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에 설치된 마킬라도라에 대한 기사이다. 심도깊으며 세계지리시간에 썰을 풀수 있는, 그리고 아이들에게 좀 더 다양한 애기거리를 제공해 줄 듯하다. 내용이 꽤 길다. 줄친 부분만 봐도 대충 맥은 잡힐 듯 하다.(내용 중간에 보면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직장을 잡지 못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디가나 '블랙리스트'는 존재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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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청기지’ 멕시코 국경의 예고된 나락
저임금·면세로 미국기업 유인…경제위기 직격탄에 노동자만 희생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
“위기? 무슨 위기? 아, 새로운 위기? 하이메 코타는 웃으며, “티후아나시가 위기에서 벗어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발생하는 온갖 비극적인 일들에도 불구하고 유머감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코타는 티후아나 지역에 있는 마킬라도라 공장들(1)의 삶의 여건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다. 이 부품조립 공장들은 1960년대 미국과 3천km에 걸쳐 국경을 접한 멕시코에 뿌리를 내렸다. 이 공장들은 멕시코의 무슨 매력에 끌렸을까? 값싼 노동력, 면세나 다름없는 세금제도, 허술한 당국의 감시, 세계 최고 경제대국과의 근접성 때문이었다.(2) 이후 여러 해 동안 캘리포니아반도(Baja California·멕시코 북서부에 있는 반도)의 정치 지도자들은 차례로 마킬라도라 덕분에 자신들이 완전고용 경제를 실현했다고 쾌재를 불렀다.
정부와 기업의 ‘해고’ 합작
노동자 출신인 코타는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노동자를 위해 운영하는 정보센터 ‘시탁’(3)은 마킬라도라가 노동자들에게 권리도 계약서도 없다는 이유로 20년째 보상을 거부해온 해고 및 산재, 임시 노동자들을 돕는 유일한 곳이다. 그들은 극심한 권리남용 피해를 받을 때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코타는 이들에게 자문을 해주며, 때때로 법적 절차를 도와준다. 요컨대 인구 140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 국경도시의 사회적 체감온도를 알고 싶다면 그의 사무실을 찾아가야 한다.
▲ <태평양을 바라보는 해변>, 2008-호엘 마리틴 다 실바
오늘, 그는 여성 노동자 3명과 약속이 잡혀 있다. 이 중 한 명은 하루 10시간 작업하며 생산한 부품 700개 중 1개의 불량품 때문에 이틀 간의 출근정지를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들이 날 해고하고 싶어서 감시하고 험담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코타에게 내민 출근정지 통보서에는 “당신이 의도적으로 회사에 해를 끼쳤다”고 쓰여 있다. 이미 주당 755페소(약 40유로)밖에 안 되는 박봉인데 최근에는 ‘기술적인 작업 중단’으로 임금이 대폭 깎이고 있다. ‘기술적인 작업 중단’은 고용주들이 최근 짜낸 발상이다.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를 막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며, 이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임금의 3분의 1은 멕시코 정부가, 3분의 1은 마킬라도라가,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은 노동자가 쉬는 날로 때우는 것이다. 그 대가로 공장들은 노동자 해고 비율을 맞추겠다고 약속했다. 해고 비율이 부품 생산량(혹은 판매량) 감소 비율보다 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티후아나 마킬라도라 산업체연합’ 회장인 마후놀리아 피네다는 “이 프로그램을 채택할 기업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기업들이 해고를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용 불가능한 규제다”라고 밝혔다.(4) 그래서 공장들이 ‘기술적인 작업 중단’을 실행하면서도,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위법행위를 일삼는다고 항변했다. 또 피네다 회장은 “노동자들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어, 파업이 전무하다”고 덧붙였다.
부품과 원료를 수입해서 조립한 뒤, 완제품을 그 즉시 미국으로 재수출하는 멕시코 내 이들 하청업체가 파업 같은 사회불안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은 없다. 가장 신뢰할 만한 보고서에 따르면, 티후아나의 이들 공장 중 82%는 노조가 없다.(5) 나머지 18%는 노동자들이 ‘유령 노조’라고 일컫는 단체에 소속돼 있다. 물론 피네다의 말은 달랐다. 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어가며’ 지난 50년 동안 마킬라도라에서는 단 한 번도 파업투쟁이 없었다고 반박했지만, 그동안 이 국경도시에 사회적인 평화가 지속된 것은 노동자들이 사주들의 행동을 ‘이해’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 파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른 새벽 산업단지에 나가보면 이런 상황은 단박에 파악된다.
