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또다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었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20.여)씨가 신혼 8일만에 정신병력이 있는 남편에게 흉기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다. 그녀는 죽기 전 8일 동안 과연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두고온 부모와 가족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늦어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하늘나라에 가서는 정말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하는 사람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르디에 다문화 관련 기사가 있어 스크랩해 놓는다. 상당히 괜찮은 기사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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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을 위한, 그녀들에 의한, 그녀들의 한국   

[특집-다문화] 결혼이주와 문화 다양성
편견과 억압 여전…주체화 위한 상호노력 때 다양성 기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담론이 뜨겁다. 그도 그럴 것이 거주 외국인이 100만 명이 넘었고, 한 해 결혼하는 사람 8명 가운데 1명이 국제결혼을 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제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그와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가 됐다. 그러나 사회에서 왁자하게 논의되는 것과 다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쉽사리 넓혀지지 않는다.

결혼이주여성의 처지만 해도 그렇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한 매매혼적 결혼이 큰 사회문제로 제기됐던 2007년 1월 필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대만 현지 취재를 통해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보도한 적이 있다.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여성들의 희망과, 한국에선 아내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한계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이들을 연결해 이익을 취하려는 중개업체가 합작해 만들어낸 게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의 실상이었다. 그 속에서 기만과 사기, 인권침해가 상당한 정도로 이뤄졌다.

당시 이런 현실을 지적한 여러 매체의 보도와 인권단체들의 노력 덕에 결혼중개업법이 수정되고,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각종 지원정책이 마련되는 등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결혼이주여성과 우리 사회를 가깝게 잇기 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그들을 위한 언어·문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나아가 그들의 2세를 위한 교육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실제 결혼이주여성들의 처지가 나아졌다는 증좌는 별로 잘 보이지 않는다. 올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발표한 ‘2008 결혼이주여성 인권백서’를 보면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이 여전히 빈곤과 폭력 그리고 편견의 그늘 아래 힘겨운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2008년 10월 말 현재 결혼이민자 수 12만1168명 가운데, 여성이 90%에 가까운 10만6576명이다. 여성들의 국적은 베트남(38.3%), 중국(16.8%), 필리핀(16.6%), 몽골(7.4%), 타이(5.5%) 순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의 연령은 20대가 가장 많고, 남편과의 평균 나이 차이는 16살 정도나 됐다.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여성들이 직업이 없고, 직업이 있는 경우도 100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남편의 월평균 소득 역시 200만원 이하가 절반가량으로 이들 가족은 대체로 기초생활수급권자이거나 차상위계층에 분포돼 있다.

매매혼의 짙은 그림자

결혼이주여성들은 남편을 만나게 된 주요 경로 역시 ‘결혼중개업소를 통해서’(37%)가 가장 많았다. 흥미로운 점은 ‘아는 사람의 소개’(34.3%)를 통해서도 엇비슷한 비율로 나타난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남성과 아시아 여성 사이의 중개결혼 상황이 개선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개업소에 여성을 소개하던 현지 브로커(속칭 마담)나 결혼이주여성과 결혼한 뒤 중개자로 나선 한국 남성이 아는 사람인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2007년 취재 때도 이미 결혼중개에 뛰어든 결혼이주여성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수가 상당해진 듯하다. 이렇게 중개업소 등의 소개를 통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편과 한두 번 본 뒤 결혼했다. 통상적으로 중개업자를 통한 결혼의 경우, 한국 남성이 도착해서 다음날 대기하고 있던 여성과 선을 보고 빠르면 그날로 결혼식을 하고 영사관에 혼인신고를 마친 후 신혼여행이라는 이름의 합방 절차를 거치고 다음날 귀국하는 것으로 결혼 절차가 끝난다. 이렇게 상대 배우자를 한두 번 보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 남성과 이주여성 양쪽 모두에게 모험--(원래 결혼은 모험이기는 하지만 이 모험은 아니지 않나 싶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혼을 통한 이주는 자본과 기술 등 자원이 없는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들의 합법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상업화된 국제결혼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발달의 부산물이다. 즉, 자본주의의 중심부나 우리나라처럼 반주변부에 속하는 나라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남성과 주변부에 속하는 나라의 여성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아래서 왜곡되고 주변화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상업화된 국제결혼을 하는 여성들을 단순히 희생자나 매매된 여성으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 압박에서 탈출하는 용기를 가진 인물들로 보는 견해들도 나오고 있다. 

2007년 취재 당시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한국 농촌과 소도시에서 만난 결혼이주여성들에게서도 이런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 여성동맹의 호찌민지부 국제결혼지원센터를 방문했을 때 당시 그곳에서 한국 문화를 배우며 비자가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던 여성들은 한결같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20대 전반의 꽃다운 나이였던 그들 대부분은 한국행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것이 전부고 남편 역시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배를 타고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는 오지인 고향의 삶보단 그래도 한국에서의 삶이 나을 것이란 기대들을 드러냈다. 초롱한 눈매로 한국어를 배우고 김밥 등 한국 요리를 익히고 있는 그들을 본 강금실 당시 여성인권대사는 “이 아름답고 총명한 베트남 아가씨들이 우리와 한 식구가 돼 미래의 한국의 한 부분을 책임질 여성들이 된다는 것이 기쁘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려는 그들의 적극적 의지를 평가한 발언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삶 속에서 그들은 주변적 존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들이 꿈을 펼치기엔 그들을 둘러싼 우리의 환경은 척박하기만 하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들을 아내로 맞은 남편들의 대부분은 빈곤층에 속한다. 그렇다고 여성 자신이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제대로 된 기술도 없는데다 언어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언어 문제는, 남편이나 가족 등과의 소통은 물론 장래 아이들의 교육에도 장애로 작용한다. 또 소통의 힘겨움은 쉽사리 남편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각종 조사에선 결혼이민자의 20% 이상이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을 이런 상태에 방치한 채 다문화 사회를 말할 순 없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외국인 이주자들이 있지만, 결혼이주여성들만큼 기층에서부터 다문화 사회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 우선 그들은 우리 국민인 배우자의 아내가 되고 2세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다른 이주자들에 비해 쉽게 우리 사회에서 수용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 그들은 통상 외국 문화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적었던 빈곤층이나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다른 문화를 생활 속에서 접촉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그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실제로 2007년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나주의 한 할머니는 며느리 둘을 필리핀에서 얻었는데 “필리핀이 어디 붙어 있는지는 몰라도 내 며느리를 보면 얼굴이 희나 검으나, 필리핀 사람이나 베트남 사람이나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했다는 박아무개씨도 아내를 통해 캄보디아가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가 센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며, 아내를 위해 자신의 남성 중심적 생각을 바꾸려 노력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그녀들

이렇게 아래로부터 뿌려진 세계화의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선, 개인적 차원의 이런 각성을 확산시킬 수 있는 두 방향의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이주여성 자신들이 우리 사회의 주체적 성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돕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주여성을 받아들이는 일반 시민들이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좁은 세계관을 벗어나 다양성에 기반한 다문화 사회를 용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일반 시민을 위한 의식개혁운동이다.

이주여성의 주체화를 위해서는 그동안 진행해온 중앙정부 차원의 관련 법률 제정과 재정 지원 노력과 더불어 그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한 다양한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운동을 펴고 있지만, 상업화된 국제결혼이 우리보다 먼저 문제가 됐던 대만의 남양대만자매회(TASAT·타사)는 대만으로 시집온 동남아 여성들이 주체가 돼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나서는 단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이 모임의 모태는 1995년 대만 남부 가오슝 인근 소도시 메이눙에서 이주여성을 위해 연 중국어교실이었지만, 그 후 8년 만인 2003년 결혼이주자가 주체가 된 단체로 발전했다. 물론 이 모임에는 이주여성들을 도와온 대만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주여성들이 단체를 주도해 회장과 이사의 3분의 2는 이주여성으로 꾸려진다.

모태가 된 중국어교실은 독특했다. 그들 자신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게 언어 교육의 내용이었다. 왜 이주자가 됐고, 대만의 이민정책과 관련법에 따른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 어떻게 이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쳤다. 이런 교육을 통해 각성한 이주여성들은 스스로를 돕기 위한 모임, 즉 타사를 결성하게 됐다. 타사 결성을 주도했고 2007년 당시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추야드룽은 모임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감, 용기가 생겼다. 이제 드디어 한 인간으로 일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타사에서는 새로운 이주자들을 위한 언어·문화 교육과 함께 자녀 교육, 이민법의 문제점 등을 함께 공부했다. 또 이주자들이 새로운 결혼이주자들을 지원하는 상담가가 될 수 있도록 상담 교육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회원들의 관심은 자신들 문제에서 공공의 문제로까지 넓어졌다.

이주여성 국제연대에 희망

이주여성의 주체적 능력 강화와 더불어 이들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변화했다. 우선 변화를 보인 것은 가족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만 알았던 그들의 아내나 며느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론 텔레비전에 나와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가족이 그들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확산시켜 일반인의 이들에 대한 인식을 바꿔내는 것이 다문화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다.

