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쌀쌀하여 아침에 나갈때 비록 두터운 겨울 웃옷을 입고 나왔지만, 아직 가을이었다. 덕수궁에 들어서기 전에 벌써 거리는 노란 은행잎으로 포장이 되어 있었고 덕수궁 안에 들어가자 마자 이렇게 고운 빛깔 단풍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단풍이 꽃보다 더 붉다"라는 뜻의 한자어가 있는데 정말 공감, 공감.


내가 오늘 덕수궁에 온 이유 중 하나는 이 사람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이다.

조르조 모란디 (Giorgio Morandi, 1890-1964)
이름만 보고는 몰랐는데 그림을 보고 기억이 났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밤에 거의 매일 이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년 넘게 들춰보다보니 여기에 실린 그림을 어디서 만나게 되면 처음 보는 그림 같지 않고 낯이 익다. 그땐 그저 잠이 안와 보았던 것 뿐인데 이렇게 오래 나의 기억을 지배할 줄이야.
Giorgio Morandi의 그림도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

덕수궁미술관, 기와, 빌딩.
세가지 건물 양식이 함께 잡히기에 담아본 사진.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거기가 2층. 두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1전시실엔 모란디의 작품, 2전시실엔 "모란디와의 대화"라고 해서, 그의 그림과 비교가 되는 우리 나라 화가 작품들이 걸려있다. 김환기, 박수근, 김구림, 최인수, 신미경등.

사진 속의 모란디는 전혀 화가같지 않았다.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 키가 크고 차가와 보이는 인상.
전시실 한 편에 마련된 그에 대한 비디오를 끝까지 다 보고 나왔다. 그는 주로 정물을 즐겨 그렸는데 정물의 종류가 그리 다양한 것도 아니다. 자기 맘에 드는 병, 그릇, 방울등, 일상에서 친숙한 것들을 몇개 구하고, 또는 직접 만들거나 색칠하여 그것들을 다르게 조합하고, 다르게 배열하여 그림을 그렸다. 해설자의 설명에 의하면 요즘 같이 눈에 보이는 이미지가 강조되는 시대에 단촐하고 간결하고 절제된 모라니의 그림이 더욱 돋보이는 것인지 모른다고.

2층 2전시실에는 우리 나라 화가들의 정물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자연을 풍경으로 담고자 했던 우리 나라 화풍에서 정물을 처음으로 그리지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이종우, 김환기, 박수근, 그리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신미경의 비누로 만든 도자, 이윤진의 사진들, 황혜선 작가의 캔버스로 만든 정물. 모란디의 그림을 보다 이들의 그림을 보니 같은 정물이지만 훨씬 역동적이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모란디의 그림이 조용히, 금방 나오지 않을 이야기를 잔뜩 품고 침묵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면.
사진 촬영, 물론 금지되어 있기에 눈으로만 보고서 한층 위로 올라갔다.



3층 3, 4전시실에는 한국근현대미술소장품이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 제목이 "나는 세개의 눈을 가졌다"
최욱경 화가의 1966년 작품에서 제목을 빌려왔다.

세개의 눈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짐작해보시라.
이중섭의 호박, 김경인의 문맹자, 하인두의 자화상, 양수아의 자화상.
하인두의 자화상은 입체적 기법으로, 고뇌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그렸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화가.
양수아는 여자 이름같지만 사실은 남자 화가인데 이 사람의 자화상은 제목을 안보면 자화상인지 모를 그림이다. 자신의 내면을 그린 자화상이라는데 굴곡많은 개인사를 가진 화가라고. 제주 4.3항쟁때 동생을 잃고 자신 역시 빨치산 출신이었으며 아픈 근대 한국의 역사가 개인사이기도 한 화가라고 한다.
세개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면 이르게 되는 곳은 어디일까.
전시실의 마지막 그림들이 알려준다. "해탈"

미술관을 나왔다. 한번 더 뒤돌아 보았다.




이렇게 큰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보다가 이 은행나무 틈에서 초록색 아기 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보았다. 향나무인가?

클로즈업!

모르는 어르신 두분 뒷모습을 도촬.
보기 좋아서요.
집에서 나올때 바람쐬고 오겠다는 말만 하고 나왔기에, 덕수궁에 도착한 후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덕수궁미술관 왔어. 단풍 완전 멋져. 사진 찍어가야지'
이에 대한 남편의 답문자,
'그래, 옛날 우리집 구경 잘하고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