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끌리는 아주 재미있는 글이다. 아이폰과 룸살롱...터치의 위안이다. 하지만 아이폰을 통한 '터치의  위안'은 이해할 수 있으나, 룸살롱에서 이루어지는 일정 금액을 받고 돈을 준 자와의 터치가 나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위안()이 아니라 자기 만족과 기만에 찬 쾌락의 추구일 뿐이다. 어쩌면 아래 글을 쓴 김모 교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래 글은 어찌할 수 없는 수컷들의 욕망을 드러내 보인 글일 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수컷의 하나로서 씁쓸하다. ㅉㅉ;;

 

한겨레신문 2010.6.2 아이폰과 룸살롱  

모든 동물의 수컷들은 불안하다. 암컷의 경우, 자신이 낳은 새끼는 반드시 자기 피가 섞여 있다. 그러나 수컷은 다르다. 자신과의 교미로 낳은 새끼가 제 새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수컷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어떻게든 ‘씨’를 뿌려놓으려 한다. 인간의 경우, 이 불안의 양상은 좀더 복잡해진다. 생물학적 종족번식과 관련된 불안은 물론, 존재론적 불안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어쩌지 못하는 불안은 공격성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증오와 분노다.

종족번식과 관련된 수컷의 불안은 아주 쉽게 해결된다. 암컷들은 불안해하는 수컷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며 위로한다. 원숭이의 경우, 이러한 접촉을 ‘그루밍’(grooming)이라 한다. 서로의 털을 다듬는 이 행동은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해소하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이기도 하다.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서로 끊임없이 만지고 만져져야 불안해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면 우리는 끌어안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한다. 왜 그럴까? 만져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슬픈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팔짱을 끼거나 이마를 주무른다. 이렇게 스스로라도 만져져야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악수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낯선 상대에게 서로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의 접촉이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에게 터치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정서적 경험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남자들에게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금지된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학교의 남자선생님이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까지 금지된다.

한국의 철없는 사내들은 이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룸살롱에서 위로받는다. 한국의 남자들은 룸살롱에 술 마시러 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술 마시려면 포장마차나 음식점에서 마실 일이지, 왜 꼭 룸살롱에서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마시려 하는가? 만지고 만져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룻밤에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을 내고 룸살롱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만져주기 않기 때문이다. 아닌가?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 보라!

서로 만지고 만져지는 ‘터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다. 사람들이 아이폰, 아이패드에 열광하는 ‘심리학적 이유’는 바로 이 터치 때문이다. 신체적 접촉이 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 내 손끝의 세밀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계가 생겨났다. 손가락을 벌리고 좁힐 때마다 화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새로운 창이 열린다. 반드시 맨손으로 만져야 반응한다. 정말 눈물나도록 감격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40대 중년남자들이 아이폰에 더욱 열광하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요즘 아저씨들이 모이면 전부 아이폰 이야기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룸살롱과 아이폰의 공통점은 바로 ‘터치’를 통한 위로다. 나는 이를 ‘배려경제’(care economy)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이 배려경제의 범위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발마사지, 스포츠마사지, 타이마사지, 안마시술소가 바로 그것이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코칭’, ‘상담’, ‘심리치료’와 같은 ‘마음의 터치’와 관련된 각종 산업도 이 배려경제에 해당된다. 

김정운 명지대 문화심리학 교수
 

한겨레신문 2010.6.4 아무나 만지지 마라

새로 연재되는 2010년 6월3일치 ‘김정운의 남자에게-아이폰과 룸살롱’을 읽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김씨는 이 칼럼에서 아이폰과 룸살롱의 공통점을 ‘터치를 통한 위로’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나아가 ‘배려경제’를 정의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먼저 김씨가 말한 룸살롱의 ‘터치’는 불안을 해소하거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룸살롱에서 ‘남성 손님의 요구에 의해 손님을 만져야 하는 사람’ 또는 ‘만져지는 사람’은 흔히 ‘접대부’라고 부르는 유흥접객원이다. 식품위생법령상 유흥접객원은 유흥주점에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여성’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유흥을 돋우는 일’에 ‘만지고 만져지는 일’이 포함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김씨나 룸살롱 고객인 일부 남성들의 착각일 뿐, 유흥접객원의 입장에서 ‘손님 요구대로 손님을 만지는 것’ 또는 ‘손님에 의해 만져지는 것’은 법령이 정한 업무 범위를 넘은 것이다. 그것은 유흥접객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추행이나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업소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손님의 요구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김씨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인가?

