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읽고서 올린 책 <보물 상자>에 나오는 그 말,
"넌 누나이고 걔는 동생이잖아." 소리를 나 역시 참 많이 듣고 자랐다.
내가 여섯살 되던 해 태어난 남동생.
아기 낳으러 병원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던 중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바로 아래 여동생을 데리고 우리 집에서 가장 높은 곳, 장독이 있는 대문 옆 지붕에 올라가 펄쩍펄쩍 뛰며 만세를 불렀다. 우리 엄마가 아들을 낳았다고. 어린 마음에도 우리 집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만한 경사가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 다섯 살 때까지 나는 남장을 했다. 어릴 때이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해주는대로 하고 다녔겠지만 그 때 사진을 보면 머리도 남자 머리, 옷도 모조리 남자 아이 옷을 입고 있다. 두 해 뒤에 태어난 내 동생도 딸. 할머니 계신 우리 집에서는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어서 여동생은 태어나서도 별로 큰 환영을 못 받았다. 어렸을 때 이 여동생은 손가락 빠는 버릇이 있어서 고쳐 주려고 별별 방법을 다 썼었는데 어디선가 이 버릇이 애정 결핍 때문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엄마는 많이 마음 아파하셨었다. 그 후로 엄마는 바로 세째 아이를 낳으셨다는데 미숙아로 태어나 낳자 마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 아이도 역시 딸.
그리고서 태어난 아이가 나와 다섯살 터울의 지금의 남동생이다. 집에서 얼마나 귀염을 받고 자랐을지는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새벽에 출근하셔서 한밤 중에 퇴근하시는 아버지, 역시 매일 출퇴근하시는 직장이 있으셨던 엄마 대신 우리는 할머니 밑에서 컸는데 과자면 과자, 음료수면 음료수, 무엇 하나 똑같이 나눠주시는 법이 없었다. 늘 남동생은 더 많이, 나와 여동생은 적게. 그냥 그런가보다 하며 받았던 나와 달리 밑의 여동생은 할머니에게 항의도 곧잘 하고 더 받은 남동생 것을 쟁취해내려는 시도도 자주 했었다.
"넌 누나이고 걔는 동생이잖아." 라는 말에 맞아, 나는 누나이고 쟤는 동생이야 하면서 아무 의의를 달줄 몰랐던, 그때도 어리숙했던 나.
그 남동생이 벌써 우리 나이로 마흔이다. 결혼해서 미국에 살면서 비자 문제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 칠순 때에도 참석을 못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아이도 낳았고 비자 문제가 해결되어 비로소 올해, 정말 오랜 만에 귀국했다. 바로 어제.
당장 달려가서 보고 싶은데 내가 월요일까지 완결지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어제 하루 종일 매달려 끝마치고 오늘 간다.
미국에서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가 옆에서 계셔주시진 않았지만 아이를 낳았다는 전화를 받자 마자 내가 사는 곳 까지 미국의 다른 주로부터 먼 거리를 달려와준 동생이다. 아직 퇴원도 안해서 병원에 누워있는데 동생과 동생처가 보온병에 미역국을 끓여서 병실로 갖고 들어오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편과 아이가 어서 일어나야 준비하고 갈텐데, 마음은 벌써 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