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크테에서의 만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9
귄터 그라스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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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내일 있었던 바의 반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귄터 그라스의 이 소설을 펼치기 까지 사실 한참 망설였다. 많은 사람들이 귄터 그라스 하면 '양철북'부터 떠올리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한데, 대학생일때 '양철북'을 극장에서 영화로 보면서 받은 충격이 수십년 지난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 귄터 그라스의 작품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의 이 첫문장은 또 뭔가. 어제는 내일 있었던 바의 반복이 될 것이라니.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한다는 말인가. 불길한 예감? 그나마 책이 그리 두껍지 않다는 것 때문에 결국 읽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별 다섯개로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분량은 많지 않다해도 책장이 그리 술술 넘어가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아마 읽으면서 작가의 의중이 전혀 헤아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가보다.

추정되는 시기는 1947년 (혹은 그보다 300년 전인 1647년에 있었던 일의 재현), 독일 각지로부터 약간의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만 각자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독일의 텔크테라는 조그만 마을에 모여든다. 원래 모이기로 한 장소는 텔크테가 아니었으나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 방편으로 변경한 곳이 텔크테인데 이곳의 숙소도 속물스런 여주인이 운영하는 보잘것 없는 작은 여관 정도이긴 마찬가지이다. 

시인들은 그들이 쓰는 시의 성격과 종류의 다양성 만큼이나 이 모임을 '페그니츠 강안의 목자들', '결실의 모임', '정직한 호박 넝쿨 초만의 모임', '정직한 전나무의 모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며, 전쟁의 여파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독일 문학을 일으켜세워야 하고 그것을 위해 시인들이 결집하였고 의견과 입장을 정리하여 국가를 향해 한목소리를 내어 평화호소문 혹은 취지문을 작성하여 발표한다는 것을 모임의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모인 시인들은 우선 자기의 시를 한두편씩 돌아가며 발표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발표하고 평을 하면서 현 국가 상황에 대해 그들이 시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찾아 호소문을 작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마디로 통일된 목소리로서 정리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거기에서 낭독된 것은 다만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당사자들에게 보내는 이 회의 참가 시인들의 소박한 청원으로서 그것은 비록 권력은 없지만 불후성이 약속되어 있는 시인들의 걱정을 모든 당사자들이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의에 모인 시인들의 애국자로서의 걱정이 언급되었는데, 독일 제국이 너무나도 난도질을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 독일 제국에서 한때 독일이라고 불리던 자신의 조극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될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244)


여기에 참가 시인들의 서명을 끝으로 이 모임의 목적이 달성된 듯이 보였다. 며칠 동안 오고간 설전, 허세, 속물스럼, 격화된 논쟁 등은 잠시 잊고 작은 성취감에 서로 포옹을 하며 뭔가 해냈다는 확신을 하며 처음으로 평화로운 식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마당에 반전 처럼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이 호소문은 발표되지 못하고 만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가로서의 터치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1927년 독일인 부모 밑에서 지금의 폴란드에서 태어난 귄터 그라스는 히틀러 치하의 경험을 몸으로 겪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때 히틀러 소년단원이 되었고 전쟁터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며 전쟁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막일꾼 노릇을 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10대 때 일어난 일. 20대가 되면서 틈틈이 시를 써서 발표한 것이 한스 베르너 리히터의 주목을 받아 문단에 초대 되었다. 

대중적으로 그를 널리 알린 <양철북>은 1959년 파리 헛간방에서 집필한 그의 장편 처녀작이다. 이 작품은 뛰어난 문학성이라기 보다는 이색적인 문체와 내용때문에 더 유명해졌다고 볼수도 있다.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당시 독일과 독일인을 묘사하고 있는 담대함, 솔직함, 기괴한 언어 유희, 비판 정신으로 당시 사회의 호평보다는 혹평을 먼저 받은 것이 무리가 아니었지만 극찬을 받기도 하여 이후 그의 문학을 계속 이끌어가는 힘이 되어 새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게 하였다. 

<텔크테에서의 만남>에는 화자로 '나'가 등장하는데 마지막으로 호소문이 발표되지 못하게 된 사건을 주도한 사람도 이 '나'라는 참가자들중 한 사람으로 짐작되지만 그게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귄터 그라스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짐작을 해볼뿐 누가 왜 그런 일을 일으켰는지는 모른채 마지막 장을 덮게 한다.

