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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학을 며칠 앞두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문을 열자 집안에서는 묘한 냄새가 났다.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는 바깥의 공기와 다른 성질로 바뀌기라도 하는 것인지. 거의 한 달을 비워두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8월 중순은 여전히 한여름이어서 밖에서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방에 들어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면 시원했다.

매일 아침 카메라를 들고서 마음이 가자고 하는대로 향했다. 미리 계획같은 것은 없었다. 서울 근교 5일마다 선다는 장에도 갔고, 대학로 연극 공연장에도 갔다. 홍대 앞, 그리고 그 뒤의 달동네를 돌아다닐 때에는 같은 하늘 아래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숨 쉬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상철이, 형민이와 곧잘 가던 카페에도 가보고, 밤이 되면 마치 건물 전체가 하나의 조명 기구처럼 번쩍거리는 영어 학원가도 돌아다녔다. 인사동 뒷골목, 비 오는 날, 그리고 같은 장소를 맑은 날. 얼마나 많은 사진들이 카메라 속에 담기고 있는지 모르고 마냥 눌러대다가 배터리가 다 되거나 메모리가 꽉 찼다는 신호가 들어오면 그것이 그 날 하루의 마감 신호가 되었다. 정말 많은 사람을 보았다. 사람이 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보며 파일로 정리했다. 내 컴퓨터 속에는 새로운 폴더가 하나 둘 늘어갔다. 어떤 폴더에는 ‘블루의 안과 밖’이라는 이름이, 어떤 폴더에는 ‘광시곡’, 어떤 폴더에는 ‘꿈을 찍는 사진관’이라고. 폴더에 사진이 쌓여가듯이 하루가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몇 개의 사진을 골라내어 USB에 옮겼다. 현상소에 가서 그 사진들을 출력해왔다. 그 다음부터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그림을 입혔다. 사진과 사진을 이어 붙여 콜라주를 하기도 하고, 예전에 해본 것처럼 사진의 일부를 도려내거나 못으로 긁어내어 질감의 변화로 느낌을 달리해보기도 했다. 사진 위에 표백제를 몇 방울 떨어뜨려 탈색의 효과를 내보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것과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가끔 엄마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니, 가끔이 아니라 자주, 그러니까 하루에 두 번 정도. 엄마의 품속을 혼자서라도 느껴보려고 애써보았고, 그렇게 오롯이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을 눈앞에서 그려보기도 했다. 이전의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누워계신 모습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누워계신 외의 다른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 해 여름, 나는 그렇게 나고 있었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나와 연관 지어 볼 때도 있었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이어질지 생각해볼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건 아주 가끔이었고, 도리질 치지 않고도 어느 새 나는 하던 일로 돌아와 있었다. 정신 팔려 있었다고 해도 되고, 몰입해있다고 해도 될 것 같은 시간들. 그리고 가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산 속의 외딴 방에 오롯이 앉아있던 엄마,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엄마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고 바로 볼 수 없기는 하지만, 예전과 달리 엄마가 어딘가 멀지 않은 곳에 계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참 신기하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겪는 것들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나중에 지나서 알게 될 그 길을 지금 나는 지나고 있는 것인지도.

오늘 만든 사진 폴더의 이름은 ‘호두나무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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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11-06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꾸준히 노력하시는 님

hnine 2013-11-07 07:35   좋아요 0 | URL
별로 꾸준하지 못해요. 더 잘 써보려다가 그냥 이대로 마치자는 뜻으로 여기에 올리기 시작했답니다.

2013-11-06 15: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

 

 

돌아다닐 때에는 햇빛 따가운지도 모르고 다녔는데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찬물을 대야에 담고 거기에 얼굴을 푹 담그기. 이건 어렸을 때 강진이랑 종종 하던 일이다. 시원하다. 머릿속까지 쨍 한다.

“강석 학생, 누가 찾아 왔어.”

보살님 목소리가 얼굴을 담그고 있던 물속을 뚫고 들어왔다.

‘누가?’

물속에서 머리를 드니, 그 잠깐 동안 마치 다른 세계에 있다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너! 여길 어떻게 알고?”

마담이었다. 저 녀석은 항상 이렇게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난다.

그날 우리는 절 주위를 한참 돌아다녔다. 어딜 가도 사람이 한명 이상 눈에 띄는 곳이 없다. 그것도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밭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게 사람 구경의 전부이다. 동네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이라든지, 가방을 메고 학원에 다녀오는 아이들이라든지, 그런 광경은 좀처럼 구경할 수가 없는 곳.

