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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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트르 발저의 산문집 <산책자>를 읽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어떻게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산책자>는 나에게 큰 공감대를 남겨 놓은 바 있다. <산책자>와 같은 해 (2017년)에 로베르트 발저의 다른 산문집이 출판되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바로 이책 <세상의 끝>인데,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역자에 의해 나왔지만 읽어보니 이 책에 실린 몇편의 글은 좀 더 먼저 출판된 <산책자>에도 실렸던 글임을 알수 있었다.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 태생이다. 8형제 중의 일곱째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계속 다니지 못하고 14살 나이에 취직을 하여야 했다. 이 책에 보면 실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건 아마 작가 본인이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데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14살에 시작하여 51세 요양병원에 입원하기까지 그가 거쳐간 직업을 보면 은행, 극단활동, 출판사, 보험회사 경리사원, 공장 사무직원, 종업원 교습소, 미술상 비서, 군복무, 보조사서 등 정말 다양한데,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주 옮겨 다닌 이들 중 어느 것도 일정한 직업이 아니었고 거처 역시 일정하지 않은 상태로 전전하며 살아왔다. 

51세때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아 요양병원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 병력은 로베르트 발저 가족에게 있어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로베르트가 열여섯살 때 죽은 그의 엄마 엘리자 발저는 생전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었고 화가였던 형 칼 발저는 자살로 삶을 마감, 넷째 형 에른스트 발저도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 둘째 형 헤르만 발저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51세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78세에 사망하기까지 그의 요양병원 생활 대부분은 직업 대신 산책하는 시간으로 채워졌고 친구보다 자연과 교감했으며 산책하는 동안 혼자 느끼고 생각하고 꿈꾸는 것은 대화 대신 글로 남겨졌다. 글 쓰기는 그렇게 일종의 생계 수단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자연으로 가라. 그러면 자연은 그대를 반겨줄 것이니. 자연은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모든 이를 사랑하고, 그대 또한 자연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서는 잃을 것이 없으며, 자연은 누구도 해친 적도 없다. 

자연의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가 곧 즐거움이며, 맑은 공기는 청량음료처럼 마실 수 있다. 자연은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대가 이 세상을 아름다운 집처럼 받아들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대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 (30쪽,「자연」중에서)


저는 별을 좋아하고, 달은 저의 은밀한 친구입니다. 제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저는 사는 동안에는 하늘을 우러러보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입지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저와 농담을 하고, 저는 흘러가는 시간과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 소중한 즐거움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낮과 밤은 제 동반자입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친숙한 발에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83쪽, 「어느 시인이 어느 신사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특별히 튀는 표현이나 문장이 없어도 어느새 마음에 적셔들어오는 문장들. 로베르트 발저 글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부분 짧은 글들이고 그 속에서 화자는 시인이기도 하고, 사무원이기도 하고, 젊은 여인이기도 하고, 가난한 청년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인물들 속에는 로베르트 발저 자신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래 인용부분을 보면 그가 자연과 교감했다고 해서 사람 사귀기에 아예 벽을 쌓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자기와 어딘지 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는데 영민했으며 친해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같은 결말이다. 


밖에 나오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 곁을 떠나왔다. 우스운 기분도 들었고, 익살맞은 느낌도 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소담스럽게 함박눈이 내리는 허공으로 저녁종이 울려 퍼졌다. 도시는 한 편의 동화 같았다. 눈은 바람에 날려 회오리를 그리며 너무나 달콤하고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눈송이 하나가 마치 키스라도 하듯 내 입으로 떨어졌다. 내 모자와 외투는 주위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처럼 이내 하얀 눈으로 덮였다.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등불이 빛났다. 이제 이 세상에는 오로지 아름다운 보금자리와 사랑스러운 사람들, 온갖 유쾌한 기분과 다정한 말들, 이루 형연할 수 없는 편안함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141쪽, 크리스마스이야기」중에서)


친해보려고 무작정 찾아갔던 사람의 집에서 나오며,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가벼운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위 상황과 배경 묘사를 통해 마치 잃어버린 무엇을 다시 찾기라도 한듯 개운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혼자가 되었을때 다시 찾는 안식. 외로움을 댓가로 하는 편안함인 것이다. 


<산책자>의 번역은 소설가 배수아가, <세상의 끝>은 서울대 임홍배 교수가 하였다. 두 권의 책에 중복되어 들어가 있는 글들이 있다보니 자연히 두권의 번역을 비교해보게 되었는데, 한 단편의 제목이 <세상의 끝>에서는 「주인과 피고용인」으로, <산책자>에서는 「주인과 고용인」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피고용인과 고용인은 완전히 반대의 뜻이지만 번역자가 잘못 번역하였다기 보다는 우리말스럽게 옮기려고 하다보니 번역자도 알면서 그렇게 번역한게 아닌가 짐작해본다.

