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부터 끌리는 아주 재미있는 글이다. 아이폰과 룸살롱...터치의 위안이다. 하지만 아이폰을 통한 '터치의 위안'은 이해할 수 있으나, 룸살롱에서 이루어지는 일정 금액을 받고 돈을 준 자와의 터치가 나에게 위안을 준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위안(慰安)이 아니라 자기 만족과 기만에 찬 쾌락의 추구일 뿐이다. 어쩌면 아래 글을 쓴 김모 교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래 글은 어찌할 수 없는 수컷들의 욕망을 드러내 보인 글일 뿐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수컷의 하나로서 씁쓸하다. ㅉㅉ;;
한겨레신문 2010.6.2 아이폰과 룸살롱
모든 동물의 수컷들은 불안하다. 암컷의 경우, 자신이 낳은 새끼는 반드시 자기 피가 섞여 있다. 그러나 수컷은 다르다. 자신과의 교미로 낳은 새끼가 제 새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동물의 수컷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어떻게든 ‘씨’를 뿌려놓으려 한다. 인간의 경우, 이 불안의 양상은 좀더 복잡해진다. 생물학적 종족번식과 관련된 불안은 물론, 존재론적 불안으로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어쩌지 못하는 불안은 공격성의 외피를 입고 나타난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증오와 분노다.
종족번식과 관련된 수컷의 불안은 아주 쉽게 해결된다. 암컷들은 불안해하는 수컷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며 위로한다. 원숭이의 경우, 이러한 접촉을 ‘그루밍’(grooming)이라 한다. 서로의 털을 다듬는 이 행동은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해소하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이기도 하다.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서로 끊임없이 만지고 만져져야 불안해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면 우리는 끌어안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한다. 왜 그럴까? 만져야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슬픈 일을 당했는데,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팔짱을 끼거나 이마를 주무른다. 이렇게 스스로라도 만져져야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악수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낯선 상대에게 서로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의 접촉이다.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에게 터치는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정서적 경험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남자들에게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금지된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학교의 남자선생님이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까지 금지된다.
한국의 철없는 사내들은 이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룸살롱에서 위로받는다. 한국의 남자들은 룸살롱에 술 마시러 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술 마시려면 포장마차나 음식점에서 마실 일이지, 왜 꼭 룸살롱에서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마시려 하는가? 만지고 만져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룻밤에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을 내고 룸살롱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만져주기 않기 때문이다. 아닌가?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 보라!
서로 만지고 만져지는 ‘터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다. 사람들이 아이폰, 아이패드에 열광하는 ‘심리학적 이유’는 바로 이 터치 때문이다. 신체적 접촉이 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 내 손끝의 세밀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계가 생겨났다. 손가락을 벌리고 좁힐 때마다 화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새로운 창이 열린다. 반드시 맨손으로 만져야 반응한다. 정말 눈물나도록 감격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40대 중년남자들이 아이폰에 더욱 열광하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요즘 아저씨들이 모이면 전부 아이폰 이야기다.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룸살롱과 아이폰의 공통점은 바로 ‘터치’를 통한 위로다. 나는 이를 ‘배려경제’(care economy)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이 배려경제의 범위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발마사지, 스포츠마사지, 타이마사지, 안마시술소가 바로 그것이다. 좀더 넓은 의미에서 ‘코칭’, ‘상담’, ‘심리치료’와 같은 ‘마음의 터치’와 관련된 각종 산업도 이 배려경제에 해당된다.
김정운 명지대 문화심리학 교수
한겨레신문 2010.6.4 아무나 만지지 마라
새로 연재되는 2010년 6월3일치 ‘김정운의 남자에게-아이폰과 룸살롱’을 읽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김씨는 이 칼럼에서 아이폰과 룸살롱의 공통점을 ‘터치를 통한 위로’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나아가 ‘배려경제’를 정의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먼저 김씨가 말한 룸살롱의 ‘터치’는 불안을 해소하거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룸살롱에서 ‘남성 손님의 요구에 의해 손님을 만져야 하는 사람’ 또는 ‘만져지는 사람’은 흔히 ‘접대부’라고 부르는 유흥접객원이다. 식품위생법령상 유흥접객원은 유흥주점에서 ‘손님과 함께 술을 마시거나 노래 또는 춤으로 손님의 유흥을 돋우는 여성’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유흥을 돋우는 일’에 ‘만지고 만져지는 일’이 포함되는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김씨나 룸살롱 고객인 일부 남성들의 착각일 뿐, 유흥접객원의 입장에서 ‘손님 요구대로 손님을 만지는 것’ 또는 ‘손님에 의해 만져지는 것’은 법령이 정한 업무 범위를 넘은 것이다. 그것은 유흥접객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추행이나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업소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손님의 요구를 감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김씨가 말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인가?
김씨는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자신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나와보라고 호언한다. 그러나 현대 한국 남성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는 김씨의 주장대로 ‘만지고 만져지면서’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위로받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일정 액수의 돈을 지급하면 음주와 더불어 (김씨의 방식대로 룸살롱을 이용할 경우) 자신의 요구대로 ‘만지고 만져지면서’ 성적 쾌락이나 지배욕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룸살롱에서 쓰는 ‘하룻밤 수십만원, 수백만원’은 단순히 ‘만지고 만져지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는 성적 서비스와 ‘2차(성매매)’를 ‘관심’과 ‘배려’라는 말로 포장하지 말라. 그런 포장술은 얄팍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왜곡한다.
다음으로 김씨가 말하는 ‘배려경제’는 가정 안팎의 돌봄노동이 다른 노동과 같이 정당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는 ‘돌봄경제학’을 근거 없이 끌어 쓴 말이다. 김씨가 ‘배려경제’의 예로 든 각종 마사지 업소는 대개 성교 행위나 유사 성교 행위가 구매되는 성매매 업소이다. 김씨가 남성들이 여성보다 많은 지출을 한다고 말한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1차 배려경제’라는 것은 결국, 여성의 몸을 이용한 성적 서비스를 통해서 그 여성이 아닌 제3자가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는 성산업이다. 김씨는 성산업이야말로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산업이며, 성산업이 현대의 대세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가?
그런데 ‘남성 고객이 룸살롱에 가는 것은 여성 유흥접객원을 만지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1차 배려경제’라는 문화심리학자에서부터 ‘유흥주점 손님이 여성 접객원의 상의를 벗긴 후 브래지어 속으로 손을 넣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던 대법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시각들이 바로 한국의 룸살롱과 성산업에 대한 문제 제기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