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서, 혹은 시간적 여유를 두고 공연을 다시금 생각한 후에 쓰고자 하는 생각으로 인해 공연 후기가 많이 늦어졌다. 20일 가까이 지났으니, 좀 지나친듯 싶기도 하다.(그런데 내 경험상으로 여행을 다녀와서도 바로 여행때 찍었던 사진을 보는 것은 별 감흥이 없다. 한 두달 정도 지난 후에 사진을 보면 나름 여러가지 생각들이 들어 좋더라.) 

공연을 본게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해도 말러 6번 공연은 정말 최고였다. 더이상의 수식어가 필요없다. 90분 가까이 되는 공연이 끝난 후의 내 느낌을 한마디로 애기하면 "90분의 시간이 10분 처럼 느껴"졌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이다. 이런 경험 처음이었다. 공연 내내 '긴장과 이완'의 반복으로 인해 숨 쉬기 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럼, 전반적인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자. 공연 전 예습삼아 들어본 음반이 뭔가 생각해보니 좀 많은 듯 싶다.(이러는 거 솔직히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두 세개 정도의 음반을 찬찬히 들어보는게 곡의 이해를 더 도와줄듯 싶은데, 워낙 내 스타일이 이것저것 찔러보는 스타일이라...ㅠ.ㅠ)

Leonard Bernstein, New York Philharmonic, 1967, SONY

Sir John Barbirolli, New Philharmonia Orchestra, 1967, EMI

Herbert von Karajan, Berliner Philharmoniker, 1975(1977), DG

Leonard Bernstein, Wiener Philharmoniker, 1988, DG

Klaus Tennstedt,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1991, EMI

Pierre Boulez, Wiener Philharmoniker, 1994, DG

Michael Gielen, SWR Sinfonieorchester Baden-Baden und Freiburg, 1999, HANSSLER
 

바비롤리의 뉴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1967년 음반은 노먼 레브레히트의 책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음반이라 고클래식에서 다운받아 들어보았다.(솔직히 잘 모르겠다. 바비롤리의 말러는 나에게는 그닥이다.) 카라얀의 베를린필하모닉 음반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지만 나에게는 좀 심심한 연주인 듯 하다. 나에게 가장 와닿는 음반은 역시 레너드번스타인과 빈필하모닉의 1988년 녹음 앨범과 텐슈테트와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1991년의 전설적인 실황 녹음이 딱이다. 거기다 하나 추가한다면 이들과는 스타일이 조금(?) 다른 불레즈의 앨범일 것이다.  

하여튼 공연장에서 음악을 들을때마다 느끼는 건, 아무리 레퍼런스 급의 앨범이라 하더라도 중간정도 실력의 실황 공연을 직접 듣는 것이 곡의 이해, 느낌 전달이 더 쉽다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이번 서울시향의 공연이 중간 정도의 실력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절대!!) 

8시 조금 넘어서 단원들이 모두 자리를 잡았다.(공연장에서 잊어버렸는지 공연전 매번 나오는 안내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악장은 루세브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번 공연의 악장은 웨인 린이 맡았다. 금관 파트를 보니 호른이 10명 트럼펫이 5명으로 금관 파트에서의 화력이 기대되었다. 악장이 인사를 한 후 드디어 정명훈 지휘자께서 포디움에 자리를 잡았다. 1악장이 시작되었다. 우선 러닝타임은 23분 정도였다. 느린 연주가 25분 정도인것을 생각하면 중간 정도의 러닝타임이었다. 드디어 연주 시작. 1악장의 첫 주제 "빰빰빰~~"은 정말 압도적이었다. 특히, 첼로주자들의 표정과 활놀림은 절도있으면서도 강하게 느껴졌다.(그날 좀 충격적인 장면은 첼로 수석인 주연선씨가 다른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살이 쪄있었다는 것이다. 급격하게...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좋아라하는 2바이올린 제2수석 김효경씨를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거기다 오케스트라 여성단원들이 공연장에서 좀처럼 입지 않는 단정하지만 여성미 물씬 느껴지는 깊게 파인 검은색 V-neck을 입고 나왔다. ㅋㅋ 좀 변태스럽나??) 

1악장에서의 백미는 첫주제부에 해당하는 부분에서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박력있는 "빰빰~"이지만 그것만큼 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부분은 15분 정도에 나오는 호른 솔로 파트였다. 처음보는 호른주자였다. 내 생각으로는 객원수석인 것 같았는데, 나이도 20대 중반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저음부분을 길고 안정적으로 뽑아내는 실력이 아주 안정적이며 미려한 느낌이었다. 서울시향의 공연에서 내내 호른 파트가 상대적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늘 공연에서는 좀 기대를 해도 될 듯 싶었다. 그런데 이날은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던, 트럼펫 파트에서 불안정한 모습이이 많이 나타났다. 얼굴 표정을 보니 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매번 잘 할 수는 없을 듯 싶다.)  

 

이번 공연은 스케르조가 2악장에 배치되었다. 연주시간은 13분 정도로 대부분의 음반이 12-13분대 런닝타임을 보이고 있다. 스케르조 악장을 들으며 든 생각은, 확실히 말러의 음악에는 뭔가 '정신착란'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말들을 여러 글에서 들은 듯 싶은데, 이번에는 내 스스로 온전히 느껴본 것이다. 그리고 스케르조 악장에서는 목관악기군에서의 잔실수들이 몇번 들렸다. 

3악장의 16분 정도로 다른 음반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 안단테 악장에서도 호른 솔로 부분에서 보여준 이 이름 모를 연주자의 실력은 대단했다. 이 부분에서 보여준 소리는 말러 5번의 아다지오 악장에서 현악기군이 보여주는 애절함보다 훨씬 더 가슴에 와닿았다.(솔직히 서울시향의 5번 공연에서의 아다지오 악장은 좀 지루했다.) 앞으로 이 호른 주자를 자주 공연장에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자연적으로 생겼다. 