김씨는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자신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보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 남성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는 김씨의 주장대로 ‘만지고 만져지면서’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위로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하면 음주와 더불어 (김씨의 방식대로 룸살롱을 이용할 경우) 자신의 요구대로 ‘만지고 만져지면서’ 성적 쾌락이나 지배욕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룸살롱에서 쓰는 ‘하룻밤 수십만원, 수백만원’은 단순히 ‘만지고 만져지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는 성적 서비스와 ‘2차(성매매)’를 ‘관심’과 ‘배려’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 그런 포장술은 얄팍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왜곡한다.

다음으로 김씨가 말하는 ‘배려경제’는 가정 안팎의 돌봄노동이 다른 노동과 같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돌봄경제학’을 근거 없이 끌어 쓴 말이다. 김씨가 ‘배려경제’의 예로 든 각종 마사지 업소는 대개 성교 행위나 유사 성교 행위가 구매되는 성매매 업소이다. 김씨가 남성들이 여성보다 많은 지출을 한다고 말한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1차 배려경제’라는 것은 결국, 여성의 몸을 이용한 성적 서비스를 통해서 그 여성이 아닌 제3자가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는 성산업이다. 김씨는 성산업이야말로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산업이며, 성산업이 현대의 대세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런데 ‘남성 고객이 룸살롱에 가는 것은 여성 유흥접객원을 만지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1차 배려경제’라는 문화심리학자에서부터 ‘유흥주점 손님이 여성 접객원의 상의를 벗긴 후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던 대법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시각들이 바로 한국의 룸살롱과 성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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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류의 환경운동 관련 사례를 들으면 사람들은 으례 그걸 어떻게 해라는 반응을 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조금은 가지고 있다. 말그대로 '숭고한 의도에 대한 적의'를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숭고'에 대한 적의가 아닌 어찌보면 '의도'에 대한 또는 '숭고의 강요'에 대한 적의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숭고의 실천이 강요가 아닌 즐길수 있어야 한다.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가 합성세제가 아닌 집에서 만든 효소세제를 사용하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을 살리는 한 개인의 행동은 습관이기도 하고 기술일 수도 있다. 

예전에 도룡뇽을 살리기 위한 지율스님의 투쟁(?)은 뭍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웠으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 손가락 질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란 마음일 것이다. 그 심리 상태를 정치인들은 이용하고...악순환이다.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또다시 문수스님의 희생이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또다시.... 

 

오마이뉴스 2010.5.24 환경을 위한 개별운동 실험 <노 임팩트 맨>  

     -다큐영화도 곧 개봉한다.

인간은 지구 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 종(種)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종을 파괴하고 상생의 원리를 배반하는 문명의 이기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자연을 버려둘 권리는 없다. 물질의 풍요를 독점하고 소비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시스템 속에 살면서 주변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왔다. 

문명의 다른 모습

편리, 안전, 풍요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 덕분에 놀랄 만한 수준의 문명을 단기간에 이룩한 것이 사실이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는 법. 높다란 빌딩과 첨단의 기계와 장비들이 문명을 밝히고 있다면 파괴되는 산림, 녹아내리는 빙하, 대양의 가운데에 섬처럼 떠있는 쓰레기 더미, 속살이 드러난 산과 땅, 산성비로 죽어가는 물고기와 곤충들, 먹이가 없어 굶어죽는 북극곰, 사냥감을 잃고 부랑인으로 전락해 버린 토착 주민들도 있는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문명이고 발전이 있으면 생기는 작은 부작용이며 우리가 누리는 편리와 풍요의 반작용이다. 도롱뇽을 생각하고 단양쑥부쟁이를 보호하고 강에 사는 물고기의 목숨을 걱정한다는 의견은 개발이 펼쳐놓은 화려함 앞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기껏 그 까짓 것들 때문에 우리가 이 좋은 것(토목개발)을 포기해야 합니까"라는 정치인은 분명 환경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지만 대중의 심성은 잘 파악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제 어쩔 수 없다?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같이 사는' 지구의 재앙을 막아야 한다. 급속한 지구 온난화는 내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도 재앙으로 다가올 수 있다(이미 조짐이 시작됐다).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기후변화 협약도 시급한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다 같이 노력해서 지구가 재앙의 화신으로 바뀌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살기 위해 필수적인 행동이라는 이야기다.