시인들이 단 며칠 동안 모임을 가졌고, 작품을 발표하였고, 모였으니 호소문 하나 작성하였고, 그것을 소재로 소설 하나를 만들어내다니, 소설가에게 소설의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섣부른 선입관이었다.

불안한 정치 상황, 사회 분위기, 전쟁 전후 사람들이 정신 세계의 변화를 겪어가며 정체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시인들이 과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현미경 역할을 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작품 발표를 하고 평화호소문을 작성한 것은 국가를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자기 존재 증명을 하고 싶었음일까. 그마저 실현시키지 못하고 무산되었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할 거리를 남겼고, 작가는 이미 이런 생각을 거쳐 간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소설가는 아무 소재나 소설로 쓰는게 아니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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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2-22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귄터 그라스의 이 장편은 처음 봅니다.
좋은 책 소개 고마워서 냉큼 담아갑니다*^^*

hnine 2022-02-22 20:15   좋아요 2 | URL
제가 양철북 영화를 보고나서 한동안 그 좋아하던 커피를 못 마실 정도였거든요. 영화 장면 중에 오스카의 난쟁이 여자 친구였던가요, 전쟁 중이었는데 커피 마시고 싶은 걸 못참고 마시러가다가 군인들 총에 맞아 그자리에서 죽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나서요.
이번엔 무슨 맘이 들어 한동안 피하던 이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는지. 그런데 이 소설은 (별로 안 두꺼워요 ^^) 작가의 의중이 양철북에서보다는 잘 와닿았던 모양이어요. 프레이야님께는 특별히 더 추천드리겠습니다 ^^

mini74 2022-03-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랴요 *^^*

hnine 2022-03-08 23:41   좋아요 1 | URL
정말 오랜만에 읽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이 이런 선물을 안겨다주었네요.
특이하고, 생각보다 흥미로웠던 작품이었어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3-0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hnine 2022-03-08 23:43   좋아요 1 | URL
간략한 리뷰였는데 이렇게 이달의 리뷰로까지 뽑아주시다니.
그리고 이렇게 축하까지 해주시니, 앞으로 더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3-08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22-03-08 23:44   좋아요 1 | URL
아이쿠, 요즘 책을 별로 못읽어 기대도 안했는데, 감사드릴뿐이랍니다.

서니데이 2022-03-08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22-03-08 23:4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당선될때마다 잊지 않고 와서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과학하는 마음 - 매일의 실패를 넘어 경이와 호기심의 세계로
전주홍 지음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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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인문과학 할때 쓰는 넓은 의미의 과학 말고, 실험 과학이라고 하는 과학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정작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과 정체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 안하는 줄 알았다. 그런 생각 할 시간 있으면 실험을 한번이라도 더 해서 데이터를 쌓아라 이렇게 농담처럼 주고 받을 줄 알았다. 그래서 처음엔 제목조차 평범해보이는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진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분의 책 소개글을 봤던가보다. 

결론은, 읽기를 얼마나 잘 했던가. 실험실이라는 곳에 대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마도 공감하며 책장이 술술 넘어갈 것이고, 앞으로 과학이라는 분야에 몸담고 싶은 사람이라면 결정하기 전에 꼭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은 책이 되었다.

우리 나라 처럼 고등학교 까지의 과학교육이 실험보다는 알려진 지식의 습득에 치중되어 있는 나라, 대학에 들어와서 조차 학부에서는 실험보다 강의 위주의 과학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인 나라, 비로소 과학 현장에 뛰어 들어 과학 연구 활동이 시작되는 것은 대학원에 들어가서 어느 연구실에 소속이 되고나서부터인 나라에서 과학자로 평생 정진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 강의실이 아닌 과학 현장에 투입되는 그때부터는 지금까지와 아주 다른 공부 방식과 연구 방식의 세계가 시작된다. 그래서 뒤늦게 아, 이건 내 적성에 맞는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과학은 머리로만 하는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구나, 머리보다 몸이 먼저 지치는구나 하는 것을 깨우쳐 가기도 한다. 갈수록 기계화 되어 가는 실험실 장비 익히기에 좌절하기도 한다.  