노동자들, 일자리 찾아 밤샘
수개월 전부터 일용직이라도 구할 요량으로 줄지어 서서 기다리는 실업자들의 행렬이 눈에 띈다. 일부는 일자리를 찾겠다는 강한 욕심에 현장에서 밤을 지새운다. 새벽 5시, 모집책이 한 명도 현장에 없었지만, 기자가 나타나자 이들은 잔뜩 겁에 질렸다. 한 실업자는 “나한데 말 걸지 마라. 내 곁으로 다가오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또 다른 이는 “여긴 금지구역이니 들어오지 마라. 이곳이 도로인 것은 맞지만, 공장 앞이라 도로도 공장 땅이다”라며 기자의 접근을 저지했다. 7시, 채용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들은 공장에서 5m 떨어진 곳에서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몸을 데웠다. 이들은 계속 겁에 질려 있다. 이들 중 유일하게 한 여성만이 인터뷰를 허락했다. 그녀는 몇 달째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일거리가 전혀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신상에 대해 아무것도 밝히고 싶어하지 않았다.
마킬라도라는 언론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항상 공장 대문에 빗장을 걸었다. 현지 언론사의 한 경제 전문 기자는 “몇 년째 온갖 방법을 써봤지만, 한 번도 공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반면 이들은 시내 주요 호텔에서 자신들이 개최하는 모든 기자회견에는 기자들을 초대한다”고 했다.(6)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기자는 마킬라도라를 둘러싼 비밀을 좀더 캐내기 위해 ‘시탁’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 사무실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알기 때문에 더는 겁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몇 해 동안 “마킬라도라에서 일하는 것은 지옥이다”라는 증언들이 반복됐다. 경제위기와 함께 사람들은 지옥을 넘어 새로운 서클에 갇혔고, 이들의 삶의 여건은 한층 악화됐다. 21살 때부터 여러 공장을 전전한 40대 로헤리오는 마킬라도라의 관행을 끊임없이 고발했다. “난 멕시코 중부 미초아칸주에서 왔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스피커 프레임을 조립하는 일본 하청업체 타쿠비에서 일했다. 그 후 캐논에 케이블선을 납품하는 또 다른 일본 하청업체 타부시에서 일했다. 그 밖에도 전기제품을 수리하는 미국 하청업체 소넨에서 일했는데 그때가 최악이었다.”
소넨 공장에서 로헤리오는 하루 10시간씩 일한 뒤, 저녁에 2시간씩 기술자 수업을 받았다. 그는 승진해, 임금도 주당 1700페소(약 90유로)로 꽤 괜찮아졌지만, 강도 높은 노동에 진이 빠졌다. 회사는 “가전제품 하나를 수리하는 데 직원들에게 20분을 줬다. 그 시간에 수리를 못하면, 일과 후 저녁 시간에 끝내야 했다. 물론 야근수당도 없었다”고 했다.
작업반장은 로헤리오가 작업속도가 느리다고 문제 삼았다. 하지만 사실은 로헤리오가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노조 결성을 시작한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그들은 여러 차례 공원에서 회합을 하고, 공장 출구에서 전단을 배포했다. 공장 감독관들은 로헤리오가 선동 주모자가 아니냐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캐물었다. 이사진들에게 ‘주모자’로 몰린 그는 어느 날 아침 해고됐다. 이들은 많지는 않지만 해고할 때 지불하던 몇 년치 근속 보상마저 지급하지 않았다. 로헤리오는 ‘시탁’의 도움을 받아 법적 절차를 밟은 덕에, 예상보다 많은 해고수당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후 그는 블랙리스트(7)에 이름이 올랐다.
