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또다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발생했었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 탓티황옥(20.여)씨가 신혼 8일만에 정신병력이 있는 남편에게 흉기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다. 그녀는 죽기 전 8일 동안 과연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며, 두고온 부모와 가족들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늦어지만 고인의 명복을 빈다. 부디 하늘나라에 가서는 정말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하는 사람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르디에 다문화 관련 기사가 있어 스크랩해 놓는다. 상당히 괜찮은 기사같다.

-------------------------------------------------------------------------------------- 

그녀들을 위한, 그녀들에 의한, 그녀들의 한국   

[특집-다문화] 결혼이주와 문화 다양성
편견과 억압 여전…주체화 위한 상호노력 때 다양성 기대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담론이 뜨겁다. 그도 그럴 것이 거주 외국인이 100만 명이 넘었고, 한 해 결혼하는 사람 8명 가운데 1명이 국제결혼을 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제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그와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시급한 과제가 됐다. 그러나 사회에서 왁자하게 논의되는 것과 다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쉽사리 넓혀지지 않는다.

결혼이주여성의 처지만 해도 그렇다. 결혼중개업체를 통한 매매혼적 결혼이 큰 사회문제로 제기됐던 2007년 1월 필자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대만 현지 취재를 통해 문제의 다양한 측면을 보도한 적이 있다. 지독한 가난으로부터 탈출하려는 여성들의 희망과, 한국에선 아내를 구할 수 없을 정도로 한계 상황에 몰린 남성들, 그리고 이들을 연결해 이익을 취하려는 중개업체가 합작해 만들어낸 게 중개업체를 통한 국제결혼의 실상이었다. 그 속에서 기만과 사기, 인권침해가 상당한 정도로 이뤄졌다.

당시 이런 현실을 지적한 여러 매체의 보도와 인권단체들의 노력 덕에 결혼중개업법이 수정되고, 결혼이주여성에 대한 각종 지원정책이 마련되는 등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결혼이주여성과 우리 사회를 가깝게 잇기 위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그들을 위한 언어·문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나아가 그들의 2세를 위한 교육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실제 결혼이주여성들의 처지가 나아졌다는 증좌는 별로 잘 보이지 않는다. 올봄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발표한 ‘2008 결혼이주여성 인권백서’를 보면 결혼이주여성 대부분이 여전히 빈곤과 폭력 그리고 편견의 그늘 아래 힘겨운 나날을 살아가고 있다. 2008년 10월 말 현재 결혼이민자 수 12만1168명 가운데, 여성이 90%에 가까운 10만6576명이다. 여성들의 국적은 베트남(38.3%), 중국(16.8%), 필리핀(16.6%), 몽골(7.4%), 타이(5.5%) 순으로 나타났다. 여성들의 연령은 20대가 가장 많고, 남편과의 평균 나이 차이는 16살 정도나 됐다.

경제적으로는 대부분 여성들이 직업이 없고, 직업이 있는 경우도 100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남편의 월평균 소득 역시 200만원 이하가 절반가량으로 이들 가족은 대체로 기초생활수급권자이거나 차상위계층에 분포돼 있다.