 실험실 (Laboratory) 이라는 말 속에 저 labor란 단어가 보여주듯이 실험실이라는 말의 어원에는 '신성한 노동의 장소', "기도하고 일하라'는 모토가 관련되어 있다. 노동, 그리고 일. 기도하듯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야하는 곳이 실험실이다. 이 말이 16세기에 오면서 단순한 작업장이 아닌 스키엔티아 (scientia), 즉 자연에 관한 보편적 지식 또는 현상 이면의 질서를 획득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오늘날 실험실에는 연구원들의 책상이 마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험실의 주요 무대는 그들의 책상이 아닌 중앙의 실험대이다. 대학원이나 연구원 실험실에서 책상에 앉아 논문을 열심히 읽거나 교재를 읽고 있는 학생이나 연구원들을 교수나 연구책임자는 좋아하지 않는다. 책상에서 나오는 결과 곧 업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험실 중앙의 실험대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실험을 통해 늘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지기만 할까? 실험의 목적이 새로운 것의 발견에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실험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클로드 베르나르는 1865년 <실험 의학 연구 입문> 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저자는 인용하고 있다 (67쪽)

실험은 우리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의 오류를 통제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출발점관찰이고, 종착점실험이며, 그 결과로 발견되는 현상들은 합리적 추론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과학의 방법으로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설 세우기는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고 경험적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입증하는 식으로 이루어짐을 지적하였고 기존 지식의 학장, 응용을 위해 실험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가설이 도출되는 근원에는 과학자의 직관도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출발일 뿐 실험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과학과 과학을 구분하는 요건이 된다.

과학 지식은 종교적 교리와 달리 얼마든지 수정되고 반박될 수 있다. (104쪽)

반증가능성 (falsifiability), 오류 가능에 대한 열린 자세는 과학을 비과학이나 종교와 구분하는 중요한 조건임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도전적이고 혁신적일까 라는 내용을 위해 2011년 <네이처>에 실린 짧은 기사 중 한편을 예시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로 인해 기능을 모르는 유전자가 많이 발굴되었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과학자는 그동안 연구해 오던 유전자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119쪽)

분명히 과학자들은 일반인들이 기대하는 만큼 진취적이거나 모험적이지 않고 늘 하던 것을 더 잘하려는 성향도 강하다면서 그렇게 된 배경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고 상당히 설득력있었다.

이 책의 3장 제목이 '우왕좌왕 실험실 안에서'. 이 책 전체에 필요없는 내용은 없다고 생각되지만 굳이 꼭 한 부분만 읽겠다고 한다면 바로 이 3장을 읽어보라고 하겠다. 실제로 어떤 과정에 의해 과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책이 아니라 문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어난 연구 방식의 급격한 변화로 ① 실험 키트의 상용화, ② 실험 및 데이터 분석의 외주화, ③ 공동 연구의 활성화와 연구의 분업화 현상 을 들고 이것의 장단점을 지적하였다 (157쪽).

오늘날 과학은 직업적 성격이 강해졌지만 196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먼의 말을 들어 과학자의 소양과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나는 스웨덴 아카데미의 누군가가 이 일이 상을 받을 만큼 고귀하다고 결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나는 이미 상을 받았습니다. 그 상은 그것을 발견한 기쁨입니다." (175쪽)

이 책의 제목이 과학하는 마음인 배경이기도 하고 저자가 책 속에서 수차례 강조한 말 과학은 성공이 아닌 성장의 이야기라는 것의 다른 버전의 말이기도 하다.

과학에 들어있는 비과학적 요소, 예술적, 문학적, 사회적 속성에 대한 내용으로 책은 마무리가 된다. 이들을 긍정적으로 보고 이런 요소때문에 과학은 생각보다 훨씬 극적이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활동이라고 했고 묘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품고 있다고 했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 철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역사적, 철학적 배경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겪고 있는 당대의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철학적 통찰력에 의해 창출되는 이러한 독립성은 단순한 장인이나 전문가진리를 추구하는 진정한 연구자 사이의 구별점이라고 생각합니다 (212쪽)

저자는 분자생리학자로서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 교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분자생리학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실이라면 조용하고 심각한 장소를 떠올렸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오히려 이 책 3장의 제목처럼 우왕좌왕, 떠들썩, 역동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그러면서 질서가 있고 규율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라는 것을 저자는 일반인들에게도 충분히 알려주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몸 속 세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교재 속의 세포는 2차원 평면 그림 속에 조용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초 단위로, 어떤 때는 백분의 1초 단위로 돌아가는 역동적인 장소인 것처럼.