고등학교 때 한창 Rock 음악 들을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그냥 듣다가 계속 들을수록 하나의 습관이 생기는데, 악기 소리를 전체적으로 듣는게 아니라 기타, 베이스, 드럼(나중에는 심벌, 베이스드럼, 스네어드럼, 탐탐 등으로 구분해서 듣게 된다) 등 악기별로 소리를 구분해서 듣곤 했다. 이번 공연장에서도 음반으로 들을때와는 다르게 각 악기별 소리를 구분해서 듣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서 알게된 것은 클라리넷의 음역이 생각보다 넓은 것 같았다. 이럴때 좀 아쉽다. 내가 음악을 좀 잘 알면 찾아보고 정확하게 알 수 있을텐데...나중에 기회되면 좀 더 자세하게 클라리넷의 소리를 듣고 싶다. 

드디어 하일라이트 4악장이다. 운명의 망치질이 이어질... 1악장부터 느낀것이지만 곳곳에 등장하는 소방울 및 타악기들의 소리는 곡의 분위기를 멜랑콜리하게 만드는 요소인듯 하다. 4악장에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나무망치의 등장을 숨죽여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언제냐, 언제냐, 언제냐...하는 마음이 이어지며 가슴을 옥죄어 오는 찰나 드디어 타악기 수석인 에드워드 최의 나무망치 타격이 이어졌다. 정말 소름이 확~~ 절대 스피커, 헤드폰으로는 들을 수 없는 공연장에서만 느낄수 있는 나무망치 타격음의 잔향, 진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첫번째 나무망치 타격에서 아쉬운 점은 최수석의 타격이 좀 소심한하게 억제된듯 보였다. 그런데 이것은 뭔가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두번째 타격에서는 좀 더 강하게 이어졌다. 두번째의 충격은 더욱 컸다. 

 <사진_한국일보>

그런데, 최수석의 움직임에서도 느껴졌지만, 이번 공연에서의 나무망치 타격이 2번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지없지 세번째 망치 타격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부분은 정말 아쉬웠다. 내가 곡의 해석적인 측면을 애기할 필요는 전혀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단, 세번째 망치 타격의 의미가 뭔가 비극적인 곡의 느낌을 배가시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면 공연장에서 보는 관람객은 당연히 그 영웅의 죽음을 의미하는 나무망치 타격을 하는 연주자의 '액션'에서도 무언가를 느낄것다. 그런데 세번째의 타격은 정명훈 지휘자의 사인이 떨어진 후 이루어졌는데, 그때 최수석의 '액션'이 좀 주저주저하는 느낌이었으며, 자신감이 없어보여 보는 이로 하여금 세번째 나무망치 연주에 '확신'이 아닌 '의심'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곡의 느낌은 곡의 부제처럼 '비극적'이었다. 4악장 종소리는 그런 의미에서 저승사자의 발걸음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런 곡의 '비극미'를 정리할 시간이 역시 필요한 음악이 6번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4악장에서 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공연장에는 그럴 준비가 되 있지 않은 듯하다. 정명훈 지휘자도 '안다 박수'가 걱정되었는지 너무 빨리 손을 내려버린 느낌이었다. 이 부분은 공연문화가 더욱 좋아지면 나아지겠지 기대해본다. 

이번 공연을 통해, 더욱더 서울시향에 애정이 가게되었다. 그리고 말러의 6번 교향곡에 대해서도 애정이 가게 되었다. 다가오는 7번과 9번 대망의 8번도 기대된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와 상상은 금물. 

ps : 이 날 공연장에 가니 서울시향의 2012년 시즌 프로그램이 나왔다. 아주 관심있는 공연이 많다. 겐나니 로제스트벤스키 부자의 공연과 정명훈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그리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콘서트 버전 및 모차르트의 레퀴엠, 피아니스트 볼로도스와의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2번, 낙소스에서 많은 음반을 선보인 안토니비트의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 등. 

11월 15일이 회원 티켓 오픈일이다. 이 날 표 값 좀 나오겠다. 그래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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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zidon 2011-12-10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후기 잘 읽었습니다.
참고로 첼로 수석 주연선씨는 현재 출산 휴가에 들어갔습니다. 임신으로 체중이 증가하신 겁니다. ^^; 대신 어제 말러9번 연주회 때는 송영훈씨가 객원수석을 하셨습니다. ^^

햇빛눈물 2011-12-14 08:07   좋아요 0 | URL
아 그랬군요. 전 그런줄로 모르고 갑자기 변하셔서 건강에 이상이 있으신 줄 알았네요...그리고 송영훈씨의 9번 연주는 상당히 인상깊게 봤습니다. 연주 후 지휘자가 악장이 아닌 첼로수석에게 먼저 악수를 하는 것도 처음 봤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이크 세계지리 - 지도 따라 지구 한바퀴, 세계가 가까이 보인다
이우평 지음 / 현암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교사 모임 계간지에 리뷰 글을 쓸 일이 있어 오랜만에 리뷰 페이퍼를 작성한다. 처음 리뷰 글을 쓸때는 허둥대둥 어려웠었는데, 이것도 몇 번 써보니 좀 요령이 붙은 듯 싶다.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지리 교양서적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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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세계지리, 유익한 세계지리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지리 책’에 목 말라있는 편이다. 매일 인터넷 서점 웹페이지에 들어가 새로나온 책들을 살피며 “뭐 새로운 책 없나”하며 확인하는 습관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지리 서적의 경우 새로 나온 책이 ‘가뭄에 콩나듯’한 게 현실이다. 지리와 가까운 역사쪽의 경우 이와 정반대인 현실을 보며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질투심까지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올해에는 나의 이런 생각을 날려 줄 멋진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한 권이 인천 신송고등학교에 근무하시는 이우평 선생님의 <모자이크 세계지리>이다.  