블랙리스트 노동자, 오갈 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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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고용했던 샤프는 몇 주 뒤 그 사실을 알자마자 그를 해고했다. 그때부터 그는 캘리포니아반도 지역의 모든 전자회사에 취직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2007년 태양전지 패널을 조립하는 미국계 마킬라도라인 유니솔라 오보닉스에 취직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용광로가 16개 있는데, 환풍기가 하나도 없었다. 열기에 숨이 막혔다. 패널을 자르는 곳이 가장 위험했다. 온종일 유리섬유 먼지를 마셨고, 그 먼지가 피부에 달라붙어 일과가 끝날 쯤에는 온몸이 먼지투성이였다.” 노동자들이 하소연을 했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노동자들이 불평할 때마다 사주들은 “이런 경제위기에 일할 수 있는 당신들은 복받은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심각한 해고 위협은 1년 내내 지속됐다. 로헤리오는 온두라스 이민자 마뉴엘과 함께 전단지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은밀히 배포했다. 최근 유니솔라 오보닉스의 새 회장 마크 모렐리가 그룹의 눈부신 2008년 실적(마뉴엘에 따르면 16%의 성장률을 보였다)을 발표하며, 환경 의식이 높아져 태양전지 패널 사업 전망이 장밋빛이라고 자랑했다. 이에 로헤리오는 “2012년까지 주문이 밀렸다면서 왜 툭하면 우리를 해고하겠다고 위협하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코타는 “물론 위기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위기가 또한 노동자들을 잠잠하게 하고, 임금 인상에 대한 이들의 명분을 잊게 하는 구실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주 단체 쪽에서 보면 ‘모든 이에게 힘든 이 시기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티후아나 상공회의소(Canieti)의 전자산업 회장 클로디오 아리올라는 향후 몇 개월은 힘들겠지만, 경제가 곧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칼데론 대통령도 아리올라보다 하루 전날 인터뷰에서 “다각적인 경제회복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리올라는 이에 화답하듯, 지금 당장은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경험한 전자산업의 호황은 분명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미국의 접경지역이라는 조커를 쥐고 있다”고 큰소리쳤다.
비록 국제 언론 앞이라 어쩔 수 없이 주장한 낙관론이라지만, 이 고해성사는 국제 언론의 수준에 걸맞은 대단한 치기였다. 티후아나에서 아직도 가장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는 분야인 전자산업이 한물갔다고 실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이들은 티후아나를 “텔레비전 세계의 수도”, “완전고용의 도시”라며 이곳이 마치 캘리포니아 남부 실리콘밸리라도 되는 양 떠벌렸다. 마킬라도라를 기획한 자들은 “이 모델로 수백만 달러의 해외투자 자본을 유치했고, 그 결과 미국에서 판매되는 텔레비전 10대 중 7대가 티후아나에서 생산된 것”이라며 칭찬을 늘어놨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1994년 체결되면서 2001년까지 전자제품 산업이 대단한 규모로 확장됐다. 전자제품 공장이 멕시코를 특히 선호한 것은 노동자들의 손이 작아서 손놀림이 민첩한데다 납처럼 오염물질을 사용해도 당국이 감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킬라도라들은 전자제품 소비가 절대 소강상태를 맞지 않을 것 같자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캘리포니아 관문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뽑았다. 티후아나 북쪽 국경선에 위치한 한 대학 부설 경제연구소에서 일하는 콰우테목 칼데론은 “1994~2000년만 해도 우리는 티후아나에서 완전고용의 경제 혜택을 누렸다. 실업률은 1%도 채 안 됐다. 특히 마킬라도라가 멕시코의 모든 국경지대에서 노동자들의 이동을 억제하는 방역선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기업 모델은 제품을 수입·조립·수출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 밖의 부문의 경제와 완전히 격리돼 있어 여타 부문에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마킬라도라가 대규모 이주노동자들을 흡수할 수는 없다. 또 우리 경제의 급작스러운 규제 완화로 매년 50만 명의 멕시코인이 난민 신세가 됐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전시 때나 발생할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킬라도라, 거품성장의 상징
▲ <공항로에서 바라본 담벼락>, 2008-호엘 마리틴 다 실바
새 천년의 등장과 함께, 이 모델의 허점이 처음 표면화됐다. 2001년 미국의 경제침체로 국경선 지대의 마킬라도라들은 20만 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 2002년 가전 부문이 인력 31%를 감축했고, 티후아나에서도 27%를 감축했다. 이에 대해 투자 전문가 레티샤 에르난데스는 “이곳 사람들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한다. 2008년까지만 해도 국경지대에 직접 투자한 해외 자본의 78%가 미국 자본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경제위기가 국경지대에 전례 없는 실업 대란을 촉발했다”고 했다.
2009년 가을, 티후아나의 공식 실업률은 7%로 멕시코의 전국 평균 실업률 수준인 5%보다 높다. 티후아나도 멕시코의 다른 지역처럼 비공식 경제가 여전히 인력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멕시코 북부 국경지대인 마타모로스의 한 대학에서 일하는 여성 사회학자로, 마킬라도라 전문가로 통하는 시릴라 퀸테로는 “기술 이전은 없었다. 정말 실망스러운 것은 지난 40년 동안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을 위한 고용창출이 없었다”며 “아침에 눈 뜨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티후아나에 위치한 마킬라도라 중 엔지니어를 단 한 명도 고용하지 않은 업체가 13%나 되고, 1~10명을 고용한 업체가 65%다. 또 73%의 전자제품 업체들은 연구소가 없다. 절반가량은 제품 하나를 조립하는 데 만족하고 있고, 13%만 세 가지 이상의 제품을 조립하고 있다. 퀸테로는 “마킬라도라 혼자서는 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채 단지 불안정한 성장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비정규직과 박봉만 양산하고 있다” 진단했다.