지금도 현장에서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많은 연구자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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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을 볼 때 당신은 누굴 보나요 - 수필가 배혜경이 영화와 함께한 금쪽같은 시간
배혜경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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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이면서 평소 영화에도 관심이 많은 저자가 이 책을 내면서 영화를 소재로 한 수필집으로 할 것인지 영화 비평서로 할 것인지 미리 정하고 쓰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정작 그런 물음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독자인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48편의 영화가 번호를 달고 나란히 목차 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세어보니 그중 내가 본 영화는 겨우 9편. 내가 안본 영화가 더 많다. 잠시 망설임. 하지만 프롤로그 중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고 그냥 읽어나가기로 결정했다.


영화는 각자의 영화다. (12)


영화는 다 말하지 않는다. (13)


내가 본 영화인지 아닌지 연연할 필요 없겠다. 영화 각본을 쓴 사람이나 영화로 만든 사람과 별개로 영화는 이제 그 영화를 본 그 사람의 것이다.


영화에 대해 말하려 하지만 영화 결말까지 다 드러낼 수 없는 제약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매우 안정감 있게 요약하는 기술은 이번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특징이었다. 영화의 중심 메시지를 짧은 몇 줄로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도 이런 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인데 이점 역시 이 책에서 돋보이던 점. 

예를 들어 영화 '밀양'의 경우엔 '감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묵시적 사랑' 이라는 문구로 요약되었고, 영화 '4인용 식탁'을 통해서는 '좋은 공포영화는 우리 무의식의 심연을 들쑤셔 놓는다. 침전한 욕망과 죄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정화하는 힘이 있다. ' 고 했다. 

수록된 영화들의 리스트만 봐서는 저자의 영화 취향을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그 다양성이 보이기도 한다. 영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관심때문이리라. 

'화씨 451 (1966)'이나 '열정의 랩소디 (1956) 처럼 오래 된 영화도 있고, '토베 얀손 (2020)', '노매드랜드 (2020)' 처럼 비교적 최근 영화도 있으며,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알려진 영화도 있지만 흥행에 실패한 영화, 독립 영화들도 포함시켰다. 고흐를 주제로 한 영화로서 각기 다른 배우가 주연한 여섯 편의 영화를 모아놓기도 했다. 고흐에 관한 영화가 이렇게 많았구나 새삼 알게 되었다. 저자의 경험과 추억이 스며들어가 더 특별했을 영화도 있었고 (타인의 삶, 도쿄 타워), 지금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누구나 강렬한 느낌을 받았을 영화 '컨테이젼'이 지금으로부터 무려 10년전에 나온 영화라는 것은 얼마전에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놀란 점이다. 


전체적으로 수필이라고 보기엔 영화 작품 자체에 더 집중되어 있고, 비평이라고 하기엔 그 정도로 무겁고 심각하진 않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는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책과 영화 사이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영화는 진실과 연출의 완벽한 뒤섞임'이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 그리고 앞에서 이미 인용한 '영화는 다 말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힌트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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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7 0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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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8 15: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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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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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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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15: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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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시스터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9
김혜정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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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인가? 했던 표지 그림이다. 

두 소녀가 등을 맞대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배경 왼쪽과 오른쪽에 외국의 건축물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제목이 디어 시스터. 웬만큼은 내용 짐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표지이다. 