 

<책 내용 중 일부>

책의 여는 글 첫 문장을 보면 이 책이 어떻게 나올 수 있게 되었는지 알려주는 부분이 있다. “나는 늘 궁금했다.” 간단하지만 명료하다. 지리학도로서 교사로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공부하는 저자의 자세를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자세가 <모자이크 세계지리>라고 하는 광범위한 세계지리 교양서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책은 크게 지역별로 나뉘어져 있다. 〔아시아〕 파트에 47개의 소주제, 〔유럽〕 파트에 41개 소주제, 〔아프리카〕 파트에 19개 소주제, 〔아메리카〕 파트에 23개 소주제, 〔오세아니아 외〕 파트에 15개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소주제의 수도 지역별로 국가의 비중에 의해 균형적으로 안배되어 있는 편이다. 책의 목차를 대략 살펴보면 ‘지리’적인 주제만큼이나 ‘역사’적인 주제가 많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저자의 아래 글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씨줄과 날줄이 엮여 옷감이 짜이듯이 세계 지표 공간상의 다양한 인문·자연 현상들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변화가 만든, 즉 역사와 지리가 함께 내재된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내용들은 다분히 지리적이면서 역사적이고, 또 역사적이면서도 지리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지리책이다. 그렇다면 지리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 제목에 ‘지리’라는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다. 바로 역사적 사건에서도 지리적인 개념과 특징을 집어내 서술하는 저자의 탁월한 안목과 솜씨가 있기 때문이다.  

 

<책 내용 중 일부>

책을 읽다보면 “아 이게 이거 였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내용들이 많다. 예를 들어 p.44의 “‘몽골’과 ‘몽고’는 그 의미가 어떻게 다를까?”라는 부분을 보자. 중국은 중화사상에 바탕으로 동서남북의 주변 민족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고 불렀다. “진한 시대에 중국을 침략했던 훈족을 ‘시끄러운 노예’라는 뜻의 흉노(匈奴)로, 몽골 이전에 몽골 고원에서 활약했던 튀르크족을 ‘미쳐 날뛰는 것’이라는 뜻의 돌궐(突厥)로 격하하여 불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몽골은 ‘무지몽매한 옛것’이라는 뜻의 몽고(蒙古)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수업시간에 ‘몽골’을 ‘몽고’라 애기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또한, p.341의 “유럽의 풍향기 꼭대기에 수탉이 있는 이유는?”과 같은 부분을 읽어보면 우리들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의 모습에서 생각지 못한 역사적 사건을 알아가는 재미까지 우리에게 제공한다.(수탉이 달려있는 이유는 성서와 관련 있다고 한다. 정확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책을 읽어보시길) 이런 소소한 ‘앎’의 재미를 주는 이 책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p.370의 “에티오피아는 왜 1년이 13개월일까?”부분이다. 1년이 13개월이라는 사실도 신기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서기보다 7년 늦다고 한다. 그러니깐 현재 한국은 2011년이지만, 에티오피아는 2004년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 개념도 우리와는 조금 다르다고 한다.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낮과 밤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24시간을 반으로 나눈 12시간을 기준으로 낮 12시간, 밤 12시간으로 나눈다. 낮은 아침 6시부터 시작되고 밤은 저녁 6시부터 시작된다. 완전히 다른 시간 개념 때문에 원주민과 약속할 때에는 오전 시간인지 오후 시간인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예컨대 아침에 ”이따 8시에 만나요“라고 하면 오후 2시(14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필자가 에티오피아 원주민과 시간 약속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신기할 따름이다. 
 


<에티오피아 달력> 
 


<풍향계에 달린 수탉>

하지만 아쉬운 점도 몇 가지 눈에 띈다. 우선, 책의 두께가 너무 두꺼워 가방에 넣거나 손에 들고 다니며 읽기 상당히 불편하다는 데 있다.(개인적으로 필자는 이동시에 항상 읽을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다니는 습관이 있는데, <모자이크 세계지리>를 읽는 기간에는 상당히 힘들었다.ㅋㅋ) 출판사의 내부 사정이 있었겠지만, 종이를 좀 더 얇은 재질로 사용하거나, 2권으로 분권을 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또한 p.360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 사진같은 경우 좀 어색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배경이 되는 피라미드와 전면에 있는 스핑크스가 합성을 해 놓은 것처럼 사진속 모습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그리고 p.418의 ‘아메리카 대륙의 정식 명칭은 무엇일까?“ 부분에서는 지리적 개념의 중앙아메리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문장 구성이 어색해 내용의 정확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이런 부분은 다른 곳에서도 몇 군데 발견된다. 이 책의 중요한 독자층이 중·고등학생이라는 부분을 생각한다면 좀 더 내용 설명이 매끄러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p.405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관련된 설명에서 “흑인 노예는 아랍인들이 10세기 이전부터 유럽으로 들여오고”있다 라는 부분이 있다. 7차 교육과정 세계지리 교과서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많다. 심지어 “아프리카 노예들을 수입”했다라고 서술하는 책도 있다. 이런 부분에서 좀 더 세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물론 당시 흑인 노예들이 물건 취급을 받았은건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들이 읽는 책에서 까지 흑인 노예를 ‘취급’, ‘수입’과 같은 표현으로 서술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좋지 않을 것 같다.