매매혼의 짙은 그림자

결혼이주여성들은 남편을 만나게 된 주요 경로 역시 ‘결혼중개업소를 통해서’(37%)가 가장 많았다. 흥미로운 점은 ‘아는 사람의 소개’(34.3%)를 통해서도 엇비슷한 비율로 나타난 점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남성과 아시아 여성 사이의 중개결혼 상황이 개선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중개업소에 여성을 소개하던 현지 브로커(속칭 마담)나 결혼이주여성과 결혼한 뒤 중개자로 나선 한국 남성이 아는 사람인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2007년 취재 때도 이미 결혼중개에 뛰어든 결혼이주여성 가족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수가 상당해진 듯하다. 이렇게 중개업소 등의 소개를 통한 여성들은 대부분 남편과 한두 번 본 뒤 결혼했다. 통상적으로 중개업자를 통한 결혼의 경우, 한국 남성이 도착해서 다음날 대기하고 있던 여성과 선을 보고 빠르면 그날로 결혼식을 하고 영사관에 혼인신고를 마친 후 신혼여행이라는 이름의 합방 절차를 거치고 다음날 귀국하는 것으로 결혼 절차가 끝난다. 이렇게 상대 배우자를 한두 번 보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 남성과 이주여성 양쪽 모두에게 모험--(원래 결혼은 모험이기는 하지만 이 모험은 아니지 않나 싶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혼을 통한 이주는 자본과 기술 등 자원이 없는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이들의 합법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상업화된 국제결혼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발달의 부산물이다. 즉, 자본주의의 중심부나 우리나라처럼 반주변부에 속하는 나라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남성과 주변부에 속하는 나라의 여성이 세계화된 자본주의 아래서 왜곡되고 주변화된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상업화된 국제결혼을 하는 여성들을 단순히 희생자나 매매된 여성으로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 압박에서 탈출하는 용기를 가진 인물들로 보는 견해들도 나오고 있다. 

2007년 취재 당시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한국 농촌과 소도시에서 만난 결혼이주여성들에게서도 이런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 여성동맹의 호찌민지부 국제결혼지원센터를 방문했을 때 당시 그곳에서 한국 문화를 배우며 비자가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던 여성들은 한결같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20대 전반의 꽃다운 나이였던 그들 대부분은 한국행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본 것이 전부고 남편 역시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배를 타고 한참이나 들어가야 하는 오지인 고향의 삶보단 그래도 한국에서의 삶이 나을 것이란 기대들을 드러냈다. 초롱한 눈매로 한국어를 배우고 김밥 등 한국 요리를 익히고 있는 그들을 본 강금실 당시 여성인권대사는 “이 아름답고 총명한 베트남 아가씨들이 우리와 한 식구가 돼 미래의 한국의 한 부분을 책임질 여성들이 된다는 것이 기쁘게 여겨졌다”고 말했다. 자신의 미래를 열어가려는 그들의 적극적 의지를 평가한 발언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삶 속에서 그들은 주변적 존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들이 꿈을 펼치기엔 그들을 둘러싼 우리의 환경은 척박하기만 하다. 위에서 보았듯이, 그들을 아내로 맞은 남편들의 대부분은 빈곤층에 속한다. 그렇다고 여성 자신이 취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제대로 된 기술도 없는데다 언어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언어 문제는, 남편이나 가족 등과의 소통은 물론 장래 아이들의 교육에도 장애로 작용한다. 또 소통의 힘겨움은 쉽사리 남편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각종 조사에선 결혼이민자의 20% 이상이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을 이런 상태에 방치한 채 다문화 사회를 말할 순 없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외국인 이주자들이 있지만, 결혼이주여성들만큼 기층에서부터 다문화 사회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집단이 없다. 우선 그들은 우리 국민인 배우자의 아내가 되고 2세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다른 이주자들에 비해 쉽게 우리 사회에서 수용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 그들은 통상 외국 문화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적었던 빈곤층이나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다른 문화를 생활 속에서 접촉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그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다.

실제로 2007년 취재 과정에서 만났던 나주의 한 할머니는 며느리 둘을 필리핀에서 얻었는데 “필리핀이 어디 붙어 있는지는 몰라도 내 며느리를 보면 얼굴이 희나 검으나, 필리핀 사람이나 베트남 사람이나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했다는 박아무개씨도 아내를 통해 캄보디아가 한국보다 여성의 권리가 센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며, 아내를 위해 자신의 남성 중심적 생각을 바꾸려 노력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그녀들

이렇게 아래로부터 뿌려진 세계화의 씨앗을 싹 틔우기 위해선, 개인적 차원의 이런 각성을 확산시킬 수 있는 두 방향의 사회운동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이주여성 자신들이 우리 사회의 주체적 성원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돕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주여성을 받아들이는 일반 시민들이 자민족 중심주의적인 좁은 세계관을 벗어나 다양성에 기반한 다문화 사회를 용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일반 시민을 위한 의식개혁운동이다.

