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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중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읽을 거리를 찾아 집안 여기 저기 뒤지다가 아버지의 책들 중에서 발견해 낸, 지금은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 그 소설집에 오 정희의 <완구점 여인>이 있었다. 그리 긴 소설이 아니었으므로 금방 읽기는 했지만 그 느낌을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 난다. 좋다, 나쁘다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기쁘다, 슬프다, 역시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모호하고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그 느낌은 오랫 동안 오 정희라는 작가에 대한 나의 감정이기도 했다.
몇 년전 작가가 오랜만에 펴낸 우화집 <돼지꿈>을 읽었고 예전에 읽었던 <유년의 뜰>을 다시 읽으면서 점차 그녀에 대해, 그녀의 소설들에 대해 조금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 동안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가져다 준 이해의 폭 덕분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 우연히 도서관의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가을 여자>. 날짜를 보니 작년 9월에 나왔는데 나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 알았더라면 지금까지 안 읽고 있지는 않았을텐데.
전작 <돼지꿈>과 비슷한 형식의 짧은 글들이 스물 다섯 편 실려 있다.  제목의 '가을 여자' 란 인생의 가을 쯤에 이른 여자를 말하는 것이라 짐작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스타일이 어디 가는가. 짧은 글 속에서도 여지없이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120% 다 전달하고 만다. 조용한 목소리로, 일부러 요란한 사건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일상의 얘기를 풀어나가면서 그녀만의 예리한 시선과 관조의 입장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때로는 반전으로, 때로는 어이없는 황당함으로, 때로는 마음을 알싸하게 물들이는 감상으로, 세상은 그렇게 기쁘기만 한 것도,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살아보니 그렇더라고 흔들림 없이 말해 주고 있다.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레이스 뜨기로 두 아이와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여자 앞에 나타난 청년 ('그 가을의 사랑'), 그녀만이 할 수 있을 마무리라고 생각되는 '복사꽃 그늘 아래서',  아들의 다이어리에 쓰여진 알파벳 약자를 추리하면서 서로 소 닭 보듯 하던 남편과 다시 마음을 주고 받게 된다는 '간접 화법의 사랑' 같은 이야기는 일부러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쓰여진 글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생'에서의 어머니, '긴 오후'에서의 시어머니는 앞서 산 세대의 뒷모습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감정 표현이라고는 하는 법이 없던 어머니가 버스를 놓쳐가면서까지 느닷없이 방생을 하고 있는 모습,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의 사진 뿐 아니라, 아들, 며느리, 손자의 사진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시모의 보자기를 발견하는 며느리의 심정,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보는 기분이었다. '요즘 아이들'에서는 오랜 만에 큰 맘 먹고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하고 비싼 식당을 찾았으나 서로 겉돌기만 하는 대화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상해서 돌아오는 이야기인데 흔한 소재일 것 같은 이야기를 참 실감나게도 그려놓았다. 사추기나 로맨스 그레이와 같은 뜻이면서 더 격이 있지 않냐는 '서정시대'에서의 반전은 서정적인 감상을 한번에 뒤집어 놓고, 중년 가장의 심리를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 '병아리'와 그 다음의 '꽃핀 날'은 이 책에 실린 글중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두 편이다.

   
  남의 밑에서 밥 먹는 월급쟁이들이 거개가 다 그렇듯, 사내라면 한 가지씩은 타고 나기 마련이라고 공인된 성질머리 죽이고 더러운 꼴, 아니꼬운 꼴 꿀꺽꿀꺽 삼키며 근무를 끝내고 만원전철에서 삼십 분, 다시 만원버스에서 삼십 분 시달려 서울의 외곽 지대까지 오는 동안 그가 오직 원하는 것은 휴식 뿐이었다 (216쪽)  
   

 그렇게 오로지 휴식을 바라며 들어온 집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병아리 소리는 남자로 하여금 식구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게 만들고, 동네 초등학교 앞에서 사왔다고 애지중지하며 병아리를 보살피고 있던 일곱 살, 다섯 살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당장 베란다로 내가라는 아빠의 명령을 어기고 몰래 방 안에 데리고 들어와 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감상이 읽는 나를 울컥하게 만든다. 