이 책의 의미와 중요성은, 바로 누군가 알고 있으며 누군가는 궁금해 하는 내용들을 친절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작금의 ‘지리학’, ‘지리교육’의 상황은 아주 좋지 않다. 특히 외부적으로 교육과정이 ‘개악’되면서 지리학 분야에 상당한 충격이 예상된다. 아무리 지리 전공자들이 “지리학은 우리 삶의 생생한 경험 세계를 대상”으로 하기에 중요하다. 또는 “익숙하기에 주목받지 못한 일상 공간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삶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시켜 줄 수 있는 학문은 지리학이 유일하다고 주장하거나, “구체적이고 익숙한 요소들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또는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이 지리학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들은 알지 못하며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지리식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지리의 ‘외연’(外延)을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첫 번째는 당연히 학교 현장에서 재미있고 유익한 지리수업을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일반인, 학생들이 쉽게 ‘지리’라는 말과 내용을 접할 수 있는 교양서적의 출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모자이크 세계지리>가 많은 이들에게 읽혀 제2의 <모자이크 세계지리> 또는 <모자이크 한국지리>같은 책들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ps : 이우평 선생님이 쓰신, <한국의 지형 산책 1.2권>이나, 최근에 공저한 <살아있는 지리교과서 1.2권>도 지리를 좋아하는 일반인, 학생 혹은 지리 전공자라면 필히 읽어봐야 하는 서적들이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들께는 꼭 구입하셔서 읽어보길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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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밀려있던 학회지들을 읽으면서 재미있고 의미있는 논문이 있기에 요약해서 옮겨 본다. 춘천교대 교수로 계시는 박승규 교수의 논문이다. 박승규 교수님은 2009년에 자신의 박삭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한 <일상의 지리학-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다>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박승규 교수님이 현재까지 낸 책으로는 이외에서 공저한 <인문지리학의 시선>과 초등용 교재인 <우리 땅 방방곡곡>이 있다. <인문 지리학의 시선>은 1장 '개념에 담겨있는 지리학의 사고방식', 5장 '풍수 사상의 두 전통' 부분을 집필하셨다.)   

  

읽을 당시 인상도 강렬했지만, 글쓴이의 지리교육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는 글이었는데, '인문학으로서의...'은 그뿐만 아니라 작금의 지리교육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어떤 지리철학(사실 읽고 싶어도 선택의 폭이 없다. 국내서적에서는...) 책 보다도 실질적이고 현실의 고민의 흔적이 많이 보이는 글이다. 좀 내용이 길지만 지리학도로서 현재의 '지리학의 위기'를 고민해볼 수 있는 의미있는 글이라 생각된다.   

만약 앞으로도 지리 전공자들이 지리 교육의 필요성을 '당연'시 한다면 똑같은 논리로서 우리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의 논리에 의해 지리는 필요없는 학문으로 이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것이다. 지리교육의 필요성을 논리로 만들고 '설파'해야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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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지리학회지 제45권 제6호 2010년

인문학으로서 지리학과 지리교육
-존재이유를 묻다-
박승규

Geography and Geography Education as the Humanities:
Ask the Raison D’ˆetre
Seung-Kyu Park

1. 서론

국어, 영어, 수학이 모든 학교 교육의 과정에 핵심으로 자리한다. 그들은 두 과목으로 나뉘고, 수준별로 교육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입시 부담을 줄일 수 있다고한다. ‘ 누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누가’ 국가 단위의 시험을 그렇게 해야 사교육이 줄고, 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지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자신의 시선에 대한 성찰없는 성실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반드시 확인하게 해야 한다. .... 아이히만이 보여주는‘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가 갖는 심각한 악의 평범성을 보면서 그녀(아렌트)는 몸서리 친다. .... 다른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지리학은‘인정투쟁’을 벌여야 한다. 지리학은 다른 사람이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구성해, 다른 사람들에게 지리학의 존재이유에 대해 설파해야 한다.  

 

2. 지리학, 인간의 심연 세계와 일상 세계를 아우르다.  

1) 나는 공간을 차지한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 존재는 지리적이다. 하지만, 존재론에는 지리학이 결여되어 있고, 지리학에는 존재론이 결여되어있다. .... 지리학자는 구체적인 사물을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칸트(Kant)가 자신의 논리학 강의를 하기 이전에 자연지리학 강의를 열심히 했었던 것 역시 지리학이라는 학문이 갖고 있는 구체성에 기인한다. .... 벤야민(Benjamin)이 말하는 ‘무의지적 기억’이란 섬광처럼 순간적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기억 방식이다. .... 그렇기에 ‘무의지적 기억’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이어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지금여기’의 나를 드러내게 한다. 인간은 관념적이고 본질적인 논의를 통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매일의 작은 사물의 조각이 모여 완성되는 존재인 것이다. .... 사르트르(Sartre)의 주장처럼 ‘실존은 늘 본질에 앞선다.’ 본질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벗어난다. 어떤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놓여 있는가와 관련 없다. 늘 같다. 그런 점에서 본질은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저편에 존재하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과 다르다. 인간이 어떤 시공간에 놓여져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  

나에게 익숙한 동네의 부재는 인간관계의 부재를 양산하고, 그것이 곧 사회문제로 확대된다. ... 동네의 부재는 곧 익명성의 증가를 가져왔고,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소통의 부재를 양산한다. .... 자연스런 인간관계가 그립다. 연고주의가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것도 결국은 동네의 부재에서 기인하는 공간의 문제인 것이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부박함이 일어난 이유는 이런 근원공간에 대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기회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 

도시 공간을 구축하고 있는 다양한 사물을 통해 인간을 이해한다. 사물 속에 담겨져 있는 인간의 다양한 기억과 욕망을 통해 도시민의 마음을 이해하고, 몸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렇기에 지리학은 인간 존재의 심연에 다가갈 수 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지 않기에 인간 본질을 왜곡하지 않고 심연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리학이 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남아있는 마지막 명제를 데카르트(Descartes)는 생각하고 있는 나에서 찾았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명제는 ‘어디에서’ 생각하고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카르트는 라일(Ryle)이 지적하듯이 마음과 육체에 관한 이원론적 시각을 제시하는 범주적 오류를 범한다.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나와 ‘그때 거기’에서 생각하고 있는 내가 다를 수 있음을 데카르트는 인지하지 못했다. 생각하고 있는 내가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생각하는 내용은 달라진다. .... ‘나는 공간을 차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Shields(1997)가 데카르트의 명제를 바꾸어 제시하고 있는 이 명제는 지리학의 학문적 존재이유를 대변한다. 지리학이 인간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통로이고, 지리학을 통해 인간의 심연을 비출 수 있음을 말해준다.  ...