혼자 산책하는 일은, 단지 시간 보내기 위한 수동적 활동만은 아니요, 어떤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나를 찾아가는 방식이고 여정이며 허물어지지 않고 매일 새로 태어나려는 의지이고 노력임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그런데 저 마지막 인용문의 첫 문장 말이다.

밖에 나오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 곁을 떠나왔다. 우스운 기분도 들었고, 익살맞은 느낌도 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소담스럽게 함박눈이 내리는 허공으로 저녁종이 울려 퍼졌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안좋다. 너무 쓸쓸하게 읽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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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30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삶이나 가족력이 마음 아프네요. 그럼에도 산책을 통해 자신과의 타인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걸 보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hnine 2021-02-11 04:44   좋아요 1 | URL
그렇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그런데, 로베르트를 엄마처럼 돌봐주던 누이도 로베르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가깝게 지내던 친형도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고, 본인도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나니 요양원 밖에 갈 곳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의 삶과 생각이 그대로 남아있는 글이 이렇게 세상에 남아서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진 않은거죠.

scott 2021-02-10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로베르토 발저
매일 걸었던 글쟁이 크리스마스날 산책 나갔다가 길에서 숨을 거둔 이 고독한 글쟁이,,,로베르토 발저
이달의 당선 추카~추카~
설연휴 가족들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에이치 나인님 서재방에 들어 올때마다
프로필속 멍뭉군에게
뭐라도 주고 싶으 ㅋㅋ

/}__/}
( • ▼•)
🍖

hnine 2021-02-11 05:30   좋아요 1 | URL
제가 멍문군 (이름이 ˝볼더˝입니다~) 에게 말해주었어요. 너 귀여워하시는 분 한분 늘었다고요.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이 참 가슴아프죠. 고독한 글쟁이였으면서 끝까지 자기와 소통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날까 싶은 한가닥 기대가 그의 글 속에 나타나있어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cott님도 당선 축하드려요~
이번 설은 저희 집에서 저희 식구 세명만 차례 지내고 산소 방문은 설 연휴 기간 이후로 미루기로 했어요. 음식 준비만 해도 되고 교통지옥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어 그것은 한편 좋네요.
scott님도 평안하고 행복하세요.
(아래 강아지 그림 너무 귀여워요. 따라 그려봐야겠어요.)
 
나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5
앙드레 브르통 지음, 오생근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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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집에 싸르트르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세권이나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들춰보는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실주의에 대해 조금 더, 아주 조금 더 이해를 하게 되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쩌다 이 책을 고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는 사실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선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초현실. 현실과 현실 너머의 세계가 만나는 곳이다.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이며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 곳, 현실에서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려는 실험의 세계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이 책의 첫 페이지 첫 문장도 다른 작가나 철학자들의 물음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는 위의 질문에 바로 이어 말한다. 이런 질문은 왜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귀착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고. 

내 존재를 객관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들, 어느 정도 확고하게 나를 나타내 주는 것들로 생각되는 내 모습은, 삶의 어느 순간 전혀 알 수 없는 활동을 함으로써 무효화되면서 그 진정한 영역을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나라고 믿는 것들이 있다면, 그래서 가끔 이건 나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면 (우리 보통 그렇지 않은가?) 작가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나 자신에게 나의 모습을 미리 상정하기 때문이고 시간과 타협할 이유가 전혀 없는 내 사유의 완성된 형태를 선행성의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설정하기 때문이며... (12쪽)

그건 우리가 그렇게 설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미리 말하자면 무의식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작가의 노력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여러 가지 취향,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친근성, 내가 빠져 드는 매력, 나에게 발생하는 사건들, 오직 나에게만 발생하는 사건들을 넘어서, 또 내가 실천한 수많은 행동, 나만이 체험하게 된 감정들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의 차별성이 무엇이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하겠다. 

