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아버지께서는 우리 삼남매를 불러서 앞에 앉히시고 각각에게 한말씀씩 하시는 시간을 가지시곤 했다. 주로 부모로써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를 전달하는 형식이었는데 일장 연설을 하신 후 우리에게도 할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기회를 주셨지만 이미 분위기는 너무 숙연해져 있어서 우리가 평소에 하고 싶던 말을 꺼내기란 무척 어려웠었다.
2009년 마지막 날, 나는 남편과 아이에게 서로 편지 교환을 하자고 제안했다.
서로에게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편지로 써서 교환하는 것이다. 말로 할 수도 있지만 나 자신부터가 말보다 글로 쓸때 더 솔직해지는 편이고 또 나중까지 기록으로 남을 수 있겠기에 생각한 것이었다.
지름이 10cm조금 넘는 원형의 조그만 빵을 사다가 앞에 놓고, 나무 꼬치를 반으로 뚝 분질러서 한쪽 끝에 스마일 스티커를 붙여서는 빵 위에 촛불처럼 꽂아 케잌 흉내를 냈다. 그리고 서로 편지를 교환했다. 아이가 먼저 엄마, 아빠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고, 그 다음 내가 아이와 남편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마지막으로 남편이 아이와 내게 받은 편지를 읽었다.

남편이 내게 쓴 편지 중, 몇 구절,
당신을 생각하면, 가지고 있는 자산을 마음껏 활용해보지 못하는 것이 가슴 아프게 해...난 당신의 능력을 믿고 존경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부딪치지 못하는 것이야. 꼭 어떠한 일을 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또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긍정을 보고 싶은거지.
인생이란 목표가 필요한 여행이겠지만 그 목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도착점을 인지하기 힘든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가끔씩은 내가 직면해야했고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적대적이었을 때에는 다시 올라갈 수는 없잖아. 가지 못한 여행에 대해 뒤돌아서서 후회하지 말자.
남편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방학중인 아이와 하루 종일 아웅다웅하는 생활에 나도 좀 피곤했는지 요즘은 평소보다 일어나는 시각이 늦어지고 있었는데 오늘 모처럼 일찍 눈이 떠졌다.
읽던 책을 두고 무심코 옆에 있던 '깐깐한 독서 본능'책에 손이 갔다. 천권을 읽고 이렇게 책을 내시는 분도 계신데, 이 책을 읽는 것도 부담이 가서 감히 시작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교과서 읽듯이 첫장부터 한줄 한줄 깐깐히 읽기 시작하자는 마음을 버리고 부담없이 여기 저기 펼쳐 보았다. 책 서평보다는 간간히 삽입되어 있는 흐린 갈색 페이지들에 쓰여진 글들에 먼저 눈길이 갔다.
"나는 가끔 우리 집에 승용차를 타고 오시는 손님에게 물어본다. '고속도로를 달려올 때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빨리 올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한다. 그분들은 고속도로가 뚫리는 과정을 잘 몰라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일 게다. 산이 잘려나가고 논밭이 쓸려나가고, 심지어 옛 무덤들이 파헤쳐지고 조상님들의 혼이 불도저에, 포클레인에 무자비하게 짓이겨진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192쪽)
녹색평론에 실렸다는 권정생님의 글이 인용되어있다.
프롤로그에 실린 허균의 글은 노트에 베껴 써보기도 한다.
이 책은 이렇게 읽어야겠구나 생각한다.
'서두르지 말고 그러나 쉬지도 말고'
어디서 본 이 말이 생각나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