이주여성의 주체화를 위해서는 그동안 진행해온 중앙정부 차원의 관련 법률 제정과 재정 지원 노력과 더불어 그들의 삶의 현장에 밀착한 다양한 지원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결혼이주여성들에게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시민운동 진영에서 이런 운동을 펴고 있지만, 상업화된 국제결혼이 우리보다 먼저 문제가 됐던 대만의 남양대만자매회(TASAT·타사)는 대만으로 시집온 동남아 여성들이 주체가 돼 자신들의 문제 해결에 나서는 단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이 모임의 모태는 1995년 대만 남부 가오슝 인근 소도시 메이눙에서 이주여성을 위해 연 중국어교실이었지만, 그 후 8년 만인 2003년 결혼이주자가 주체가 된 단체로 발전했다. 물론 이 모임에는 이주여성들을 도와온 대만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주여성들이 단체를 주도해 회장과 이사의 3분의 2는 이주여성으로 꾸려진다.

모태가 된 중국어교실은 독특했다. 그들 자신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게 언어 교육의 내용이었다. 왜 이주자가 됐고, 대만의 이민정책과 관련법에 따른 권리와 의무는 무엇인지, 어떻게 이 사회 속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가르쳤다. 이런 교육을 통해 각성한 이주여성들은 스스로를 돕기 위한 모임, 즉 타사를 결성하게 됐다. 타사 결성을 주도했고 2007년 당시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추야드룽은 모임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과정을 통해 “나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감, 용기가 생겼다. 이제 드디어 한 인간으로 일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타사에서는 새로운 이주자들을 위한 언어·문화 교육과 함께 자녀 교육, 이민법의 문제점 등을 함께 공부했다. 또 이주자들이 새로운 결혼이주자들을 지원하는 상담가가 될 수 있도록 상담 교육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회원들의 관심은 자신들 문제에서 공공의 문제로까지 넓어졌다.

이주여성 국제연대에 희망

이주여성의 주체적 능력 강화와 더불어 이들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변화했다. 우선 변화를 보인 것은 가족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만 알았던 그들의 아내나 며느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때론 텔레비전에 나와 자기 주장을 펴는 것을 보고 가족이 그들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를 확산시켜 일반인의 이들에 대한 인식을 바꿔내는 것이 다문화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다.

타사에서 이를 위해 한 일은 회원들을 다문화 강사로 훈련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결혼이민자들을 현지 언어나 문화를 가르치는 인력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이 있고, 일부에선 실제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시집와서 한국 생활 14년차인 임옥씨가 그런 사람이다. 조리사 자격증을 따서 구립유치원의 조리사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 다문화 강사가 돼서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고 전해왔다. 이런 강좌를 통해 주민들은 결혼이민자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출신국가에 대한 정형화된 인식도 깨게 된다.

결혼이민자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서는 그들의 출신국가 및 경험을 공유하는 국가들의 사회운동과 연계하는 게 필요하다. 예를 들어 타사는 각 송출국 여성단체들은 물론 아태 지역의 이주운동단체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있다. 타사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던 추야드룽도 홍콩의 이주자지원단체인 APMM의 워크숍에 참여해, 조직과 연대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을 배울 수 있었다. 또 대만 여자기독교청년회(YWCA)처럼 송출국인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여성단체들과 연대해, 이주여성들의 2세를 위한 ‘어머니 고향 방문’ 프로그램을 전개함으로써 2세들이 자신의 어머니의 문화에 대한 존중감을 갖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노력을 통해 결혼이민자들이 우리 사회 속에 굳건히 뿌리내리게 될 때 국가의 성원을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로 한정시켜온 우리의 민족 모델이 다문화 모델로 진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국민국가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이주자가 적절한 정치적 규범을 준수할 경우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허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한 다문화주의에 대해, 문화를 본질화해 좀더 근본적인 형태의 저항을 침묵시킨다는 비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주의는 민족 모델이나 프랑스의 공화국 모델과 같은 배제적 통합 모델 안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세계화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인 점은 분명하다.

