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 로베르트 발저 산문.단편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임홍배 옮김 / 문학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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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트르 발저의 산문집 <산책자>를 읽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어떻게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산책자>는 나에게 큰 공감대를 남겨 놓은 바 있다. <산책자>와 같은 해 (2017년)에 로베르트 발저의 다른 산문집이 출판되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바로 이책 <세상의 끝>인데, 다른 출판사에서 다른 역자에 의해 나왔지만 읽어보니 이 책에 실린 몇편의 글은 좀 더 먼저 출판된 <산책자>에도 실렸던 글임을 알수 있었다.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 태생이다. 8형제 중의 일곱째로 태어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계속 다니지 못하고 14살 나이에 취직을 하여야 했다. 이 책에 보면 실로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건 아마 작가 본인이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데서 비롯되었으리라 생각된다.14살에 시작하여 51세 요양병원에 입원하기까지 그가 거쳐간 직업을 보면 은행, 극단활동, 출판사, 보험회사 경리사원, 공장 사무직원, 종업원 교습소, 미술상 비서, 군복무, 보조사서 등 정말 다양한데,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주 옮겨 다닌 이들 중 어느 것도 일정한 직업이 아니었고 거처 역시 일정하지 않은 상태로 전전하며 살아왔다. 

51세때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아 요양병원 생활을 시작하는데 이 병력은 로베르트 발저 가족에게 있어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로베르트가 열여섯살 때 죽은 그의 엄마 엘리자 발저는 생전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었고 화가였던 형 칼 발저는 자살로 삶을 마감, 넷째 형 에른스트 발저도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 둘째 형 헤르만 발저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51세에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78세에 사망하기까지 그의 요양병원 생활 대부분은 직업 대신 산책하는 시간으로 채워졌고 친구보다 자연과 교감했으며 산책하는 동안 혼자 느끼고 생각하고 꿈꾸는 것은 대화 대신 글로 남겨졌다. 글 쓰기는 그렇게 일종의 생계 수단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자연으로 가라. 그러면 자연은 그대를 반겨줄 것이니. 자연은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모든 이를 사랑하고, 그대 또한 자연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자연에서는 잃을 것이 없으며, 자연은 누구도 해친 적도 없다. 

자연의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가 곧 즐거움이며, 맑은 공기는 청량음료처럼 마실 수 있다. 자연은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대가 이 세상을 아름다운 집처럼 받아들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대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준다. (30쪽,「자연」중에서)


저는 별을 좋아하고, 달은 저의 은밀한 친구입니다. 제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저는 사는 동안에는 하늘을 우러러보기를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입지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저와 농담을 하고, 저는 흘러가는 시간과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 소중한 즐거움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낮과 밤은 제 동반자입니다. 저는 아침저녁으로 친숙한 발에 의지하여 일어섭니다. (83쪽, 「어느 시인이 어느 신사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특별히 튀는 표현이나 문장이 없어도 어느새 마음에 적셔들어오는 문장들. 로베르트 발저 글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부분 짧은 글들이고 그 속에서 화자는 시인이기도 하고, 사무원이기도 하고, 젊은 여인이기도 하고, 가난한 청년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인물들 속에는 로베르트 발저 자신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아래 인용부분을 보면 그가 자연과 교감했다고 해서 사람 사귀기에 아예 벽을 쌓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그는 자기와 어딘지 비슷한 구석이 있어보이는 사람을 발견하는데 영민했으며 친해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같은 결말이다. 


밖에 나오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 곁을 떠나왔다. 우스운 기분도 들었고, 익살맞은 느낌도 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소담스럽게 함박눈이 내리는 허공으로 저녁종이 울려 퍼졌다. 도시는 한 편의 동화 같았다. 눈은 바람에 날려 회오리를 그리며 너무나 달콤하고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눈송이 하나가 마치 키스라도 하듯 내 입으로 떨어졌다. 내 모자와 외투는 주위의 모든 사물과 사람들처럼 이내 하얀 눈으로 덮였다.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등불이 빛났다. 이제 이 세상에는 오로지 아름다운 보금자리와 사랑스러운 사람들, 온갖 유쾌한 기분과 다정한 말들, 이루 형연할 수 없는 편안함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141쪽, 크리스마스이야기」중에서)


친해보려고 무작정 찾아갔던 사람의 집에서 나오며,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가벼운 자책에 빠지기도 하지만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위 상황과 배경 묘사를 통해 마치 잃어버린 무엇을 다시 찾기라도 한듯 개운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혼자가 되었을때 다시 찾는 안식. 외로움을 댓가로 하는 편안함인 것이다. 


<산책자>의 번역은 소설가 배수아가, <세상의 끝>은 서울대 임홍배 교수가 하였다. 두 권의 책에 중복되어 들어가 있는 글들이 있다보니 자연히 두권의 번역을 비교해보게 되었는데, 한 단편의 제목이 <세상의 끝>에서는 「주인과 피고용인」으로, <산책자>에서는 「주인과 고용인」으로 번역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피고용인과 고용인은 완전히 반대의 뜻이지만 번역자가 잘못 번역하였다기 보다는 우리말스럽게 옮기려고 하다보니 번역자도 알면서 그렇게 번역한게 아닌가 짐작해본다.

혼자 산책하는 일은, 단지 시간 보내기 위한 수동적 활동만은 아니요, 어떤 사람에게는 스스로 선택한 나를 찾아가는 방식이고 여정이며 허물어지지 않고 매일 새로 태어나려는 의지이고 노력임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그런데 저 마지막 인용문의 첫 문장 말이다.

밖에 나오자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 곁을 떠나왔다. 우스운 기분도 들었고, 익살맞은 느낌도 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소담스럽게 함박눈이 내리는 허공으로 저녁종이 울려 퍼졌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안좋다. 너무 쓸쓸하게 읽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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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1-30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삶이나 가족력이 마음 아프네요. 그럼에도 산책을 통해 자신과의 타인과의 만남을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걸 보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hnine 2021-02-11 04:44   좋아요 1 | URL
그렇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그런데, 로베르트를 엄마처럼 돌봐주던 누이도 로베르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가깝게 지내던 친형도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고, 본인도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나니 요양원 밖에 갈 곳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그의 삶과 생각이 그대로 남아있는 글이 이렇게 세상에 남아서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나진 않은거죠.

scott 2021-02-10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이치 나인님,
로베르토 발저
매일 걸었던 글쟁이 크리스마스날 산책 나갔다가 길에서 숨을 거둔 이 고독한 글쟁이,,,로베르토 발저
이달의 당선 추카~추카~
설연휴 가족들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에이치 나인님 서재방에 들어 올때마다
프로필속 멍뭉군에게
뭐라도 주고 싶으 ㅋㅋ

/}__/}
( • ▼•)
🍖

hnine 2021-02-11 05:30   좋아요 1 | URL
제가 멍문군 (이름이 ˝볼더˝입니다~) 에게 말해주었어요. 너 귀여워하시는 분 한분 늘었다고요.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이 참 가슴아프죠. 고독한 글쟁이였으면서 끝까지 자기와 소통이 될 만한 사람을 만날까 싶은 한가닥 기대가 그의 글 속에 나타나있어요.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cott님도 당선 축하드려요~
이번 설은 저희 집에서 저희 식구 세명만 차례 지내고 산소 방문은 설 연휴 기간 이후로 미루기로 했어요. 음식 준비만 해도 되고 교통지옥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어 그것은 한편 좋네요.
scott님도 평안하고 행복하세요.
(아래 강아지 그림 너무 귀여워요. 따라 그려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