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일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 같고, ( 오 시 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 ( 오 시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렌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업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시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시집 같고,
(장석남 '젖은 눈')
쉼표로 끝나지만 이것이 시의 전문이다.
늦은 밤 아니라 대낮에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가 답답해지면 부엌을 서성거리는 나.
읽고 있는 세권의 책이 여간해서 손에 안잡혀 읽다가 중단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간다.
어제밤 잠자리에 들며 손에 든것도 읽고있던 세권의 책이 아니라 예전에 읽었던 시집 중 한권이었다.
처음부터 마지막장까지, 결국 전부 다시 읽고 잠들었다.
시집의 제목처럼, 시집 속의 시들에 몽땅 물기가 스며있었다.
마음으로 울며 읽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1121/pimg_7149951631102839.jpg)
그믐
나를 만나면 자주
젖은 눈이 되곤 하던
네 새벽녘 댓돌 앞에
밤새 마당을 굴리고 있는
가랑잎 소리로서
머물러보다가
말갛게 사라지는
그믐달
처럼
(장석남 '그믐')
'자화상'이라는 시도 좋았는데,
이 시도 옮겨 적고 싶은데,
이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