글·권태선 kwonts@hani.co.kr
<한겨레> 파리 특파원과 편집국장 등을 거쳐 지금은 논설위원으로 있다. 파리 특파원 시절 이슬람 이주자들의 시위 당시 프랑스와 영국의 이주자 문제를 취재하면서 이주자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 2006~2007년에는 한국의 결혼이주여성 문제를 집중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  ------------------  ------------------  ------------------ 

한국적 다문화주의, 또 하나의 새마을운동  

[특집-다문화] 관변 다문화주의 비판 

‘포섭’-‘배제’의 모순 되풀이하는 국가동원체제
‘다문화’라는 이름뒤의 획일성·서열화 깨뜨려야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5호] 2009년 12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구사한 사회통제 시스템을 국가동원체제라고 부른다. 국가동원체제는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국가 독재를 정당화한다. 대표적인 것이 새마을운동이었다. 1970년대 국가동원체제의 핵심인 새마을운동과 200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달구는 다문화주의 열풍은 기이하게도 닮아 있다. 첫째,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진행된다. 둘째, 대상 대중의 역량 강화와 사회 통합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 의한 내적 분열과 사회적 배제다. 셋째, 당사자들의 주체적 자율성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조직은 철저하게 국가 주도로 위에서 아래로 전파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이유로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하에 수행된 모든 사업은 권위주의적이고 전시행정적’이었다. 그러나 명목적인 수준에서는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했기에 ‘대중동원적’ 성격을 띠었다. 다문화주의도 다를 바가 없다.

갑작스런 다문화주의 바람

한국은 반이민국가이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동질화의 압력이 강한 사회이며, ‘순혈’에 대한 강박을 바탕으로 전근대적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다. 게다가 다문화주의는 유럽과 미국에서 퇴조하고 있는 정치철학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대유행하고 있다. 불과 2~3년 사이에 놀라운 속도로 주류 담론이 되어버렸다. 바로 국가가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는 2006년 급작스럽게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공했다. 2006년 5월 개최된 ‘제1회 외국인정책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은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과제로 제시한다. 이후 각급 지자체를 포함하는 정부의 모든 부처는 ‘표류와 과잉’이라는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련 제도와 시설의 선점 경쟁에 뛰어든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다문화주의는 허구적이며 모순된 효과 이상을 낳을 수 없다. 국가는 국가 통합성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만 이질적인 소수자 집단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의 입장에서는 소수자들의 ‘포섭’과 ‘배제’라는 상반된 작업이 일관된 통치 행위의 일환으로 수행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혈통 중심의 편협한 국민주권 개념을 고수하는 한국의 경우 이런 문제는 좀 더 노골적인 형태로 발현된다. 한편에서는 다문화주의를 부르짖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들이 지원했던 ‘다문화’ 활동가를 가차없이 쫓아내야만 하는 것이 한국 다문화주의의 현실이다. 2009년 10월 23일 미누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이주민의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서울 가이드라인’이 공표된 2008년 11월 12일, 마석가구공단에서는 법무부와 경찰 직원 280여 명이 투입된 ‘인간사냥’식 합동단속을 통해 130여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붙잡혔다. 그 가운데 5명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의 위선적 양면성은 ‘다문화’라는 상징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문화’라는 상징이 대중의 내면에 친숙한 일상성으로 착근되는 과정은 ‘새마을정신’이 내면화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새마을운동은 대중매체와 학교 교육 그리고 국가가 지정한 85개 사회교육기관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국가 주도 다문화주의 역시 다를 바 없다. 1990년대 10년간 다문화와 관련한 기사 건수는 총 235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된 이듬해인 2007년 한 해에만 무려 2만7894건으로 급증했다. 2008년에는 3만6778건으로 더욱 늘어났다. 공익광고를 통해 다문화 사회는 ‘사랑하는 마음도 더 많아지는 사회’로 칭송된다. 다문화 시범학교들이 지정되고 다문화 교육센터, 다문화 복지센터,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 등 전국적으로 수백 곳의 ‘다문화’ 관련 기관들이 설립되어 운영된다. 법무부가 지정한 ‘ABT’(Active Brain Tower)라고 명명된 ‘다문화 사회통합 주요 거점 대학’만도 20여 곳에 이른다. 이 기관들을 중심으로 ‘다문화 전문가’, ‘다문화 복지사’, ‘다문화 멘토’, ‘다문화 전문 상담원’, ‘다문화 지도사’ 등으로 불리는 전문가 집단이 속성으로 양성되고, 수많은 의사(擬似) 자격증이 남발된다. 다문화를 주제로 하는 각종 행사와 강좌에는 자원봉사자와 수강생으로 발 디딜 틈을 찾기 어렵다. 