내가 이 차별성을 인식하는 정도가 얼마나 분명하냐에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무엇을 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세계의 운명에 대해 나만이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의 문제가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12, 13쪽)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나'라는 화자가 되어 자기의 실제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소위 자동기술이라는 방식으로서, 머리를 써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자기의 느낌과 떠오른 것들, 경험한 것을 오직 자기의 감정에 충실하여 기술하는 방식이다. 이 작품이 있게 한 그의 경험이라는 것은 1926년 10월 4일 파리의 어느 거리에서 '나자 (Nadja)'라는 이름의 여자를 우연히 만나 10월 13일 마지막 만나기까지의 경험이다. 이처럼 날짜, 만난 장소, 방문한 장소까지 글, 사진, 그림까지 동원하여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가 나자를 처음 만나던 날의 상황과 느낌을 적은 부분을 발췌하여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10월 4일, 그야말로 할 일이 없고 매우 침울한 오후가 계속되던 날들 가운데 어느 저녁 시간에, 나는 마치 그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만의 비결이라도 있는 것처럼 라파예트 가를 서성대고 있었다. (...)

나는 옷차림이 매우 초라한 한 젊은 여자가 내 쪽으로 한 열 걸음쯤 떨어진 지점에서 오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녀 또한 나를 보고 있거나 이미 본듯 했다. (...) 

나는 주저하지 않고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그녀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것은 너무나 신비스럽고 마치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저 눈 속에 스쳐가는 범상치 않은 빛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 눈 속에는 어두운 고통의 빛과 밝은 자부심의 빛이 동시에 비칠 수 있을까? (65-67쪽)

나도 궁금해졌다. 어두운 고통의 빛과 밝은 자부심의 빛이 동시에 비치는 눈빛이란 어떤 모습일지. 고통과 자부심, 어두움과 밝음이 동시에 말이다.

10월 5일, 6일, 7일, 이들은 계속 만나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듣고 상대방을 알아가고 상대방에게 나를 설명하고 책과 그림에 대해 말하고 그림을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 

그녀가 내게 무엇을 요구하건, 그 요구를 거절한다는 것은 몹쓸 짓이라고 할 만큼 그녀는 순수하고 지상의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생활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 (91쪽)

나자에 대해 작가가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 계속 서술하고 있지만 쉽게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음으로 넘어가는데 방해로 느껴지지 않은 것은, 꼭 공감해야한다는 법은 없으며 작가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위에 말한 작가 자신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본다면 작가는 이런 자기 감정이 일반적인 대중들에게 속속들이 공감되기를 바랐겠겠는가?

만남은 10월 13일까지 계속되었고, 10월 13일 나자는 과거의 어떤 자기 경험을 뜬금없이 꺼냈느데 그 순간 작가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그녀가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순간 나의 마음은 그녀에게서 영원히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을 그녀가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느끼게 된, 절대로 회복 불가능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 없다고 생각될 만큼 오랫동안 울었다. 나자를 더 이상 만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울었다. (117쪽)

그녀는 그에게 여러 개의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 선물했고, 이 날이 나자와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이 그림들은 책 속에 그대로 실려 있으며 그는 마치 나자를 다시 보듯이 그림 속 이미지를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이후 작가는 나자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지만 그것이 얼마나 속물적 바보들에 의한 결정인지 토로하며 괴로와한다. 

상식을 벗어나는 비정상적인 행위가 공공장소에서 자행되면, 그 순간부터 객관적으로 입증되고 불법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그 행위는 다른 그 어떤 행위보다도 몇 천 배 더 끔찍한 구금의 원인이 된다. 내가 보기에 모든 종류의 감금은 임의적인 것이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박탈해도 되는 이유가 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들은 사드를 가두었고 니체를 가두었고 보들레르를 가두었다. 밤에 불쑥 찾아와 당신이 저항할 수 없는 강제력을 동원하거나 별별 수단을 다 써서 구속복을 입히는 방법은, 경찰이 당신의 호주머니에 권총을 슬며시 집어넣고 위협하는 방법이나 다름없다. (144쪽)


그는 논리의 창살을 '가장 가증스러운 감옥'이라고 하면서 자유와 광기와 큰 기쁨을 누리지 못하도록 충동을 억누르는 장치에 대해서 쓰고 있다. 

논리 대신 그는 무엇에 의지하고 싶은 것인가?

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무의식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싶고, 무의식만을 믿고 싶고, 내 눈 속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빛의 한 점, 그 어둠의 덩어리에 부딪히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주는 빛의 한 점을 내 스스로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무의식의 드넓은 방파제를 한가로이 거닐고 싶다. (160쪽)

나자의 존재는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었다. 그를 이끌어주는 빛의 한 점. 그는 그 빛의 한 점을 뚫어지게 바라보듯이 나자를 바라보고 싶었구나. 그래서 나자의 입에서 뜬금없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왔을때 그의 마음에서 의도치 않던 변화와 실망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구. 


