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크테에서의 만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9
귄터 그라스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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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내일 있었던 바의 반복이 될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귄터 그라스의 이 소설을 펼치기 까지 사실 한참 망설였다. 많은 사람들이 귄터 그라스 하면 '양철북'부터 떠올리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한데, 대학생일때 '양철북'을 극장에서 영화로 보면서 받은 충격이 수십년 지난 아직까지도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 귄터 그라스의 작품이라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의 이 첫문장은 또 뭔가. 어제는 내일 있었던 바의 반복이 될 것이라니.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애매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한다는 말인가. 불길한 예감? 그나마 책이 그리 두껍지 않다는 것 때문에 결국 읽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별 다섯개로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분량은 많지 않다해도 책장이 그리 술술 넘어가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아마 읽으면서 작가의 의중이 전혀 헤아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던가보다.

추정되는 시기는 1947년 (혹은 그보다 300년 전인 1647년에 있었던 일의 재현), 독일 각지로부터 약간의 시간차가 있기는 하지만 각자 활동을 하고 있는 시인들이 독일의 텔크테라는 조그만 마을에 모여든다. 원래 모이기로 한 장소는 텔크테가 아니었으나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아 임시 방편으로 변경한 곳이 텔크테인데 이곳의 숙소도 속물스런 여주인이 운영하는 보잘것 없는 작은 여관 정도이긴 마찬가지이다. 

시인들은 그들이 쓰는 시의 성격과 종류의 다양성 만큼이나 이 모임을 '페그니츠 강안의 목자들', '결실의 모임', '정직한 호박 넝쿨 초만의 모임', '정직한 전나무의 모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며, 전쟁의 여파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독일 문학을 일으켜세워야 하고 그것을 위해 시인들이 결집하였고 의견과 입장을 정리하여 국가를 향해 한목소리를 내어 평화호소문 혹은 취지문을 작성하여 발표한다는 것을 모임의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모인 시인들은 우선 자기의 시를 한두편씩 돌아가며 발표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발표하고 평을 하면서 현 국가 상황에 대해 그들이 시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찾아 호소문을 작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마디로 통일된 목소리로서 정리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거기에서 낭독된 것은 다만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당사자들에게 보내는 이 회의 참가 시인들의 소박한 청원으로서 그것은 비록 권력은 없지만 불후성이 약속되어 있는 시인들의 걱정을 모든 당사자들이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의에 모인 시인들의 애국자로서의 걱정이 언급되었는데, 독일 제국이 너무나도 난도질을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 독일 제국에서 한때 독일이라고 불리던 자신의 조극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될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244)


여기에 참가 시인들의 서명을 끝으로 이 모임의 목적이 달성된 듯이 보였다. 며칠 동안 오고간 설전, 허세, 속물스럼, 격화된 논쟁 등은 잠시 잊고 작은 성취감에 서로 포옹을 하며 뭔가 해냈다는 확신을 하며 처음으로 평화로운 식사를 하고 헤어지려는 마당에 반전 처럼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이 호소문은 발표되지 못하고 만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가로서의 터치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1927년 독일인 부모 밑에서 지금의 폴란드에서 태어난 귄터 그라스는 히틀러 치하의 경험을 몸으로 겪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4세때 히틀러 소년단원이 되었고 전쟁터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며 전쟁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막일꾼 노릇을 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10대 때 일어난 일. 20대가 되면서 틈틈이 시를 써서 발표한 것이 한스 베르너 리히터의 주목을 받아 문단에 초대 되었다. 

대중적으로 그를 널리 알린 <양철북>은 1959년 파리 헛간방에서 집필한 그의 장편 처녀작이다. 이 작품은 뛰어난 문학성이라기 보다는 이색적인 문체와 내용때문에 더 유명해졌다고 볼수도 있다.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당시 독일과 독일인을 묘사하고 있는 담대함, 솔직함, 기괴한 언어 유희, 비판 정신으로 당시 사회의 호평보다는 혹평을 먼저 받은 것이 무리가 아니었지만 극찬을 받기도 하여 이후 그의 문학을 계속 이끌어가는 힘이 되어 새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게 하였다. 

<텔크테에서의 만남>에는 화자로 '나'가 등장하는데 마지막으로 호소문이 발표되지 못하게 된 사건을 주도한 사람도 이 '나'라는 참가자들중 한 사람으로 짐작되지만 그게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귄터 그라스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짐작을 해볼뿐 누가 왜 그런 일을 일으켰는지는 모른채 마지막 장을 덮게 한다.

시인들이 단 며칠 동안 모임을 가졌고, 작품을 발표하였고, 모였으니 호소문 하나 작성하였고, 그것을 소재로 소설 하나를 만들어내다니, 소설가에게 소설의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섣부른 선입관이었다.

불안한 정치 상황, 사회 분위기, 전쟁 전후 사람들이 정신 세계의 변화를 겪어가며 정체성을 잃어가는 가운데  시인들이 과연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현미경 역할을 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모여 '자기들끼리' 작품 발표를 하고 평화호소문을 작성한 것은 국가를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자기 존재 증명을 하고 싶었음일까. 그마저 실현시키지 못하고 무산되었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할 거리를 남겼고, 작가는 이미 이런 생각을 거쳐 간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소설가는 아무 소재나 소설로 쓰는게 아니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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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2-22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귄터 그라스의 이 장편은 처음 봅니다.
좋은 책 소개 고마워서 냉큼 담아갑니다*^^*

hnine 2022-02-22 20:15   좋아요 2 | URL
제가 양철북 영화를 보고나서 한동안 그 좋아하던 커피를 못 마실 정도였거든요. 영화 장면 중에 오스카의 난쟁이 여자 친구였던가요, 전쟁 중이었는데 커피 마시고 싶은 걸 못참고 마시러가다가 군인들 총에 맞아 그자리에서 죽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나서요.
이번엔 무슨 맘이 들어 한동안 피하던 이 작가의 책을 읽게 되었는지. 그런데 이 소설은 (별로 안 두꺼워요 ^^) 작가의 의중이 양철북에서보다는 잘 와닿았던 모양이어요. 프레이야님께는 특별히 더 추천드리겠습니다 ^^

mini74 2022-03-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랴요 *^^*

hnine 2022-03-08 23:41   좋아요 1 | URL
정말 오랜만에 읽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이 이런 선물을 안겨다주었네요.
특이하고, 생각보다 흥미로웠던 작품이었어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03-0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nine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hnine 2022-03-08 23:43   좋아요 1 | URL
간략한 리뷰였는데 이렇게 이달의 리뷰로까지 뽑아주시다니.
그리고 이렇게 축하까지 해주시니, 앞으로 더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03-08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22-03-08 23:44   좋아요 1 | URL
아이쿠, 요즘 책을 별로 못읽어 기대도 안했는데, 감사드릴뿐이랍니다.

서니데이 2022-03-08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hnine 2022-03-08 23:4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당선될때마다 잊지 않고 와서 축하해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