이나와 주나 두 자매가 여름 방학 동안 한 사람은 엄마를 따라 태국 치앙마이에, 또 한 사람은 아빠를 따라 독일 베를린에 가서 단기 체류를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원래 이나와 주나 둘 모두 엄마를 따라 태국 치앙마이에 갈 예정이었으나 둘 사이가 한참 안좋을 시기에 서로 떨어져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남자 형제들은 크면서 위계질서가 어느 정도 만들어져 가서 오히려 덜 싸우는지 모르겠으나, 비슷한 나이의 자매라면 정말 자라면서 치열하게 싸운다. 이나와 주나도 그랬다. 결국은 한 집에 못살겠다 지경까지 이르렀을때 마침 그럴 수 있게 된 상황, 즉 엄마 아빠를 따라 다른 도시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이는 가끔 안부를 전하게 되고, 그러다가 한 집에 살땐 못하던 속마음 얘기까지 하게 된다. 그중엔 오해에서 비롯된 일도 있었음을 알게 되고, 이나는 주나에게, 주나는 이나에게 한 집에 살땐 모르던 핏줄이기에 느껴지는 아련함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기회를 경험하게 된다. 

김혜정 작가 하면 청소년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큼 익숙한 이름이 될 만큼 알려진 작품이 많은 작가이다. 작가 자신이 역동적인 십대를 보냈고 기억력까지 좋은 덕에 쓸수 있던 소설이었다고 하는데,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시작은 그렇더라도 그것이 전부이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이야기가 너무 심심하게, 예측 가능하게 흐르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자잘한 사건들은 있으나 그중 어느 것도 이 소설을 특징지워줄만한 사건은 없이 끝까지 간다. 

이렇게 자매가 등장할 경우 둘의 성격은 자매이면서도 아주 다를 것이라는 것도 독자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주나는 이나와 달리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길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가서 뭐 하지, 엄마, 아빠한테 말하면 가지 말라고 할 게 분명한데, 집을 잘 찾아올 수 있을까. 이나가 1단계, 2단계를 넘어 3,4 단계까지 생각한다면 주나의 생각 구조는 1단계 가고 싶다, 2단계 그럼 간다로 간단하다. (136쪽)

이렇게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여진다. 

언니와 동생의 역할, 남자 친구로 인한 교우 관계에서 오는 갈등, 건강 문제로 인한 의기소침 등, 표지 설명처럼 두 자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라고 하기엔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 재미가 좀 약하지 않나 싶다. 

한편의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재미있는 소설을 쓴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인것 같다. 그게 아무리 작가의 일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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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 어쩌다 보니 황혼, 마음은 놔두고 나이만 들었습니다
이나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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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나도 영낙없이 갖고 있던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 이 저자의 수필집 <여자의 허물벗기 (1992, 문학사상사)>를 읽고나서였다.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 문학에 대한 통찰, 자기가 대하는 사람을 환자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의 고민과 불안을 치료하는 입장이지 자기 자신은 고민과 불안으로 시간과 정신 낭비하지 않는다는 특권의식을 내세우지 않았다. 치료하는 직업가보다는, 사람에 대해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은 저자의 행보가 괜히 존경스러워, 이후로 그녀가 내온 책들은 거의 다 읽어오고 있다.

최근에 나온 에세이집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저자의 경향을 워낙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제목이 어떻든 신경쓰지 않았다. 이도 저도 아닌 듯한 표지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구입하여 바로 읽기 시작했을 뿐이다.

1961년생. 염색하지 않은 백발 그대로, 단정한 단발로 사람들 앞에 서는 저자가 어느 새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되었다고 했다. 노년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책 전체에 흐르는 주제라고 할까. 심각한 이론을 바탕으로 쓰지도 않았고 그저 평소 생각을 정리한 기록에 가까워 공감하면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제발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참으로 아리송하고 쓸모없는 주문 같은 것은 하지 말았으면. 예수님도, 부처님도, 그분들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만 하고 살지는 앖았다. 하물며 우리 같은 어리석은 미물이 무슨 수로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산단 말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라는 부추김은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라.', '혁명으로 계급을 전복시켜라.'하는 말처럼 때론 아주 위험하다. (30)

젊은 세대에게 조언을 하는 것을 매우 삼가하면서 그래도 해야한다면 사회의 트렌드가 어떻든 책임감있고 자기 경험과 소신을 바탕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만 그분들의 유전자를 내가 받았으니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는 것이고 부모의 가르침이 내 머릿속에 있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실천한다면 여전히 부모의 영혼이 내 안에 살아 있다는 것. 그러니 부모의 죽음, 먼저 가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그들과 나눈 시간과 경험과 지혜를 잘 간직해 가능한 많이 꺼내 많이 써먹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사랑하는 사람의 유전자 혹은 기억이 내 몸과 마음 속에 있는 한, 죽음으로써 그들이 내 곁을 떠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74)