행동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하다. 국가의 정책으로 지원하고 시민들의 의식이 뒤따라서 생활로 실천하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 인식의 차이, 우선과제 설정의 문제들로 환경은 뒤로 밀리기 마련이다. 전환의 계기가 필요하다.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
 
책 <노임팩트 맨(No Impact Man)>은 지극히 평범한(?) 개인의 친환경적 실천역량을 보여준다. 한 가정이 과연 어디까지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는지(No Impact)를 실험한다. 1년간의 '노임팩트' 프로젝트.

문제는 어떻게 해야 친환경적으로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다. 기업의 광고는 넘쳐서 친환경이라고 붙이면 소비자인 내가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예를 들어서 일회 용기를 쓰지 않는 것과 세제와 물을 써서 사기그릇을 닦아 내는 것과 어떤 행위가 더 '비환경적'인지를 알기 힘들다. 또, 고연비의 자동차를 타는 것과 전기자동차를 타는 것이 원료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 비용, 지구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이 되어 있지 않다(정보를 얻기 힘들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도시 중의 도시 '뉴욕'에 사는 한 가족의 환경을 위한 프로젝트는 시작부터가 문제다. 당장 일어나서 코를 풀려고 티슈를 쓰는 것부터, 아기의 종이 기저귀를 사용하는 문제가 환경을 생각하는 저자의 가슴을 억누른다.

매년 두 번씩 방문하는 친가, 외가 방문의 기회도 한번으로 줄이게 되고 가족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숭고한 실천'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테이크 아웃'에 가서도 1회용 용기를 쓸 수 없으니 직접 가져간 유리병이나 그릇에 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1년 동안 단골 가게에서는 익숙해지지만 처음 당하는 점원은 자신을 더 귀찮게 만드는 손님에게 적의를 드러낼지 모른다.

두꺼비집의 스위치를 내린다. 집안은 암흑과 고요 속에 휩싸인다.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잠깐이다. 밤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씻지도 일하지도 못하고 TV와 컴퓨터도 그냥 장식품이거나 걸림돌이 될 뿐이다. 음식은 쉽게 썩어서 버리기 일쑤고 빨래는 100% 손과 재생비누로 이루어진다.

데우기와 굽기, 데치기 등은 모두 가스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소똥을 이용한 메탄가스로. 태양광을 이용하면 좋지만 아파트에서는 제약이 많다. 전기를 생산하는 것도 자전거를 프로선수처럼 타야 웬만큼 쓸 수 있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물론 좋은 점도 있다. TV를 보지 않으니 아이와 같이 노는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났고 부부간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다. 일찍 잠들고 일찍 일어나서 해가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능력(?)이 생긴다.

공기오염의 주범인 자동차를 타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걸으면 된다. 걷는 것의 좋은 점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귀찮고 힘들어서 실행을 안 할 뿐이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르기, 걷기 힘든 거리는 자전거를 탄다. 차로만 갈 수 있는 먼 곳은 과감하게 포기한다. 모임을 줄이고 집에서 가족과 오붓하게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다. 

<노임팩트맨>은 인간이 문명 안에서 문명을 이용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자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가까운 곳에서 나는 것을 직접 요리해서 먹으며 환경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육식을 거부하는 것은 관심과 작은 노력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새것을 사지 않고 쓰다가 버려지는 수많은 것에 대한 애정이 지구를 쓰레기로부터 구원하는 길이다. 없어서 물려받는 것이 궁상이 아니라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고귀한 행위인 것이다.

지금 힘들지만 실천할 때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면 행동은 어렵다.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지속가능한 실천이 돼야 한다. 이것이 먼 미래에 닥친 재앙에 대비하는 '생존기술'이 될지도 모른다. 에너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살아갈 방법이 있음을 보여줄 선지자가 될 것 같다.

실천을 위한 상세한 정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1년간 실천해볼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당장 하나씩 실천하리라 마음먹는다. "새 물건 사지 않기" 이것부터다.