 

 

 

 

 

 

 

 

 

 

 


마지막 글 '꽃핀 날'에서 여자는 늦게 일어나 동동거리던 와중에 문득 유리문 너머로 목련 꽃망울이 터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숨이 막힐 듯한 전율을 느끼지만, 결국 식구들 아침밥을 제대로 못먹여 불평 속에 출근, 등교를 시키고 난후 다시 바라본 목련은 더 이상 몇 분 전의 그 목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뭔가를 깨닫는 장면이다.

   
  집 안은 갑자기 가위눌린 듯 조용해졌다. 솥 안에 새까맣게 눌어붙은 밥을 숟가락으로 긁어내다가 난데없이 후룩 누물이 떨어졌다. 슬프다거나 참담하다거나 따위 자극적인 감정의 작용이 없는데도 그랬다. 눈물이 어린 눈에 환시처럼, 착시현상처럼 피어오르던 목련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 굳이 그 꽃을 찾아보려 해도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꽃이 피어나는 그 운명적인 시간이 내 존재의 한순간과 만나 섬광처럼 부딪치고 사라졌다. 인생에의 꿈이나 그리움이라는 것도 그러한 것인가. (227쪽)  
   

작가의 이 통찰력 앞에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녀의 소설 속에는 이제 소설로만 보이지 않는 그녀의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통찰과 관조가 들어있다. 그래서 소설을 위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삶의 경륜이 녹아있는 '수필적'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러기에 짧은 우화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은 아닐지. 가을을 가을답게 하는 이 책을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역시 오 정희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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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3-28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으로도 급관심이군요.
아주 오래 전 읽어 본 것 같은데 작가에 대한 기억의 흔적이
내게 남아 있지 않네요. 기억하겠습니다.^^

hnine 2010-03-29 06:46   좋아요 0 | URL
오 정희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지요.
요즘 신세대 작가들과는 다르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분명한 세계가 있다고 할까요.

꿈꾸는섬 2010-03-29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정희 선생님 작품 정말 좋아요.^^

hnine 2010-03-30 00:15   좋아요 0 | URL
꿈꾸는 섬님 서재에서 안그래도 이 책에 대한 페이퍼 봤어요.
생활의 흔적이 끈끈하게 묻어나오는 글들이지요. 모든 얘기들을 작가가 직접 겪은 일처럼 담담하게 쓰면서 말이어요.

글샘 2010-04-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알라딘의 리뷰 당선 덕분에 오정희 님의 글을 만나게 돼서 감사합니다. ^^ 알라딘도, 나인님도...

