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 태어남의 불행에 대해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 챕터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나이 예순에 알았던 것, 그것을 나는 이미 스무 살에 깨닫고 있었다. 확인을 위한 사십여 년에 걸친 길고, 무용한 작업......(16쪽)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종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43쪽)

 

사람이 늙어갈수록 '문제'를 제쳐 놓고 자신의 과거를 들쑤셔 보는 것은 아마도 사념에 집중하기보다는 추억을 뒤적이는 것이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리라. (71쪽)

 

냉소로써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구원도 도울 수 없는 법이다. 냉소로써는 오로지 자신의 상처-자신의 혐오감이 아니라면-만을 감출 수 있을 뿐이다. (213쪽)

 

나는 불안에 대한 처방을 회의에서 찾았다. 처방은 마침내 병과 한통속이 되어 버렸다. (220쪽)

 

자동장치와 변덕의 혼합물인 인간은 결함 있는 로봇, 고장난 로봇. (230쪽)

 

생각한다는 것, 그것은 기초를 뒤흔드는 것, 자신의 기초를 뒤흔드는 것을 말한다. 행동은 우리 사이의 간극을 채워 주는 까닭에 보다 위험성이 적다. 반면에 사고는 그 간극을 위험스러울 정도로 넓혀 놓는다. (260쪽)

 

구원은 없다는 확신은 구원의 한 형태이며, 구원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계획하고 역사 철학의 체계를 세울 수도 있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해결책으로, 유일한 출구롤 삼음으로써..... (265쪽)

 

나는 왜 이사람의 책을 읽는가.

그에 대한 답을 책 속의 한 문장에서 찾았다.

 

내면 깊은 바닥에까지 내려가 있는 사람, 일상의 환상들로 되돌아갈 욕구도 기력도 잃은 사람과 나는 마음이 통한다. (43쪽)

 

산다, 살아간다, 살아낸다

같지 않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어쨌든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를 읽은 후 두번째로 에밀 시오랑의 이 책을 읽으며 그런 관점으로 한번 보았다. 그 역시 살아내려고 했고, 그래서 실망하고 아파했, 그래도 그건 진행형이었기에 끝까지 살아내었다. 무엇이 그를 끝까지 버텨내게 했을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이끌었을까. 마지막까지 가보기 전엔 결코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의 생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직접 끝까지 살아보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 것은 내가 어떻게 한 시각 한 시각을, 하루하루를, 한 해 한 해를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었다. (273쪽)

 

태어남이 불행이라는 말의 뜻은, 태어날때의 순수성과 본성을  살아가면서 점점 잃어버리게 되고 퇴색되고 변색되고 왜곡되어가는 것에 대한 통탄의 라고 본다. 태어날때, 혹은 태어나기 직전이 그래서 가장 덜 불행하다고 한 것이다.

 

삶을 한번 이렇게 보기 시작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기란 어렵다. 에밀 시오랑은 이것을 황홀경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 막다른 골목에서 겨우 찾아낸 출구를 보면서 다른 출구를 찾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선 것 자체가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회의주의는 막다른 길에 몰린 자의 황홀경이다. (156쪽)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 상황을 명징하게 볼 수 있는 힘이 과연 있을지. 명징하게 볼 수 있으려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보다 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상황이 있을까 싶은 상태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묻게 된다. 즉, 객관적 회의주의란 가능할까, 회의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명징하게 볼 수 있는 힘만이 사막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유일한 악덕이다. (22쪽)

 

명징하게 볼 수 있었는지, 그것은 잘 몰라도 에밀 시오랑은 적어도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하는 힘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전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 비해 짤막한 글들이 아포리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속도감 있게 읽혀진다. 원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책 안쪽에 물론 나와있는데 프랑스어엔 까막눈이다보니. '존재의 불편함', 뭐 이런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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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3-1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을 뽑아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그중 인상 깊은 것 세 개만 뽑으라면,
(신에게서 멀어질수록 사람은 종교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해결책으로
회의주의는 막다른 길에 몰린 자의 황홀경이다)

이 세 가지 문장의 공통점은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정반대라는 것, 이네요.

아포리즘의 글을 좋아해서 예전에 이런 류의 책을 찾아 읽었어요.
이 책 팍팍 끌리는군요.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명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잘 알기에 더욱...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를 다시 들춰 봐야겠어요...

hnine 2015-03-14 12:37   좋아요 0 | URL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아포리즘 식이 아니었고 글도 더 촘촘했지요.
이 책이 훨씬 더 쉽게 읽힌건 토막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에밀 시오랑이 어떤 식으로 쓸지 예측하고 읽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나라에서 이런 내용의 책을 누군가 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생각도 해보았어요. 다양한 사고 방식의 하나로 보기 보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결정내리려고 하는 우리의 습관이 이런 책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