내년엔 TV를 떼어내고, 동네에서는 자전거로 이동하고, 3년 뒤엔 전기스위치를 내릴 수 있을지 기대해 보겠다. 앗, 어떡하지. 마나님께 허락도 안받고 이런 공약을 하다니. 우선 설득과 토론이 일차과제다. 혼자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당장 시행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합의로 천천히 실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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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달 환경운동연합에서 나오는 월간지 서평 코너에 책의 소개글이 있어 읽어 보았다. 우리에게는 '4대강'사업과 관련하여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개발 중심적 시각으로 보면 쓸모없는 듯한 습지나 강가 모래톱, 대초원, 곡류가 지하수를 풍성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봐야지 인간의 시선을 통해 보는 현재의 너무나 치우친 인간중심적 사고는 큰 문제가 있어 보인다. 언젠가 큰 사단이 날 듯 하다. 

마땅한 소개 글이 없어, 출판서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물은 지구의 혈액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물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왔다. 이 시스템 속에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이 책은 물이 순환하는 이 시스템 전체를 따라가며 이러한 자연의 시스템 속에서 물과 땅과 생물이 이뤄내는 놀라운 협업의 현장을 보여준다.

MIT 환경공학자인 저자는 보스턴 항구 오염제거 공사라는 대규모 정부 프로젝트에서 슬러지의 질을 평가하고 슬러지에 포함된 물질들이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이 프로젝트의 경험에서 이 책은 탄생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인간의 눈에는 쓸모없거나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습지나 강가 모래톱, 구불거리는 곡류가 물을 깨끗이 하고 지하수를 풍부하게 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밝혀낸다.

또한 미국에서 벌어진 60여 년간의 지난한 수질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이 깨끗해지지 못한 것은 준설과 댐 건설, 수로 변경을 통해 물이 스스로 정화하는 과정을 간섭하거나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수로들을 단순하게 만들었고, 결국은 물을 더럽히고 말았기 때문임을 아프게 짚어낸다.

‘4대강 살리기’라는 전 국토 개발 프로젝트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꼭 읽어둬야 할 책이다.

물과 땅과 생물이 이뤄낸 놀라운 균형

미국의 수질오염을 근본부터 살펴보려면 모피 거래를 이야기해야 한다. 13세기 말부터 15세기 초반까지 유럽의 모피 수요는 극에 달했고 최고의 모피로 대우받던 비버는 결국 멸종 위기에 처했다. 유럽인들이 다시 모피의 ‘금광’을 찾은 것은 바로 아메리카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곧 비버 모피로 부를 축적했고 결국 19세기 초에 이르러 아메리카 비버를 멸종 위기로 내몰았다(뉴욕도 비버 모피 거래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비버는 아메리카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핵심종이었다. 비버가 댐을 건설하면 자연적으로 습지가 만들어지고 습지는 다양한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모인 다양한 생물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통해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고 물은 이 시스템을 통해 정화되고 순환되었다. 그래서 비버가 사는 땅의 물은 이슬처럼 맑고 풍부했다.

대초원 프레리도 생물들 간의 정교한 협업으로 물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디언이 들불을 놓아 목초의 생산성을 높이면, 버팔로와 프레리도그가 그 풀을 뜯어 먹었다. 이렇게 해서 번성한 수천만 마리의 버팔로가 만든 진흙 웅덩이와 수십억 마리의 프레리도그가 판 구멍은 지하로 더 많은 물이 흘러 들어가게 해주었다.

자연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물을 깨끗하고 풍부하게 유지했다. 하지만 무지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는지도 모른 채 파괴적인 개입을 감행해 왔다.

인간은 어떻게 균형을 깨왔는가

아메리카로 온 유럽인들은 프레리의 시스템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무도 없고 곡식도 키우지 않는 프레리는 그저 ‘불모지’(barren), ‘공지’(opening), ‘사막’(desert)일 뿐이었다. 그들은 혀와 가죽만을 취하기 위해 버팔로를 마구 학살했고, 농지를 만들기 위해 프레리의 땅에서 풀을 뽑아냈다. 그리고 소를 키우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버팔로와 프레리도그를 독으로 죽였다. 프레리도그와 버팔로의 감소로 프레리의 물은 줄었고, 미국 전역엔 끔찍한 황사가 불었다.