2) 지리학, 일상적인 삶을 비추다  

.... 공간적전환(spatial turn)’은 세상을 인식하는 커다란 흐름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공간이 세상을 읽어가는 중요한 인식소임을 세상에 알리는 인식의 전환이다. 지리학은 세상을 읽어내는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  

지리학은 우리 삶의 생생한 경험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익숙하기에 주목받지 못한 일상 공간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삶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다. 구체적이고 익숙한 요소들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내면세계에 다다를 수 있는 학문임을 알아야 한다. 익숙한 공간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하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다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학문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지리학은 그런 학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

3. 지리교육, 존재론적 성찰과 교과 정당성 확보  

1) 지리 교과에 대한 성찰: 지리는 꼭 가르쳐야 한다  

... 다른 과목명을 대입했을 때 논리가 어색하고, 성립할 수 없는 지리만의 고유한 필요성이 있어야 한다. ... 교과이기주의로 폄훼하는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지리학 고유의 논리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다 객관적으로 지리교과의 필요성에 대해, 지리교과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 세상을 향해 천명할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 지리를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지리를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것이 온전한 인간을 길러내는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지리교육에서 가르쳐야 하는 내용에 대한 숙의과정을 거쳐 과거와 다른 지리교육의 모습을 구성해야 할 때이다. .... 지리 교과도 ‘내가 지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지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당위’적인 시선을 버려야 한다. 지리는 존재 그 자체로 학생들 이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교과임을 알게 해야 한다‘. 존재’의 차원에서 지리 교과는 교육적 이상을 실현하는데 기여할 수 있음을 주장해야 한다. .... 우리가 지리를 전공했기 때문에 당연히 학교에서는 지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왜 지리를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을 가로막는다. ....  

칸트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을‘철학하기(philosophiren)’라고 한다. .... 지리적 경험은 ‘위치’를 통해서 궁극적 실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리적 경험에서 ‘위치’는 모든 지리적 현상들을 파악할 수 있는 출발점이며, 종착점이다. 지리학자는 지리적 현상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묻고, 왜 그와같은 현상이 그곳에서 발생했는지를 묻는다. 동일한 지리적 현상이라고 하더라도, 그와같은 현상이 발생한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지리적 현상에 담겨있는 의미는 달라진다. ....  

일상 공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를,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일상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지리교육은 ‘명제적 지식’ 내지는 ‘기술적 지식’에 대한 교육에서 벗어나 ‘실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이나 ‘묵시적 지식(tacit knowledge)’도 함께 가르쳐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준다. ....  

4. 결론

...........

결론은 무엇일까요? 지리 전공자로서 이 부분에 무엇인가 쓸 내용이 있어야만 한다는게 바로 '결론'이지 않을까요? 

ps : 이와 관련된 도서를 생각하면 순간 떠오르는 책들이다. 

       

     

  지리학의 본질 2(대우학술총서번역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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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10-2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슨 지식을 흡수할 때 장소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에 책을 읽거나 할 때도 지도를 찾아보는 습관이 있습니다.지리라는 과목은 지질학 기후학 등 이과분야에 걸쳐있는 분야도 있기 때문에 문과 편향적인 사람들도 관심을 두어볼 만한 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알렉산더 훔볼트 같은 사람은 지리학에서도 중요시하지만 특정분야를 떠나 많은 영향을 준 인물 아니겠습니까...그가 탐험 후에 남긴 기록들을 보면.저 역시 훔볼트 처럼 공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햇빛눈물 2011-10-27 12:56   좋아요 0 | URL
'훔볼트 처럼 공부'한다. 아주 좋은 말씀이십니다. 안그래도 예전에 훔볼트의 책을 구입한게 있는데 한번 훝어봐야겠네요. 요즘 '통섭'이란 말이 유행처럼 나오는데, 지리란 학문만큼 이에 어울리는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 70억 인구의 날'을 맞이하여 비슷한 시기에 여러 신문에서 관련 글이 실렸다. 한번 모아봤다. 묘하게 논점이 조금씩 다르다.특히, 한국일보의 기사는 특히 눈에 띈다. 균형적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글 같다. 사실 인구 증가가 정말 문제이기나 할까?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의 저출산으로 인한 미래의 인구 감소도 문제일 수 있을까? 난 잘 모르겠다.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애기하는 그 문제들을....?  

사실 인구 문제는 '절대적인 수'의 문제라기 보다, 분배와 균형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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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0.24  인구 70억 

기원전 8000년 세계 인구는 500만명가량이었다. 그로부터 10억명이 되기까지 약 1만년의 시간이 걸렸다. 미국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기원전 500년에 1억명을 넘었고 기원후 500년에 2억명으로 불어났다. 이후 세계 인구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크게 증가하지 못하다가 베토벤, 나폴레옹이 활동했던 1805년쯤 10억명에 이르렀다. 19세기 들어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100년여 만에 20억명이 됐다. 

유엔은 10월31일을 ‘인구 70억의 날’로 정했다. 아동인권 비정부기구 플랜 인터내셔널은 인도의 인구밀집지역인 우타르프라데시에서 31일 태어날 여아를 70억번째 아기로 선정하기로 했다. 인도의 인구 증가세가 가장 빠른데다 남아선호 사상으로 여아 살해가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매초 5명의 아기가 태어난다. 분당 300명이고 하루 40만명꼴이다.

세계 인구는 2025년 80억명에 이르고 2100년 100억명을 넘어설 것으로 유엔은 전망한다. 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의 인구가 크게 늘어 현재의 3배가 될 것이라고 한다. 인도는 2030년 16억명으로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인구대국이 될 전망이다.