hnine 2010-04-12 11:50   좋아요 0 | URL
아이쿠, 글샘님.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신기한 시간표 보림문학선 1
오카다 준 지음, 윤정주 그림, 박종진 옮김 / 보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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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를 읽다 보면 이 정도면 누구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순간의 착각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 대상으로 한 책이라도 이런 스토리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있다. 얼마 전에 읽은<The Mysterious Benedict Society>가 그랬고 오늘 읽은 이 책도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신기한 시간표'라는 제목부터 기발하다. 표지를 넘기고 두어 페이지 넘겨 보면 '서로 다른 초등학교에서 다른 계절, 서로 다른 시간에 생긴 이야기'라는 작은 글씨가 적힌 장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교실에서 보는 그런 시간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열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들에,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따라 아침,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셋째 시간, ...,방과 후, 한 밤 등으로 소제목을 붙였을 뿐이다.
다섯 명 이상하고 매일 아침 인사를 하자는 목표를 세운 2학년 어느 반. 그 다섯을 채우는데 교실의 금붕어, 새장의 앵무새도 동원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보통 어른들의 상상력으로 해볼 수 있을까? 양호실 까지 혼자 가는 길이 무서운 미도리가 자기와 관련된 색깔의 타일을 밟으며 앞으로 나가는 고양이를 만나 건너 뛰기 방식으로 무사히 양호실까지 갈 수 있었다는 이야기. 그 고양이는 아마도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도리의 상상력이 불러낸 고양이 일 것이다. 교실 바닥 틈새로 떨어뜨린 지우개를 도마뱀이 주워가지고 나오는데 특수한 지우개를 함께 가지고 나온다. 내가 쓴 글에서 나쁜 뜻의 단어만 지울 수 있는 지우개. 그러니까 내가 쓴 문장은 모두 좋은 뜻으로 고쳐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마음 속으로 몰래 바라던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겪게 된 어느 날, 원망 삼아 돌멩이가 되라고 속으로 빌었던 친구가 없어지는 사건이 일엊나자 순진한 아이는 정말로 그 친구가 돌멩이로 변했다고 생각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는 이야기도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독특하게 잘 그려냈다고 보여진다. 어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는 똑바로 있는 물건이 휘여져보이거나 뒤죽박죽 보이게 되는 현상, 아마 어떤 아이를 놀려서 그 아이가 울먹이게 되자 어린이다운 죄책감과 미안한 마음에서 발동한 상상력이겠지. 꿈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둠의 유혹을 듣지 않고 눈을 꼭 감고 있던 아이의 이야기, '누가 치즈를 먹었을까'에 나오는 여러 명이 동시에 할 수 있는 가위 바위 보 방식은 참 기발하지 않은가? 양손이 모자라면 입을 사용하여 세개의 가위, 바위, 보를 동시에 낸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점심 배식이 끝나고 나면 급식실의 아주머니들은 마녀가 된다는 상상은, 나도 예전에 가끔 점심 시간이 아닐 때 식당의 아주머니들은 무얼 하고 계실까 궁금했던 기억을 떠올리니 더 실감이 났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던 경험때문인지 저자는 학교를 무대로 한 환타지 동화를 많이 썼다고 한다. 낯설은 시간과 공간으로의 이동과 관련된 환타지가 아닌, 친숙하고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잠시 경험하는 상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아이들의 두려워 하는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바라는 염원이랄까,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램이 상상력의 문을 열고 눈 앞에 나타나게 되는 공통점을 안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는, 아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는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다. 정말 이런 책은 아무나 쓰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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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3-26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다른 일 하느라 다 못 읽고 반납했네요 ㅠㅠ

hnine 2010-03-26 17:40   좋아요 0 | URL
환타지 동화로 분류가 되어서 저한테는 별 재미가 못느껴질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았는데 하늘바람님도 다시 기회가 되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ㅁㄴ 2010-05-0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
 
행복도 내 작품입니다
월호 지음 / 마음의숲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나는 없다, 부처도 없다, 설법도 없다.
'없다'의 의미를 새삼 다시 배운다.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없음'이라면 허무주의와 다를 바가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없음이란 이 세상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모든 고정 관념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내 작품이라는 제목부터 마음을 끌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 반야심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지고 있는 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 '금강반야바라밀경 (줄여서 금강경)'의 내용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놓은 책이다. 모두 32장으로 되어있다는 금강경을 이 책 역시 32개의 소제목 아래 풀어놓고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어떤 느낌이 오기에 책을 반납하기 전에 여기에 옮겨본다.