먼저 간 이의 죽음을 슬픔 외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자 나의 죽음을 두려움 외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대부분의 자살은 자신이 지고 갈 짐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모두 옮겨지게 하고 생명을 가진 주체의 책임에서 우물쭈물 도피해보려는 시도가 불운하게 성공한 결과일 뿐이다. (100)

정신과 의사이니 아무래도 다른 진료과보다 많이 접했을 자살에 대한 저자의 정의랄까. 

불운한 성공을 흉내내지 말것.


노년이 되면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가 '쓸모없음'이라 고백하면서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끝까지 지키고 싶은 "쓸모"란 무엇일까 얘기한다.

밥을 하는 행위는 계획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상당히 섬세하고 때론 복잡할 수 있다. 무언가를 다듬고, 썰고, 씻고, 무치는 행위들을 집중해서 하며 마치 참선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우는 데 도움이 된다. 또, 누군가 내가 해주는 음식을 깨끗이 먹고 감사해 한다면 성취감을 느끼고, 그 대상과 끈끈한 유대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누구든, 밥상 차려주는 사람에게는 빚을 지는 것이니까.

지금도 365일 부엌에는 빠짐없이 들어간다. 아파도 들어간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말 죽기 직전까지, 음식을 스스로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만 살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음식 차리기란 대소변 내보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후의 창조적 행위이며 사실은 참 숭고한 일이 아닌가 싶다. (166)

내 손으로 음식 만드는 자들이여. 자부심을 가지라. 나 역시 오랫동안 밥상을 차려오면서 투덜대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까지 의의를 달아본 적이 없었는데. 


'어른답게 말하기'란 소제목의 글은 더 주목해서 읽게 되었다. 다른 이에게는 쉽게 던지면서 자신은 듣기 싫어하는 '라떼'와 '꼰대' 라는 말이 유행어인 세상 아닌가. 노년이 되면 입을 여는 대신 귀를 열고 지갑을 열라고 했다지만 그렇다고 그저 입 다물고 듣기만 하다가는 우스운 노인, 비웃음 혹은 배제의 대상, 호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말의 양이 아니라 '질', 즉 언제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하느냐가 진짜 관건이라고 했다.

일단, 지금까지 잘 살아온 '나'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좀 참자. 내 경험을 나누어주면 좋을 것 같지만,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는 내 입만 아프다. 젊은이들과 좋은 관계를 맺겠다는 지나친 의욕은 버릴 것. 늙은이들에게 중요한 이야기가 젊은이들에게도 중요하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묻기 전에 자기 이야기를 먼저 풀어내는 것은 되도록 자제할 것. 이야기가 그리 하고 싶으면 돈 주고 정신과 의사를 찾는게 낫다. 만약 자신의 이야기를 상대방이 싫어한다면 정말 필요한 불행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고 그들과 함께 식사라도 한끼 하는것이 훨씬 낫다. 

첫째, 배우고 싶은 후배나 제자에게만 전수해줄 것

둘째, 때를 잘 살필 것

셋째, 나는 그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하고 그 시간에 자기 계발을 더 할 것. (217, 219)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계발하는데 더 힘쓰라는 세번째 사항이 특히 마음에 든다.


몇 페이지 넘기면 나오는 다음 대목도 함께 세트. 

노인이 되어 갈수록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통제대마왕이 되려고 한다면서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들이 잊고 있는 것,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들을 뛰어넘는 젊은이들의 능력과 잠재적인 에너지다. 그들이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보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삶의 과정 중에 겪을 수 있는 시행착오와 실수들이다. 누가 도대체 실패를 하지 않고 기술을 연마할 수 있고, 좌절을 겪지 않고 지혜로울 수 있는가? 자신보다 젊은이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은 그런 기본적인 삶의 원칙은 거부하고, 상대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집사, 노예 혹은 로봇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마음속 깊이에는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 쓸모 없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다. 불안은 때로 파괴적인 에너지로 작용한다. (232)


지금까지의 저자 자신의 생을 돌아보며, 

세상의 귀한 분들처럼 일생을 다 바쳐서 진리를 찾아 헤매지는 못했지만, 다만 매일 밥을 핶고 책을 읽었고 몸이 허락하는 한 일했으면 된 거 아닐까. 

