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나이 예순에 알았던 것, 그것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깨닫고 있었다. 확인을 위한 사십여 년에 걸친 길고, 무용한 작업......(16쪽)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종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43쪽)

 

사람이 늙어갈수록 '문제'를 제쳐 놓고 자신의 과거를 들쑤셔 보는 것은 아마도 사념에 집중하기보다는 추억을 뒤적이는 것이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리라. (71쪽)

 

냉소로써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구원도 도울 수 없는 법이다. 냉소로써는 오로지 자신의 상처-자신의 혐오감이 아니라면-만을 감출 수 있을 뿐이다. (213쪽)

 

나는 불안에 대한 처방을 회의에서 찾았다. 처방은 마침내 병과 한통속이 되어 버렸다. (220쪽)

 

자동장치와 변덕의 혼합물인 인간은 결함 있는 로봇, 고장난 로봇. (230쪽)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기초를 뒤흔드는 것, 자신의 기초를 뒤흔드는 것을 말한다. 행동은 우리 사이의 간극을 채워 주는 까닭에 보다 위험성이 적다. 반면에 사고는 그 간극을 위험스러울 정도로 넓혀 놓는다. (260쪽)

 

구원은 없다는 확신은 구원의 한 형태이며, 구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역사 철학의 체계를 세울 수도 있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해결책으로, 유일한 출구롤 삼음으로써..... (265쪽)

 

나는 왜 이사람의 책을 읽는가.

그에 대한 답을 책 속의 한 문장에서 찾았다.

 

내면 깊은 바닥에까지 내려가 있는 사람, 일상의 환상들로 되돌아갈 욕구도 기력도 잃은 사람과 나는 마음이 통한다. (43쪽)

 

산다, 살아간다, 살아낸다

같지 않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어쨌든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를 읽은 후 두번째로 에밀 시오랑의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관점으로 한번 보았다. 그 역시 살아내려고 했고, 그래서 실망하고 아파했, 그래도 그건 진행형이었기에 끝까지 살아내었다. 무엇이 그를 끝까지 버텨내게 했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마지막까지 가보기 전엔 결코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의 생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직접 끝까지 살아보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 것은 내가 어떻게 한 시각 한 시각을, 하루하루를, 한 해 한 해를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었다. (273쪽)

 

태어남이 불행이라는 말의 뜻은, 태어날때의 순수성과 본성을  살아가면서 점점 잃어버리게 되고 퇴색되고 변색되고 왜곡되어가는 것에 대한 통탄의 라고 본다. 태어날때, 혹은 태어나기 직전이 그래서 가장 덜 불행하다고 한 것이다.

 

삶을 한번 이렇게 보기 시작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기란 어렵다. 에밀 시오랑은 이것을 황홀경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겨우 찾아낸 출구를 보면서 다른 출구를 찾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선 것 자체가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회의주의는 막다른 길에 몰린 자의 황홀경이다. (156쪽)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상황을 명징하게 볼 수 있는 힘이 과연 있을지. 명징하게 볼 수 있으려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보다 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이 있을까 싶은 상태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묻게 된다. 즉, 객관적 회의주의란 가능할까, 회의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명징하게 볼 수 있는 힘만이 사막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유일한 악덕이다. (22쪽)

 

명징하게 볼 수 있었는지, 그것은 잘 몰라도 에밀 시오랑은 적어도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하는 힘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전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 비해 짤막한 글들이 아포리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읽혀진다. 원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책 안쪽에 물론 나와있는데 프랑스어엔 까막눈이다보니. '존재의 불편함', 뭐 이런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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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3-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을 뽑아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그중 인상 깊은 것 세 개만 뽑으라면,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종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해결책으로
회의주의는 막다른 길에 몰린 자의 황홀경이다)

이 세 가지 문장의 공통점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정반대라는 것, 이네요.

아포리즘의 글을 좋아해서 예전에 이런 류의 책을 찾아 읽었어요.
이 책 팍팍 끌리는군요.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알기에 더욱...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를 다시 들춰 봐야겠어요...

hnine 2015-03-14 12:37   좋아요 0 | URL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아포리즘 식이 아니었고 글도 더 촘촘했지요.
이 책이 훨씬 더 쉽게 읽힌건 토막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에밀 시오랑이 어떤 식으로 쓸지 예측하고 읽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나라에서 이런 내용의 책을 누군가 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생각도 해보았어요. 다양한 사고 방식의 하나로 보기 보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결정내리려고 하는 우리의 습관이 이런 책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하고요.
 