1장 모든 것은 내 작품입니다
2장 꿈에서 깨어나세요
3장 하루하루를 완전연소하세요
4장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야 합니다
5장 몸뚱이는 체험학습의 교재입니다
6장 믿는 대로 체험합니다
7장 바로 지금 여기를 사세요
8장 진리는 어디에든 있습니다
9장 마음의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10장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채울 수 있습니다
11장 일단 감사하고 행복하세요
12장 부처의 행을 하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13장 인생은 한바탕 연극입니다
14장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15장 전할수록 알게되고, 베풀수록 갖습니다
16장 과정 자체를 즐기세요
17장 나는 내가 창조합니다
18장 모든 사람이 부처입니다
19장 있으면서 없습니다
20장 진정한 모습은 겉모양이 아닙니다
21장 우리는 이미 완벽합니다
22장 한 가지 정답은 없습니다
23장 나의 주인은 나 자신입니다
24장 마음공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25장 우리에겐 각자의 향기가 있습니다
26장 밖에서 주인을 찾지 마세요
27장 주는 마음을 연습하세요
28장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용감합니다
29장 연 따라 나타났다 연 따라 사라집니다
30장 세계도 없습니다
31장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32장 변화의 열쇠를 손에 쥐세요 

내용은 부처님과 수보리 존자의 문답 형식으로 되어 있다. 수보리라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굉장히 좋았으나 성격이 모나서 가족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여 혼자 집을 떠나 살다가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되었고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행했다고 한다. 
 좋은 꿈을 꾸려하지 말고 꿈에서 깨어나도록 하자는 것 (2장의 내용), 부처님은 출가자들에게는 무소유를 권했지만 재가자들에게는 열심히 생업에 종사할 것을 권장하여 가정생활에서 매일 생활비를 충당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것 (즉 불교의 현실성), 인욕 (忍辱)은 단지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복과 덕에 더 이상 관심이 없음, 즉 애착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는 것, 어리석은 사람은 불쾌함과 고통을 느끼면 그 고통을 나의 체험으로 여기고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내가 느끼는 이 불쾌함과 고통은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므로 곧 인연따라 사라지게 마련이라 생각하고 나의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니 집착할 것 없고 고정 관념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 (29장 내용). 
나는 내가 현재 만들어가는대로 계속 변한다. 마음을 한군데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물 처럼 계속 흐르게 하라. 그렇지 못할때 집착이 생기고 애착이 생긴다. 모든 존재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한 자리에 변하지 않고 있는 법이 없다는 의미의 무 (無). 고정된 실체로서의 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다는, 역설적이기까지한 금강경의 말씀의 핵심은 '머무르지 말라'는 것 아닐까. 과거에도 머무르지 말고, 미래에도 머무르지 말며 오직 지금, 여기를 사는 것. 지금 여기서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아무 것도 없다. 나도 없고 책도 없고 말씀도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며 살 뿐.
이 책을 읽고난 지금, 마음이 참 고요하고 평화롭다. 