이 마지막 페이지의 문구대로라면 나도? 

이렇게 위안삼으며, 노년을 통과하는 비결중 하나는 역시 과한 욕심 내려놓기임을 되새겨 본다. 

나보다는 연배인 저자. 다행이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아 조금 뒤에 따라가며 흉내라도 낼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다행이고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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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02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저자가 벌써 할머니가 되었군요.
근데 전 이제 더 이상 새치라고 우길 수도 없는 이 흰머리가 용납이 잘 안 되더라구요.
물론 그렇다고 완벽하게 염색을 하는 것도 아니죠.
더 이상 버티기 곤란하다 싶을 때 염색을 하는데
그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ㅠ
과감하게 흰머리 내놓고 다니는 사람 보면 부럽기도 해요.
저도 나이 더 들면 그런 용기가 나올까요?
하긴 지구를 생각하면 염색은 안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전 나이들수록 책과, 드라마와 영화를 더 많이 보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ㅋ

hnine 2022-01-03 05:49   좋아요 2 | URL
저자 본인이 결혼을 늦지 않게 해서 자식들도 일찍 둔 편이라고 하더니 아들도 결혼을 늦지 않게 한 모양이죠 ^^
손주 봐주는게 너무 좋다고 여러 군데서 언급을 했어요.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유전 영향인지 아직 염색 안하고 있는데 제 친구들은 대부분 염색하더군요.
책, 드라마, 영화. 우리에게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코로나 덕분에 그걸 더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프레이야 2022-01-06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인 님 최후까지 살아남을 쓸모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게 되네요. 대소변 내보니는 정말 최초이자 최후까지 살아남을 창조적 쓸모이자 생존의 필요충분 요건인 거 같아요. 대소변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목숨을 보며 또 그걸 거두어 주는 노목숨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부엌에 들어가 음식 만들고 밥상 차리는 일도 못지 않은 쓸모네요. 기본은 하고 사는 듯 ㅎㅎ 말수 줄이고 양질의 말을 하고 사는지도 점검해야겠어요. 여기서도 TPO가 중요하군요. 어렵네요. 오늘 날씨가 제법 따뜻하고 좋아요.^^

hnine 2022-01-06 23:29   좋아요 2 | URL
살아있다는 것의 정의부터 생각해보게 되어요. 생물학적으로 호흡이 가능하고 뇌가 기능을 할수 있을때까지를 말할지 (기계를 써서라도), 아니면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할때까지를 말할지.
저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아무도 청하지 않은 옛날 얘기, 간섭, 지시, 충고의 말 하기 전에 이런 것들부터 생각해보고 점검해보는게 훨씬 유익한 일 같아요.
잘 늙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기때문에 노력하면 멋있는 일이기도 하겠다, 이렇게 생각의 방향을 잡으려고 한답니다.
오늘 낮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밖에서 식사를 했는데, 햇빛이 따뜻해서 참 좋았어요.

프레이야 2022-01-06 23:35   좋아요 1 | URL
나인 님 전 요즘 헷갈리는 게 있어요. 인간다운 삶을 스스로 영위할 수 있을 때 살아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수정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인간다운 삶이 아닌 거 같은 삶도 살아 있는 것이더라구요. 오히려 그 애착이랄까 집착이 덜하지도 않고요 에구

hnine 2022-01-07 00:27   좋아요 2 | URL
아마 살아있는 동안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할 문제 중 하나가 아닐까해요. 살아있는다는 것에 대해서요. 그리고 그 답도 바뀌어갈 수 있겠지요. 이게 또한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
이런 문제는 그냥 머리속으로 생각만 할때보다 가족, 친지등 주위에서 어떤 구체적인 경우을 겪거나 보게 되면 더 답이 보일때가 많더라고요.

서니데이 2022-02-10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hnine 2022-02-11 06:4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