타사에서 이를 위해 한 일은 회원들을 다문화 강사로 훈련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결혼이민자들을 현지 언어나 문화를 가르치는 인력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이 있고, 일부에선 실제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시집와서 한국 생활 14년차인 임옥씨가 그런 사람이다.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구립유치원의 조리사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 다문화 강사가 돼서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고 전해왔다. 이런 강좌를 통해 주민들은 결혼이민자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출신국가에 대한 정형화된 인식도 깨게 된다.

결혼이민자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서는 그들의 출신국가 및 경험을 공유하는 국가들의 사회운동과 연계하는 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 타사는 각 송출국 여성단체들은 물론 아태 지역의 이주운동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있다. 타사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던 추야드룽도 홍콩의 이주자지원단체인 APMM의 워크숍에 참여해, 조직과 연대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을 배울 수 있었다. 또 대만 여자기독교청년회(YWCA)처럼 송출국인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여성단체들과 연대해, 이주여성들의 2세를 위한 ‘어머니 고향 방문’ 프로그램을 전개함으로써 2세들이 자신의 어머니의 문화에 대한 존중감을 갖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노력을 통해 결혼이민자들이 우리 사회 속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될 때 국가의 성원을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로 한정시켜온 우리의 민족 모델이 다문화 모델로 진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국민국가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이주자가 적절한 정치적 규범을 준수할 경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다문화주의에 대해, 문화를 본질화해 좀더 근본적인 형태의 저항을 침묵시킨다는 비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주의는 민족 모델이나 프랑스의 공화국 모델과 같은 배제적 통합 모델 안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인 점은 분명하다.

글·권태선 kwonts@hani.co.kr
<한겨레> 파리 특파원과 편집국장 등을 거쳐 지금은 논설위원으로 있다. 파리 특파원 시절 이슬람 이주자들의 시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이주자 문제를 취재하면서 이주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 2006~2007년에는 한국의 결혼이주여성 문제를 집중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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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다문화주의, 또 하나의 새마을운동  

[특집-다문화] 관변 다문화주의 비판 

‘포섭’-‘배제’의 모순 되풀이하는 국가동원체제
‘다문화’라는 이름뒤의 획일성·서열화 깨뜨려야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사회통제 시스템을 국가동원체제라고 부른다. 국가동원체제는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국가 독재를 정당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1970년대 국가동원체제의 핵심인 새마을운동과 200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달구는 다문화주의 열풍은 기이하게도 닮아 있다. 첫째,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진행된다. 둘째, 대상 대중의 역량 강화와 사회 통합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 의한 내적 분열과 사회적 배제다. 셋째, 당사자들의 주체적 자율성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조직은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이유로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수행된 모든 사업은 권위주의적이고 전시행정적’이었다. 그러나 명목적인 수준에서는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했기에 ‘대중동원적’ 성격을 띠었다. 다문화주의도 다를 바가 없다.

갑작스런 다문화주의 바람

한국은 반이민국가이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동질화의 압력이 강한 사회이며, ‘순혈’에 대한 강박을 바탕으로 전근대적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다. 게다가 다문화주의는 유럽과 미국에서 퇴조하고 있는 정치철학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대유행하고 있다. 불과 2~3년 사이에 놀라운 속도로 주류 담론이 되어버렸다. 바로 국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는 2006년 급작스럽게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 2006년 5월 개최된 ‘제1회 외국인정책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은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제시한다. 이후 각급 지자체를 포함하는 정부의 모든 부처는 ‘표류와 과잉’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련 제도와 시설의 선점 경쟁에 뛰어든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다문화주의는 허구적이며 모순된 효과 이상을 낳을 수 없다. 국가는 국가 통합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이질적인 소수자 집단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소수자들의 ‘포섭’과 ‘배제’라는 상반된 작업이 일관된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혈통 중심의 편협한 국민주권 개념을 고수하는 한국의 경우 이런 문제는 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발현된다. 한편에서는 다문화주의를 부르짖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했던 ‘다문화’ 활동가를 가차없이 쫓아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 다문화주의의 현실이다. 2009년 10월 23일 미누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이주민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서울 가이드라인’이 공표된 2008년 11월 12일, 마석가구공단에서는 법무부와 경찰 직원 280여 명이 투입된 ‘인간사냥’식 합동단속을 통해 13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붙잡혔다. 그 가운데 5명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의 위선적 양면성은 ‘다문화’라는 상징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문화’라는 상징이 대중의 내면에 친숙한 일상성으로 착근되는 과정은 ‘새마을정신’이 내면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새마을운동은 대중매체와 학교 교육 그리고 국가가 지정한 85개 사회교육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 역시 다를 바 없다. 1990년대 10년간 다문화와 관련한 기사 건수는 총 235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된 이듬해인 2007년 한 해에만 무려 2만7894건으로 급증했다. 2008년에는 3만6778건으로 더욱 늘어났다. 공익광고를 통해 다문화 사회는 ‘사랑하는 마음도 더 많아지는 사회’로 칭송된다. 다문화 시범학교들이 지정되고 다문화 교육센터, 다문화 복지센터,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 등 전국적으로 수백 곳의 ‘다문화’ 관련 기관들이 설립되어 운영된다. 법무부가 지정한 ‘ABT’(Active Brain Tower)라고 명명된 ‘다문화 사회통합 주요 거점 대학’만도 20여 곳에 이른다. 이 기관들을 중심으로 ‘다문화 전문가’, ‘다문화 복지사’, ‘다문화 멘토’, ‘다문화 전문 상담원’, ‘다문화 지도사’ 등으로 불리는 전문가 집단이 속성으로 양성되고, 수많은 의사(擬似) 자격증이 남발된다. 다문화를 주제로 하는 각종 행사와 강좌에는 자원봉사자와 수강생으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렵다.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명목적으로는 농민층의 자기 역량 강화와 사회통합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농민층에 대한 차별적 접근을 통해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은 영세 소농에게는 오히려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강제로 작용했다. 한 월간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1960년대 전반에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마을’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다.” 이 점에서 역시 다문화주의는 새마을운동을 꼭 닮아 있다. 영세 소농이 ‘새마을’에서 쫓겨났듯이, 이주민 역시 ‘다문화 마을’ 만들기라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개발 프로젝트에 의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다. ‘다문화 특구’로 지정된 안산시 원곡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인위적인 개발 프로젝트는 이주민의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제2, 제3의 ‘미누’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짐짓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분할통치 방식으로 이주민 공동체의 내적 분열과 인종적 서열화를 조장한다. 다문화주의에 의해 선진국 출신 이주자와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자, 비자 소지자와 만료자,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주자와 비국적 취득 이주자 사이의 경계와 위계는 더욱 엄격하고 뚜렷해진다. 이주민 공동체는 ‘선별적 포용’과 ‘폭력적 배제’의 대상으로 뚜렷하게 분리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민족’ 역시 1세계 거주 에스닉(ethnic) 코리안, 남한인, 3세계 거주 에스닉 코리안, 북한 이탈 주민 등의 순으로 ‘인종적으로 서열화’된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혹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이주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다. 2009년 1월 현재 한국에는 64만여 명의 이주노동자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약 27%에 해당하는 18만여 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들의 90%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근무한다. 내국인 노동자의 40~50%의 임금으로 하루 평균 11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한다. 2007년 이주노동자의 재해율은 1.01%로 한국 노동자 전체 재해율인 0.72%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은 ‘국내 노동시장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소중 제조업의 생존에 절대적 기여를 하는 한국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인권과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회용 노동자’와 ‘불법 인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을 뿐이다.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2007), ‘거주외국인지원조례’(2007), ‘다문화가족지원법’(2008) 등 2006년 이후 제정된 일련의 이주민 관련 법령으로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통해 미등록 체류자에 대한 단속 및 강제 퇴거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며 매년 말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미등록 체류자 합동단속을 통해 수많은 ‘미누’들이 강제 퇴거당한다. 2007년 한 해에만 2만2546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단속되었고 그중에 1만8462명이 강제 퇴거당했다. 대부분의 단속반원들은 사복 차림이다. 신분증을 제시하거나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79.5%가 수갑을 사용했으며, 4.5%는 경찰 장구를 사용했다. 전자충격기와 그물총을 사용하는 경우도 2.9%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2003년 이후에만 무려 100여 명의 이주민들이 사망했다.

‘국가 관료’가 주도하는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농민은 ‘실질적 주체’가 아니었다. 농민의 자조적 민주주의가 강조되었음에도 농민의 ‘자율성’은 보장되지 못했다. 한국 다문화주의의 가장 큰 특이성은 바로 이 점과 관련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에는 이주민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이주민 대중에게는 그 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이주민 인구의 증가였다. 1990년에 5만여 명이 채 되지 않던 외국인 인구의 규모는 2007년에는 10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체 인구의 2%를 웃도는 규모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이 전 사회적 의제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담론에서 이주민 자신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은 한국인들만이 결정한다. 그런 방식으로 획일적인 (곧 반다문화적인) 다문화의 규정, 자격, 기준, 매뉴얼이 작성된다. 이주민은 ‘온정과 연민’, ‘교육과 상담’의 대상일 뿐 결코 문화적 주체로 존중되지 않는다. 이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이 강요될 뿐이다.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외적인 강제가 되어버린 다문화주의는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다문화의 주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절박한 현실적인 욕구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왜곡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이주민 당사자들은 냉소적인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응한다.