전적으로 이웃 북부 강대국 미국에 의존해온 이 수출경제는 이미 경제위기 전부터 급속도로 침체했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며 상황이 바뀌었다. 코타는 “우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과도한 임금착취와 무보상 해고가 10년 전부터 이미 자행돼왔다. 공장들은 한 푼의 지출도 꺼린다. 심지어 유해물질을 차단하는 보호장비 구입비 지출도 꺼린다. 하지만 일자리가 전무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입도 벙긋 못한다”고 말했다.
이곳 사람들은 요즘 전자제품용 배터리를 생산하는 마킬라도라 ‘파워소닉’에 대해 말들이 많다. 로헤리오는 “전에는 온종일 납을 다뤘기 때문에 ‘파워소닉’에 다니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아침 사람들이 공장 앞에 줄을 선다”고 했다. 대출로 집을 산 36살의 네차우알코요틀은 소넨에서 해고됐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사주들이 보호장비 미착용자만 병에 걸린다”고 했으니 “난 보호장비의 품질을 믿고 싶다”고 했다. 매월 회사 기준에 따라 혈액검사가 실시되고 있는데, 아직 자신은 괜찮다고 했다. “사주들이 우리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주진 않지만, 만약 혈액 속의 납수치가 너무 높다 싶으면 저들은 우리 부서를 바꾼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납중독 사실을 알게 된다”고 했다.
모든 전자기기의 필수 구성요소인 납은 사람들의 공포와 수군거림 속에 하천 등 사방에 깔렸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산업단지 아래쪽 칠판싱고 지역 주민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연 속에 방치한 납폐기물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2008년 미국의 비정부기구(NGO)인 ‘환경보건연합’의 도움을 받아 토양 3천t을 미국으로 보내 오염을 제거하게 했고, 8천t을 콘크리트로 봉인했다.
이 퍼포먼스 비용은 기업들이 아닌 양국 정부가 부담했다. 칠판싱고의 조직을 이끌고 있는 예시나 팔로마레스는 “언론 앞에서는 기업인들 모두가 우리의 퍼포먼스를 칭찬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아이가 무뇌아로 태어나 그 즉시 죽어갈 때마다 우리는 아우성을 쳤지만 다 허사였다. 불행하게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업폐기물과 노동자들의 건강에 대한 철저한 감시가 없다”고 지적했다. 파나소닉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카르멘은 “난 전자제품 회로기판에 납땜을 했다. 그 작업을 할 때마다 내가 납 연기를 호흡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6개월째가 되자 얼굴 반점과 만성피로, 요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나소닉의 주치의는 아무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날 검사한 종합병원 의사는 내게 직장을 그만두지 않으면 얼마 안 있어 백혈병에 걸릴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직장 찾아 어려운 이민행
카르멘은 일을 관뒀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장을 옮기는 것이 쉬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요즘은 “우리를 찾는 곳이 별로 없다”며 달라진 세태를 전했다. 소니가 폐업한 뒤, 그녀가 거주하는 동네의 실업자 수가 증가했다. 그녀의 이웃 주민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난 치아파스에서 13살 때 이곳에 왔다. 지난 30년 동안 남부로 다시 떠난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원칙적으로 이주노동자는 몇 년간 이곳 국경도시에서 돈을 벌어, 이주 브로커에서 돈을 주고 북부, 즉 미국으로 가는 행운을 잡고 싶어한다. 하지만 요즘은 불투명한 현지 사정 때문에 그것이 대단히 위험해졌다. 가톨릭 종교단체가 이주노동자들이 묵고 있는 티후아나의 한 숙소에서 주최한 이민 강연에는 참석자 수가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강연장이 다 차지 않은 것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보통 미국에 간 멕시코 이주노동자들은 건설 부문에서 일한다. 하지만 요즘은 시기가 정말 좋지 않다”고 했다.