(별점을 네개만 준 이유 : 책에 오자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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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4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5 0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첫사랑 미래의 고전 1
이금이 지음, 이누리 그림 / 푸른책들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금이 작가의 책은 쉽게 읽힌다. 억지도 없고 과장도 없고 그저 물 흐르듯 자연스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 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금이 작가의 책에는 예외가 별로 없다. 이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조심스러운 것은 내가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어본 것은 아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교과서적이라고 할까. 어떻게 보면 새로울 것이 별로 없는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다. 제일 바람직한 결과로 이야기의 끝이 맺어진다. 그래서 이금이 작가의 작품은 흠 잡을데 없고, 흠 잡고 싶지도 않지만 별표를 주면 다섯개까지 못주게 되고 만다. 정해진 수위를 넘지 않는, 예상되는 스토리 라인을 깨지 않는 한계, 항상 그런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좋았던 느낌을 쓰기 보다 이런 감상을 쓰는 것이 몇 배 더 망설여지고 주저하며 쓰게 되지만 최소한 솔직해지자는 결단을 하고 쓴다. 어느 작가나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이 있겠는데 이금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면 항상 아름다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한마디로 '좀 더 재미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좀 더 재미있으려면 어떤 소재를 어떻게 펼쳐 나가야 하는 것일까. 그걸 내가 명쾌하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첫사랑. 6학년 남자 아이의 첫사랑 얘기이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자신을 성장시켜주었다면 어쨌든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도 놀라울 것이 없는, 완벽한 마무리이다. 그러니까 난 그게 아쉬운 것이다. 이 리뷰의 제목을 '고민되는 책'이라고 붙인 이유이다.
첫사랑. 제목만 들어도 얼마나 설레이는 말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 없고 마음의 준비 같은 것도 안 되있을 때 시작되는 사랑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생각해도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주 고운 분말의 앙금으로 마음 깊숙한 곳에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
같은 반 여자 아이 연아를 좋아하는 동재가 연아의 마음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동재의 이런 심리 묘사는 자세히 그려져 있는 반면, 동재의 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동재와 이제 그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게 되었을 때의 연아의 심리는 어떤 것인지 잘 나타나있지 않은 것이 좀 아쉽다.
동재 자신의 경험을 통해, 또 동재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이혼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민 아버지, 혼자 공부하러 스페인으로 떠난 엄마를 통해, 그리고 첫사랑 상대로부터 실연을 당한 후 평생을 혼자 살고 있는 이웃집 할머니를 통해, 우리의 주인공 동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배우고 있는 중이다.
가슴 속 하트가 빨갛게 빛을 발하고 있는 표지 그림은 따로 별 다섯개를 주고 싶었다.  

 

(언젠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 대해 혹평으로 가득찬 리뷰가 올라온 것을 읽으며 머리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라고 하면서도 마음은 많이 쓰라렸었다. 나의 이 리뷰가 누군가의 마음을 그렇게 불편하게 하지 않을지 내가 먼저 불편하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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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3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3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10-03-24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평은 독자만이 누리를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해요. 평론가와는 다르잖아요^^
책을 고르고, 책값을 지불하고, 시간을 쪼개 읽고... 불평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숙한 작가라면 자기 글을 읽고 불평해주는 독자에게 고마움을 느낄 거 같아요.ㅎㅎ

hnine 2010-03-24 18:13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참 다행이겠습니다. 제 생각이 성숙하지 못했네요. 제 마음의 불편을 해소시켜주신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순오기 2010-03-24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우리 모녀는 저런 느낌을 '이금이스럽다'는 말로 대신하지요.^^
작가에게 저도 여러번 이야기 했지만, 강연회에 온 독자들 질문에서도 빠지지 않는 얘기라 작가님도 잘 알고 자신의 한계라고 말씀하시죠.^^ 지난 가을 이금이 작가 광주강연회 페이퍼에도 썼지만, 해피엔딩이 아닌 상태로 등장인물을 놔두고 작가만 쏙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서 결국 해피엔딩으로 가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읽은 이금이 작가의 책 중에 <벼랑>은 고딩이 주인공인 단편집인데 기존 작품과 차별화되는 작품이었어요. 읽으면서 많이 아팠고 작가 후기를 보면서도 제가 울었던 작품이죠.

hnine 2010-03-25 04:51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께서 하하~ 웃어주시니 저도 따라 하하~ 하고 싶어지는데요? '이금이스럽다'라는 말도 재미있고요. 작가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의 한계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신다니 위의 lazydevil님 말씀대로 성숙한 작가, 맞으시네요/
<벼랑>도 꼭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순오기님을 울린 작품이라...

