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들이 나에게는 어렵고 불편하다. 나 또한 원론적으로 미혼모도 임신의 이유로 학습권을 침해 받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도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현실적으로 학교입장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의 임신을 개인의 행실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왜곡된 성문화에 기인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구조적으로 미혼모에 대한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으면서 나머지 학생, 학교와 어울릴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것이 전무한 상황에서 다분히 원론적인 차원에서 미혼모의 학습권을 강조하며 '학교에서 거둬야'한다는 것은 왠지 공허한 주장으로 들린다. 학교란 기존의 이데올리기를 옹호하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태생적으로 그러한 곳이다. 그리고 학교란 곳에 '교육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애기하면 안되는게 없는 곳이 또한 대한민국의 학교다. 그러면서도 온갖 '비교육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또한 학교이기도 하다.  

미국과 캐나다는 미혼모도 떳떳히 학교를 다니고 아이도 데리고 온다고 한다. 근데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는 큰 이유중의 하나는 그 나라들의 개방된 성생활과 태도, 제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제도는 배워와야 할 지언정,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성생활과 성적 자세까지 배워오자고 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는 하는데 왜 우리는 왜 없냐'식의 처방 및 근거는 자칫 공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좀 엇나가는 애기겠지만, 대한민국 학문, 사회과학의 문제가 어찌보면 외국의 그것들을 단순히 차용한데서 온게 아닌가 한다. 뭐 많은 학자들이 이미 한 애기기는 하지만. 정말 그런거 같다. 그렇다 보니, '거기는 하는데 왜 우리는 왜 없냐'식의 말들이 범람하는 듯 하다. 나부터 반성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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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5  미혼모 학교가 거둬야 한다.

학생 미혼모들의 대다수가 배울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의뢰로 전국 미혼모 시설에 수용된 학생들을 조사한 정책연구팀은 조사 대상의 85%가 학업 중단 상태라고 그제 밝혔다. 14~18살 정도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출산을 이유로 아예 배울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배움의 의지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60%에 가까운 응답자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계속 공부할 방안을 마련해주기를 희망했다.  

이들이 학업을 중단한 데는 육아나 경제적 어려움 등의 이유가 클 것이다. 하지만 다니던 학교에서 학교 명예를 해친다거나 주변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자퇴나 전학을 요구해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에는 한 여학생이 이런 학교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해 미혼모의 학습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받아냈으나 현장에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 헌법과 교육기본법은 누구나 신체적 조건 등을 이유로 교육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임신을 이유로 자퇴를 종용하는 것은 학습권 침해라고 인권위는 판단했다.

굳이 인권위의 판단이 아니더라도 학교가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내모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청소년의 임신을 당사자의 품행 문제로만 인식해선 안 되며 왜곡된 성문화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이 심각하다. 실제로 학생 미혼모 가운데는 성폭력을 당한 경우가 꽤 있다.

정부는 대안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된 미혼모자 시설 입소 기간을 재학기간에 포함시키는 방안이나 미혼모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안교육기관 설립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은 될지 몰라도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다. 미혼모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는 낙인 효과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임신을 이유로 전학이나 자퇴를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원하면 기존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많은 나라에선 미혼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등교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10대에 미혼모가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학교나 가정에서 남녀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성교육을 철저히 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퇴폐적인 성문화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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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한겨레신문 에서 명지대에 적을 두고 있는 김정운 교수의 글들이 실리고 있다. 전에 실렸던, '아들을 팼다', '내년에 오십인데' 등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근데 어찌보면 좀 사람맘을 짜증나게 하는 글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물론 난 전자이다) 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한테 피해는 주지 않지만 왠지 한대 쥐어박고 싶은 친구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ㅋㅋ 그냥 내 느낌이다. 하여튼 난 맘에 든다. 특히나 이번 글도 맘에 든다. "할 일도 많은데 나보고 도인이 되란다." 웃음이 푹하고 나온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래서 난 그냥 살란다. 그냥...생겨먹은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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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5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