미국 이민을 생각하는 이들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 국경을 코앞에 둔 채, 이들은 공장을 전전하며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 이들 중 한 명은 “마킬라도라가 우리에게 말한 것과 달리, 우리를 고용하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가진 장비로 배관공, 정원사 혹은 전기기술자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는 포기 상태고 나머지 일부도 참고 견디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미국 땅을 밟기 전에 이미 위기에 봉착했다. 그래도 이들은 이주 브로커에게 건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티후아나의 위기는 특히 50대에서 감지되고 있다. 마킬라도라는 초창기부터 젊은 인력을 채용했다. 대부분의 구직광고는 ‘35살 미만’이라고 못박고 있다. 숙명의 50살이 된 노동자는 해고당하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투쟁한다. 네차우알코요틀은 “이들은 생산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일한다. 이들은 최고의 생산성을 갖추고 있지만 고용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결국 해고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54살이 되자마자 그런 일을 당한 델피나는 “당시 난 세 사람 몫을 했다. 난 두통에 시달리고 코피를 흘려가며 일했지만, 현장감독은 항상 날 감시하며 속도를 내라고 주문했다. 그러던 이들은 앉은 채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며 우리에게 서서 작업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대화도 할 수 없었고, 화장실도 갈 수 없었고, 심지어 껌을 씹을 수도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기댈 곳은 노동자들의 연대뿐
델피나는 2008년 11월 아무런 해명도 없이 해고됐다. 그녀는 해고당한 그주의 임금은 물론 퇴직금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조정위원회에 제소해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현재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그녀의 딸 중 한 명이 200페소(약 10.5유로)를 송금해주면 세 식구가 하루 두 끼로 한 주를 나고 있다. 혹 사람들이 그 돈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물을 때면,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25년을 마킬라도라에서 일했지만, 그녀에겐 퇴직금도 모아둔 돈도 없다. 그 돈으로 7명의 자녀를 양육한 것이 고작이다. 많은 싱글맘들이 그렇듯, 그녀는 여러 해 동안 밤샘 작업을 하며 온갖 경험을 했다.
그녀는 “마텔사가 내가 다니던 회사를 합병했을 당시, 퇴직금도 주지 않고 날 해고하려 했다. 내가 거부하자 날 납치했다”며 장난감 회사인 마텔사를 상대로 권리투쟁을 해야 했던 사실도 밝혔다. 그녀는 경비가 지키는 사무실에 감금된 채 꼬박 하룻밤을 지새운 뒤, 새벽녘에 그들이 건넨 2천 페소(약 106유로)짜리 수표를 수용하겠다고 동의하고서야 풀려났다고 했다. “알다시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시탁’의 도움을 받아 이 사건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고발했다. 마텔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법정은 몸값을 요구한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납치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델피나는 이제 자신이 마킬라도라에서 더 이상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는 “내 나이엔 불가능하다. 저들은 진작부터 젊은 애들도 고용하지 않는다”며 실업자 신세인 20살 된 사위를 가리켰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가재도구라도 처분하려 하지만, 이곳 주민들 모두가 가난하기 때문에 거래되는 게 거의 없다”고 했다.
그녀의 아들 집에 화재가 났을 때, 소방관들은 출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정상은 아니지만, 누구를 탓하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또 아들 가족이 모든 것을 잃었는데 “아들이 근무하는 마킬라도라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단지 그의 회사 동료들만이 기부금을 전달했다”며 “아직 이곳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것이 연대의식”이라고 덧붙였다.
글·안 비냐 Anne Vigna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ps : 솔직히 예전에는 FTA는 무조건 반대하는 의견에 난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조금 누그러진게 사실이다. 정답은 없고 정답은 없다. 현실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제적 여건상 무역 의존성이 높다는 사실에서 FTA가 기회일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선결조건(미국이 우리에게 요구한 선결조건이 아니다 ㅋㅋ)이 있다. 국가로서의 존립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식량문제의 보호(멕시코의 경우 옥수수 수입 개방으로 농촌은 황폐화 되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문제이다. 식량은 단순히 경제적 마인드로 접근하면 아주 위험한 결과가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가주권을 내주는 악조항(투자자국가제소권) 들은 최소한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페이지에다 스크랩한 조국 교수의 기사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나의 생각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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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면세 부품과 원료를 수입, 조립해 완제품을 수출하는 멕시코 내 외국계 공장.
(2) 1999년 12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Janette Habel의 ‘멕시코와 미국 사이엔 국경선 하나밖에 없다’와 2008년 3월호에 실린 안 비냐의 ‘멕시코에서 토르티야가 사라진 날’ 참고.
(3) www.cittac.org.
(4) www.aim.org.mx.
(5) Jorge Carrillo et Redi Gomis <La Maquiladora en datos, resultados de una encuesta>, El colegio de la frontera norte, 티후아나, 2004.
(6) www.newsreel.org.
(7) 많은 노동자들과 ‘시탁’은 이 리스트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