 

 

 

 

 

 

http://youtu.be/kr3mnL5aUBA

 

 

 

 

 

 

 

 

이거 재미 붙이면 안되는데.

마구 틀리고, 페이지 넘기는 소리 "휙!" 하고 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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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5-03-05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연주하신거에요? +0+

hnine 2015-03-05 14:35   좋아요 0 | URL
넵! ^^

무스탕 2015-03-0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울~~!!! 멋져요!!
이건 취미로 똥땅거리는 수준이 아니신대요. 우와~~
몇 번 들었어요. 아우~ 조아 >_<

hnine 2015-03-05 15:01   좋아요 0 | URL
캄사합니당~ (머리조아리고 인사 ^^)

2015-03-05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3-05 21:59   좋아요 0 | URL
Mozart 곡들이 좋게 말하면 경쾌, 발랄하고, 막 말하자면 좀 가볍고 초싹거리지요 ㅋㅋ
그래서 성격이 밝은 사람들은 오히려 베토벤 처럼 무겁고 스케일이 큰 곡을 선호하고 반대로 약간 진지 모드인 사람들은 밝고 경쾌한 곡을 접근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 마음이 울적하여 일부러 기분을 업시켜볼 요량으로 일부러 Mozart 곡을 자주 쳐보고 있답니다. 그러면 확실히 마음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잘은 못해도 이렇게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게 악기를 다룰줄 안다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답니다.
들어주셔서 고마와요 ^^

icaru 2015-03-05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부디 재미 붙였주세요!!!
*,,* ) 감동의 쌍콧물... ㅎㅎ

hnine 2015-03-05 22:02   좋아요 0 | URL
이 아줌마가 갈수록 없던 용기가 마구 생겨나고 있습니다.
어릴땐 누가 피아노좀 쳐보라고 하면, 아니, 그런 말 하기도 전에 도망가서 숨어있은 적이 많았는데 말이예요 ㅋㅋ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Youtube에 올리고 보니 옆에 다른 사람들이 같은 곡 연주한 것들이 같이 주루룩 뜨는데 정말 비교되더라고요. 그래도 꿋꿋하게! ^^

2015-03-05 1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3-05 22:05   좋아요 0 | URL
저도 바로 가서 그 책 검색해보았어요. 이 분도 쫌 멋진 분 같네요. 음악이 아니면, 때로 책이 아니면, 내 삶이 축제라는 기분이 드는 때가 팍 줄어들지 않을까요.
많이 모자라지만 용기내어 올려보았는데 함께 들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늘 혼자 치다가, 누군가 들어준다고 생각하니 창피한 것도 있지만 기분이 좋네요.

nama 2015-03-05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십니다. 자주 올려주세요^^

hnine 2015-03-05 22:07   좋아요 0 | URL
자주 올릴 수 있을만큼 레퍼토리가 두둑하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시간날때마다 연습해서 가끔씩 올려볼께요.
요즘, 아이까지 집에 늦게 오는 날이 많으니 좀 심심하기도 하지만 이런 여유도 생기고, 나쁘지만은 않네요.

서니데이 2015-03-05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매일 꾸준히 연습을 하시나봐요. 전에 피아노교습을 받으셨다고 듣었던 것 같은데요, 지금도 잘 치시는 것 들으면서 참 부러웠어요.

hnine 2015-03-06 04:54   좋아요 1 | URL
연습을 한다기보다 책상에 앉아있다가 좀이 쑤시면 밖에 나가 한바퀴 돌고 들어오면 좋을텐데 게으르고 귀찮다보니 그냥 피아노 몇번 뚱땅거리는걸로 대신해요. 잘~ 치려면 정말 맘먹고 연습을 많이 해야하지만 그냥 재미로 쳐요.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상미 2015-03-10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 없으면
나 신부 입장도, 남편 팔짱끼고 퇴장도 못할뻔 했잖아 ㅎㅎㅎ
네 유튜브 구독 눌렀어.
자주 올려봐~~~~
난 모짜르트가 좋아 ㅎㅎ
내 분위기랑 딱 이야.