인구 70억 시대는 유엔이 ‘70억 행동’에서 밝힌 대로 기회인 동시에 도전이다. 인구과잉에 자원고갈 우려가 나오지만 진짜 자원은 인간이고 식량이 절대 부족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 인구의 7분의 1인 10억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보다 많은 15억명은 비만으로 고민하고 있다.

지구상에 살았던 생명체의 개체수를 세어온 아벤티스그룹이 2000년 내놓은 연구결과를 보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태어난 인간의 총수는 1060억명에 이른다. 현존하는 우리는 1000억~1070억번째 생존대열에 놓여 있다.  

  

한국일보 2011.10.25  지구 인구 70억

아프리카대륙이 얼마나 넓은지 잘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반적 상상을 초월하는 넓이다(3,000만㎢). 세계지도에서 북극 주위에 몰려 있는 러시아(1,700만㎢), 캐나다(997만㎢), 알래스카지역(153만㎢)를 합친 것보다 훨씬 넓다. 미국과 중국(각 960만㎢), 서유럽 전체(500만㎢)와 인도(316만㎢)를 합친 것보다도 넓다. 그런 아프리카가 '크지 않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세계지도에서 왼쪽 끝에 위치해서도 그렇지만 위도를 기준으로 원통 형태로 쪼개 세계지도를 그렸기 때문이다. 둥근 지구본을 보면 아프리카대륙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

■ 유엔이 10월 31일을 '70억 인구의 날'로 정했다. 70억이라면 어른 아이 모두 인간 띠를 만들 경우 적도를 260바퀴 이상 돌 수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은 현생인류의 출현을 약 4만년 전으로, BC 8000년 경의 세계인구를 500만 명으로 추정했다. 서기 1년에 2억 명으로 추산됐던 것이 1800년 지나 10억 명이 됐다가 다시 200여년 후에 70억 명이 된 것이다. 산업혁명 과정에 살았던 맬더스(1766~1834)는 불과 50년 전(1750년)에 8억 명이었던 인구가 10억 명이 되는(1805년) 과정을 보면서 "인구는 기하급수적, 식량은 산술급수적 증가"라고 경고했다.

200여년 전 맬더스의 경고가 '70억 인구의 날'을 앞두고 가장 적나라하게 적용되어 가는 곳이 아프리카대륙이다. 전세계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대륙에서 중국 인도가 그 절반 이상이며 증가추세는 꺾이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중국 인도는 인구와 식량 관계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아프리카와는 달라 보인다. 2007년 아시아 인구 40억, 아프리카 8억이었으나 2050년엔 아시아 52억, 아프리카 18억 명이 된다고 한다. 아시아 인구가 30% 늘어나는 동안 아프리카는 125% 증가한다는 얘기다.

그 넓은 땅덩어리에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인구가 늘어난다면 아프리카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구와 식량 관계를 어떻게 제어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미래사회의 위기일 수도, 기회일 수도 있겠다. '70억 인구의 날'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 주고 있다. 국가 단위 우리(남한)의 인구는 1950년에는 세계 24위였으나, 2007년엔 26위로 됐다가 2025년엔 31위, 2050년엔 44위가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 인구는 갈수록 급증하는데 우리는 갈수록 격감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거시적인 담론이 시급한 상황이다. 

 

서울신문 2011.10.25  인구 10억명 시대 경제학자 맬서스 ‘2011년판 70억 인구론’  

“먹을거리가 부족한 게 아닙니다 어떻게 나눠먹을지가 문젭니다  

 누구는 이달 말이면 된다고 하고, 누구는 올해 말 또는 내년 3월이라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이미 넘었다고도 한다. 누가 맞았는지 정확히 알거나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계 인구 70억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꼼수’가 등장했다. 유엔은 아예 31일을 ‘70억 인구의 날’로 정했다. 한발 더 나아가 아동인권운동기구인 ‘플랜 인터내셔널’은 인도 북동부 우타르프라데시아주에서 태어나는 여자아이를 ‘70억번째 아이’로 공인한다고 발표했다. 1초마다 2.5명, 1분에 150명씩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죽는 사람까지 고려하면 누가 70억번째인지 어차피 알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벤트인 셈이다. 생명의 탄생은 축복이지만, 70억이 사는 지구는 마냥 축복할 수 없는 일이다.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파괴되고 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세계화 ‘덕택’에 한 나라의 불행은 다른 나라의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며 지구는 이미 완벽히 ‘연동’된 상태다. 과연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가상인터뷰 ‘후 앤드 왓’(Who&What)에서는 이 같은 질문에 답해줄 만한 사람의 강연을 들어보기로 했다. 바로 역사상 가장 ‘비관적’인 책을 쓴 사람으로 꼽히는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1766~1834)다. 지난 200여년간 그의 저서 ‘인구론’에 비할 만한 논쟁을 낳은 책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유일하다고 평가된다. 인구 10억명 시대에 살았던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 맬서스는 오늘날의 지구를 어떻게 평가할까. 2011년에 부활한 맬서스의 인구론 1, 2강을 들어보자.