책의 맨앞 <뒤늦게 전하는 말>(후기를 대신하는 말)에서 작가는, 여러 해가 지난 후 책이라는 형식 안에서 글을 다시 다듬으려고 하는 작업은 이미 사소한 사건들을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유기적인 관계로 재구성하게 하고 객관적인 진술이 되게 하여, 순전히 감정에 의존하여 쓴 글과는 구별되게 한다면서, 인간의 삶 속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은 일련의 경쟁 관계에 놓였다가 결국 그 싸움에서 아주 쉽게 곤란한 상태에 빠져 버리는 쪽이 대체로 주관성이라고 했다. 

그래서 객관성을 폄하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변함없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류투성이일지라도 주관성 속에 글이 머물러 있는 것이지마는, 좀 더 정확한 표현에 이르게 하기 위해 객관성에 대해 사소한 배려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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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1-01-23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서재 대문 사진 바뀌었습니다.
먼저 사진의 그 반려견의 어렸을 때 모습인가요?
아님 새끼를 낳은 것인가요?
암튼 귀엽고 앙증 맞습니다.
우리집 다롱이는 다 늙어서 안쓰럽기도하고
사람 손을 더 타서 귀찮기도 하고 그러네요.
이런 맘 가지면 안 되는데...ㅠ
그래도 아직은 잘 먹긴합니다.

hnine 2021-01-24 09:16   좋아요 1 | URL
stella님, 저 녀석이 이래봐도 2012년생이랍니다. 이름은 ‘볼더‘이고요. 올해 나이 열살이니까 사람 나이로 치면 저와 함께 늙어가는 연령이랄까요 ^^ 사진은 바로 며칠 전에 찍은 거예요. 시츄가 원래 좀 어려보이는 종이긴 하지만 유난히 동안 페이스인가봐요. 그래도 나이는 못속여서 예전보다 행동이 느려지고 불러도 잘 안오고 그래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가 이해해야지...ㅋㅋ

scott 2021-01-25 19:28   좋아요 1 | URL
앗! 프로필속 볼더 혀를 낼름 ㅋㅋㅋ(맛있는 냠냠이 먹고 행복해하는것 같음)
열살 이 아닌 사진속에서는 세살로 보여여 ㅋㅋ
에이치 나인 님이 잘해주셔서 더욱 동안이 된것 같은 ㅋㅋㅋ
볼드 아픈데 없이 건강하게
(ᵔᴥᵔ)

hnine 2021-01-25 23:46   좋아요 1 | URL
남편이 찍은 사진인데 어떻게 찍었는지 현장 목격을 못해서 모르겠어요. 남편 말로는 이런 사진 쉽게 찍을 수 있는 거 아니라고 하더군요. 집에 식구가 적다보니 볼더가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답니다. 아들도 오랜만에 집에 오면 제일 먼저 볼더부터 찾아요.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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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유명한 <동물 농장>과 <1984년> 이전에 <카탈로니아 찬가> 가 있었다.

시간순서로도 그렇지만, 작가의 스페인내전 참전기록 <카탈로니아 찬가> 없이 <동물농장>과 <1984년> 같은 소설이 나왔을까 싶어서이다. 

카탈로니아는 스페인 북동부지방 이름으로서 항구도시 바르셀로나가 위치해있는 곳이다.

전체주의, 파시즘을 혐오하던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 (1935-1939) 취재를 위해 종군기자로 갔다가 카탈로니아에서 직접 의용군에 지원해버린다. 이 책의 첫문장은 그 입대 전날 기록에서 시작한다.

의용군에 입대하기 전날이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레닌 병영에서 장교 탁자 앞에 서 있는 한 이탈리아인 의용병과 마주쳤다. (9쪽)

여기서 ''는 조지 오웰 작가 자신이다. 자기처럼 의용군에 지원한 한 이탈리아 출신 의용군을 보며 호감을 느끼면서 그의 행색과 표정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읽고 있다.

이 이탈리아인 의용병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남루한 군복과 사나우면서도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은 당시의 특별한 분위기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는 그 전쟁과 관련한 내 모든 기억과 얽혀 있다. 바르셀로나의 적기, 초라해 보이느 병사들을 가득 태우고 전선으로 기어가던 가늘고 긴 기차, 전선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전쟁에 찌든 잿빛 소도시, 질퍽질퍽하면서도 얼음속처럼 추운 산속 참호.