성찰,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

국가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다문화 사회’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여러 가치와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다문화 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다.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인 셈이다. 이를테면 어떤 다수 집단(과 그들의 정체성 혹은 문화)도 ‘보편(표준)의 지위’ 혹은 ‘주류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심’과 ‘표준’, ‘주류’와 ‘다수’의 위상을 누렸던 기존의 인식틀과 제도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가 요구되는 탓이다. 그 핵심에는 민족국가를 재규정하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구성원에게는 인위적 동질성을 강요하고 소수자에게는 자의적 차별을 자행하는 ‘표준화된 권위’의 근간이자 거점이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민족국가를 재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문화 사회를 추구하는 철학이요, 정치 지향이요, 문제의식이자 전망으로서의 다문화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 실현을 위해 행정 및 관변 조직을 최대한 활용해 국민을 동원하고 참여시키는 정치’적 슬로건일 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위선과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한다. 대중에게 다문화는 친숙한 일상으로 내면화되지만, 정작 다문화 사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이주민 공동체는 내적으로 분열되고, 한민족의 인종적 서열화가 이루어지며, 이주민의 자기결정권과 삶의 주도권은 더욱 취약해진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1987년 이후 쇠퇴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가동원체제가 재가동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새마을운동이 그러했듯이 ‘정치·사회·경제적 위기를 관리하고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목적’임은 분명하다. 만약 다문화주의를 재가동되고 있는 국가동원체제로 이해한다면,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태도는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가 보여주는 위선과 모순의 분열증은 서구적 이론과 개념에 의존해서는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국가동원체제의 맥락에서라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통치술의 일환일 뿐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다문화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전 국가적이며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다문화’는 우리의 강령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결코 다문화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똑같아지고 있는 것이 싫을 뿐이다.

글·오경석
한양대학교 다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한울,2007)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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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마킬라도라에 대한 기사이다. 심도깊으며 세계지리시간에 썰을 풀수 있는, 그리고 아이들에게 좀 더 다양한 애기거리를 제공해 줄 듯하다. 내용이 꽤 길다. 줄친 부분만 봐도 대충 맥은 잡힐 듯 하다.(내용 중간에 보면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직장을 잡지 못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디가나 '블랙리스트'는 존재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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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청기지’ 멕시코 국경의 예고된 나락  

저임금·면세로 미국기업 유인…경제위기 직격탄에 노동자만 희생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 
 
“위기? 무슨 위기? 아, 새로운 위기? 하이메 코타는 웃으며, “티후아나시가 위기에서 벗어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발생하는 온갖 비극적인 일들에도 불구하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코타는 티후아나 지역에 있는 마킬라도라 공장들(1)의 삶의 여건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이 부품조립 공장들은 1960년대 미국과 3천km에 걸쳐 국경을 접한 멕시코에 뿌리를 내렸다. 이 공장들은 멕시코의 무슨 매력에 끌렸을까? 값싼 노동력, 면세나 다름없는 세금제도, 허술한 당국의 감시, 세계 최고 경제대국과의 근접성 때문이었다.(2) 이후 여러 해 동안 캘리포니아반도(Baja California·멕시코 북서부에 있는 반도)의 정치 지도자들은 차례로 마킬라도라 덕분에 자신들이 완전고용 경제를 실현했다고 쾌재를 불렀다.

정부와 기업의 ‘해고’ 합작

노동자 출신인 코타는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노동자를 위해 운영하는 정보센터 ‘시탁’(3)은 마킬라도라가 노동자들에게 권리도 계약서도 없다는 이유로 20년째 보상을 거부해온 해고 및 산재, 임시 노동자들을 돕는 유일한 곳이다. 그들은 극심한 권리남용 피해를 받을 때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타는 이들에게 자문을 해주며, 때때로 법적 절차를 도와준다. 요컨대 인구 140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 국경도시의 사회적 체감온도를 알고 싶다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야 한다.

    
▲ <태평양을 바라보는 해변>, 2008-호엘 마리틴 다 실바  

오늘, 그는 여성 노동자 3명과 약속이 잡혀 있다. 이 중 한 명은 하루 10시간 작업하며 생산한 부품 700개 중 1개의 불량품 때문에 이틀 간의 출근정지를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들이 날 해고하고 싶어서 감시하고 험담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코타에게 내민 출근정지 통보서에는 “당신이 의도적으로 회사에 해를 끼쳤다”고 쓰여 있다. 이미 주당 755페소(약 40유로)밖에 안 되는 박봉인데 최근에는 ‘기술적인 작업 중단’으로 임금이 대폭 깎이고 있다. ‘기술적인 작업 중단’은 고용주들이 최근 짜낸 발상이다.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며, 이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임금의 3분의 1은 멕시코 정부가, 3분의 1은 마킬라도라가,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노동자가 쉬는 날로 때우는 것이다. 그 대가로 공장들은 노동자 해고 비율을 맞추겠다고 약속했다. 해고 비율이 부품 생산량(혹은 판매량) 감소 비율보다 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티후아나 마킬라도라 산업체연합’ 회장인 마후놀리아 피네다는 “이 프로그램을 채택할 기업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해고를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용 불가능한 규제다”라고 밝혔다.(4) 그래서 공장들이 ‘기술적인 작업 중단’을 실행하면서도,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위법행위를 일삼는다고 항변했다. 또 피네다 회장은 “노동자들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어, 파업이 전무하다”고 덧붙였다.

부품과 원료를 수입해서 조립한 뒤, 완제품을 그 즉시 미국으로 재수출하는 멕시코 내 이들 하청업체가 파업 같은 사회불안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은 없다. 가장 신뢰할 만한 보고서에 따르면, 티후아나의 이들 공장 중 82%는 노조가 없다.(5) 나머지 18%는 노동자들이 ‘유령 노조’라고 일컫는 단체에 소속돼 있다. 물론 피네다의 말은 달랐다. 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난 50년 동안 마킬라도라에서는 단 한 번도 파업투쟁이 없었다고 반박했지만, 그동안 이 국경도시에 사회적인 평화가 지속된 것은 노동자들이 사주들의 행동을 ‘이해’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 파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른 새벽 산업단지에 나가보면 이런 상황은 단박에 파악된다.

노동자들, 일자리 찾아 밤샘

수개월 전부터 일용직이라도 구할 요량으로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실업자들의 행렬이 눈에 띈다. 일부는 일자리를 찾겠다는 강한 욕심에 현장에서 밤을 지새운다. 새벽 5시, 모집책이 한 명도 현장에 없었지만, 기자가 나타나자 이들은 잔뜩 겁에 질렸다. 한 실업자는 “나한데 말 걸지 마라. 내 곁으로 다가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또 다른 이는 “여긴 금지구역이니 들어오지 마라. 이곳이 도로인 것은 맞지만, 공장 앞이라 도로도 공장 땅이다”라며 기자의 접근을 저지했다. 7시, 채용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들은 공장에서 5m 떨어진 곳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몸을 데웠다. 이들은 계속 겁에 질려 있다. 이들 중 유일하게 한 여성만이 인터뷰를 허락했다. 그녀는 몇 달째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일거리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마킬라도라는 언론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항상 공장 대문에 빗장을 걸었다. 현지 언론사의 한 경제 전문 기자는 “몇 년째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한 번도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반면 이들은 시내 주요 호텔에서 자신들이 개최하는 모든 기자회견에는 기자들을 초대한다”고 했다.(6)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기자는 마킬라도라를 둘러싼 비밀을 좀더 캐내기 위해 ‘시탁’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 사무실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알기 때문에 더는 겁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몇 해 동안 “마킬라도라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이다”라는 증언들이 반복됐다. 경제위기와 함께 사람들은 지옥을 넘어 새로운 서클에 갇혔고, 이들의 삶의 여건은 한층 악화됐다. 21살 때부터 여러 공장을 전전한 40대 로헤리오는 마킬라도라의 관행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난 멕시코 중부 미초아칸주에서 왔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스피커 프레임을 조립하는 일본 하청업체 타쿠비에서 일했다. 그 후 캐논에 케이블선을 납품하는 또 다른 일본 하청업체 타부시에서 일했다. 그 밖에도 전기제품을 수리하는 미국 하청업체 소넨에서 일했는데 그때가 최악이었다.”

소넨 공장에서 로헤리오는 하루 10시간씩 일한 뒤, 저녁에 2시간씩 기술자 수업을 받았다. 그는 승진해, 임금도 주당 1700페소(약 90유로)로 꽤 괜찮아졌지만, 강도 높은 노동에 진이 빠졌다. 회사는 “가전제품 하나를 수리하는 데 직원들에게 20분을 줬다. 그 시간에 수리를 못하면, 일과 후 저녁 시간에 끝내야 했다. 물론 야근수당도 없었다”고 했다.

작업반장은 로헤리오가 작업속도가 느리다고 문제 삼았다. 하지만 사실은 로헤리오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 결성을 시작한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공원에서 회합을 하고, 공장 출구에서 전단을 배포했다. 공장 감독관들은 로헤리오가 선동 주모자가 아니냐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캐물었다. 이사진들에게 ‘주모자’로 몰린 그는 어느 날 아침 해고됐다. 이들은 많지는 않지만 해고할 때 지불하던 몇 년치 근속 보상마저 지급하지 않았다. 로헤리오는 ‘시탁’의 도움을 받아 법적 절차를 밟은 덕에, 예상보다 많은 해고수당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블랙리스트(7)에 이름이 올랐다.

