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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2013년 <눈먼 부엉이>로 등단한 소설가. 올해 마흔살. 소설만 쓰지 않는다. 소설을 써도 우리가 쉽게 떠올리지 않는 소재와 주제로 쓰길 좋아한다. 인간과 비인간, 실재와 가상, 친절과 불친절, 겸손과 오만, 이렇게 이분법으로 그를 정의하기 어렵다. 그가 이렇게 말했듯이.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쓰는 (사는) 글쟁이이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인데 표지에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가 작게 붙어있는 것은 대구 태생인 그가 서울에 거주하면서, 그리고 파리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느낀 점, 생각한 점들을 기록하였다는 명분때문이다. 그의 평소 생각, 친한 사람들과의 대화, 문학, 건축, 철학, 예술관 등이 넘치도록 담겨있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한 명칭 '플라뇌르'는 프랑스어로 산책자, 배회자를 의미한다. 정지돈은 이에 덧붙여 매우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달아놓았다. 단순한 산책자라고 하기엔 여러가지 의미와 사회적 배경, 이미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뇌르 뿐 아니라 그는 어떤 개념에도 하나 이상의 해석과 의미를 갖다 붙일수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알고 있는게 많고 그 어떤 가능한 관련성도 떨쳐내고 싶어하지 않아보인다. 그래서 나 같은 독자에게 처음의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게 정지돈이라는 사람이구나 알아가게 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애초에 그는 무엇을 계획했나.
플라뇌르의 흔적 찾기. 그것을 재발명하거나 취소하거나 아니면 외면하기, 산책과 젠더, 상품, 자아, 신체, 공간, 사물, 매체를 엮는 불가능한 기획의 밑바탕을 깔기, 그것이 곧 근대성과 자본주의, 그리고 그 이후다! (80)
그러면서 산책을 사랑했던 로베르트 발저와 버지니아 울프, 레베카 솔닛을 많이 언급하였는데, 이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읽어도 새삼스러울 만큼 새롭게 그들을 재조명해주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에게 산책이 무엇이었는지.
책 중에는 정지돈과 친구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들이 자주 나온다.
오랜만에 이 시간에 연남동에서 술을 마시니....지옥 같네요. 정연씨가 말했다.
지돈씨, 글쓰기가 너무 힘든 것 같아요.
- 늘 그러시잖아요.
- 갈수록 힘든 정도가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동력이 사라진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생각했다. 아무래도 독자가 없는 것 같아요.
-지돈씨는 인기 많잖아요.
-그럴 리가...근데 여기서 독자는 진짜 독자말고 다른 의미에서의 독잔데, 저는 언제나 저 자신이 제1의 독자였거든요. 제가 읽고 싶은 글을 썼는데 어느 순간 그 제1의 독자를 잃어버린 느낌이에요.(145)
내가 생각하는 직업으로서의 작가의 정의 중에도 그것이 있었다. 나를 위해서만 쓸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부럽기도 했고 부럽지 않기도 했다.
현대의 산문체 작품들은 현대의 심리에 부합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오직 그 작품들이 단숨에 쓰여질 수 있을 때만. 이삼십 줄, 말하자면 최대한 백 줄 정도의 생각이나 혹은 회상, 이것이 현대의 소설이다.
장편서사시는 내게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큰 책들이 쉬는 시간-지하철 안, 심지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위에서-에 읽힌다. 그러면 뭣 때문에 책이 이렇게 커야만 하는가? 나는 저녁 내내 책 읽는 독자를 상상할 수없다. 우선 수백만 대의 TV가 있고, 둘째, 콜호스 사람들은 신문을 읽어야만 하며, 기타 등등.
-유리 올레샤, <매일 한 줄씩> 1965- (172)
그는 앉아서도 쓰고, 누워서도 쓰고 서서도 쓴다고 했다. 쓰는 글의 범주가 다르다고 했다.
다음은 플라뇌르가 왜 통설적으로 여성을 포함시키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플라뇌르의 어성형은 플라뇌즈다. 학계의 통설상 플라뇌즈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존재다. 여성이 플라뇌르가 되기에는 사회의 편견과 위협 요소가 너무 컸다. 여성은 거리로 나서는 순간 응시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쉽게 말해 남자들이 자꾸 쳐다보고 집적댄다는 말이다. (183)
1920~1930년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여성 산책자들이 등장하는데 소위 모던걸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던걸들은 플라뇌즈로 개념화되지 못했고, 여성은 상품 소비문화의 수동적인 노예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남성들은 관찰자이자 소비자로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반면 여성, 모던걸들은 허영과 사치를 일삼는 성적 방종이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비중있는 페이지는 마지막 글, 이 책의 제목과도 같은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254~270)이 아닌가 한다.
독일의 문화사회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인용하면서 그가 추구하는 것을 말했다.
크라카우어처럼 내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특정 대의가 아니라 대의들 사이의 틈새였다. 대의를 실천하면서도 대의로부터 자유롭게 생활하고 사유하기, 상충하는 대의를 함께 유지하기, 대의들 사이에 공유되는 공간에 머물기. 믿음 없이 살기, 하지만 어떠한 믿음 속에서. (262)
크라카우어가 이러한 삶의 표본으로 떠올렸다는 에라스뮈스는 15세기 종교개혁 시기 카톨릭 인문주의자였다.
에라스뮈스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데 그것은 특정한 목적이나 주장, 대의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아이디어였고,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이며 단지 지식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헌신해도 된다는 해방감이다.
이렇게 내겐 에라스뮈스라는 학자를 새로이 알게 되는 기회가 된다.
누군가는 이를 방관이나 비겁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에라스뮈스는 부당한 권력 앞에 한 번도 방관자였던 적이 없으며 종교개혁의 큰 공헌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에라스뮈스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조건이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는 집과 선량한 친구들과의 산책, 정원에서의 식사라고 생각했다. (266)
결국 그런 것인가. 시원한 나무 그늘이 있는 집, 선량한 친구들과의 산책, 정원에서의 식사. 이상적인 삶이란 말이다.
정지돈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면서 산책에 대해, 플라뇌르라는 자기 인식자로 사는 삶에 대해, 대의가 아닌 대의들 사이의 틈새를 볼 수 있는 자의 자유에 대해 알고 간다.
정지돈 작가, 땡큐! 건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