1936년 12월 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으로부터 불과 일곱 달 전이다. (11쪽)


파시스트에 맞서는 공화파 통일노동당 소속으로 1936년 12월에 의용군에 지원하여 1937년 1월부터 5월까지 스페인 아라곤 전선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전 기록이니, 소설이라기 보다 다큐멘터리에 더 가깝다고 보여진다.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자기 의견이나 생각이 많이 들어가있기는 하지만 허구의 인물이나 사건이 아닌 실제 사건, 실제 인물, 실제 상황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떤 이념과 기대를 가지고 내 조국도 아닌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현장에서 그 이념과 기대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었는지, 몸으로 겪어 얻은 결론은 무엇인지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의용군에 입대는 하였으나 기대하던 전투에 투입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고 무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태로 전선에서 대기 상태로 몇 주를 보내며 그는 점차 이 내전의 실상과 목적을 파악해가는데, 전쟁은 그가 목적으로 하던 혁명, 즉 노동자를 위한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었으며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된다. 작가에게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혁명이 더 중요했고 그 혁명을 이루기 위해 거칠 수 밖에 없는 전쟁이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혁명보다는 전쟁의 승리가 더 중요한 공산주의, 리더 없이 나가야하는 무정부주의의 한계 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이 책 5장에 보면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나타나있다. 


6, 7장엔 파시스트들과의 참호전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와중에도 작가 특유의 유머코드는 군데군데 살아있다.

그 포탄들은 너무나 천천히 날아 달리기를 해도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마치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며 휘파람을 부는 소리 같았다. (114쪽)


8장, 즉 이 책의 중반부 쯤 오면 작가가 파악해가고 있는 공산주의 실상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스페인내전에 처음 투입되었을때 작가가 본 스페인의 모습, 즉 사회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것 같은 스페인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예컨대 속물 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 그곳에는 농민과 우리만 있었다.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의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한 국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 만큼은 지속되었다. (...)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 그 결과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내 용망은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되었다. (140, 141쪽)

그가 애초에 지향하던 사회주의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드러내주는 부분이라서 인용해봤다. '이론적으로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으로 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하였음을.

작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아주 다른 길로 구별되어 갔으며 스페인은 점차 프랑코의 독재 영향권으로 들어가 공산주의의 주도 아래 들어가는 것을 목격해갔다. 전쟁은 사회주의 국가 실현을 위한 혁명을 위한 길로서가 아니라, 공산주의 정권의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전쟁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을 알아가면서 작가는 큰 실망과 패배감을 느낀다.

그해 4월말, 보름의 휴가를 얻어 들른 바르셀로나는 노동 계급의 지배가 아닌 다시 부르조아적 분위기가 지배적인, 그가 의용군 입대차 머물렀던 1936년 12월과 이미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휴가차 바르셀로나에 머무르는 동안 그의 이런 생각을 굳히게 되는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르셀로나 시가전이다. 정부의 치안대 (공산주의자)가 전국노동자연맹 (무정부주의자) 거점인 전화교환국을 점거하여 노동자연맹을 쫓아낸 것을 계기로 치안대와 통일사회당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 전국노동자연맹과 무정부주의연합 (통일노동자당)이 맞섬으로써 이들 사이의 분열이 공고화 된 것이다. 조지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소속이었고, 애초에 통일사회당과 통일노동자당은 파시즘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노선을 걷고 있었으나 이제 통일사회당은 통일노동자당을 일컬어 '위장한 파시스트 조직'이라며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그에 이어진 바르셀로나 전투에 대한 누명을 씌우기 시작했다. 조지 오웰이 이 책을 쓰기로 시작한 동기 중의 하나가 자기가 본 것을 바탕으로 통일노동자당에 대한 이런 누명을 벗겨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수 있고 이 책의 11장에서 본격적으로 이것을 증명해보이는 기술을 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시가전은 통일노동자당의 단독공작을 통해 일어난 폭동이었다는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었고, 스페인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커져갔으며 통일노동자당과 전국노동자연맹의 간부들도 차츰 몸을 사리게 되고 전쟁에 대한 외국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등)의 지원과 조력이 끊어질까봐 눈치보는 분위기가 팽배해져갔다. 

더불어, 바르셀로나 전투에서 작가가 목격한 것은 통일사회당, 공산주의, 통일노동자당 사이의 분열이라는 것도 있지만 또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정작 민간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때를 돌이켜볼때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당시에 우연히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 갑자기 내 시야에 흘끗 들어온 민간인의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의미 없는 소동으로 비칠 뿐이었다. (191쪽)

독재와 전체주의에 맞서 민중들이 주인이 되는 평등 사회를 이루자는 이념아래 전투가 벌어지지만 정작 그 민중들에게 그런 전투는 의미없는 또하나의 노동으로 비춰질 뿐이라는 것. 