블랙리스트 노동자, 오갈 데 없어  


     
 
그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고용했던 샤프는 몇 주 뒤 그 사실을 알자마자 그를 해고했다. 그때부터 그는 캘리포니아반도 지역의 모든 전자회사에 취직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2007년 태양전지 패널을 조립하는 미국계 마킬라도라인 유니솔라 오보닉스에 취직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용광로가 16개 있는데, 환풍기가 하나도 없었다. 열기에 숨이 막혔다. 패널을 자르는 곳이 가장 위험했다. 온종일 유리섬유 먼지를 마셨고, 그 먼지가 피부에 달라붙어 일과가 끝날 쯤에는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노동자들이 하소연을 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동자들이 불평할 때마다 사주들은 “이런 경제위기에 일할 수 있는 당신들은 복받은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심각한 해고 위협은 1년 내내 지속됐다. 로헤리오는 온두라스 이민자 마뉴엘과 함께 전단지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은밀히 배포했다. 최근 유니솔라 오보닉스의 새 회장 마크 모렐리가 그룹의 눈부신 2008년 실적(마뉴엘에 따르면 16%의 성장률을 보였다)을 발표하며, 환경 의식이 높아져 태양전지 패널 사업 전망이 장밋빛이라고 자랑했다. 이에 로헤리오는 “2012년까지 주문이 밀렸다면서 왜 툭하면 우리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코타는 “물론 위기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위기가 또한 노동자들을 잠잠하게 하고, 임금 인상에 대한 이들의 명분을 잊게 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주 단체 쪽에서 보면 ‘모든 이에게 힘든 이 시기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티후아나 상공회의소(Canieti)의 전자산업 회장 클로디오 아리올라는 향후 몇 개월은 힘들겠지만, 경제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칼데론 대통령도 아리올라보다 하루 전날 인터뷰에서 “다각적인 경제회복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리올라는 이에 화답하듯, 지금 당장은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전자산업의 호황은 분명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국의 접경지역이라는 조커를 쥐고 있다”고 큰소리쳤다.

비록 국제 언론 앞이라 어쩔 수 없이 주장한 낙관론이라지만, 이 고해성사는 국제 언론의 수준에 걸맞은 대단한 치기였다. 티후아나에서 아직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분야인 전자산업이 한물갔다고 실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이들은 티후아나를 “텔레비전 세계의 수도”, “완전고용의 도시”라며 이곳이 마치 캘리포니아 남부 실리콘밸리라도 되는 양 떠벌렸다. 마킬라도라를 기획한 자들은 “이 모델로 수백만 달러의 해외투자 자본을 유치했고, 그 결과 미국에서 판매되는 텔레비전 10대 중 7대가 티후아나에서 생산된 것”이라며 칭찬을 늘어놨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1994년 체결되면서 2001년까지 전자제품 산업이 대단한 규모로 확장됐다. 전자제품 공장이 멕시코를 특히 선호한 것은 노동자들의 손이 작아서 손놀림이 민첩한데다 납처럼 오염물질을 사용해도 당국이 감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킬라도라들은 전자제품 소비가 절대 소강상태를 맞지 않을 것 같자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캘리포니아 관문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뽑았다. 티후아나 북쪽 국경선에 위치한 한 대학 부설 경제연구소에서 일하는 콰우테목 칼데론은 “1994~2000년만 해도 우리는 티후아나에서 완전고용의 경제 혜택을 누렸다. 실업률은 1%도 채 안 됐다. 특히 마킬라도라가 멕시코의 모든 국경지대에서 노동자들의 이동을 억제하는 방역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기업 모델은 제품을 수입·조립·수출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 밖의 부문의 경제와 완전히 격리돼 있어 여타 부문에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마킬라도라가 대규모 이주노동자들을 흡수할 수는 없다. 또 우리 경제의 급작스러운 규제 완화로 매년 50만 명의 멕시코인이 난민 신세가 됐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전시 때나 발생할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킬라도라, 거품성장의 상징

    
▲ <공항로에서 바라본 담벼락>, 2008-호엘 마리틴 다 실바
새 천년의 등장과 함께, 이 모델의 허점이 처음 표면화됐다. 2001년 미국의 경제침체로 국경선 지대의 마킬라도라들은 20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2002년 가전 부문이 인력 31%를 감축했고, 티후아나에서도 27%를 감축했다. 이에 대해 투자 전문가 레티샤 에르난데스는 “이곳 사람들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한다. 2008년까지만 해도 국경지대에 직접 투자한 해외 자본의 78%가 미국 자본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경제위기가 국경지대에 전례 없는 실업 대란을 촉발했다”고 했다.

2009년 가을, 티후아나의 공식 실업률은 7%로 멕시코의 전국 평균 실업률 수준인 5%보다 높다. 티후아나도 멕시코의 다른 지역처럼 비공식 경제가 여전히 인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인 마타모로스의 한 대학에서 일하는 여성 사회학자로, 마킬라도라 전문가로 통하는 시릴라 퀸테로는 “기술 이전은 없었다. 정말 실망스러운 것은 지난 40년 동안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위한 고용창출이 없었다”며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티후아나에 위치한 마킬라도라 중 엔지니어를 단 한 명도 고용하지 않은 업체가 13%나 되고, 1~10명을 고용한 업체가 65%다. 또 73%의 전자제품 업체들은 연구소가 없다. 절반가량은 제품 하나를 조립하는 데 만족하고 있고, 13%만 세 가지 이상의 제품을 조립하고 있다. 퀸테로는 “마킬라도라 혼자서는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채 단지 불안정한 성장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비정규직과 박봉만 양산하고 있다” 진단했다.

전적으로 이웃 북부 강대국 미국에 의존해온 이 수출경제는 이미 경제위기 전부터 급속도로 침체했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코타는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과도한 임금착취와 무보상 해고가 10년 전부터 이미 자행돼왔다. 공장들은 한 푼의 지출도 꺼린다. 심지어 유해물질을 차단하는 보호장비 구입비 지출도 꺼린다. 하지만 일자리가 전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입도 벙긋 못한다”고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요즘 전자제품용 배터리를 생산하는 마킬라도라 ‘파워소닉’에 대해 말들이 많다. 로헤리오는 “전에는 온종일 납을 다뤘기 때문에 ‘파워소닉’에 다니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아침 사람들이 공장 앞에 줄을 선다”고 했다. 대출로 집을 산 36살의 네차우알코요틀은 소넨에서 해고됐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사주들이 보호장비 미착용자만 병에 걸린다”고 했으니 “난 보호장비의 품질을 믿고 싶다”고 했다. 매월 회사 기준에 따라 혈액검사가 실시되고 있는데, 아직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사주들이 우리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주진 않지만, 만약 혈액 속의 납수치가 너무 높다 싶으면 저들은 우리 부서를 바꾼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납중독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다.

모든 전자기기의 필수 구성요소인 납은 사람들의 공포와 수군거림 속에 하천 등 사방에 깔렸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산업단지 아래쪽 칠판싱고 지역 주민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연 속에 방치한 납폐기물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2008년 미국의 비정부기구(NGO)인 ‘환경보건연합’의 도움을 받아 토양 3천t을 미국으로 보내 오염을 제거하게 했고, 8천t을 콘크리트로 봉인했다.

이 퍼포먼스 비용은 기업들이 아닌 양국 정부가 부담했다. 칠판싱고의 조직을 이끌고 있는 예시나 팔로마레스는 “언론 앞에서는 기업인들 모두가 우리의 퍼포먼스를 칭찬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아이가 무뇌아로 태어나 그 즉시 죽어갈 때마다 우리는 아우성을 쳤지만 다 허사였다. 불행하게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업폐기물과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없다”고 지적했다. 파나소닉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카르멘은 “난 전자제품 회로기판에 납땜을 했다. 그 작업을 할 때마다 내가 납 연기를 호흡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6개월째가 되자 얼굴 반점과 만성피로, 요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나소닉의 주치의는 아무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날 검사한 종합병원 의사는 내게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얼마 안 있어 백혈병에 걸릴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직장 찾아 어려운 이민행

카르멘은 일을 관뒀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장을 옮기는 것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요즘은 “우리를 찾는 곳이 별로 없다”며 달라진 세태를 전했다. 소니가 폐업한 뒤, 그녀가 거주하는 동네의 실업자 수가 증가했다. 그녀의 이웃 주민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난 치아파스에서 13살 때 이곳에 왔다. 지난 30년 동안 남부로 다시 떠난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원칙적으로 이주노동자는 몇 년간 이곳 국경도시에서 돈을 벌어, 이주 브로커에서 돈을 주고 북부, 즉 미국으로 가는 행운을 잡고 싶어한다. 하지만 요즘은 불투명한 현지 사정 때문에 그것이 대단히 위험해졌다. 가톨릭 종교단체가 이주노동자들이 묵고 있는 티후아나의 한 숙소에서 주최한 이민 강연에는 참석자 수가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강연장이 다 차지 않은 것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보통 미국에 간 멕시코 이주노동자들은 건설 부문에서 일한다. 하지만 요즘은 시기가 정말 좋지 않다”고 했다.