hnine 2015-03-11 09:46   좋아요 0 | URL
동영상으로 찍어놓고 업로딩할 방법 찾다보니 youtube까지 올리게 된거란다. 여긴 네이버처럼 바로 동영상 옵로딩이 안되더라구.
네 결혼식 반주, 그동안 강산이 몇번 변했는지 전설같은 이야기구나 ^^
모짜르트곡은 기분전환에 그만이지. 책상에 계속 앉아있다가 정신을 다시 또롱또롱하게 하고 싶을때.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올까 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이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이재무 <무서운 나이>

 

 

 

 

 

 

어려운 단어 하나 없이도

이렇게 단박에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시,

살아있는 동안

흉내라도 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지,

욕심이 지나치지 않은가?

이런 시 읽기를

놓지 않고 나이들어가면 좋겠다

 

 

 

 

 

 

 

 

 

 

 

 

 

 

 

 

 

 

 

 

 

 

 

 

 

 

 

기다리던 책을 밤에서야 받았다.

 

오늘은 좋은 날.

아침엔 꽃을,

저녁엔 시를 받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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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3-0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둥번개가 두려운 시절이 어째서 더 행복한 시절일까요.................?

꽃 정말 아름답네요. 아름다워요^^

hnine 2015-03-04 13:25   좋아요 0 | URL
천둥번개에도 무뎌질만큼 현재 생활의 무게가 무거운거겠지요. 자식을 둔 어미, 아비에게는 내 식구 먹여살리는 일이 천둥번개보다 무서울지 모르겠어요.

꽃, 예쁘죠? 꽃이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도 보이시나요? ^^

아무개 2015-03-04 13:16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전에 두려워 하진 않던
천둥번개를
지금은 두려워 해요.
지킬것이 많아질수록 두려움이 더 많아 지던데요.
겁장이 아무개 ^^::::::::::::

넵 봉오리~그 이름도 아름다운 봉오리도 보았어요~
 
발치카 No.9
이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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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보관함에 담겨 있던 책 두권을 주문했는데 그 중의 한권이다.

지금처럼 팟캐스트가 다양해지기전 부터 '문장의 소리'라는 팟캐스트를 듣는게 낙이었는데 이은선이라는 이 작가는 그 문장의 소리의 구성작가였다가 2010년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하였고 작년이었던가 첫 소설집인 이 책을 낸 후엔 본인이 그 방송에 초대작가로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이 책에 대해 소개를 듣고 읽어봐야겠다 생각이 들어 보관함에 담아놓았더랬다. 그때 방송에서 듣기로, 작가는 대학 졸업후 경험을 넓힌다는 목적으로 우즈베키스탄에 갔고, 거기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러시아와 가깝다는 것 정도 밖에 아는게 없는 그 나라에서의 경험, 즐겁지만은 않았던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이 책의 대부분의 단편들이 만들어졌다. <발치카 No.9> 이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까롭까>, <톨큰>, <분나> 등, 책 속의 단편 제목들도 낯설다. 우즈베키스탄의 소수 민족 언어라고 하니 그럴 수 밖에. <살사댄서의 냉풍욕>, <판타롱 아일랜드> 라는 제목들도 분위기가 만만치는 않기는 마찬가지.

모두 열 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카펫: 목화를 재배하여 카펫을 짜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야말로 생계만 겨우 이어갈수 있을 뿐 병이 나도 치료도 받을 수 없는 형편. 아픈 자식을 머나먼 타국에 보내서라도 치료 받게 하고 싶은 어미와, 그렇게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에 오늘을 걸고 사는 아이가 나온다.

빛나던 해가 들판으로 가라앉았다. 훌렁, 들판이 들썩였다. 지평선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모글모글한 목화송이들이 허공에 떠다녔다. 몸이 훌쩍 떴다. 톨큰이 녹물을 흘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엄마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엄마, 나 이제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아! 환한 빛이 들판을 감싸 쥐었다. 목화송이 하나를 잡아 그 위에 올라타고 하늘을 헤엄쳤다. 저 멀리서 다시 큰물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엄마, 율두스 조심해요! 나는 있는 힘껏 헤엄쳐 파도가 이는 곳으로 갔다. 여러 척의 목화 배들이 내 옆을 스치며 배들의 무덤 쪽으로 향했다. 물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거대한 철갑상어 한 마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목화송이를 가득 쥔 손을 힘차게 흔들어주었다. 젖은 눈을 물 위에 떠 있는 목화송이에 스윽 문지른 철갑상어도 나와 목화들을 따라 배들의 무덤 쪽으로 헤엄쳐 왔다. 수평선이 다시 하늘로 치솟았고 나는 두손 가득 움켜쥔 목화송이를 하늘로 띄워 보냈다.