얼마전에 읽은 치누아 아체베의 <사바나의 개미언덕>의 한 대목도 그러했다.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한 대학에서 열린 연설회에 정작 노동자들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 시가전 후 다시 전선으로 돌아온 작가는 전쟁이 끝난 뒤 스페인의 운명을 예측하고 있었다. 즉, 스페인에는 공산주의자들 영향이 더욱 강력한 우익정부가 들어설 것이고, 그 정부는 결국 파시스트적 경향을 가질 수 밖에 없을거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투에 참가한 작가는 목에 총상을 입고 타라고나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받고서 탈출하듯이 서둘러 영국으로 돌아온다. 스페인내전의 결말, 자기 이념의 결말을 보고서 내린 결단인 셈이고 스페인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한지 여섯달 후의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 이 글을 쓰게 된다. 자기가 참전하여 목격한 사실을 토대로 스페인내전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과 통일노동자당의 누명을 벗기고자 하는 개인적인 노력의 일환, 이것이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의 탄생 배경이라면 배경이다. 문학적 목적으로 쓰였다고 보기엔 그 목적이 처음부터 뚜렷하다. 차라리 정치적 목적이라면 모를까.


그의 예견대로 스페인 내전은 군부 반란군 (프랑코 군부)이 승리를 거두었고, 스페인 공화국은 사라지고 프랑코의 파시즘 국가가 탄생하였다.


경험은 인식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록은 인식과 추론을 바탕으로 한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스페인내전의 경험은 이 책 한권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은 터닝포인트를 겪었고 세계를 보는 눈도 달라졌을 것이다. 동물농장과 1984가 이 책보다 나중에 쓰여졌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 책 제목이 카탈로니아에 대한 오마쥬 (Homage to Catalonia) 인 것도 너무나 잘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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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1-16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하여튼 저하고 맞지 않는 작가입니다. 꼭 집어서 한 명 더 고르라면,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
사실 이런 얘긴 하지 말아야 건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데, 글쎄 지금 취중이란 말입니다. 하하하...!

hnine 2021-01-17 04:31   좋아요 0 | URL
솔제니친 책은 저도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 한권 읽었는데 먼저 읽은 동생이 말하기를 이 책 한권이 딱 하루 얘기라고 하면서 읽어보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중학교때 얘기라 벌써 오래전 일이어요. 지금 읽어도 재밌게 읽진 않았을텐데 중학생때이니 어땠을까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으시는데 맞지 않는 작가도 있으시겠지요. 저도 그런 작가가 있나...생각해보니, 딱히 없는 것 같아요. 맞지 않는 작가 나올때까지 더 많이 읽어야겠어요 ㅋㅋ (이 무슨 엉뚱한 결론인지).
 
사바나의 개미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3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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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읽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 이어 두번째로 읽는 나이지리아 작가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이다.

캉안이라는 아프리카의 가상국이 배경이고 샘, 이켐, 크리스 세사람의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중고등학교때부터 친구였고 함께 영국 유학길에 오른다. 

공부를 마치고 세사람은 모두 고국을 위해 일하리라는 포부를 가지고 돌아오는데, 원래 의사 지망생이었으나 영국 사람들을 모방하기 좋아하고 남들의 기대에 맞추는 경향이 있던 샘은 학교 교장의 한마디에 군인이 되기로 방향을 바꾸었고 군인이 된 샘은 캉안으로 돌아와 쿠데타를 통해 스스로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크리스와 이켐은 각각 공보처장관과 신문사편집장이 되면서 세 사람 사이는 예전같지 않게 된다. 

구체적으로 일이 터진 것은 한동안 가뭄으로 시달리고 있는 아바존이라는 지역의 주민들이 자기 지역을 방문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대통령궁으로 직접 찾아오는 일에서 비롯된다. 대통령이 된 샘은 이 일에 대해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고 공보처장이자 친구인 크리스를 포함한 각료들을 소집하여 이 일이 더 커지거나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잠잠해지게 하고 싶은 자기 뜻을 알아주기 바라며 협조를 바라지만 크리스부터가 여기에 냉담하기만 하다. 결국 대통령 각하 즉 샘은 검찰총장을 불러 아마존 주민들의 의견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 하며 무마할 것을 명하고 크리스에게는 언론 보도를 주의시킬 것을 부탁한다. 크리스는 이런 사실을 신문사편집장인 이켐에게 알리고, 이에 동조할 수 없는 이켐은 그날 밤 <태양에게 바치는 찬가>라는 비유적인 글을 쓴다. 이 글은 새정부와 대통령의 정책과 행태를 비웃고 풍자, 경고하는 내용인데 이 책 제목 <사바나의 개미언덕>의 유래를 알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아침은 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모두 머리가 여럿 달린 아주 오래된 청동 동상이 되었고 그들의 얼굴은 단지 뭉툭해진 이목구비만 남아 마치 사바나에 새로 돋아난 풀에게 지난 해 덤불에서 발생한 불에 대해 이야기해 주려고 남아 있는 개미 언덕 같습니다. (55쪽)