미국 이민을 생각하는 이들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 국경을 코앞에 둔 채, 이들은 공장을 전전하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은 “마킬라도라가 우리에게 말한 것과 달리, 우리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가진 장비로 배관공, 정원사 혹은 전기기술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는 포기 상태고 나머지 일부도 참고 견디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미국 땅을 밟기 전에 이미 위기에 봉착했다. 그래도 이들은 이주 브로커에게 건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티후아나의 위기는 특히 50대에서 감지되고 있다. 마킬라도라는 초창기부터 젊은 인력을 채용했다. 대부분의 구직광고는 ‘35살 미만’이라고 못박고 있다. 숙명의 50살이 된 노동자는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투쟁한다. 네차우알코요틀은 “이들은 생산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일한다. 이들은 최고의 생산성을 갖추고 있지만 고용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 해고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54살이 되자마자 그런 일을 당한 델피나는 “당시 난 세 사람 몫을 했다. 난 두통에 시달리고 코피를 흘려가며 일했지만, 현장감독은 항상 날 감시하며 속도를 내라고 주문했다. 그러던 이들은 앉은 채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며 우리에게 서서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대화도 할 수 없었고, 화장실도 갈 수 없었고, 심지어 껌을 씹을 수도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기댈 곳은 노동자들의 연대뿐

델피나는 2008년 11월 아무런 해명도 없이 해고됐다. 그녀는 해고당한 그주의 임금은 물론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조정위원회에 제소해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그녀의 딸 중 한 명이 200페소(약 10.5유로)를 송금해주면 세 식구가 하루 두 끼로 한 주를 나고 있다. 혹 사람들이 그 돈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물을 때면,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25년을 마킬라도라에서 일했지만, 그녀에겐 퇴직금도 모아둔 돈도 없다. 그 돈으로 7명의 자녀를 양육한 것이 고작이다. 많은 싱글맘들이 그렇듯,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밤샘 작업을 하며 온갖 경험을 했다.

그녀는 “마텔사가 내가 다니던 회사를 합병했을 당시, 퇴직금도 주지 않고 날 해고하려 했다. 내가 거부하자 날 납치했다”며 장난감 회사인 마텔사를 상대로 권리투쟁을 해야 했던 사실도 밝혔다. 그녀는 경비가 지키는 사무실에 감금된 채 꼬박 하룻밤을 지새운 뒤, 새벽녘에 그들이 건넨 2천 페소(약 106유로)짜리 수표를 수용하겠다고 동의하고서야 풀려났다고 했다. “알다시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시탁’의 도움을 받아 이 사건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고발했다. 마텔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법정은 몸값을 요구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납치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델피나는 이제 자신이 마킬라도라에서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내 나이엔 불가능하다. 저들은 진작부터 젊은 애들도 고용하지 않는다”며 실업자 신세인 20살 된 사위를 가리켰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가재도구라도 처분하려 하지만, 이곳 주민들 모두가 가난하기 때문에 거래되는 게 거의 없다”고 했다.

그녀의 아들 집에 화재가 났을 때, 소방관들은 출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정상은 아니지만, 누구를 탓하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또 아들 가족이 모든 것을 잃었는데 “아들이 근무하는 마킬라도라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단지 그의 회사 동료들만이 기부금을 전달했다”며 “아직 이곳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것이 연대의식”이라고 덧붙였다.

글·안 비냐 Anne Vigna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ps : 솔직히 예전에는 FTA는 무조건 반대하는 의견에 난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조금 누그러진게 사실이다. 정답은 없고 정답은 없다.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제적 여건상 무역 의존성이 높다는 사실에서 FTA가 기회일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선결조건(미국이 우리에게 요구한 선결조건이 아니다 ㅋㅋ)이 있다. 국가로서의 존립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식량문제의 보호(멕시코의 경우 옥수수 수입 개방으로 농촌은 황폐화 되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문제이다. 식량은 단순히 경제적 마인드로 접근하면 아주 위험한 결과가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가주권을 내주는 악조항(투자자국가제소권) 들은 최소한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페이지에다 스크랩한 조국 교수의 기사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의 생각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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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면세 부품과 원료를 수입, 조립해 완제품을 수출하는 멕시코 내 외국계 공장.

(2) 1999년 12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Janette Habel의 ‘멕시코와 미국 사이엔 국경선 하나밖에 없다’와 2008년 3월호에 실린 안 비냐의 ‘멕시코에서 토르티야가 사라진 날’ 참고.

(3) www.cittac.org.

(4) www.aim.org.mx.

(5) Jorge Carrillo et Redi Gomis <La Maquiladora en datos, resultados de una encuesta>, El colegio de la frontera norte, 티후아나, 2004.

(6) www.newsreel.org.

(7) 많은 노동자들과 ‘시탁’은 이 리스트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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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에게 당면한 사회적 이슈중의 하나인 강간범에 대한 '화학적 거세' 문제와 관련된 기사인줄 알았는데, 더 포괄적인 정신병자, 광기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시선에 대하여 다루고 기사이다. 기사 중 "치료 행위는 기본적으로 환자들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과 의사 기 방이옹의 말처럼, 환자들은 "그를 둘러싼 사회가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란 글을 읽으며 과연 우리 정상인(?)에게 해를 끼칠만한 사람은 누구이며, 그 정상인과 비정상인(광인)의 구분 기준은 무엇이며, 비정상인(광인)들이 정말로 정상인보다 더욱 더 많이 이 사회에 피해를 미칠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들을 더욱 더 미치게 만드는 건 사실 정상인이라 칭해지는 사람들이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그러나 비정상적들인 행동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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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를 범죄시하는 권력의 ‘광기’   

사르코지 “정신병자에게 족쇄를!”…‘정상인’보다 낮은 범죄율 무시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호 
 
“강간범을 거세시켜야 할까?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의회 토론에서 미셸 알리오마리 프랑스 내무장관이 한 말이다. 인권에 대한 이런 시대착오적인 관점(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다른 분야에도 확산되고 있다. 정신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개혁의 결과로 수십 년간 쌓아온 성과들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몰고 온 변화들은 정신질환자를 치료가 필요한 한 인간이 아닌,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고 있다.


2008년 12월 2일은 프랑스 정신의학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현직 프랑스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정신병원(파리 근교의 앙토니 병원)을 몸소 방문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그가 한 발언 때문이기도 하다. 역대 프랑스 국가 최고통치자들 중 이처럼 정신병에 낙인을 찍는 발언을 했던 예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단호하다. 그가 보기에 정신병 환자들은 위험한 존재다. 그런 생각은 그의 발언들 속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의 노력은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이 퇴원시킨 환자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에서부터 “정상인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때로는 실현 가능성이 적은 희망 때문에 (…)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까지. 그의 발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는 정신병 환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정신병 환자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버젓이 길을 활보하는 사람들 중에도 위험한 환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발언들을 더 잘 음미하고 싶다면, 전문가들의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노숙자들 중 30%가 정신이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자라는 말이다. 이들은 병원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차가운 길에서 죽어간다.

사르코지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교도소와 병원, 경찰 간 3자 공조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3자 간에 균형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좀더 분명해진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교도소 안도 위험하고 교도소 밖도 위험하다. 오늘날 정신병은 무엇보다 안전의 문제이다. 이제 정신병 환자들도 아동성범죄자와 테러리스트들에 이어 공포에 떠는 대중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의 범죄율보다 높지 않다.(1) 또한 정신질환자들이 작거나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중 상당수가 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정신병원에 필요한 건 안전요원이 아니라 충분한 수의 전문의다. 정신질환자들은 무관심과 따돌림, 폭력의 희생자로서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많으며 ‘정상인들’에 비해 기대수명도 짧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사르코지의 재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둔갑

그의 발언은 우연한 시점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르노블에서 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젊은 남자를 살해한 사건(2)이 있은 며칠 후에 그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 언론플레이에 능한 사르코지에게는 대중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좋은 기회였다. 그는 곧바로 ‘정신병원 보안강화 계획’이라는 정책을 세우고, 여기에 3천만 유로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신병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환자의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환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환자들에게 위치추적 장치를 부착해 탈출하면 경보장치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필요한 모든 병원’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폐쇄병동이 도입되고, 200여 개의 폐쇄병실이 마련될 것이다. 또한 기존 5개의 폐쇄병동에 4개의 중환자병동(UMD)을 추가하기 위해 4천만 유로가 투입될 예정이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코지는 강제 입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그는 잘못된 통계 수치를 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강제 입원이 전체 입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에 이른다. 환자 자신의 동의 없이 정신병동에 입원시키는 경우를 강제 입원이라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제3자, 주로 환자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2008년 4월 보건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환자의 행동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강제 입원을 시킨 경우는 전체 입원의 2%에 불과하다. 사르코지에게는 2%라는 수치가 인용하기에는 너무 적었을 것이다.