1905년 루스벨트 댐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86년 동안 미국 전역에는 저수지 339곳, 댐 154곳, 운하 1만 2300km, 수력발전소 52곳이 건설되었다. 이로 인해 1만 4천 평방마일이 넘는 농경지에 물이 공급되어 서부는 발전과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개간 옹호론자들은 수로 사업을 부를 낳는 기적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치러야 할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미시시피 강, 오하이오 강, 미주리 강은 수로가 직선으로 변경되고 준설되었다. 농경지를 확보하고 수상 운송을 개선하며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부근의 습지 80% 이상이 사라졌고, 하류 쪽에는 오히려 홍수가 더 많이 발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습지를 메우고 운하를 개발함으로써 강물을 바다로 더 빨리 흘러가게 하고 강의 수위 변동도 이전보다 더 크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어류 대부분이 멸종되거나 멸종 위기에 놓였으며 물이 땅에 스며들 틈 없이 바다로 흘러 나가게 해 결국 그 지역의 지하수량을 줄이고 말았다.

결국 이들 지역의 수생 생태계는 단순해져버렸다. 정교한 정화장치를 잃은 시스템에 새로운 오염물질이 미치는 영향은 재앙이었다. 오염물질이 섞인 물줄기가 지하수층으로 스며들어가면,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을 되살리기 위해 정말로 해야 할 일들

수생 생물들이 멸종되면서 수질오염도 빨라졌다. 결국 1969년 연방대법원 판사는 댐과 운하 건설, 준설을 담당하며 한때 미국 건설의 영광을 대표했던 공병대를 공적 1호라고 규정했다. 특히 공병대가 플로리다 주 남부에서 추진했던 수로 변경 계획은 너무나도 파괴적이었다.

1928년에 플로리다 주 남부에서 홍수가 발생해 2750명이 익사하자 공병대는 근처의 오키초비 호와 에버글레이즈 습지를 ‘주적’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구불구불 흐르던 길이 220km의 키시미 강은 곧게 뻗은 길이 90km의 운하로 변했다. 오키초비 호 주위에는 흙으로 거대한 제방이 쌓였고, 에버글레이즈 습지의 절반 이상을 농경지로 바꾸기 위해 길이 2240km에 이르는 운하와 제방, 방수로, 배수장이 건설되었다. 이로 인해 부동산 투기꾼, 목장주, 사탕수수 재배업자, 농업 기업가들은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들어서자 강과 호수가 오염되었다. 70년대에 이르자 한때 엄청난 수를 자랑하던 물새가 크게 줄었고, 농경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동물을 중독시켰으며, 에버글레이즈는 말라붙기 시작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여기에 들불처럼 번져나간 환경운동의 압력이 가세해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자연을 예전 그 모습대로 복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공병대는 키시미 강을 제방과 갑문에서 해방시키고, 습지를 회복하는 공사를 담당하고 있다. 3억 달러가 넘는 예산을 들여 키시미 강 운하 구간을 구불구불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려던 계획은 강 전체를 복원하는 계획으로 확대되어 예산도 120억 달러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습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플로리다 주는 풀의 낙원을 되살리기 위해 지금도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미국은 수로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한 쉽지 않은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수로의 원형을 망가뜨린 지 100년이 지난 지금에야 자연의 효율적인 물 관리 시스템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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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글에 나오길래 지정학(정치지리) 관련 서적인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문명의 충돌'류의 국제 관계, 세계화에 관련된 내용인것 같다. 그래도 국제화시대의 세계지리 측면에서 참고해보면 좋을 듯하다. 읽기 시작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얼마전에 읽기 시작한 하름 데 블레이의 '공간의 정치'도 아직 다 읽지 못한 상황이다. ㅋㅋ 책 빨리 읽는 사람이 부러울 따름.

파이낸셜뉴스 2010.6.2 서평 '감정의 지정학'

 

 지난 주말 제주에서 열린 제3차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북한의 천안함 어뢰 공격 사건과 관련,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하지도 않지만 원하지도 않는다”고 천명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느끼고 있는 북한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함께 두번 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고 싶지 않은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과연 이러한 감정들은 앞으로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까.