순오기 2010-03-25 08:57   좋아요 0 | URL
저는 '좋은 작품'의 기준을 내가 울었느냐, 안 울었느냐로 단순히 평가하는 독자예요.^^
제가 평가단 하면서 무조건 '좋다'라는 리뷰를 쓸 수 없는 성향이라 고민을 많이 합니다. **책들에도 콕콕 지적한 리뷰를 올리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안 편하지만, 작가나 출판사에는 그런 감상이 약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풉니다.^^

hnine 2010-03-25 12:42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나를 울렸느냐, 즉 내 마음을 움직였느냐...
책을 읽고서 지적할 사항은 지적을 해야 옳은 리뷰가 되는 것 맞지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단순히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근거 있게 내 생각을 나타낼까, 그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테헤란의 지붕>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테헤란의 지붕
마보드 세라지 지음, 민승남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이란 출신 친구가 있었다. 나보다 나이는 훨씬 어렸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친하게 지내던 아이였다. 이란의 테헤란에서 나고 자라다가 가족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했는데, 미국에서의 정착도 쉽지 않았는지 이 친구는 오빠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와 있는 중이었고 부모는 다시 이란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영국에서 미국식 영어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본국을 떠난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무슬림의 전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와 보였지만 여자들에 가해지는 제약, 지나치게 가족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관계의 불편함 등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곤 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친구 생각이 났다.
이 책의 저자는 원래 이란 출신의 미국 작가인데 열아홉살 때 가족과 함께 이란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지금까지 미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역시 저자가 이란을 떠나 온 나이와 비슷한 십대 후반의 젊은이들이며 글의 화자가 되는 '파샤'는 특히 저자가 겪었듯이 곧 미국의 대학으로의 진학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시대적 배경은 1970년대. 이란의 독재 국왕 팔레비가 미국으로 추방되기 바로 몇 해 전, 독재 정권 유지를 위해 국민에 대한 탄압과 제제가 심하던 시기이다. 그런 압력에 대해 불의를 느끼고, 앞서 간 선배들을 추모하며 반항심을 느끼지만 십대 후반이란 나이에 맞게 사랑과 우정에 쏟는 생각과 시간들로 자신의 인생을 어둡게만 엮어나가지 않는 주인공과 그 친구들의 현재의 삶과 미래에 대한 꿈이 잘 그려져 있다. 주인공인 '파샤'가 오랫 동안 흠모해오던 이웃 소녀 '자리'는 이미 결혼할 상대가 정해져 있는 상황이었고, 그 상대 남자는 파샤도 존경해 마지 않는 인품과 주관을 가진 사람이기에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연정을 품고 있던 중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파샤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고  파샤는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체제에 대한 반항심을 몸으로 보여주는 자리의 행동, 흠모하던 대상을 하나씩 잃어가며 오는 상실감, 학교 역시 국가의 감시와 탄압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샤와 그의 친구들의 방황은 계속되지만 매일 밤 집의 가장 높은 곳, 지붕에 올라가 하늘의 별을 보며 키우는 꿈보다 큰 절망은 없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꿈을 꾸고 키울 수 있으며 그렇게 삶을 계속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을 희망적이고 아름다웠다고 기억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청소년 시절에 실제로 지붕 위에 올라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작가로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붕이라는 장소는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바라보며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장소가 되어주나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이 '테헤란의 지붕'인 것은 상징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지붕 위에서 갖게된 작가의 꿈을 50대에 이르러 첫 소설을 펴냄으로써 마침내 이루게 된 작가의 행보를 봐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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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3-23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팔레비 체제하의 이란의 지붕 위에서 꾼 꿈을 50대에 이뤘다니 부럽습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서 또 희망이 있는 거겠죠.
이런 작품이 뉴베리상을 많이 받던데...

hnine 2010-03-23 13:10   좋아요 0 | URL
순탄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꿈보다는 이렇게 절절한 사연을 거쳐 이루어지는 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지난 해 아주 많이 읽힌 책 중의 하나라고 해요.

2010-03-23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3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늘바람 2010-03-23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50대. 50대에 가면 저도 꿈을 이룰 수 있을지.

hnine 2010-03-23 13:1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무슨 말씀을요.
하늘바람님보다 훨씬 일찍 50대에 도달할 저는 어쩌라고요~ ^^
일단 그렇게 이루고 싶은 꿈을 가지고 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