사르코지는 새 법안에 통원치료를 포함한 의무치료 조항이 명시돼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의무치료 조항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간호사들이 경찰과 함께 몰려와 반항하는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치료 행위는 기본적으로 환자들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과 의사 기 방이옹의 말처럼, 환자들은 “그를 둘러싼 사회가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3) 사르코지도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치료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의 동의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리가 돈 2급 시민들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으니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환자들의 퇴원과 관련한 규정도 강화될 것이다. 환자를 퇴원시키려면 담당 의사와 간호사, 외부 정신과 전문의 3명의 소견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소견을 밝히는 것에서 끝난다. 최종 결정은 행정 담당자가 내린다. 그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게 사르코지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에 앞서 안전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병원 밖에서는 행정자치단체장이, 병원 안에서는 병원장(경영자)이 ‘사장’처럼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경영자’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의 역할은 병원을 관리하고 병원 내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떻게든 예산을 절약할 방법을 궁리하고 불합리한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사르코지는 내무부 장관 시절에 이미 제안했던 계획을 다시 들고 나왔다.(4) 국가 차원에서 강제 입원 환자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자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의학계의 분노

사르코지의 발언에 정신병원 종사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중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안전의 밤’이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2월 7일, 파리 근교 몽트뢰유에서 열린 한 집회에는 2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가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앙토니 병원에서의 사르코지의 발언은 마른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다. 이미 25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돼온 프로세스가 갑자기 제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이 프로세스를 이해하려면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정신의학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2차 대전 중에 레지스탕스 운동 내부에서 정신병 환자 강제 수감- 때로는 평생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에 반대하는 ‘탈정신병운동’이 발전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광기의 인간성’(5)을 탐구한 프랑스 정신의학의 아버지 필리프 피넬이 있었다. 정신병 환자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람들에게는 ‘미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자 수용소의 벽을 허무는 것만으로 그런 생각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광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고 환자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될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공동체’ 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지역별·기관별 심리치료사들은 새로운 정신의학을 창조했다.(6) 정신과 의사들은 더 이상 ‘의료종사자’(7)가 아니라 환자가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전문 상담사’(8)들로 재정의된다. 이런 정신의학 혁명에 참여한 정신과 의사 뤼시앙 보나페는 “일반인도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우리는 그 잠재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누구든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정신병 환자들도 다른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병원이 가지는 중심적 역할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치료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시 말해 치료팀이 병원 안팎에서 환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생 동안 환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조직돼야 한다. 이 운동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장 에임은 “각 지역에 공립학교가 있듯이 지역별로 사회·의료팀을 두어야 한다”(10)고 주장한다.

환자를 인간 주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새로운 정신의학이 나날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끊임없이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 개선점을 찾아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현재 정신의학이 맞고 있는 ‘위기’는 이런 개념의 정신의학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개념의 정신의학을 추방하고 싶어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광기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여 통제·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것이 사르코지가 제안한 정책들이 뜻하는 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질환자들에게 투입되는 비용은 불필요한 인간들에게 투자되는 불필요한 비용이 된다. 온갖 평가(11)나 증명들을 요구하고 성과에 비례해 재정 지원을 하는 등의 정책을 강요하는 것에 의료종사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신병원 시스템이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 그것이다. 가령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주부나 자살 위험에 직면한 기업 간부들도 진료해야 한다. 그러러면 정신과 의사들은 광기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오늘날 광기는 부정된다. 이제 정신질환자는 평범한 신경증 환자들과 똑같이 취급된다.

돈으로만 환산되는 치료

우리는 지금 차가운 타산적 이성의 승리를 목도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성이 아니라 회계사들과 기술 관료들의 이성이다. 광인은 사회와 진정한 관계를 누릴 자격이 있는 특이한 주체가 아니라 뇌질환 환자로서 뇌를 ‘스캔’하고 유전적 형질을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문제 있는 행동을 일삼고 비정상적인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로서, 가능하면 빨리 정상인으로 되돌려져야 할 존재로 간주된다. 주류 ‘생체정신의학’의 이런 ‘과학적’ 시각은 정신질환자들의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 정신질환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순수한 의미의 손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젠가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때까지 약으로 광기를 억누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제약산업에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행동치료요법도 다시 인기를 끌게 될 것이다.

광기는 이제 이 세계 속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나 광기는 우리에게 삶이 숫자나 그래프로 요약될 수 없다는 것, 사람들 간의 관계가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광기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인간’이나 ‘시장형 인간’으로 정의되는 개인의 개념에 대항한다. 이 개념으로 정의된 인간은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할 줄 알며, 인간관계보다는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침투한 ‘거래’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프랑수아 토스켈은 말했다. “광기의 인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12)

글·파트리크 쿠프슈 Patrick Coupechoux
저서로 <광인들의 세계: 우리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들을 학대하는가>(2006), <피억압자의 우울증: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연구>(2009)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ps : 프랑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어떤 문제가 이슈화 되는건 분명 어떤 계기(사건)에 의해서인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또다른 계기로 삼아 자신들의 비정상적인, 소개인적인 이익을 취하려 하는건 정치인들의 특기인 건 어디가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그럼 정치인들은 필요없는 존재 아닌가? 그건 또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금 한창 인기를 몰로 있는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생각난다. 왜 현재 우리에게 평소에 인기도 없는 사회과학도서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는지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많은 대중들에게(평범할때는 별 관심없는 일반인들에게까지) 과연 '정의'가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을 유발할만큼 '정의'가 없고 혼란한 사회란걸 반증하는 건 아닐까? (더하여,'정의란 무엇인가의 핵심근간에 해당하는 존 롤즈의 '정의론'도 같이 읽어볼 만하겠다. 근데 책 두께가 장난아니다. 과연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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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범죄학 교수 장루이 스농은 살인범의 2~5%, 성범죄자의 1~4%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정신질환자들이 크고 작은 범죄의 희생자가 될 확률은 일반인에 비해 17배나 높다(2008년 1월 16일, 안전구금에 관한 법률안 상원 공청회에서 한 발언).

(2) 2008년 11월 12일, 뤽 뫼니에(26·학생)가 이제르의 생테그레브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3) ‘안전의 밤’ 운동의 일환으로 보낸 공개 편지. www.collectifpsychiatrie.fr.

(4) ‘광기마저 순수성을 잃어버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7월호 참조.

(5) 피넬은 광인들이 부분적 이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성에 접근함으로써 치료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6) 레지스탕스 내부에서 ‘탈정신병운동’의 두 조류가 탄생했다. 프랑수아 토스켈로 대표되는 첫 번째 조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제도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조류를 대표하는 뤼시앙 보나페는 지역별·분야별로 정신과 치료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7)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Gallimard, Paris, 1976.

(8) 뤼시앙 보나페, <소외로부터의 해방: 광기와 사회>, Presses universitaires du Mirail, Toulouse, 1991 중, ‘정신과 의사의 역할’ 참조.

(9) <Recherches>, 17호, 1975.

(10) <Chronique de la psychiartrie publique>, Erès, Paris, 1995.

(11) “미소(항공기 승무원의 미소가 아니다)는 정신병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미소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쿠르슈베르니의 라보르드 클리닉의 창립자 장 우리가 한 말이다.

(12) <광기 속에서의 종말 체험>, éditions de l‘Arefppi, Toulouse,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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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난 이런 사건을 볼때마다 너무나 씁쓸하다. 씁쓸하기 싫은데, 그리고 이해가 가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기분이 나쁜건 이해하지만 사실은 명확히 해야하지 않을까? '군대'란 곳이 어떤 곳인가? 전쟁에 필요한 사람(피아가 명확히 구분되는 전장에서 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일 수 밖에 없을 때 난 살고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아닌가? 그럼, 군대가 '사람 죽이는 기술 배우는 거' 맞지 않나? 물론 EBS라고 하는 전국적으로 방송이 나가는 파급력있는 공적 공간에서의 논란성 있는 발언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마녀사냥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난 이 나라가 선진적인 나라라 할 수 있으려면 '관용'과 '허용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느선까지냐 어디까지냐는 그 다음 문제라 생각된다. 

하여튼, 씁쓸하다. 이 사건과 관련된 글 두개를 스크랩한다. 근데, 동아일보 사설은 참 민망하다. 최대한 어떻게해서든지, 대한민국의 전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이 교사와 전교조를 어떻게 해서든지 엮어보려는 태도. 난 이 사건을 처음에 접했을때 이 사람 만약에 교사인데 전교조 교사이면 참 신문에 많이 나오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신문기사에 그런 내용은 없는 걸 보고, 전교조 교사가 아니구나 했다. 근데 동아일보 사설에 이게 나오는 순간, 혹시 뭐 "예전에 전교조 아냐"라는 상상을 했었는데, ㅋㅋ. 근데 혹시 이런게 아닐까 상상한다. 이 교사는 발령 초기 잘못된 선배의 지령으로 전교조에 멋도 모르고 가입했다. 그 후에 자신과 전교조(또는 조직이라고 해두자)가 맞지 않다는 걸 알고 뒤늦은 후회와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탈퇴를 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 교사는 참으로 억울하겠다.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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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서 '살상 기술' 배우는 거 맞다" 
[진보, 야!] "군대문제, 좌파의 담론과 정책은 무엇인가?" 
 