 프랑스 국제문제연구소 고문으로 국제문제 세계적 권위자인 도미니크 모이시는 최근 저술한 ‘감정의 지정학’에서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세계를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민주주의의 승리’를 예찬하며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거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과 같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단순한 관점은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감정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세계화로 인해 복잡해진 오늘날의 세계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수많은 감정들 중에서도 두려움. 희망 그리고 굴욕이라는 세가지 감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세 감정이야말로 국가와 사람들이 직면한 도전 과제의 해결과 상호 관계에 있어 결정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자신감의 부족을 나타낸다. 반면 희망은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굴욕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상처 받은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영광스러운 과거와 좌절된 현재의 차이가 너무 클 때 굴욕이 압도한다.

 저자는 세계화로 인해 정체성과 감정의 불안정이 증폭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를 ‘희망의 문화’ ‘굴욕의 문화’ ‘두려움의 문화’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전 세계의 다양한 사건들을 기존의 이념적 사고나 이성적 시각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대해 가늠해 볼 수 있도록 돕고 있다. 
▲ 저자는 아시아를 희망의 대륙으로, 이슬람은 굴욕의 대륙으로, 서구는 경제적으로 그들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는 아시아와 그들을 파괴하려고 하는 이슬람 세계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세계의 지정학적 충돌을 묘사하고 있다. 

서구의 식민지로 굴욕의 역사를 지나온 아시아는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어 이제 희망의 대륙으로 변모했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시작된 몰락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극도의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희망을 상실한 그 굴욕은 ‘상대에게도 고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겠다’는 파괴적인 테러 행위로 표출되고 있다. 같은 굴욕의 역사에서 아시아는 희망을 건져 올렸고 아랍 세계는 좌절감에 몸부림치고 있다. 한편 과거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구는 이제 경제적으로 그들을 따라잡으려 하고 있는 아시아와 서구를 파괴하려고 하는 이슬람 세계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일자리를 빼앗아가며 테러를 일으키는 외부인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저자는 그동안 희망을 독점해왔던 서구 세계가 다시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두려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책의 끝 부분에서 저자는 2025년의 세계를 굴욕과 공포가 지배하는 세상, 반대로 희망과 안정이 지배하는 세상, 두가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통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상상하며 우리가 직면하게 될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미래에 대해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둘 다 필요하며 우리가 직면한 도전 과제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희망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국민일보 2010.5.31 세계정치, 문명 충돌 아닌 감정 충돌 

"감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프랑스 국제문제연구소 고문인 도미니크 모이시는 저서 '감정의 지정학'(랜덤하우스 펴냄)에서 지정학적 충돌이 '감정'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감정이 세계 정치를 지배한다는 시각에서 국제 정세를 분석한 이 책은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과는 다른 '감정 충돌론'을 주창한다.  저자는 헌팅턴이 1993년 '문명의 충돌'에서 제기한 "문명의 충돌이 세계 정치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헌팅턴이 예측한 것처럼 서구를 상대로 한 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의 동맹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는데다 중국과 인도가 무책임하고 위험한 혁명국가라기보다는 현상 유지에 만족스러워 하는 강대국으로 행동한다는 것. 저자는 19세기부터 지금까지 감정이 정치의 최전선에 있었다고 말한다.

   2008년 8월 러시아와 그루지야 간 전쟁도 감정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루지야가 독립을 요구하는 친러시아 자치영토 남오세티야를 침공하자 자국민 보호 명목으로 무력 개입한 러시아는 이를 통해 냉전에서 느낀 굴욕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는 분석이다. 저자는 세계의 지정학적 정세를 '두려움'과 '희망' '굴욕' 세 가지 감정으로 분석한다. 아시아는 중국과 인도의 눈부신 경제 성장으로 '희망'이 확산되고 있고 이슬람권은 역사적 몰락과 쇠퇴에 대한 두려움으로 '굴욕'의 감정이 커지고 있으며 서구는 아시아가 부상하고 이슬람이 위협해 오는 현실에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일본은 희망의 아시아 문화에서 제외됐다. 10년간의 경제위기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데다 최고령 국가가 됐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또 굴욕의 이슬람권 문화가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결합돼 자살 폭탄 테러범을 양산했다고 분석하고 굴욕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말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버지에게 이 책을 바친 저자는 "우리가 직면한 도전 과제들에 맞서려면 희망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이 책의 밑바탕에 있는 확신이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고 강조한다. 또 한국어판 서문에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은 약간의 굴욕감이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입증해보였다"면서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요소는 자신감이다. 희망이라는 감정이 바로 자신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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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전쟁 불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중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 중 일부는 전쟁 경험을 해본 사람들도 있기도 하고 대부분은 나처럼 전쟁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가족이..우리의 터전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전쟁 불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희생하면서까지 꼭 추구해야할 가치나 내용이 있는 것일까, 전쟁에서? 그들의 무모함이 무서울 따름이다.