사람 소리보다 짐승 소리가 더 자주 들리기도 한다. 컹컹 개 짖는 소리, 새벽엔 새 우는 소리,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우는 소리, 꿩 소리.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마담에게 들려주며 한참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마담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느 덧 해가 슬슬 넘어가고 있는데도 마담은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살님께서 마담것까지 저녁을 차려주시기에 먹고 난 후였다.

“강석이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이기에 저렇게 할 말 있다고 선전포고를 하고서 꺼내야 할까 궁금했다.

“원래 일정대로면 나 내일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날이야.”

그때까지도 마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방학 다 끝나가는데 여행이라도 가냐?”

“그보다 더 원래 일정이라면 내가 아니라 네가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거지.”

그제서야 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미술대회 본선 출전 자격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바로 내일이 그 해외 단기 연수를 떠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담이랑 무슨 관련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 꼭 미대에 가서 화가로 이름을 날려보고 싶은건 나야. 중학교때부터 죽어라 학원 다니며 연습했어. 아버지가 못이룬 꿈을 내가 이뤄내고도 싶었고. 그런데 기회는 나처럼 노력한 것도 아닌 너에게로 돌아가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 솔직히 죽고 싶더라.”

마담은 내 얼굴 대신 우리가 앉은 개울가의 돌을 하나 집어 바닥에 괜한 줄을 그으며 말을 계속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네가 그동안 하고 다닌 일을 알게 되었어. 싸움질에, 경찰서 출입, 더구나 함께 어울리던 패거리 중 한 녀석이 자살했다는 것 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먼저 그 얘기를 꺼냈지. 그런 경력이 있는데 해외 연수 자격에 문제가 없겠느냐고. 그런 녀석이 외국 나가서도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나라 망신 아니겠냐고.”

듣고 있자니 얼굴로 피가 다 몰리는 것 같았다. 어디, 끝까지 다 들어나보자고 버티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시더군. 대회 측에 문의를 빙자하여 네 과거를 다 알리셨고, 결국 너는 자격이 취소되고, 대타로 내가 가게 되었어.”

그건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 대신 누군가 가겠거니 했는데 그게 마담인 줄은.

“여긴 왜 왔냐?”

내가 궁금한 건 그거였다. 내일 예정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 될걸 여기를 찾은 이유를 모르겠어서이다.

“내가 견딜 수 없었어. 이건 아니다 싶었고.”

마담의 목소리가 좀 떨린다 싶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름해인데도 산 속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 속에서 밤이 되면 눈에 안 보이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주 가만 가만 부는 바람, 그래서 도시 같으면 부는지도 모를 그런 바람의 소리도 들린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고 가면 나뭇잎 소리가 나고, 물을 밀고 가면 물소리가 난다.

마지막 버스도 놓친 마담과 내 방에 나란히 누워서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밖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뭐지?’

뭐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는데 이 밤중에 뭐가 떨어진단 말인가? 옆에 보니 마담은 그 소리에도 깨지 않고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나가보기가 웬지 좀 겁이 나서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방문 밖에 뭐가 떨어져있는지부터 확인하리라.

 

다른 날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방문을 열고 밖을 나가보았지만 바닥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뒹구는 나뭇잎, 나뭇가지들, 그뿐이었다.

아침을 차려다 주신 보살님께 여쭤보았다. 자다가 방문 밖에 뭐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보살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나가 봐. 뭐가 떨어져 있나.”

“일어나자마자 봤지요. 떨어진 거 없다니까요.”

“한 밤중에 저 호두나무에서 꽃이 떨어지면 그렇게 크게 들릴 때가 있지.”

“네? 꽃이 떨어지는 소리였다고요?”

내가 머물고 있는 방 바로 앞에는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호두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눈여겨 본적이 없었다.

나가보니 정말 꽃이라고 불러줄까 싶은, 푸른 빛 도는 꽃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게 떨어지면서 그렇게 큰 소리를 냈을 것 같지 않았다.

보살님이 방에서 나오시며 한 말씀 덧붙이며 가셨다.

“목 뒤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이 어떤 때는 죽비가 한 대 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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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눈을 떴을 때 옆에서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장씨 아저씨였다.

“이제 깼구나. 지금이라도 깨워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하나 하던 참인데.”

장씨 아저씨가 내 방을 다녀가신 후 나는 심한 감기인지 몸살인지를 모를 증세로 열이 오르고 땀에 젖어 끙끙 앓았던 모양이다. 만져보니 입고 있는 옷이 축축하게 젖어 있고 내 옆에는 물수건과 작은 대야가 놓여 있었다. 아저씨가 방에 다녀가신 다음 날인 어제 낮에 비를 맞으며 산 속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꿈이었구나......’

