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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호밀밭의 파수꾼'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나 역시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면서도 그 이유를 지금도 확실히 모르겠다. 다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라도 공통적인 상처가 마음 저 깊은 곳에 있나보다. 건드려지기 전엔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처가. 호밀밭의 파수꾼에서의 주인공이 자신의 그런 상처를 드러내는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그런 상처로부터 지키고 보호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읽는 사람들은 공감 이상의 무엇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샐린저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홉가지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시큰둥했던 것은 아마 여기 저기 조각처럼 돌아다니는 잡문들을 출판사 측에서 임의로 묶어 낸, 상업적 목적으로 태어난 책일거라는 짐작때문이었다.
그러다가 6년 만에 결국 이 책과 대면했다. 돌고 돌아서.
Ellen Wittlinger라는 미국의 소설가의 Noodle soup for nincompoops 라는 글을 읽고 좋아서 그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 읽은 것이 Hard Love. 이 책 역시 무척 좋았는데 이 책에서 직접 대놓고 인용하진 않지만 장래 소설가가 되고 싶어하는 작품 속의 주인공이 샐린저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자기가 만드는 잡지의 이름도 '바나나 피시'라고 붙인 것을 보면.
'그래, 다시 만나보다 샐린저' 라고 마음 먹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이 그래서 그런지 처음엔 이 책이 샐린저의 에세이 류인 줄 알았는데 아홉 편의 짧은 소설 묶음집이었다. 1948년에서 1953년 사이에 여기 저기 발표된 작품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최근 우리 나라 소설가 오 정희의 작품집을 봐도 그렇고, 어떤 경지에 있는 작가들에게는 꼭 장편만이 그 역량을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짧은 소설의 임팩트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이 책은 당당히 보여주고 있었다.
샐린저는 작년에 타계하기까지 어떤 생을 살아왔을까. 작품으로 작가를 짐작해보는 것이 어쩌면 아무 소용없는 일일지 모르겠지만 무관하지도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첫페이지이 화두라는 것도 그렇다.
두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면 한 손바닥으로만 치는 소리는 어떤 것일까?
'샐린저가 종교인이었어? 아니면 한때 종교에 심취했기라도?' 라는 생각은 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인 <테디>를 읽으면서 또 하게 되었다. 열 살 소년이 일기장에 끄적거린 내용이라는게
내 생각에, 삶이란 하찮은 선물이다. (329쪽)
라니.
아무리 그 소년이 천재적이고 하루를 명상으로 시작하는 독특한 아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 작품의 결말을 읽고 또 읽지만 아직도 나는 도대체 어떤 끝맺음인지, 그리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을 못한다. 그 마지막 비명은 누구의 비명 소리였는지? 누구에 의한 비명 소리였는지. 천재적인 삶이 곧 행복한 삶인가? 오히려 주위의 자기보다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평생을 소통이 안되는 답답함 속에 살면서 또다른 소외의 둥지나 틀게 되지 않을까?
이 책을 읽게한 결정적인 작품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의 시모어 역시 보통의 일생을 살아간 사람은 아니다. 샐린저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약하다. 약해 빠졌다.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일생 반전을 이루는 그런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인물들은 눈 씻고 찾아도 없다. 대신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경험에 나머지 일생이 지배당하는 삶을 사는 찌질이들.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다. 자기의 삐끗한 발목 (ankle)을 uncle (아저씨)로 말바꿈하여 <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라는 제목을 탄생시킨 이야기 속에서 그 중년 부인의 수다는 곧 지나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고 후회이고 허무의 눈물이었다. 보이지 않는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 계속 언급하는 어린 딸에 대한 애처로움은 곧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애처로움이었겠지.
<웃는 남자>에서 그 남자의 웃음은 진정 웃음이었던가? 오히려 끔찍하지 않은가.
<작은 보트에서>에 나오는 어린 아이 라이오넬. 틈만 나면 보트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그 유대인 어린 아이는 혹시 작가의 어린 시절의 한 추억 자락에서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도 해본다.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에 나오는 인물 시모어가 여기서는 라이오넬의 삼촌으로 언급된다.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안정되어 보이는 관계는 이미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사랑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야 맞는지도. 사랑은 비참함. 비참함과 비릿함으로 남는 찌꺼기. 이 작품에 나오는 '나'는 후반부엔 X라는 전혀 다른 인물로 바뀌기도 하는데 이 인물 역시 작가의 분신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에스메 남매가 주인공 '나'와 헤어지는 장면의 묘사가 참 독특하다. 이 리뷰의 마지막에 인용해보기로 한다.
<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머리 희끗한 남자 '리'의 옆에 처음 부터 줄곧 있던 여자가 바로 '아서'가 전화로 그렇게 절실하게 호소하는 여자 '조아니', 그렇지 않나요 샐린저씨? 조아니가 지금 막 돌아왔다고 거짓말을 하는 아서의 심리는 그럼 뭔가요?
<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 시대>에 등장하는 그 젊은, 아니 어린 화가가 다른 사람들을 속여가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보고 샐린저씨 당신이 글을 쓸때 가끔 드는 느낌을 그렇게 작품 속에 그려놓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니길 바란다고 하지 않겠어요. 샐린저씨 당신은 어쩌면 생각보다 교활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해놓겠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와 사람들이 좋아할 이야기 속에서 고민한 흔적이 나타난 부분을 나는 다음 부분에서 찾았다.
다음 나흘 동안 모든 여가 시간과 완전히 내 것은 아닌 얼마간의 시간까지 이용하여 나는 미국 상업미술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되는 열두어 점의 견본 작품을 그렸다. 대개는 엷게 칠하고 종종 돋보이게 하기 위해 선을 그려넣기도 하면서, 나는 시사회 날밤 리무진에서 나오는 야회복을 입은 사람들, 살아오면서 음흉한 부주의의 결과로 고통을 당해본 적이라곤 한번도 없을, 또한 아마도 음흉스러움이라고는 가져본 적도 없을 최상류층 커플을 그렸다. (...) 텔레비전에나 나올 법한 볼이 발그스레한 마음씨 고운 아이들이 깨끗이 비운 아침 식사 쟁반을 들고 조금만 더 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그렸다. 피가 스르는 잇몸, 얼굴의 잡티, 추한 머리칼, 불완전한 혹은 부당한 생명보험 같은 국가적인 악으로부터 보호받은 결과 세상에서 근심 하나 없이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가슴이 큰 웃는 얼굴의 여자들을 그렸다. (257쪽)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웃은 유일한 순간은 다음 문장을 읽을 때 뿐이었다.
여름에 활동하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반바지를 입은 미국 여자라는 사실을 음미했다. (300쪽)
그 외에 나는 내내 심각했고 진지했다. 샐린저씨, 농담도 좀 던져보시지요? 하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한번 읽고 또 한번읽느라 책은 이미 반납기한일을 넘겨버렸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난 기꺼이 또 한번 이 책을 읽을거라 생각한다. 그게 언제일지. 삶이 하찮은 선물이라고 말하기 까지 그 사람은 여한없이 생을 사랑해보았으리라는 지금의 생각과 아주 다른 생각을 하게 될 때일지 나는 모른다. 그저 지금은 '조금은 덜 감상적인 생활방식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기 시작해야 할 때'.
(마지막 문장은 이 책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 비참함으로> 중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