새마을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명목적으로는 농민층의 자기 역량 강화와 사회통합을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농민층에 대한 차별적 접근을 통해 ‘농민층을 분해’시키고 국가 통제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다. 새마을운동은 영세 소농에게는 오히려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강제로 작용했다. 한 월간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1960년대 전반에 농촌 인구 100명 가운데 13명이 ‘헌마을’을 떠났는데 1970년대 후반에는 해마다 37명이 ‘새마을’이 된 농촌을 떠났다.” 이 점에서 역시 다문화주의는 새마을운동을 꼭 닮아 있다. 영세 소농이 ‘새마을’에서 쫓겨났듯이, 이주민 역시 ‘다문화 마을’ 만들기라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개발 프로젝트에 의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있다. ‘다문화 특구’로 지정된 안산시 원곡동 일대가 대표적이다. 인위적인 개발 프로젝트는 이주민의 삶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뿐이다.

제2, 제3의 ‘미누’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짐짓 이주민의 사회통합을 목표로 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분할통치 방식으로 이주민 공동체의 내적 분열과 인종적 서열화를 조장한다. 다문화주의에 의해 선진국 출신 이주자와 개발도상국 출신 이주자, 비자 소지자와 만료자, 한국 국적을 취득한 이주자와 비국적 취득 이주자 사이의 경계와 위계는 더욱 엄격하고 뚜렷해진다. 이주민 공동체는 ‘선별적 포용’과 ‘폭력적 배제’의 대상으로 뚜렷하게 분리된다. 이 과정에서 ‘한국 민족’ 역시 1세계 거주 에스닉(ethnic) 코리안, 남한인, 3세계 거주 에스닉 코리안, 북한 이탈 주민 등의 순으로 ‘인종적으로 서열화’된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가혹한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이주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집단이다. 2009년 1월 현재 한국에는 64만여 명의 이주노동자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약 27%에 해당하는 18만여 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들의 90%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3D’ 업종에서 근무한다. 내국인 노동자의 40~50%의 임금으로 하루 평균 11시간에서 12시간을 일한다. 2007년 이주노동자의 재해율은 1.01%로 한국 노동자 전체 재해율인 0.72%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은 ‘국내 노동시장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소중 제조업의 생존에 절대적 기여를 하는 한국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이주노동자의 대다수는 인권과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일회용 노동자’와 ‘불법 인간’ 사이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을 뿐이다.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2007), ‘거주외국인지원조례’(2007), ‘다문화가족지원법’(2008) 등 2006년 이후 제정된 일련의 이주민 관련 법령으로부터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출입국관리법 개정을 통해 미등록 체류자에 대한 단속 및 강제 퇴거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며 매년 말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미등록 체류자 합동단속을 통해 수많은 ‘미누’들이 강제 퇴거당한다. 2007년 한 해에만 2만2546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단속되었고 그중에 1만8462명이 강제 퇴거당했다. 대부분의 단속반원들은 사복 차림이다. 신분증을 제시하거나 동의나 허락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의 79.5%가 수갑을 사용했으며, 4.5%는 경찰 장구를 사용했다. 전자충격기와 그물총을 사용하는 경우도 2.9%에 달했다. 그 과정에서 2003년 이후에만 무려 100여 명의 이주민들이 사망했다.

