 작품들'이라고. 이 작품을 읽으면서 보고 싶지 않은 보아야 했고, 믿었던 무엇엔가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것도 같다. 즐겁고 유쾌하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은 그런 남다른 여운을 내게 오랫동안 남겨준 그런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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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뽀로 여인숙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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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나의 자주빛 소파>와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은 작년에 무지 읽고 싶어했던 소설들이다. 이 책들을 이야기하는 서평들과 광고에 혹했다고 해야 할까. 작가들의 약력이 너무 인상적이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해서 두 소설 중에, 조경란의 소설부터 서점에서 구입해서 읽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어긋나게 소설에 몰두가 안 되어서 애를 먹었었다. 겨우 단편 몇 개만 골라서 읽었을 뿐이었다. 조경란의 소설이 주는 소리없이 강한 위력을 뿜는 그 우울한 맥빠짐 때문에, 곧이어 하성란의 삿뽀로 여인숙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집 근처에 있는 도서 대여점이 점포 정리를 했다. 거기서 <삿뽀로 여인숙>을 발견하고 헐값에 사와서 읽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나에게 참 좋았다. 왜 좋았을까. 주인공 진명이가 어디서 많이 본 친구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쌍둥이 동생이 고3때 죽고, 그 이후로, 집에서 버스로 여덟 정거장이나 되는 학교까지 아무 생각없이, 심장이 터지도록 늘상 뛰어서 다니는 진명이. 더는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휴식 시간엔 문제집만 풀고, 퉁퉁 불은 라면을 먹고, 고3 이라는 시간을, 반쪽 같던 쌍둥이 동생의 죽음을, 묵묵히 견디는 그 모습. 진명은 선명의 죽음을 계기로의 생활들 때문인지 성적은 많이 올랐다지만, 대학 진학엔 실패를 하고 작은 회사에 경리 보조 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한참 조명을 받는 이쁜 스무살을, 자신이 늘 신던 낡은 운동화처럼 남루하게 보내고 있다. 웬지 남같지가 않다. 으레 소설 속에 나오는 스무살이 그러하듯 뭔가 그럴싸한 척하는 느낌, 그런 게 이 주인공에게는 없다. 그래서 한없이 이 소설에 끌렸던 거 같다. 사실, 이 소설 속에 줄거리는 너무나 많은 우연과 같은 만남으로 연명해 간다. 하지만 이런
우연 남발이 소설 전체의 빛을 죽이지는 않는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진명이가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동생과 연루된(직, 간접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헤어지고 혹은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혹은 삿뽀로라는 공간을 직접 찾아가는 식으로 '운명'이라는 불리는 그 시간들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발걸음의 고즈넉함에 더 큰 울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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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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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욕심이 많은 나는 그렇다. 책을 사서, 읽는 것보다는 소유하는 데에 더 마음을 쓰는 사람같다. 그런 나는 남에게 책을 빌려 주는 일도 굉장히 인색하다. (못됐다.) 하지만 예외도 있어서, 국내 소설책 만큼은 내가 한번 읽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돌려보고, 나중에 돌려 받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유는 국내 소설이 소장 가치가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다른 장르의 책들과 달리, 국내 소설책은, 내 속에서 불러 일으키는 반향이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느낌을 준다. 왠지 같이 돌려보고, 같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준달까?

각설하고,(나는 왜, 국내 소설 서평만 쓸라치면, 작품과는 관계없는 사설이 길어지는지 모르겠다.-.-;; ) 전경린의 이 소설은 삼십대 부부의 불륜에 대한 것이다.

후기에서 작가는 말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합법적으로 제도에 편입되어 기념비가 되는 사랑보다 삶을 무너뜨리고 얼굴을 다치며 내쫓기는 사랑에 매혹되었다.....중략....그리고 가급적 삶과 연루되지 않는, 관능적이고 부유하는 사랑을 미화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쾌락과 감상과 욕망의 비루함과 가벼움과 무상한 환멸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사랑이 왜 지리멸렬한 삶의 가랭이를 벌리고 그 살점 속에 뿌리를 박아 서로의 악성 종양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숙고하게 되었다.'라고.

나는 이 작가 후기가, 이 소설 전체를 이야기 해 준다고 생각한다. 본래,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을 해야 하고, 기타 등등의 인터뷰나 후기에서 작품에 대해 중언부언 덧붙이는 일은 작품의 미완성을 작가 스스로 시인하는 행동이 되고 만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예외로, 이런 감성적인 멜로 소설(?)은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는지, 무척 궁금해져서 어떤 땐 작품에 앞서 후기부터 읽어보곤 한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나'말고도, 우울하고 꿀꿀한 여러 유형의 '여자의 일생'이 나온다.
먼저, 소설의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주인공 '나'의 남편을 사랑하는 인쇄소 여직원 영우, 그녀는 이종 사촌오빠와 사랑에 빠지고, 사촌 오빠의 약혼녀가 자살하는 데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이었고, 주인공 부부의 두터운 애정에 틈을 벌이는 결정적인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두 번째, 주인공 부부가 이사간 시골 동네의 어느 빈집, 안주인이었던 부희, (그녀는 과거의 인물이며, 주인공의 앞일을 암시해 주는 인물이다.) 그녀는 집에서 첫아이 아빠와 일을 벌이다가, 현재의 시아버지에게 발각되고, 시아버지를 살해하게 된다.