 

한겨레신문 2010.5.28 나는 전쟁이 무섭다

남북관계가 또다시 불행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애써 쌓아올린 화해의 분위기는 물거품이 되고, 분노가 용기를 대신하려 들고, 불신이 지혜를 가장한다. 어느 원로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했다는데 나는 전쟁이 무섭다.

유럽에서 세계대전의 우려가 현실이 되려 하던 193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극작가 장 지로두는 희곡 <트로이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를 발표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리스의 미녀 헬레나를 유혹하여 자기 나라로 데려오자, 그리스 연합군이 전함을 몰고 트로이 해안으로 쳐들어왔다. 헬레나를 되돌려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텐데, 트로이의 주민들은 지상 최고의 미녀인 그녀의 거취에 자신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 쪽에서도 까다로운 조건을 붙인다. 파리스와 헬레나 사이에 아직 육체관계가 없었음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파리스를 비롯한 트로이의 남자들이 성불능자들임을 고백하는 꼴이기에 트로이 쪽은 오히려 두 사람이 동침했다는 증거를 찾으려 든다. 원로들은 벌써 군가를 제정하고 그리스군을 ‘암소의 새끼들’로 부르기로 결정한다.

신들도 이 위기에 당연히 개입하나, 그들은 두 나라의 행복과 안녕보다는 이 기회에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세력 판도를 넓히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나 제우스는 트로이의 맹장 헥토르와 그리스의 지장 율리시스를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 있었다. 평화를 갈구하는 헥토르의 뜻을 받아들여 율리시스는 헬레나가 아직 ‘순결’한 상태임을 그녀의 남편 메넬라스에게 설득하기로 약속한다. 헥토르는 이제 트로이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율리시스는 비관적이다. 협상 테이블이 아무리 현명해도, 그것은 오만함과 증오의 바다에 떠 있는 쪽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율리시스의 예견은 옳았다. 헥토르는 호전적인 그리스 장군 오이악스가 자기 뺨을 때리고, 면전에서 자기 아내 안드로마케를 끌어안아도 인내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트로이 쪽에서 일어났다. 호전적인 계관시인 데코모스가 평화주의자들을 비겁하다고 탄핵하며 민중들에게 전쟁을 부추긴다. 헥토르는 선동을 막기 위해 그를 창으로 찌른다. 비명소리에 양쪽 사람들이 몰려들자, 데코모스는 죽어가면서, 자기를 찌른 것이 그리스의 장군 오이악스라고 외친다. 트로이는 분노하고 전쟁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희곡 하나를 간추린다는 게 너무 길어졌지만, 전쟁은 늘 이렇게 일어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전쟁은 바보짓이다. 분쟁의 해결책 가운데 전쟁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르게 하는 것은 없다. 전쟁은 우리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인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명분도 이 비극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핍박받는 민족의 독립전쟁 같은 것을 거론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핍박하는 일도 실은 전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은 단순한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포탄이며, 구덩이에 파묻히는 시체 더미이며, 파괴되는 보금자리이며, 생사를 모른 채 흩어지는 가족이다. 이 오월에 강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소년들은 어느 골목을 헤맬까. 지금 축제를 벌이는 젊은이들의 소식을 어느 골짜기에서 듣게 될까. 공부하고 일하고 춤추는 아이들은 어디로 갈까. 그들이 훈장을 뽐내며 돌아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음의 상처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을 볼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민족의 절망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능력을 스스로 멸시하고, 우리가 이 민족이었던 것을 저주할 것이다.

나는 전쟁이 무섭다. 오만과 증오에 눈이 가려 심각한 것을 가볍게 여길 것이 무섭다. 전쟁을 막을 지혜와 역량이 우리에게서 발휘되지 못할 것이 무섭다.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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