넓고 푸른 바다 위, 하얀 목화 배를 탄 나였다 (33-34쪽)

이 단편의 결말이다. 아이는 살아나나? 아니면 죽음을 의미하나? 어디까지가 실제 상황이고 어디부터가 아이의 상상인지 모르겠다. 의미를 곱씹을겸 문장이 아름다와서 읽고 또 읽고, 옮겨적어본다. 83년생. 아직 젊은 작가인데, 이런 수려한 감성, 비유, 상징의 문장력이 책의 여기 저기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까롭까: 까롭까는 '상자'라는 뜻이라고 첫 페이지의 조그만 설명을 못 봐서, 읽는 내내 글 속의 '나'가 누구일까 추리해야했다. 글 속의 나는 사람이 아니라 다름아닌 까롭까, 즉 상자였다.

보를라의 눈물이 모래사장에 하나, 하나 점을 찍었다. 나는 물 점들을 따라 모래 위로 가느다란 길을 내었다. 간간이 허리를 꺾은 채 걸음을 쉬던 보를라는 맑은 눈물이 핏물로 바뀔 때까지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내 몸이 그어온 길에 빛이 고였다. 빛 속에서 죽은 아이의 울음이 터졌다. (69쪽)

역시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이고, 한번 스윽 읽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문장이었다.

 

톨큰: 톨큰은 '파도'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바다로 가는 강줄기 옆의 작은 마을을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화자는 사람이 아니라 새. 수호새인 아내를 잃은 남편새이다. 권력의 이름으로 붕괴되는 마을의 현장에서 마을 사람들의 부질없는 기원과 함께 죽어가는 수호새의 이야기이다. 처절한 파국의 이야기를 수려한 문장력으로 더 처절하게 그려놓은 듯 하다.

 

분홍코끼리: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 같다는 생각은, 예전에 작가 인터뷰 방송을 들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모르고 읽었더라면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듯. 사람은 무슨 권리로 다른 생물들을 오직 우리의 즐거움을 목적으로 가두고 훈련시키고 매질 하는가.

 

발치카 No. 9: 이쯤에서 불만이 조금씩 불어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독자에게 좀 더 친절할 수 없었나 하고. 이건 99% 독백이잖아? 어떻게 알아들으라는 거야, 불만 불만.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 발치카가 뭔가요? No.1부터 No.9까지는요? 사건의 일련 번호인가요?

 

살사댄서의 냉풍욕: 제목이 희극적인가? 내용은 역시 아니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마음은 눈물에 늘 젖어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오랜만에 저 먼 나라가 아닌 우리 나라가 배경이지만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와서 못겪을 일 겪으며 살고 있는, 삶다운 삶이 아닌 삶을 살고 있는, 스물 여섯 여자가 나온다.

 

분나: 이것이 무슨 뜻인지 글 중에 단한번도 소개가 되지 않는다. 커피를 뜻하는 것 같다고 추리할 뿐. 작품 속 소녀의 이야기는 이 세상엔 죽음보다 못한 삶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 La: 갈수록 점입가경이랄까. 아들의 묘를 파고 내려가 그 위에서 생을 마치는 노인, 그에게 핏줄은 삶의 이유이고 종교였나. 평생을 믿고 지켜오던 것이, 그보다 더 속물적이고 눈앞에 보이는 욕망의 산물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 그 믿음이 뼈속까지 새겨져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죽음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인가보다.

 

이화: 이 역시 주인공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온갖 구렁텅이에 빠지길 거듭하는 일생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예외적으로 해피엔딩이다. 그래, 이 정도로도 해피엔딩이랄 수 있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앞으로는 지금보다 나아질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게 하니까, '파국'으로 끝내진 않고 있으니까.