셋째, 휴게소 여인, 비구니가 되고자 절에 들어갔다가, 스님에게 내침을 당하고 속세에서 만난 전과자와 강제로 살다가, 남편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걸 계기로 그와 이혼을 하지만, 현재 출감한 그에게 시시종종 구타를 당한다. 한편으로는 트레일러를 모는 한 가난하고 착한(?) 유부남과 순수한 사랑을 나눈다.

넷째, 주인공 '나'의 어머니, 어머니는 여고 시절에 만나 사랑하게 된 선생님인 아버지와, 원치 않은 임신 끝에, 친정에서 강력히 반대하는 불행한 결혼을 한다. 결혼 직후엔 시어머니로부터 모진 시집살이를 겪다가, 끝내 주인공인 딸마저 홀대하게 된다. 주인공은 어릴 적에 7년 동안, 엄마, 아빠 다른 자매들과 떨어져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된다. 주인공은 어린 가슴에 엄마에 대한 원망을 키우며 자란다.

소설 전체적으로, 씁쓸한 뒷맛이 느껴지는 내용이다. 사랑이라는 것의 본질은, 이다지도 비루하고 환멸스러운 것이었나.......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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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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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비평계와 세간에서 이 책을 향해 숱하게 쏠리고 쏟아져 내렸던 찬사와 호평을 잘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내 식으로 굳이 이 책에 대한 느낌을 하자면, 이렇다. 스물 한살의 프랑스 작가가 써내린 소설치고 퍽 훌륭한, 18세기 말을 배경으로한 베트남 여행기이네. 라고.

이 소설의 행간 어느 부분도 도발적이고, 문제적이라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만한 부분이 없다. 그저 담담하고, 아릿하며, 고독하고 무상하다.

그래서일까, 마음의 평정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길에 꺼내 놓고, 행간 사이를 음미하며 읽으면 전율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 책이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던 당시는 절대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다.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졸면서 띄엄띄엄 읽었기 때문인 즉, 감동은 반감하고 말았던 거 같다.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다 죽었다. 베트남에서 온 어린 왕자는 멀고도 낯선 이국 땅 프랑스에서 외롭게 죽었고,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여러달에 걸친 뱃길로 미지의 세계, 베트남에 도착한 선장과 선교사 수녀들도 우여곡절 끝에 모두 죽었다. 선장과 선원들은 숲속에서 살해당하거나 부상으로 죽었고, 선교사와 수녀 몇은, 프랑스에서 어린 아들을 외롭게 죽도록 한 데 대해 상심한 왕의 폭정으로 살해당하거나, 풍토병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물론 이 모든 죽음이 참혹하고 슬픈 것이긴 하지만, 이 소설의 초점은 그 참혹한 슬픔을 강조하는 데 있지 않다. 죽음과 가까워지고 죽어 잊혀지는 것이 생의 의미라는 것을 미학적으로 보여 준다고나 할까.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프랑스 선교사와 수녀들은 프랑스어를 가르치거나 베트남말을 배우는 등 논밭을 함께 경작하는 등 프랑스에서 지니고있던 모든 것을 잊고 이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베트남 원주민과 더불어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마지막까지 살고 있었던 도미니크 신부와 까트린느 수녀 일행은 다른 지역에 선교를 할 목적으로 일부 선교사와 수녀 몇을 처음 정착한 마을에 두고,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고된 여행길에서 도미니크 신부와 까트린느 수녀만이 살아남게 된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베트남에 왔지만, 이들의 일행은 모두 죽었으며 이 둘만이 고립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 두 사람은 구체적인 생의 본질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나누던 기도와 복음과 말씀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이었다. 7년이 지난 후, 이 둘은 한 날 같은 시간에 병으로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사족을 좀 달자면, 나는 이 책을 통해 베트남의 지역색도 아울러 맛볼 수 있기를 바랬다. 푸른 벼와 연잎에 찐밥, 코끼리를 타고 밭을 경작하고, 어린 아이들도 담배를 피우는 모습. 순박한 원주민, 풍토병. 그것 이상의 무언가를 말이다. 하지만 '다다를 수 없는 나라'라고 하는 제목이 보여 주듯...... 알 듯 말 듯 모호하고 정적인 느낌으로 베트남의 풍광 묘사를 메우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원체가 이것이 이 소설의 미학이라고 하니, 뭐 그런 줄 알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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