제1강 ‘음울한 과학’ 인구론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강연을 기대했는데, 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시는 분들의 표정이 보이는군요. 네. 전 선천성 구개파열, 소위 말하는 언청이죠. 그래도 지금 보시다시피 말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실은 케임브리지대 지저스 칼리지에 입학한 이후에 여러 웅변대회를 휩쓸 정도였으니 강연에 대한 실망은 접으셔도 됩니다. 강단에 올라오기 전에 좀 들어보니 다들 저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시더군요. 이해합니다. 200년이 지났으니, 제가 한 일만 남고 제 자신은 희미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겁니다. 우선 간단히 제 배경을 얘기하면서 시작하죠. 전 대학을 졸업한 후에 목사로 일했고, 나름대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793년에는 지저스 칼리지의 평의원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 주요한 관심은 당시의 정치와 경제에 있었습니다. 특히 복지정책이나 식량가격정책에 대해 깊은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39살에는 이스트인디아컴퍼니 칼리지의 교수가 되면서 역사, 정치, 상업, 금융을 가르쳤습니다. 담당은 ‘정치경제학’이라는 처음 만들어진 분야였죠. 흔히 애덤 스미스를 경제학의 시조라고 여기지만, 스미스는 도덕철학 담당 교수였어요. 결국 제가 최초의 전업 경제학자가 된 셈이죠.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제가 오늘 여기 선 이유가 된 책. 바로 ‘인구의 원리에 관한 소론:고드윈, 콩도르세 및 기타 저술자의 연구를 논평하면서 장래의 사회개혁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함’이죠. 너무 기니까 그냥 여러분들이 부르는 대로 ‘인구론’이라고 부르기로 하겠습니다. 이 책은 원래 제 아버지와의 논쟁에서 시작됐습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목사였던 제 아버지 대니얼 맬서스는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당시 철학가나 정치인들과 비슷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던 단계였고 양모 수요가 늘어나면서 귀족과 중간계급이 대규모 목양지를 만들기 위해 토지를 닥치는 대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도시빈민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부양 자녀수에 따라 빈민에게 생활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역시 이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죠. 하지만 전 이 정책이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려는 장기적인 악수가 될 것으로 봤습니다. 왜냐고요. 간단합니다. 초판의 서문에 전 이렇게 적었습니다. 사실 책은 사라지고 이 문구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경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렇게 설명해 보죠. 인간은 가급적 많은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구는 1, 2, 4, 8, 16, 32…로 증가하죠. 반면 식량은 마음대로 증산할 수 없기 때문에 1, 2, 3, 4, 5, 6, 7, 8…로 늘어납니다. 그럼 지금 인구와 식량이 1:1이라면 200년 후에는 인구와 식량의 비율은 259:9, 300년 후에는 4096:13으로 벌어지게 됩니다. 물론 식량생산 기술을 개발하면서 격차는 좁아지겠지만 균등하게 늘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인류가 파국으로 가고 있다는 거죠. 물론 인구론은 그 해결책 역시 담고 있었습니다.

인구 증가속도를 늦추는 방법은 전쟁, 기아, 질병 같은 ‘적극적 억제’와 출산율을 낮춰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예방적 억제’가 있습니다. 전 예방적 억제를 권장했습니다. 목사인 제가 어떻게 적극적 억제를 하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혼을 늦게 하거나 빈민에게 청결을 권고하지 말고, 도시의 거리와 집은 더 좁고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게 하면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인구증가를 억제하고 평균수명을 줄일 수 있습니다. 잔혹하다고요. 인구증가로 모두가 파멸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어떤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구론은 ‘성경’이 아닙니다. 단지 제 스스로 생각했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제 주장을 담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전 평생 악평과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사회학적으로 해결책을 고찰했던 제 이론들은 빈민구제나 복지정책에 대한 반대 근거로 사용되며 기득권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18세기에 저보다 앞서 이런 내용을 발표한 사람은 많았죠. 단지 제 이론이 산업혁명 급변기의 영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또 비교적 간단명료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당시를 대표하는 이론이 되지 않았을까요. 




제2강 ‘수정 인구론’

자, 그럼 현실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2011년의 오늘을 보니 제가 예측했던 것과 확실히 다르군요. 200여년이 지났으니 인구와 식량의 비율이 259:9여야 한다는 말인데 전혀 그렇지 않군요. 원인을 분석해 보니 전 산업혁명의 초창기의 암울한 분위기에 치중했던 나머지 인류가 얼마나 놀라운 발전을 할지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구와 식량에 대한 제 전제를 다시 써야 하겠죠. 다만 변명을 하자면 저는 생전에 제 의견을 고치려고 노력했다는 겁니다. 인구론은 개정판이 나왔고 그때 내용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는데, 지금 사람들은 초판만 기억합니다. 예를 들어 2판에서 인구 문제 해결 가능성을 낙관하기도 했죠. 또 빈민구제도 전면적인 폐지보다는 점진적으로 상황을 보며 조절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강조했던 예방적 억제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수많은 국가들이 인구억제 정책을 썼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아이를 적게 낳고 있습니다. 인구증가율이 높은 저개발 국가에서는 결혼연령을 늦추고 피임을 유도하는 등 제 200년 전 주장을 쓰고 있습니다. 인구는 늘어나지만 인구증가율은 둔화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언제 실질적으로 줄어드느냐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인구증가가 식량과만 연관을 맺는 것뿐 아니라 환경파괴나 자원고갈, 기후변화 등 제가 예측하지 못했던 요소들이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요. 인구증가는 아직도 막아야 하는 숙제입니다.

식량이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제 전제는 분명 틀렸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산업국가와 개발도상국에서는 식량 생산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보다 높아진 경우도 있더군요. 그러나 저개발 국가에서는 아직 굶어죽는 이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비교적 충분해진 식량을 어떻게 나눌지를 고민하는 분배의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강연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경제학은 어디까지나 당시의 사회상황에 치중해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것을 택할지는 전문가와 정책 결정권자들의 몫입니다. 제 시절에 장 바티스트 세이는 “공급이 수요을 창출하기 때문에 공급 과잉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죠. 하지만 전 공급 과잉 현상이 충분히 생길 수 있고, 이런 경우에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요.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 훨씬 적합한 얘기 아닌가요. 이래도 제가 단순히 한물 간 경제학자, 거짓 예언자이기만 할까요.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없습니다. 70억이 살아가는 지구라면 더 그렇습니다. 2025년에는 80억의 지구가 됩니다. 그 이후는 여러분의 손에 달렸습니다. 함께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무기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ps : 역시 글을 읽고 공부를 하다 보면, 원문을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서울신문의 기사에서도 나오지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멜서스의 '인구론'의 내용은 사실과 다른 면이 많은 듯 하다. 한번 구입해서 읽어봐야 겠다. 또한 얼마전에 라루스 세계지식 사전 시리즈로 <세계의 인구>란 책도 나왔다. 미리보기를 통해 살펴보니 상당히 보기 쉽게 나온 책같다. 디자인도 좋고, 같이 읽어보면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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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1-10-2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억..대단한 숫자네요. 5천만원의 몇배? 감이 안와요.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건 참 비극이죠...