한잠 푹 자고 나서 이제 괜찮다는 말에 장씨 아저씨는 그래도 못 미더워하시더니 감기 몸살 약을 주시고는 내가 약을 먹는 것을 보시고서야 아저씨 방으로 돌아가셨다.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와주셨다. 열 살 때 엄마는 영영 나에게서 떠난 줄 알았는데 엄마는 나를 보고 계시다.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지켜주고 계시다.

꿈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누구든 꿈을 꾼다. 잠자는 동안 꿈을 꾸고 잠에서 깨어나면서 꿈에서도 깨어나지만 나는 꿈에서 깨어났으되 깨어났다고 할 수 없는 이상한 기운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머릿속 어느 한편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어서 항상 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책을 볼 때도 산책을 할 때도, 심지어는 누구와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꿈에서 벗어나있는 순간은 없었다. 그건 마치 누군가 늘 나를 지켜봐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고, 내가 나가 있는 동안에도 집에 항상 나를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는 그런 느낌이기도 했다. 나에겐 참 낯선 느낌이었는데 차츰 나에게 이상한 힘을 주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일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걷는데 쓰고 있었다. 카메라는 손에 들고 작은 수첩과 연필은 뒷주머니에 꽂고 웬 종일 쏘다녔다.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그야말로 발길이 가는대로, 그날 기분대로 움직여 가면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한, 무언가 카메라에 담을 거리를 찾고 있는 한 심심하거나 지루하지는 않는 법이었다. 내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이 세상의 빛깔은 같지 않다. 카메라가 없을 때 내 눈에 비치는 이 세상이 무채색이라면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는 그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로 보인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이 메모리를 꽉 채우면 절 아래 PC방에 가서 내 블로그의 폴더에 옮겨 놓는 것 까지. 그 일을 나는 반복하며 어제 같은 오늘,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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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아주 지독한 안개였다. 아니, 안개라기보다는 마치 물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앞으로 나가면서 얼굴도 몸도 점점 더 젖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딜 걷고 있는 것인지 뚜렷하지가 않았다. 아는 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낯설지도 않은 것 같은, 그런 산길이다. 몸이 점점 더 축축해져 와서 이제 그만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앞으로 앞으로 걸어 나가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하며 계속 걷다보니 저 앞에 뿌옇게 집인지 암자인지 모를 뭔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안개 속에 잘못 본 것일까? 다시 보아도 분명 연기가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누가 있어 저기. 누가 살고 있는 거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잖아.’

다리 한 짝 들어 올려 걸음을 떼어놓는 것도 쉽지 않다고 느껴져 올 무렵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그 연기 피어오르는 집에 가까워지질 않았다. 마치 계속 헛발질을 하고 있던 것처럼. 하지만 이마에선 이렇게 땀이 흐르고 있는데. 이렇게 힘들여 걷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다리에 뭐가 툭 걸리는 것 같더니 내 몸은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바로 눈앞에 그 집이 있었다. 다 와서 넘어진 모양이었다. 문고리를 잡아당기기 위해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 있는데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오고 있었다.

엄마다. 엄마였다.

돌아가실 무렵의 그 창백한 얼굴 그대로, 엄마는 거기, 그 집의 방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엄마! 엄마 맞아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마, 왜 여기 있어요?”

입은 꼭 다문 채 엄마는 그냥 가만히 앉아 나를 보고만 계셨다.

“엄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래요?”

엄마가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신다.

“엄마, 내가 보고 싶어 왔어요? 그래서 그렇게 쳐다만 보시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는 엄마 무릎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렇게 울지는 않았는데 나는 아이가 된 것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게 나는 그동안 한참 참았던 눈물 보따리가 터지기라도 한 듯 그렇게 울었다.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외로움이었을까. 나는 어떤 명목 아래 그렇게 눈물을 감추고 살아왔던 것일까.