많은 군필자 남자들이 술을 마시면 군대 이야기를 한다. 남자들끼리 모였을 때 하고, 여자들이랑 함께 있는 자리에서 한다.

남자들끼리 모이면 유격 행군 때 먹었던 씨레이션에 대한 이야기, A형 텐트치고 비 오는 땅에서 잔 이야기, 유격 PT 체조하는데 조교를 죽이고 싶었다는 이야기, 휴일에 끌려 나가 눈 치우고 잡초 뽑은 이야기 등등을 하면서 서로의 군 생활에 대한 ‘연대감’을 만들곤 한다.

군대 얘기와 '훌륭한' 남자들

다른 한 편 여자들과 있는 자리에서 예비역들이 하는 이야기는 “군대는 x 같아” 버전과 “난 군 생활 열심히 잘 했어”라는 버전이 있다. 이 두 가지 버전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은 데 사실은 같은 이야기다. 군대는 힘든 곳이다. 그리고 자기는 그 과정을 마친 ‘훌륭한’ 남자라는 이야기이다.

2010년 7월 24일. “남자들은 군대 갔다 왔다고 좋아하죠, 그죠? 뭐 자기가 군대갔다왔으니까 뭐 해달라고 만날 여자한테 떼쓰잖아요? 근데 그걸 알아야죠. 군대 가서 뭐 배웁니까? 죽이는 거 배워오죠. 여자들이 그렇게 힘들게 낳으면 걔네들은 죽이는 거 배우잖아요. 그럼 뭘 잘했다는 거죠, 도대체가? 뭘 지키겠다는 거죠? 죽이는 거 배워오면서. 걔네 처음부터 그거 안 배웠으면 세상은 평화로워요.”라고 장희민이라는 EBS 언어 영역 강사가 강의하는 도중에 이야기했다는 동영상과 스샷(캡처화면)이 돌기 시작했다.

온라인은 순식간에 달궈지기 시작했다. ‘코갤’(디씨인사이드 코미디 갤러리) 등을 위시하여 ‘네티즌 수사대’가 그녀의 ‘신상 털기’를 시작했고, 급기야 그녀의 미니홈피는 해킹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와의 ‘직접 통화’ 시리즈가 블로그와 게시판을 날아다닌다.

동시에 EBS에는 그녀의 ‘사과문’이 게시되었고, 7월 25일 EBS는 ‘긴급경영회의’와 ‘확대간부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로 ‘보도자료’가 나가고, 곽덕훈 사장의 사과문이 홈페이지에 게시되었다. 그녀는 강사직을 그만 두었다.

많은 군필자들이 “우리는 죽이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라면서 항변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은 장희민을 죽였다. 사적으로, 공적으로 그녀의 ‘사회적 생명’은 끊어졌다. 물론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범죄와 단죄가 판별할 틈도 없이 ‘공습작전’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다이내믹 코리아!

범죄와 단죄 사이, 다이내믹 코리아!

여기서 잠깐 장희민의 주장을 살펴보자. “남자들은 군대 갔다 왔다고 좋아하죠” 여기에 문제가 있나? 한편으로는 군대가 싫었다고 다들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여러 설문조사들에서 군필자들에게 군 경험이 사회생활에 도움이 되었냐고 물으면 과반수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가장 핵심적인 주장인 “군대 가서 뭐 배웁니까? 죽이는 거 배워오죠”를 살펴보자.

군인이 자기의 ‘몸’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교육받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총기이다. 총의 용도는 살상에 있다. 예컨대 PRI(Preliminary Rifle Instruction 사격술 예비훈련)는 피나고 알배기고 아픈 훈련일 뿐만 아니라 능숙하게 ‘죽이기’ 위한 자세 훈련이다. 수류탄의 목적, 크레모어의 목적, 전차, 자주포, 전투기 모두는 ‘죽이는 거’가 목적이다. 그것의 기술을 배우는 것은 ‘죽이는 거’가 아닌가? 훈련만 생각해봐도 알 일이다.

작게는 부대 ATT(Army Training Test 전투력 측정 훈련)에서 크게는 UFG(을지 프리덤 가디언, UFL에서 2008년 바뀜), 호국훈련 등의 각종 훈련에서 ‘죽이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는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 ‘죽이는 거’는 국가의 군대, 즉 국군이기 때문에 국가통수기구/군사지휘기구로부터 국방부, 밑으로 내려오면 각급 지휘관에 의해 통제될 따름이다. 군대를 갔다 와서 죽이는 걸 안 배웠다는 예비역들은 도대체 어느 군대를 갔다 온 건가?

“내 부모와 가족, 애인을 위해서 군대 갔다 왔는데, 죽이는 걸 배웠다고?”라고 화를 내는 것은 ‘살상’이라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가는 사람은 극소수다. 대부분은 군대에 ‘끌려’ 간다.

하지만 그들의 ‘선량한’ 목적과 상관없이 그들이 ‘죽이는 거’를 배우는 것은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다. 장희민의 주장은 틀리지 않았다. 화를 어디다가 내고 있는 건가? ‘만만한 상대’에게 뿜고 있는 거 아닌가.

남성적 자아와 피해자 의식

하지만 군필자들의 감정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징병제 군대에 ‘빽 없어서’ ‘신의 아들’이 되지 못해서 들어간 것, 그리고 그 안의 위계적인 군대의 악습들과 여러 가지 병폐를 겪은 것들에 대한 분노는 군대를 경험하는 절대 다수의 남성들은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을 ‘피해자’로 느끼는 것도 온당하다.

예컨대 이런 이중 감정이 등장한다. 군필자들은 자신들의 '남성적'인 자아도 그대로 보존 받고 싶으면서, 자신들의 '피해자'로서의 지위도 유지 받고 싶어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군대 x 같아”와 “난 군 생활 열심히 잘 했어” 두 가지를 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병역 비리’를 저지르지 않은 ‘훌륭한’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완전히 인정해주는 집단은 술자리에서의 군필자들밖에 없다. 결국 이에 대해서는 ‘군필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다.

군대는 이미 ‘성역’이 된다. 더 문제는 군대를 이렇게 ‘성역’으로 만든다고 해서 군필자들의 ‘분노’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분노’를 만드는 것은 장희민이 아니라 군대와 징병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EBS 사장이 성명을 통해 밝힌 이야기가 굉장히 많은 것을 설명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될 매우 부적절한 발언”이다. 군필자들의 분노는 결국 국가주의에서 결론을 맺게 되는 것이다. 군대를 다녀온 이들의 ‘고충’은 결국, 국가가 위무해주면서 ‘멋진 사나이’로 ‘인증’하는 선에서 봉합되고 만다.

국방부를 움찔하게 하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대에서 제기해야 할 문제가 얼마나 많던가. 이를테면 장희민을 조리돌릴 시간에 병사들의 임금 현실화와, 내무생활 개선, 전군의 적절한 휴가, 핸드폰 사용, 전역 후 ‘현실적인’ 퇴직금 지급 등을 이야기했다면 어땠을까? 그 에너지였다면 국방부가 움찔하지 않았을까?

결국 이런 식의 구도는 군대를 가지 않은 ‘병역 비리’를 저지른 이들/병역거부자들과, 갈 수 없는 이들 즉 여성들과 장애인들과 소수자들의 시민권만 약탈하는 수순으로 끝난다. 남성 군필자들의 ‘분노’는 늘 같은 방향의 쳇바퀴를 돌며 분출할 상대를 찾아다녔을 뿐이다. 이걸 반기는 건 과연 누굴까? 우파들은 손 안 대고 코를 푼 셈이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자. 1999년의 ‘군가산점제 위헌 판정’, 2001년 ‘월장 사태’부터 시작해서 가깝게는 2010년의 ‘재범이 사태’까지 이르는 동안 매번 군대와 관련된 사회적 논란은 ‘상식’과 ‘몰상식’ 혹은 ‘여성’과 ‘남성’의 구도로만 진행되었다.

‘진보’ 혹은 ‘개혁’ 진영 논자들은 늘 ‘상식’이라는 준거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곤 했다. 내가 의아한 것은 여기에서 ‘좌파’의 논점이다. ‘상식’이라는 기준은 ‘몰상식’하고 ‘파시즘’의 징후를 가지고 있는 대중들에 대한 ‘비판’ 혹은 ‘계도’라는 방향의 논의로만 끌고 갔다.

"사이버 테러, 너무 몰상식하다” 식의 담론이 전부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민주적 군대’라는 판타지는 노무현 정부에 의해 ‘자주 국방’이라는 ‘상식’을 가지고 “국방개혁 2020”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좌파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군사주의’를 문제 삼거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대체복무’ 정도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늘 멈추곤 했다. 그 다음으로 나와야 할 좌파들의, 특히 진보 정당이 말하는 한국 ‘군대’에 대한 다른 담론과 정책을 본 적이 없다.

군대, 좌파의 대답은 무엇인가?

근본적인 수준에서, 예컨대 국가가 부르주아들의 집행기구인 것처럼, 근대 국가의 징병제 군대는 억압적 국가기구가 맞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분쇄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문제제기는 적절했지만, 그 다음은 무엇인가? 