 

판타롱 아일랜드: 수몰되는 마을, 수몰되는 집, 수몰되는 엄마의 무덤, 자의반 타의반 수몰되는 나와 아버지.

 

연상되는 작가나 작품은 김이설과 앨리스 먼로. 대체로 파국과 파멸의 과정을 질펀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치부와 환부를 드러내는게 거리낌이 없다는 점에서 김이설의 소설을, 길어질 수 있는 서사를 모두 단편에 압축적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농축하여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앨리스 먼로를 떠올렸다.

 

어차피 소설은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를 두고 쓰여지는 것인데, 독자들에게 좀 더 친절할 수는 없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미리 듣고 읽었으니 다행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 작품들이 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과연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이전에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사회자가 안그래도 그런 질문을 했더니 작가 답하기를, 본인도 걱정을 했으나 출판사의 편집자가 배경이 중요하기 보다 사람들이라면 통하는 면이 있으니까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그대로 출판해도 좋을 것 같다고 했다던가? 그렇게 기억한다. 하지만 작품엔 손대지 않더라도 뒤에 작가의 말이라든지, 그런 곳에라도 이 작품들의 배경에 대해 두어 줄 넣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일관하는 주제의 서사, 감탄하게 하는 문장. 별 다섯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가 별 하나 지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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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2 1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5-03-02 18:18   좋아요 0 | URL
그냥 소설이예요. 그런데 저는 이런 소설 읽으며 어떤 자기개발서나 철학 서적 읽는 것 만큼이나 많이 배우고 또 배워요.
읽어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어요. 이 작가 본인이 실제로 우즈베키스탄 가서는 끔찍한 사고를 경험하기도 했고, 작가가 열 몇살때부터 어머니께서 투병 생활을 시작하셨다는 가족사도 가지고 있더군요. 이 책 뒤의 작가의 말에 보면 다시 태어나면 우리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고 싶다고 썼어요. 작가의 어머니께서 세살때 그 어머니를 여의셨기 때문에 그런 엄마를 측은하게 생각하는거죠.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인생들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비참하고 끔찍한지. 아마 작가도 쓰면서 많이 울었을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작가가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 포함되어있다고 하니까요.
잠깐 창 밖을 보니 벌써 달이 얼굴을 내밀었네요.
언제나 궁금하고 반가운 님.
제게 빌어주신 것처럼 님께서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5-03-02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신 리뷰에 갑자기 한 문장이 떠올라서요..앨리스 먼로의 ..


But, she said also that she had felt alive. Maybe for the first time in her life, truly alive. she felt as if she had been given a chance; She had started her life all over again. she would walked out on her silver and her china and her decorating scheme and her flower garden and even on the books in her bookcase. She would live now, not read.She had felt her clothes hanging in the closet and her high -heeeled shoes hanging in the their trees. Her diamond ring and her wedding ring on the dresser. Her silk nightdresses in their drawer. She meant to go arount naked at least some of the time in the country, as long as the weather stayed warm. 

 p 94. Dear Life

여기서도 결국 파국으로 치닫죠.. ㅠㅠ
많은 느낌을 받았었어요..나인님..
저 단편에서..


쓰신대로 앨리스 먼로 작품 내내, ˝치부와 환부를 드러내는게 거리낌이 없다는 점˝
이라는 표현을 저도 쓰고 싶었어요.

작가의 실제 이력은 후에 확인했지만, 읽으면서, 이건 상상이기 힘들다 라는 세부 묘사가 ..자꾸만 ..


2015-03-02 1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과학을 취하다 과학에 취하다 강석기의 과학카페 3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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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도 읽을 수 있는 과학저서들은 과연 어떻게 쓰여질까. 책 속의 내용보다 어느 날 문득 이것이 궁금해졌다. 저자는 과학을 전공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을 전공했다 할지라도 그가 모든 과학 분야에 걸쳐 지식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고 더구나 이 책과 같이 비교적 최신 내용들로 책을 구성할때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 모아지고 어떻게 자기만의 글로 재탄생시킬까. 

 

1. 평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 저널 몇가지 (예. Nature, Science, Current Biology, PLOS ONE, PNAS, 등)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여 구석구석 자세히 읽는다 - 구독 신청을 하면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원문을 읽을 수 있다.