그때였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계시던 엄마가 나를 일으켜 세우신 것은. 내 어깨를 가만히 일으켜 세우셨다. 그리고는 나를 꽉 안으셨다. 그렇게 엄마 품속에 안겨있으니 마치 한데 있다가 따뜻한 집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헤매다가 편안한 쉴 자리를 찾아 앉은 것 같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어쩌면 엄마에 대한 기억을 외면하고 살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기억을 떠올려봐야 아무 소용없으니까, 내 자신이 더 찌질 해지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엄마는 나를 계속 보고 계셨나보다. 내가 잘 커나가기를 바라보면서 내 옆에 계셨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걸 알려주고 싶으셨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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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절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나는 이를테면 객식구로서 머물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절에서 하는 어떤 일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 같은 것은 없었다. 누가 부르러 오면 내려가서 아침을 먹었고, 점심을 먹었고, 저녁을 먹었다. 다만 절에서의 하루 일정을 소리로, 분위기로서 조금씩 익숙해져갈 뿐이었다. 잠이 좀 늦게 들어 밤늦게 까지 깨어 있을라치면 어느 덧 이 세상엔 나 혼자 깨어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사방이 조용했다. 그저 들리는 소리라고는 물소리와 바람소리뿐. 그건 도시에서 듣는 물소리, 바람소리와 분명 다른 소리였다.

아버지는 왜 나를 이리로 보내셨을까?

아버지 말씀대로 머리도 식히고 마음도 다 잡기 위해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내 마음이 뭘? 내 머리가 뭘 어떻다고?

아버지 혼자 괜히 오버하신다고 생각하며 돌아누웠다가, 곧 다시 천장을 보고 누우며 다시 내게 말한다.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냐? 너는 그냥 네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야. 네가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그런 것은 별 쓸모없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어차피 네 의지가 아니라 네 주위 상황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이 어지러웠다. 나를 움직여가는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다른 것들이라니.

8월의 중순에 이르자 여름의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한낮엔 여기서도 돌아다니면 땀이 흘렀다. 그래도 다른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절 밖 산책을 자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카메라를 들고서. 카메라를 들고 다닐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나는 발걸음도 다르고 눈의 반짝임도 아마 다를 것이다. 멀리서도 눈에 뜨일 만큼 고운 색깔의 꽃나무를 찍는 것은 쉽다. 산봉우리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탁 트인 경치를 찍는 것은 몇 번 앵글을 잡아보고 셔터를 누르면 된다. 하지만, 바람을 찍고 싶을 때는 그렇지 않다. 소리를 찍고 싶을 때, 나의 꿈을 찍고 싶을 때에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어릴 때 읽은 동화 ‘꿈을 찍는 사진관’ 이 생각난다. 읽고 또 읽었던, 좋아하는 동화 중 하나였는데 언제부터 그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찍어놓은 사진들은 결국 나의 꿈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그 날 밤, 다른 날보다 낮에 좀 많이 걸어 돌아다녔더니 피곤했는지 저녁 먹고 난 이후 잠이 일찍 들어있었다. 밖에서 누가 인기척 하는 소리에 번쩍 눈이 떠져서는 가만 귀를 기울였다.

“강석이 학생 자나?”

누군가 와 있었던 것 맞다.대답할 것도 없이 바로 방문을 열었을 때 거기엔 장씨 아저씨가 서 계셨다.

“아, 아저씨 오셨네요?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보는 장씨 아저씨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니 그새 많이 늙어있었다.

“야, 이거 길에서 만나면 몰라보겠구나. 청년이 다 되었네. 그래, 여기 있으려니 갑갑하지는 않고?”

“아니요. 방문 열고 나가면 다 뚫려 있으니 오히려 갑갑하지 않아요. 어디 가셨더랬어요?”

“지난 번 공사해준 데서 급히 손봐달라고 연락이 오는 바람에 거기 불려갔다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 이제 왔지 뭐냐. 한옥은 지을 때도 그렇지만 보수하는데도 공이 많이 들어가. 후딱후딱 안 된다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재촉만 해대니.”

“그럼 요즘은 주로 한옥 일만 하세요? 예전에 아저씨, 우리 아버지랑 공사장에서 함께 일하실 때 생각나요.”

“내가 네 아버지 신세를 많이 졌지. 아버지 덕분에 일거리 떨어질 걱정은 안했으니. 아버지가 말씀은 없으시면서도 결단력 있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뚝심이 있어서 집 지어 파는 바닥에서는 아주 적격이셨지.”

아저씨는 오랜만에 옛날 일을 얘기하시며 그게 지금도 그리 나쁜 추억은 아닌지 슬그머니 눈가에 웃음을 지으셨다.

“한참 잘 나가고 있을 때 우연찮게 한옥 집 공사가 들어왔는데 아버지는 그때 거기까지 눈 돌릴 틈이 없었고, 나만 어쩌다보니 거기 뛰어 들어가게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 이렇게 따로 돌아다니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아버지와는 종종 연락은 하고 소식도 듣고 지내고 있었다마는.”

