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쏜살 문고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박광자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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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꾼'이라고 하면 보통 '말'하기를 좋아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을 일컫지만, 말이 아니라 글로 본다면 로베르트 발저는 분명히 글수다꾼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다. 

1878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로베르트 발저 (Robert Walser) 우리에게 <산책자>라는 에세이로 많이 알려져있는데 소설과 희곡을 여러편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빈곤한 가정형편으로 생계를 위해 일찍이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여러 직장을 전전하였다. 그러던 중 스무살때 신문 지상에 시를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희곡과 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정신 질환으로 사망한 어머니에 이어 형도 정신질환을 앓다가 요양병원에서 사망했는데 로베르트 발저 역시 오십세 무렵 정신분열증으로 병원에 입원을 시작으로 창작활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이십년 이상 정신요양원에 머물렀다. 조용하지만 열광적인 산책자였던 그는 1956년 크리스마스날 역시 산책을 하던 중 심장 마비로 눈길 위에서 생을 마친다.

사후 그의 짧은 글들을 모아 출판된 이 책에는 열편의 글이 실려있고 열편중 가장 긴 산문 <산책 (Der Spaziergang)>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사람들과의 교류없이 혼자 걷고 혼자 생각하며 혼자 글쓰기가 전부였던 로베르트 발저이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생각이 많고 느끼는 것도 많고 눈여겨 보는 것이 많은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마 그가 가끔만 걷는 사람이었다면, 누구와 동행하며 담소를 나누며 걸었다면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했을 것들, 사람 눈길이 미치지 않는 자연의 구석구석을 얼마나 세세히 보고 관심을 가졌었는지 놀랄 정도이다.

매일 그게 그것일수도 있는 풍경이 그에게는 달랐다. 새로운 것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결핍이라고 하였다.

완전히 새로운 것에서 계속 즐거움과 맛보기를 찾는 것이야말로 나는 하찮다는 징조, 내적인 삶의 결핍, 자연에서 소외된 것, 이해력이 보통밖에 안 되거나 혹은 부족한 상태라고 본다. 항상 무언가 새로운 것과 색다른 것을 봐야 하는 것은 아이들이고, 아이들은 그렇게 해야 만족한다. 진지한 작가라면 소재를 쌓아 놓는 일에 신경 쓰거나, 감칠맛 나는 욕망에 부응하는 심부름꾼이 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자주 비슷해지는 것을 열심히 피하기 위해서, 물론 노력은 하지만 몇 번이고 계속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것이라면 작가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67)


포함된 이미지: Plant These Winter Flowers to Brighten Up Your Garden or Landscape


한 겨울에 피는, 수선화를 닮은 작고 소박하고 여린 꽃, <스노드롭 (사진)>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어떤 심성의 사람인지 엿볼수 있다.

스노드롭을 보았다. 마당에도, 장에 가는 시골 아낙의 수레에도 있었다. 한다발 사고 싶었지만 나처럼 건장한 사람이 그처럼 섬세한 생명을 가지는 것은 맞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온 세상이 반기는 소식을 전하는 이 부끄럼쟁이, 무엇보다도 빠른 전령은 달콤하기 그지없다. (96)

추위를 말하지만 이미 더 따뜻한 것을 말하고, 눈을 말하지만 녹색 세상, 움트는 싹을 말한다고 했다..

바라는 것은 이루어질 것이고, 따스함이 세상을 덮으리라고.

조금만 기다리자. 행복이 오고 있다. 행복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기다리면 복이 온다. 최근에 스노드롭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오래되고 좋은 속담이 생각났다. (97)


그가 기다리는 행복은 어떤 것이었을까. 

혼자 할 수 있는 작고 조용한 행위의 반복에서 최대의 의미를 찾기 원했던 로베르트 발저는 보통 사람이면서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산책자>, <세상의 끝>에 이어 <산책>을 읽었으니 이제 그가 남긴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빌려다 놓았다. 무엇을 가지기 위한 것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님을 배우는 학교라고 한다는 정도 알고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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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베르트 발저가 글수다꾼이라니 그러니까 읽고 싶은 생각이 확 드네요. ㅋ
사진 속 꽃은 눈속에 피는 꽃인가 봅니다. 신통한데요?^^

hnine 2024-01-12 07:18   좋아요 1 | URL
사람과 교류가 거의 없었던 사람이 얼마나 섬세하고 자연과 사람에 관심이 많았는지 몰라요. 그걸 모두 글로 표현해놓았고 그게 다른 사람이 말로 표현하는 분량만큼 되나봅니다.
스노드롭이란 꽃은 우리나라 복수초가 눈속에서 봄소식을 알리듯이 외국에서 그런 상징인가봐요. 수선화를 닮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