오늘도 화이팅해요, 우리~~

햇빛눈물 2011-10-26 12:39   좋아요 0 | URL
70억. 대단한 숫자이죠!! 사실 요즘 뉴스에서 수 억에서 수 천억에 이르는 숫자들을 애기하다보면 숫자에 대한 감이 없어지는 듯해요. ㅋㅋ
'우리' 멋진 세실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지나간 신문을 읽다가 아는 교수님의 칼럼이 보여 옮겨 본다. 겨울때 1정 연수를 받으며 오경섭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좀 말씀을 길게(?)하는 스타일이셔서 강의 듣기 좀 힘든 면도 있었지만, 상당히 환경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분인 것 같았다. 

좋은 글같다. '촌철살인'류의 문구도 많이 보인다. 

ps : 그리고 대부분의 교수님들 프로필 사진은 10년에서 20년 지난 사진을 쓰시는 것 같다. ㅋㅋ 그리고 오경섭 교수님은 올 8월에 퇴임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신문에는 한국교원대 교수로 나온 틀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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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1.10.20  4대강 사업 찬양론들의 오류  

찬양론자들은 우리 강을 싸잡아서
원래 병들어 있다고 전제한 듯하다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오류다



» 오경섭 한국교원대 교수·지형학

며칠 후면 4대강 사업의 완공(?) 축제가 있다고 한다. 그간 이 사업을 우려해온 대다수 국민들은 망연히 사태를 지켜볼 뿐이다. 신문과 방송의 주요 관심사는 서울시장 보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에 쏠려 있는 듯하다. 이런 와중에도 현 정권 관계자들과 일부 신문들은 4대강 사업을 적극적으로 옹호·찬양하고 있다. 이들은 올여름 사업구간 하천 본류 최고수위는 예년보다 높지 않았다는 사실로 사업이 성공적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지형학 전공자인 필자의 관점에서는 올여름 사업구간 본류가 넘치지 않은 것은 아직 보의 수문을 달지 않은, 완공 이전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예외적인 사실일 뿐이다. 모래 준설로 통수단면(通水斷面)이 넓어진데다 아직 보의 수문을 달지 않은 상태여서 배수는 매우 잘될 수밖에 없었다. 즉 도로는 넓혀놓고 아직 신호등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차들이 막힘없이 주행할 수 있는 상황과 같다. 올해는 역설적으로 사업구간 본류의 홍수 위험이 가장 적은 해라고 할 수 있다. 보에 수문을 달고 배후에 물을 저장한 상태에서 금년과 같은 장마를 맞이했다면 어떠했을지도 고려해야만 한다. 4대강 사업 이전에도 여주대교 일대 등 몇곳을 제외하면 사업구간 본류는 대체로 범람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

올여름의 예를 잘못 해석한 4대강 찬양론자들은 그간 이 사업을 반대하거나 우려한 사람들의 견해는 무너졌다고 한다. 그러니 수질 문제도 사업 추진자들의 주장대로 좋아지리라 생각한다. 즉 강모래를 퍼내고 보를 막았기에 수량이 많아져 수질도 좋아진다고 믿는다. 찬양론자들은 모래톱이 천혜의 수질정화 필터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정수기에 비유하면 4대강 사업은 정수필터를 없애고 물통은 크게 한 것과 같다. 찬성론자들은 이런 정수기가 있다면 그 물을 안심하고 마시겠는가?

또한 4대강 사업 찬양론에서 빠지지 않는 게 생태공원이다. 말이 생태공원이지 이것은 자연상태 모래톱을 파헤쳐서 만든 인공조경 공간일 뿐이다. 찬양론자들의 심미안은 아직도 산업화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마저 준다. 산업화 시대에는 자연적인 것보다도 더 미끈하고 각지고 정돈된 듯한 인위적인 조경을 선호했다. 그러나 21세기는 자연의 요소들을 최대한 살리고 인공적인 요소는 절제하거나 극소화한 경관이 높이 평가받는 시대다. 이들이 찬양하는 조경은 이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4대강 사업구간 주요 하천 본류는 오염물 유입의 양과 질이 통제되지 않는 도시와 공단, 하굿둑 배후를 제외하고는 세계에 자랑할 수준의 수질과 기본 유량을 가뭄에도 유지해온 곳이다. 이곳은 4대강 사업 이전의 치수체계로도 홍수 피해가 별로 없었던 곳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곳만큼은 갈수기에도 강물이 잘 흐르고 천혜의 수질정화필터 구실을 하는 모래톱이 다른 나라와는 달리 잘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은 건강한 혈관을 무차별적으로 대수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찬양론자들은 우리 강을 싸잡아서 원래 메마르고 병들어 있다고 전제한 듯하다. 이는 우리 하천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오류다.

정부당국, 정치인, 언론인 등 4대강 사업에 긍정적 의견을 피력하려는 분들께 부탁할 말이 있다. ‘4대강 사업을 우려하는 국민=정부 일에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이란 편견을 버리기 바란다. 이런 시각의 말과 글은 그렇지 않은 대다수 국민에 대한 ‘언어폭력’이다. 또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4대강 사업을 자전거길, 천변 위락시설, 수변공간 개발 등 국민을 현혹하는 말로 포장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들조차도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해도 이들은 4대강 사업의 곁가지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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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4대강 찬양, 증말 미칠~~~~~~~~거 같습니다!

햇빛눈물 2011-10-25 22:27   좋아요 0 | URL
정신 나갔죠. 아니 처음부터 '정신'이라는게 없는 부류의 인간들 같습니다. 씁쓸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