나에게 왜 느닷없이 이 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그런 것을 묻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아버지께서 언질을 주셨던가보다. 뭐, 그러니 내가 여기 지금 있게 된 것이겠지만 말이다.그때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아저씨는 알고 계실 거란 생각, 우리 아버지와 예전부터 오래 같이 일을 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 아니 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거란 생각이.

“저, 아저씨. 여쭤볼게 있어요.”

“응? 뭔데?”

“돌아가신 우리 엄마요......”

나의 그 말에 아저씨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어떻게 저의 엄마가 되셨어요?”

그렇게 물어보려고 계획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아저씨가 금방 대답을 못하시는 것을 보고 나는 이 기회를 그냥 보낼 수는 없다고, 지금 아니면 영원히 모르고 지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나는 그동안 내 머리 속으로 상상한 것을 마치 사실이 그런 양,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처음엔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던 아저씨는 나의 말로 미루어 이미 내가 대강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셨을까?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어딘가를 한동안 바라보고 계신 아저씨의 표정으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아저씨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보니 그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벽 한쪽에 겨우 나있는 작은 창을 바라보고 계신 거였다.

“하긴, 너도 이제 클 만큼 컸으니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싶긴 하다만......”

“네 아버지랑 결혼하기 전부터 네 엄마, 그러니까 친모가 워낙 몸이 약했더란다. 그래서 건강부터 좀 챙기고 아이는 천천히 가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네가 생긴거라. 네 엄마를 끔찍이 생각했던 니 아버지가 알면 혹시나 낳지 못하게 할까 염려되어 그랬는지 거의 산달 될 때까지 아이 가진 것을 숨겼다더라. 그러다가 너를 낳았고, 다행이 아기는 건강했는데 네 엄마는 건강이 계속 안 좋아져서 결국 강석이 네가 돌을 지내고 얼마 안 되어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지. 나도 여기까지는 들은 얘기고 내가 네 아버지를 처음 만나 함께 일하게 된 게 바로 그때쯤이었지. 갓 난 너를 키워줄 사람이 마땅찮으니 네 아버지는 아예 너를 데리고 할머니도 계시고 이모들도 있는 너의 외가에 들어와 살게 되었지.”

말없이 듣는 나의 시선은 방바닥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저씨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숨을 죽이고 있는 내 가슴은 쿵쾅거렸다.

“그런데 그때 네 외가에는 몸이 워낙 약했던 네 엄마보다 먼저 결혼한 네 엄마 동생분이 와계셨다지. 혼인한 집안이 손이 무척 귀한 집안이었는지 결혼하고 오래도록 아이가 안 생기자 며느리를 무척 힘들게 했나보더라. 결국 남편 되신 분과 거의 강제로 헤어짐을 당하고 친정에 와계신거였지. 그분이 다른 이모들보다 특히 더 너를 예뻐하였다더라. 아마 아이에 한이 맺혀서 그랬는지.”

무슨 말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아저씨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너는 자꾸 커가고, 네 아버지가 언제까지 그렇게 너를 엄마 없이 할머니와 이모들 손에서만 키울 수는 없는 것 아니겠냐. 할머니는 연세도 있으시고, 이모들도 언젠가는 다 출가들 하실 테고......”

“그래서……요?”

“너를 제일로 예뻐하고 애지중지 키워주시던 그 이모가 아주 네 엄마가 되어 주기로……. 그래 되었던 거지.”

그러니까 나를 낳아주신 엄마는 내가 갓난아기일 때 돌아가시고 원래 이모였던 분이 나의 엄마, 키워주신 엄마가 되신 거란 말씀이다.

“처음에 그게 누구 뜻이었는지는 내도 모르겠고. 너는 계속 그 어머니를 네 친어머니로 생각하고 자랄 만큼 그 이후로도 너를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셨는지. 나중에 강진이가 태어난 후에도 어찌 보면 너를 더 챙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

밤이 깊었는지 밖에서는 다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그 날 밤 아저씨가 돌아가신 후 나는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여러 사람의 얼굴이 내 머리 속에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엄마, 내가 당신 얼굴을 기억할 나이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야했던 엄마, 그렇게 세상을 뜬 언니가 불쌍했을까, 아니면 그렇게 엄마 얼굴도 모른 채 남겨진 갓 난 내가 불쌍해서였을까. 그 엄마 역시 내가 더 커가는 것도 못 보시고 일찍 세상을 뜨고, 그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뿐 아닌 다른 가족들까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어려서 어머니와 이별을 한 강진이 생각도 났다. 어지러운 생각으로 머리는 자꾸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머리에 못 이겨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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