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돌아다닐 때에는 햇빛 따가운지도 모르고 다녔는데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찬물을 대야에 담고 거기에 얼굴을 푹 담그기. 이건 어렸을 때 강진이랑 종종 하던 일이다. 시원하다. 머릿속까지 쨍 한다.

“강석 학생, 누가 찾아 왔어.”

보살님 목소리가 얼굴을 담그고 있던 물속을 뚫고 들어왔다.

‘누가?’

물속에서 머리를 드니, 그 잠깐 동안 마치 다른 세계에 있다가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너! 여길 어떻게 알고?”

마담이었다. 저 녀석은 항상 이렇게 귀신처럼 갑자기 나타난다.

그날 우리는 절 주위를 한참 돌아다녔다. 어딜 가도 사람이 한명 이상 눈에 띄는 곳이 없다. 그것도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밭에 앉아 뭔가를 하고 있는게 사람 구경의 전부이다. 동네를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이라든지, 가방을 메고 학원에 다녀오는 아이들이라든지, 그런 광경은 좀처럼 구경할 수가 없는 곳.

사람 소리보다 짐승 소리가 더 자주 들리기도 한다. 컹컹 개 짖는 소리, 새벽엔 새 우는 소리, 이름 모를 곤충들이 우는 소리, 꿩 소리.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마담에게 들려주며 한참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마담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어느 덧 해가 슬슬 넘어가고 있는데도 마담은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살님께서 마담것까지 저녁을 차려주시기에 먹고 난 후였다.

“강석이 너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이기에 저렇게 할 말 있다고 선전포고를 하고서 꺼내야 할까 궁금했다.

“원래 일정대로면 나 내일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날이야.”

그때까지도 마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방학 다 끝나가는데 여행이라도 가냐?”

“그보다 더 원래 일정이라면 내가 아니라 네가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거지.”

그제서야 나는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미술대회 본선 출전 자격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바로 내일이 그 해외 단기 연수를 떠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담이랑 무슨 관련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아버지 핑계를 대었지만 사실 꼭 미대에 가서 화가로 이름을 날려보고 싶은건 나야. 중학교때부터 죽어라 학원 다니며 연습했어. 아버지가 못이룬 꿈을 내가 이뤄내고도 싶었고. 그런데 기회는 나처럼 노력한 것도 아닌 너에게로 돌아가는 걸 참을 수가 없었어. 솔직히 죽고 싶더라.”

마담은 내 얼굴 대신 우리가 앉은 개울가의 돌을 하나 집어 바닥에 괜한 줄을 그으며 말을 계속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네가 그동안 하고 다닌 일을 알게 되었어. 싸움질에, 경찰서 출입, 더구나 함께 어울리던 패거리 중 한 녀석이 자살했다는 것 까지. 내가 아버지에게 먼저 그 얘기를 꺼냈지. 그런 경력이 있는데 해외 연수 자격에 문제가 없겠느냐고. 그런 녀석이 외국 나가서도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나라 망신 아니겠냐고.”

듣고 있자니 얼굴로 피가 다 몰리는 것 같았다. 어디, 끝까지 다 들어나보자고 버티고 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시더군. 대회 측에 문의를 빙자하여 네 과거를 다 알리셨고, 결국 너는 자격이 취소되고, 대타로 내가 가게 되었어.”

그건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 대신 누군가 가겠거니 했는데 그게 마담인 줄은.

“여긴 왜 왔냐?”

내가 궁금한 건 그거였다. 내일 예정대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 될걸 여기를 찾은 이유를 모르겠어서이다.

“내가 견딜 수 없었어. 이건 아니다 싶었고.”

마담의 목소리가 좀 떨린다 싶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여름해인데도 산 속이라 그런지 금방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 속에서 밤이 되면 눈에 안 보이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주 가만 가만 부는 바람, 그래서 도시 같으면 부는지도 모를 그런 바람의 소리도 들린다.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리고 가면 나뭇잎 소리가 나고, 물을 밀고 가면 물소리가 난다.

마지막 버스도 놓친 마담과 내 방에 나란히 누워서 바람소리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마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면 잠이 들었는지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러다 설핏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밖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었다.

‘뭐지?’

뭐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는데 이 밤중에 뭐가 떨어진단 말인가? 옆에 보니 마담은 그 소리에도 깨지 않고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나가보기가 웬지 좀 겁이 나서 그냥 누워있기로 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방문 밖에 뭐가 떨어져있는지부터 확인하리라.

 

다른 날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방문을 열고 밖을 나가보았지만 바닥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떨어져 있지 않았다. 뒹구는 나뭇잎, 나뭇가지들, 그뿐이었다.

아침을 차려다 주신 보살님께 여쭤보았다. 자다가 방문 밖에 뭐가 쿵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보살님은 빙그레 웃으셨다.

“나가 봐. 뭐가 떨어져 있나.”

“일어나자마자 봤지요. 떨어진 거 없다니까요.”

“한 밤중에 저 호두나무에서 꽃이 떨어지면 그렇게 크게 들릴 때가 있지.”

“네? 꽃이 떨어지는 소리였다고요?”

내가 머물고 있는 방 바로 앞에는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호두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눈여겨 본적이 없었다.

나가보니 정말 꽃이라고 불러줄까 싶은, 푸른 빛 도는 꽃송이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게 떨어지면서 그렇게 큰 소리를 냈을 것 같지 않았다.

보살님이 방에서 나오시며 한 말씀 덧붙이며 가셨다.

“목 뒤에 빗방울 떨어지는 것이 어떤 때는 죽비가 한 대 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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