 

2. 읽다가  당시 사회적 이슈나 대중들의 관심사와 부합할만한 논문이나 기사를 스크랩하고 내용을 정리한다.

 

3. 이것들의 분류작업을 한다. 즉, 하나의 테마로 묶일만한 것끼리 모아놓는다 - 전공별로 모으거나, 주제별로 모아놓기도 하고 본주제에서 벗어났으나 관련된 기사는 따로 (인물) 모아 놓는다.

 

4. 하나의 기사, 그리고 한 묶음글에 적절한 제목을 붙이고 대중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내용을 다듬는다.

 

이 책을 읽으며 과정을 추측해본 것이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세계 유수 과학 저널에 발표된 내용을 십분 이용하여 이 책을 만들었는데 저널에 실린 논문 뿐 아니라 거기 실린 부고 기사까지도 하나 버릴 것 없이 구석구석 평소에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책 마지막 장의 '인물이야기'는 그해 과학 저널에 실린 부고 기사를 기본으로 하고 그 밖에 유용한 자료들이 있으면 참고하여 썼다고 저자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첫 꼭지글, "청마(靑馬)는 없지만 파랑새는 있다"는  2012년 J.R. Soc. Interface 9권 2563에서 2580페이지에 실린 Saranathan 외 공동저자의 문헌을 바탕으로 썼다고 밝혀 놓았다. 청마는 없다는 뜻은, 말을 비롯하여 척추동물에는 파란색 색소가 없기 때문에 조류인 파랑새와 달리 파란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가지를 알면 두세가지의 모르는 것이 생기더라는 것이 평소 내가 입버릇 처럼 하는 말이다. 적어도 과학에 관해서는. 그럼 왜 척추동물에는 파란색 색소가 없을까? 사람의 파란 눈은 그럼 뭔가? 이런 질문이 생겼는데 다행히 나 같은 독자를 위하여 내용중에 그 설명이 포함되어있었다.

 

책의 제목은 물론이고 책 속의 각 꼭지글 제목 붙이는 것도 무척 중요한 것 같다. 내용을 대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인만큼 읽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제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 속에 어떤 내용을 담느냐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일지 모른다.

 

참고문헌들을 보면 대체로 최근 1-2년내의 논문들이다. 이 정도면 굳이 최근이랄 것도 없는 것이, 워낙 진행 속도가 빠른 과학 분야이기 때문인데 과학사에 관한 주제가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다.

 

대중 잡지가 아닌 학술 저널의 최근 논문이나 기사를 바탕으로 한 만큼 제목을 어떻게 바꿔 붙이든, 내용을 어떻게 각색하든, 이해가 그리 쉬운 내용들은 아니다. 그래도 저자가 매우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저자 본인도 이해가 힘들었던 부분은 어중간하게 아는 척 넘어가기 보다는 자기도 이해가 어려웠다고 실토한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제든지 원래 출처를 찾아볼 수 있게 모든 글에 참고 문헌을 명확하게 달아놓았다는 점이다. 어디까지가 인용 범위이고 어디부터가 자기가 덧붙인 내용이라는 것을 밝혀놓아 신뢰가 갔다. 또한 마음에 들었던 점은, 그가 읽었을 그 많은 논문들 중에, 최근 사회적 관심과 잘 접목이 될 만한 논문들을 비교적 잘 뽑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럴려면 이 사회가, 문화가, 정치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늘 깨어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성공 요소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짧고 과학은 길다고 했다. 과학은 저 멀리 어디에 있지 않다. 우리의 삶, 이 순간, 이 공간 자체가 과학이고 실존이다. 어느 특정 그룹만의 관심사이고 연구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런 사실을 대중에게 알리는 작업, 필요한 일이고 멋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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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2-23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어보고싶네요.
저는 의도적으로 과학책이나 철학책을 한달에 한권은 읽으려고 노력하거든요.
전문서적은 버겁고 이런책은 괜찮을것같아요

hnine 2015-02-23 23:32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썼어요. 과학책이지만 앨리스 먼로도 나오고요 ^^ drop과 bubble과 foam의 차이에 대해서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여러 분야 다양하게 독서를 하시려고 노력하시는군요. 저도 정말 치우쳐서 책을 읽고 있어요. 제일 손 안가는 분야는 역시 철학, 사회학 분야의 책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