 

게다가 군대는 계속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변화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 군대에 대해 접근하는 다른 종류의 남성들의 전략과 대응들도 있는데(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겠다), 계속 ‘파시즘/국가주의’의 구도에서 ‘평화 군축 반핵’이라는 구호만 외칠 것인가? 좌파의 구체적인 대답은 무엇인가?
 
                                                                                                                레디앙 2010년 07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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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0.7.26  [사설]軍의 존재 이유부터 가르쳐야 할 사회  

현직 고교 교사인 장희민 EBS 수능 강사는 EBS가 24일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 강의에서 “남자들 군대 가서 뭐 배우고 와요. 죽이는 것 배워 오죠. 여자들이 그렇게 힘들게 낳아 놓으면 죽이는 것 배워 오잖아요. 처음부터 그거 안 배웠으면 세상은 평화로워요”라고 말했다. 국어 전공인 30대 후반의 교사가 군(軍)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 참으로 놀랍다. 공개 방송강의에서 군을 ‘사람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으로 매도해 군필자(軍畢者)와 현역 군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낼 정도라면 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쳤을지 짐작할 만하다.

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토를 방위하기 위해 존재한다. 군이 나라를 지켜주지 못해 외부의 침략을 당한다면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끊임없이 외침에 시달린 우리 역사만 봐도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사설은 논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 상식적으로 외침에 시달린 우리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 역사는 고려 말, 조선 중기 강군을 보유하지 못해서 즉, 적군을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 군인과 무기가 발달하지 못해서 그렇게 원나라의 지배와 임진왜란 같은 국난을 겪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 다시 물어본다. 군대에서 군인들이 배우는게 뭐란 말인라?)

더구나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대남(對南) 적화통일 야욕을 포기하지 않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가다. 북한 정권은 주민이 굶어죽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핵무기를 비롯한 무력 증강에 매달리며 천안함 폭침(爆沈)도 주저하지 않는 예측 불허 집단이다. 통일이 되더라도 우리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다.

다음 달이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다. 한 세기 전 우리는 군사력 부족으로 일본에 36년 동안 국권을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다. 6·25 때는 북의 남침으로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신세였다가 유엔군의 도움으로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 군의 존재를 부인하고도 생존할 수 있었던 국가는 인류 역사상 없다. 전쟁이 나서 침략을 당하면 비전투 인원인 여성과 어린이도 안전하지 않다. 장 씨가 지난 30여 년 동안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교사로 일할 수 있는 것도 군이 나라를 지켜주었기에 가능했다. (--정말 초등학생이 말하는 수준이다.) 그는 한때 전교조 소속 교사였다고 한다. 이런 교사들한테서 배우는 우리 아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할 때가 되면 대한민국의 군과 안보가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스럽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직 때 “군복무는 썩는 것”이라고 말해 대통령 자질을 의심받았다. 병역 의무를 다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존경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국가안보가 튼튼해진다. 입으로만 ‘평화 사랑’ 운운하며 군대와 군인을 모욕하는 위선(僞善)의 언행으로 어린 세대의 정신을 물들이는 상황이 걱정스럽다. 

ps : 정말 이런 사설은 싫다. 너무나 뻔히 보이는 글. 물론 사설과 칼럼이 한 신문의 간판이니 그 의도가 있는건 당연한데...(내가 고등학교때 논술을 공부한다고 이런 사설을 가지고 논리적 글쓰기를 공부했다고 생각하니 좀 웃긴다) 맨 마지막에 나온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뭐 “군복무는 썩는 것”이라는 말의 뉘앙스와 그 분의 언행 스타일로 보았을때 뭐 비일비재 했던 일이고 정치적인 다분히 정치적인 일이니 빼더라도, 전교조와 이 사건을 연결시키는 듯한 글은 정말 너무나 싫다. 아무리 어느 한 집단을 싫어한다지만 이렇게 연관시키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전교조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전교조 조합원 교사 중가 다들 훌륭한 교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조직'의 문제라기 보다는 '개인'의 문제이다. 그렇듯 '개인'의 문제가 곧 '조직'의 문제일수만은 없는 것이거늘, 뭔 껀수만 있으면 물고 늘어지는 언론의 태도는 이제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든다. 제발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그래도 한 신문의 사설이라고 하면 논리적이고 올바른 글쓰기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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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0.4.12  (2부)우리 안의 욕망…① 주거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ㆍ10명 중 9명 이상 “부동산이 빈부격차 키운다”

이번 설문조사는 경향신문이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지난 3월8~9일 이틀간 서울에 거주하는 만 19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 방식으로 실시했다. 지역·성·연령대별 비례할당에 의한 층화무작위 추출법을 이용했다. 지역은 중부권(마포·서대문·용산·은평·종로·중구), 강북권(강북·광진·노원·도봉·성동·성북·중랑·강동구), 강서권(강서·관악·구로·금천·동작·양천·영등포구), 강남권(강남·서초·송파구)으로 나눴다. 또 성별·연령·권역·결혼여부·소득수준·교육수준·가족구성·가족수·주택규모·거주형태·점유형태 등의 응답자 특성을 고려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최대 허용오차 ±3.1%포인트다.

 

“우리 사회에서 부동산이 빈부격차를 낳느냐”는 질문에 설문 응답자 중 95.3%가 ‘그렇다’라고 응답했다. 집 보유여부를 떠나 우리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부동산’ 문제가 계급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에 공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매우 큰 영향’이라는 응답이 64.0%에 달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징표로 읽힌다.

영향을 준다는 응답은 모든 응답계층에서 90%를 상회했다. ‘매우 큰 영향을 준다’는 응답은 40~50대, 중부권, 월소득 200만~299만원과 400만~499만원, 월세 임대층에서 조금 높은 경향을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응답은 4.7%에 불과했다.

이 같은 통계는 우리나라 주택시장이 가장 손쉽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풀이된다. 바로 이웃들의 이야기인 만큼 체감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데 따른 지표라 할 수 있다. 주부 윤모씨(49)는 “한동네에 살며 매년 김장철이면 돕고 살던 이웃이 5년 전 2곳의 아파트 분양권을 매입하면서 왠지 사이가 어색해지기 시작했다”며 “2년 뒤 7억원 가까운 이윤을 챙긴 그 사람은 골프로 취미 생활을 하고 있으나 나는 여전히 예전처럼 가내수공업 부업을 하고 있다. 뼈빠지게 일해도 여전히 제자리라고 생각하면 소외감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치솟는 서울의 부동산 가격으로 지방 사람들도 소외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광주에 거주하는 심모씨(47)는 “광주 토박이인 친구가 20대에 서울로 일자리를 구해 떠났을 때만 해도 비슷하게 사는 것 같았지만, 현재는 비슷한 평수의 아파트인데도 지방에는 미분양이 넘쳐나는 반면 그 친구 집값이 3배 정도 더 높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주변에서 그 친구가 ‘서울 가서 성공했다’고 칭찬할 때마다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서울에 사느냐, 지방에 사느냐에 따라 마치 인생의 ‘등급’이 나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일터에서도 집 보유 여부는 사람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로 통한다. 직장인 이모씨(34)는 “동료 중 하나가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3채나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부러워한다”며 “부동산으로 돈 벌 생각들을 하지 직장 다니면서 목돈을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주택의 기능에 대해서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주택은 주거공간’이라고 본 응답자가 85.2%로 ‘주택은 투자재산이라고 본다’는 응답자(14.8%)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사람들의 양면성이 심한듯하다. 실제 맘과 뭔가 자신의 맘이 들어나는 곳에서는 실제 맘과 다른 태도를 보이는.)강남권 거주자 사이에서 ‘투자재’로 보는 비율이 미미한 수준으로 높게 나타났을 뿐 각별한 편차를 보이지 않았다. 주택규모에 대해서는 ‘집은 가족수에 맞게 적정해야 한다’는 응답이 89.2%로, ‘집은 클수록 좋다’(10.8%)는 의견을 크게 앞질렀다.

 

‘내 소유가 아니라 임대주택이어도 괜찮다’는 데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동의했다. 이는 한국인의 ‘집’에 대한 인식에 있어 ‘투자재’보다는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전통적인 인식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윗 부분에 나오는 주택의 기능에 관한 설문과 내용도 그렇지만, 실제 현실에서의 사람들의 맘과 행동이 이럴까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절반 가까은 사람들이 '임대주택이어도 괜찬다'는 생각을 할까? 그리고 주택이 '투자재'보다는 '살아가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할까? 이건 설문조사를 좀 더 심층적으로 해야 현실과 부합하는 정말 정확한 내용일 듯 하다) 동시에 현재의 고가로 형성된 주택시장에서 ‘소유’ 중심의 정책보다는 생활 수준에 맞추면서도 부담없는 수준의 ‘임대’ 주택을 대거 보급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인 공감대와 필요성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현재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을 두고는 응답자 중 가장 많은 28.7%가 ‘부동산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투기세력’을 꼽았다.

다음으로는 ‘이익을 위해 분양가와 건축비를 높게 책정하는 건설사’(24.0%)와 ‘무능력하고 일관적이지 못한 정부정책’(23.4%)이 엇비슷했고, ‘지역별로 편차가 큰 자녀교육 환경’(15.6%) 등도 지목됐다. ‘부동산 재테크를 조장하는 언론’(6.5%)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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