창조주 전능자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중간역할자 메신저 외눈박이 신에게 올리는 말로써, 당신 (외눈박이 신) 보기에 인간이 아무리 잘못을 저지르고 뜻을 거역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 같을지라도 그것이 노여운 나머지 내팽기치며 무시해버리는 짓을 하지 말것이며 하물며 인간 세상을 다 불태워 버리는 우를 범하지는 말라고 탄식하며 부탁, 내지는 경고하는 내용이다. 이 책의 요점이 이켐이 쓴 이 <태양에 바치는 찬가>라는 글에 집약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여기서 사바나는 아프리카 신생국 캉안을, 개미 언덕은 사바나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온 민중들의 흔적과 역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샘, 크리스, 이켐 세사람 모두 캉안이라는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포부는 같았을지모르나 그들이 택한 방법과 길은 달랐다. 결국 대통령은 이켐에게 신문사 편집장 정직 명령을 내리고 대통령궁으로의 불법 데모 행진과 관련하여 아바존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한다. 이켐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크리스는 흥분하여 그의 행적를 수소문하며 찾아다니지만 행방은 묘연하고 믿고 싶지 않은 루머만 떠돌뿐이다.

치누아 아체베는 아프리카의 가상국 캉안을 배경으로 조국인 나이지리아는 물론 제3세계 신생국의 문제점을 파헤쳐보려고 했다. 서구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에서 해방은 했지만 신생국이 스스로 헤쳐나갈 길은 순탄하지 않다. 강력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독재자의 출현이 대신하고, 독재자의 불안은 언론 탄압, 민심 수용 실패, 대립과 반목, 부정부패로 이어지면서 국가 운영은 혼돈속 진흙탕 길을 걷는다. 이런 상황의 책임을 서구 제국주의에 전담시키는 대신 아프리카 자국민에게서도 찾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그의 이전 작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서와 같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그의 첫번째 소설이고 <사비나의 개미언덕>은 그의 다섯편의 소설중 마지막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세사람 주인공 모두 뜻하지 않은 결말을 맞게 되고 역시 개미언덕의 일부로 남는 것인가 절망스러울때, 이켐과 그의 여인 엘레와 사이에 태어난 아기의 명명식을 목적으로 크리스의 연인이었던 비어트리스를 비롯한 여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 하고 결의를 다지는 모습이 새롭다. 그렇게 맺은 작가의 의도를 다시 헤아려보게 하는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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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펭귄클래식 4
조지 오웰 지음, 최희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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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때문에 어린이책 카테고리에 들어가있기도 하다는 책.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듯 착각할 정도로 많이 인용되는 책.

추천 도서 목록에 단골로 들어가있는 책.


다른 책을 읽다가 잠시 참고만 하려고 들춰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어느새 끝까지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책 <1984년> 에 비해 분량이 적기도하고, 읽다보니 생각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1903년 6월 25일 인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국인 영국에서 식민지 인도로 파견된 관리였는데 1907년 어린 조지 오웰은 어머니하고만 영국으로 다시 이주하여 소년기의 대부분을 아버지의 부재속에 보냈다. 입학한 학교에서 학비를 감면받으며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부유한 집 아이들로부터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며 놀림받은 경험때문일까. 그는 일찍부터 계급 차이에 눈을 떴다고 한다. 이후 47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의 이력은 매우 다양하다. 버마, 스페인, 프랑스, 모로코, 스코들랜드 등의 나라로 이주해다니면서 방송국, 잡지사, 참전, 교직, 탄광지대 등을 거쳤고 그곳 민중들의 삶을 눈으로 보거나 직접 체험하며 전체주의, 계급주의에 맞서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키운다. 

<동물농장>은 1943년 그가 영국 런던으로 돌아와 완성시킨 소설로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비꼬아 풍자한 풍자소설이며 정치소설이다. 짐작되다시피 내용때문에 이리저리 출판이 미뤄지다가 1945년에 비로소 출판이 되었다.


농장운영을 게을리하고 술만 마시는 장원농장  주인 존스 씨로 인하여 농장 운영은 엉망이고 농장의 동물들은 일은 죽도록 하면서도 배고픔에 시달리는 생활을 한다. 불만이 점점 커져가던중 수퇘지 메이저 영감은 농장의 동물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꿈 얘기를 하며 반란을 준비하자고 연설한다. 