‘국가 관료’가 주도하는 새마을운동 과정에서 농민은 ‘실질적 주체’가 아니었다. 농민의 자조적 민주주의가 강조되었음에도 농민의 ‘자율성’은 보장되지 못했다. 한국 다문화주의의 가장 큰 특이성은 바로 이 점과 관련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에는 이주민이 설 자리가 전혀 없다. 이주민 대중에게는 그 어떤 주도적인 역할도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가 공론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이주민 인구의 증가였다. 1990년에 5만여 명이 채 되지 않던 외국인 인구의 규모는 2007년에는 10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전체 인구의 2%를 웃도는 규모였다. 이 시기를 전후해 ‘다문화·다민족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문제의식이 전 사회적 의제로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문화주의 담론에서 이주민 자신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든 것은 한국인들만이 결정한다. 그런 방식으로 획일적인 (곧 반다문화적인) 다문화의 규정, 자격, 기준, 매뉴얼이 작성된다. 이주민은 ‘온정과 연민’, ‘교육과 상담’의 대상일 뿐 결코 문화적 주체로 존중되지 않는다. 이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양자택일의 선택지만이 강요될 뿐이다. 한국인에 의해 주도되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든지 혹은 거부하든지 둘 중 하나만이 가능하다. 그렇게 또 하나의 외적인 강제가 되어버린 다문화주의는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다문화의 주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절박한 현실적인 욕구들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존재를 왜곡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이주민 당사자들은 냉소적인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응한다.

성찰,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

국가동원체제로서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다문화 사회’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여러 가치와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다문화 사회는 전통적으로 공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하는 사회다. ‘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요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이 제 각각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향유하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인 셈이다. 이를테면 어떤 다수 집단(과 그들의 정체성 혹은 문화)도 ‘보편(표준)의 지위’ 혹은 ‘주류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가 다문화 사회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심’과 ‘표준’, ‘주류’와 ‘다수’의 위상을 누렸던 기존의 인식틀과 제도들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성찰과 비판, 그리고 재구조화가 요구되는 탓이다. 그 핵심에는 민족국가를 재규정하는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구성원에게는 인위적 동질성을 강요하고 소수자에게는 자의적 차별을 자행하는 ‘표준화된 권위’의 근간이자 거점이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민족국가를 재동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문화 사회를 추구하는 철학이요, 정치 지향이요, 문제의식이자 전망으로서의 다문화주의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국가가 추구하는 목적 실현을 위해 행정 및 관변 조직을 최대한 활용해 국민을 동원하고 참여시키는 정치’적 슬로건일 뿐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의 다문화주의는 위선과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동의를 동원한다. 대중에게 다문화는 친숙한 일상으로 내면화되지만, 정작 다문화 사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이주민 공동체는 내적으로 분열되고, 한민족의 인종적 서열화가 이루어지며, 이주민의 자기결정권과 삶의 주도권은 더욱 취약해진다.

다문화주의라는 이름으로 1987년 이후 쇠퇴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가동원체제가 재가동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새마을운동이 그러했듯이 ‘정치·사회·경제적 위기를 관리하고 통치체제의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목적’임은 분명하다. 만약 다문화주의를 재가동되고 있는 국가동원체제로 이해한다면,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태도는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다문화주의가 보여주는 위선과 모순의 분열증은 서구적 이론과 개념에 의존해서는 이해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국가동원체제의 맥락에서라면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통치술의 일환일 뿐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다문화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전 국가적이며 전 사회적인 수준에서 ‘다문화’는 우리의 강령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결코 다문화주의를 반대하지 않는다.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 모두가 똑같아지고 있는 것이 싫을 뿐이다.

글·오경석
한양대학교 다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여러 동료들과 함께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한울,2007)을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