"우리는 왜 이 비참한 상태에 계속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힘들게 생산한 것을 거의 모두 인간이 빼앗아 가기 때문이오. 

인간은 우리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적이오. 인간을 제거합시다. 혁명! 모든 인간은 적이오. 모든 동물은 동무요." (34-36쪽)

사흘 후 동물들을 선동하던 메이저영감은 죽고 혁명은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농장주인 존스는 이웃마을로 쫓겨나고 농장은 동물들의 것이 되어 이름도 장원농장에서 동물농장으로 바꾸고 똑똑한 돼지 나폴레온이 새로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혁명후 농장은 과연 메이저영감과 동물들이 이루고자했던 그런 곳이 되는가? 혁명의 꿈은 실현되는가? 


러시아 혁명 시대의 인물, 계층을 각각 상징하는 동물들이 나오고 있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동물들이 누구를 상징하는지 어렵지 않게 연관지을 수 있게 조지 오웰의 풍자는 치밀하고 정확하다. 어떻게 전체주의라는 것이 생겨나고 어떤 상태에서 혁명이 탄생하게 되는지, 그리고 혁명후 세상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결말을 보게 되는지 조지 오웰은 마치 그 시대를 다 겪고 한참을 더 살아 결과를 눈에 본듯 분석적이고 꿰뚫어보며 쓰고 있다. 전체주의를 유지시키는데 언어는 어떻게 변질된 방법으로 이용되는지, 종교가 어떻게 대중을 회유하는데 이용되는지, 대중의 무지와 안일, 자포자기는 사고와 판단 대신 맹목적인 희망과 복종의 삶으로 이끌 뿐이며, 결국 대중 전체를 위한 혁명은 소수 엘리트들에 의한, 소수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 

등장하는 동물중 '복서'라는 이름의 말이 있다. 똑똑하지는 않지만 변함없는 성실함과 일할 때 보여주는 엄청난 힘 때문에 농장 식구들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는 동물이다. 어떤 어려움과 좌절이 있어도 결론은 늘 내가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것, 그래서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겠다는 것이고, 혁명이 약속한 그들의 동물농장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주며 살아온 복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생각과 믿음을 의심하줄 몰랐다. 

결국 국가나 사회가 원하는 것은 복서같은 인물이 아닐까? 의심없이 희망하고, 문제의 답을 늘 자기 자신의 노력에서 찾으며, 죽을때까지 성실한 복서. 내가, 당신이, 우리들이, 성실하게 피땀흘려 살아가는 모습은 결국 이 소설 속 복서로서의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걸 몰라야하는건가? 자꾸 그런 걸 알아가면 의심없이 성실하게 생을 마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스노볼처럼 총명한 돼지로 살다가 권력자의 눈 밖에 나서 영영 추방당하고 반역자로 몰리는 삶, 모두에게 존경받고 성실한 삶을 살아간 복서의 삶. 이 둘 중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할 것인가. 

조지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정말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시아 혁명 처럼 이미 지나간 어떤 특정 시기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고 동물농장의 이야기는 더구나 아니었다.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두 발로 다니는 것은 모두 적, 네발로 다니는 것은 모두 동무라고 외치던 돼지들이 스스로 두 발로 걷는 장면이 나온다. 돼지가 경멸하던 인간과, 인간이 지배하며 부려먹던 돼지의 모습 사이의 구분이 점차 모호해지는 것이다. 

이미 역사 속에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라고 부인 못하고 자꾸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올리며 새로운 연관짓기를 해보고 있노라니 슬퍼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정말 열심히 살아볼 가치가 있는 곳인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만큼 살아온 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려니 슬플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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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2-31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2021년 신축년 새해 행복하고 건강한 나날로 가득 채워지시길 바랍니다.
┝┦┎┑
┕┚┖┙┣┕┃
┶ ┎┒
┑┕┚┣┗┃
^ㅡ^♡받으세요♡

hnine 2021-01-01 06:09   좋아요 1 | URL
scott님, 우리 함께 행복하고 함께 건강한 나날이 되도록 애써보아요.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1-01-01 1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민음사 걸로 읽은 것 같습니다. 상징적 문장이 신선했어요.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님이 뜻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 행복한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 ★ ★

hnine 2021-01-01 19:08   좋아요 0 | URL
저희 집에도 민음사 것도 있는데 손에 잡히는대로 읽었네요.
뜻하는대로 일이 술술 풀리면 참 좋겠지만, 그런 일은 별로 안일어나는 것 같아요 ㅠㅠ
안분지족, 이 말을 대신 새기며 살까봐요.
페크님, 늘 제 서재 들러주시고 관심가져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