누구나 약점은 있다. 내게도 유일한(?) 약점이 있다. 욱하는 성격이다. 잘나가다가도 성질나면 확 뒤집어엎는다.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상처도 많이 입힌다. 그러나 내가 입는 내면의 상처는 더 깊다.
나는 운전하다가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버리는 인간들을 절대 용서 못한다. 이들은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자 인류평화의 가장 큰 적이다. 이런 인간들을 목격하면 나는 끝까지 쫓아간다. 그 차를 따라잡아, 창문을 열고 가능한 한 험악한 인상으로 경고를 한다. 그러나 난데없이 욕해대는 낯선 인간에게 웃으며 대응할 사람은 없다. 당연히 거친 욕이 오간다. 결국 “너, 내려” 어쩌고 하면서 멱살잡이까지 간다. 상대방이 나를 알아보기라도 할라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발전한다. 결국 나만 망신당하고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처받은 자존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집에 돌아오면 아내는 한술 더 뜬다. ‘당신은 그런 일을 아예 시작하질 말아야지,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고, 결국 당신만 손해 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지구평화는 어떻게 되느냐’고 웅얼거리는 내게, 아내는 내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복사본을 내민다. 고2 때 담임선생님은 내 성격에 대해 이렇게 써놓으셨다. ‘성실하고 과묵한 성격이나 쉽게 격함.’ 아, 그때나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이나 난 하나도 안 변한 것이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 나는 심리학자다. 심리학의 발생지인 독일에서의 13년간의 유학생활을 포함해 30년째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런 내가 요즘 내린 결론이다. 철든 이후 내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바꿀 수도 없다. 그런데도 서점가의 수많은 성공처세서들은 자꾸 ‘너를 바꾸라’고 한다. 그런 책을 읽으며 끝없이 자학한다고 성격이 고쳐질 리 만무건만, 아직도 그 어설픈 미국식 성공처세서들은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각종 리더십 이론은 한술 더 뜬다. 온갖 좋은 이야기는 다 모아놓고 나한테 성인군자가 되란다. 책임자로서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내 성격까지 고쳐 도인이 되란다. 리더로서의 책임보다 내 성격을 고치느라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환장할 노릇이다.

‘너를 바꾸라’는 이 문화사적 압력은 우연이 아니다. 130년 된 현대심리학의 역사는 ‘모든 문제의 원인은 너 자신’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드러난 심리적 문제가 그리 명확하지 않을 때는 무의식까지 들춰내며, ‘네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라며 협박해왔다. 온갖 종류의 심리학적 상담, 심리치료는 바로 이 인간의 ‘결함모형’에 기초하고 있다. ‘콤플렉스’, ‘우울’, ‘불안’, ‘성격장애’ 등과 같은 심리학적 개념의 철학적 전제는 ‘부정적 인간관’이라는 뜻이다.

최근 ‘결함모형’에 기초한 현대심리학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약점과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연구해왔던 현대심리학의 접근방식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의 약점을 고치기보다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자꾸 키워나가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을 끌어올리면 약점은 저절로 개선된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엄밀한 심리학이 되기에는 아직 많은 이론적 약점이 있지만, 긍정심리학은 평생 ‘나 자신이 문제’라는 자괴심에 시달려온 내겐 큰 위로가 된다.  

ps : 김정운 교수의 책이 뭐가 있나 해서 검색을 해보았는데,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일본 열광'말고는 나머지 네권의 책은 제목은 다르지만 책의 키워드는 비슷해보인다. 내 생각으로는 ''니 멋대로 재미있게 살아라, 억지로 살지 말고.'인것 같다. 아, 그리고 책을 찾다 '일본 열광'에 대한 어떤 독자의 독서평을 보고 알았다. 김정운 교수의 글의 어떤 부분이 때론 사람들을 짜증나게도 할 수 있는건지. 바로 '억지스러움'이다. 글들이 약간씩의 '편협'스러움과 '억지스러움'이 뭍어나는 듯 하다. 뭐 개인의 글의 스타일인듯.  

하여튼, 최근작인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한번 읽어보고 싶다. 알란딘 2009 올해의 책까지 선정되었다니...내가 왜 몰랐을까? 근데 솔직히 아내와의(혹은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난 개인적으로 결혼 후에 사람들 앞에서 "결혼해서 너무 행복해요?", 또는 "우리 아내(남편) 너무 멋있죠, 저한테 너무 잘해줘요."라는 식으로 광고하고 아양떠는 식으로 애기하는 사람들 보면 재수없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재미있으면 지들 둘이 있을때 하면 되는거지. 왠지 자신의 현실은 정반대인데, 들키기 싫어서 억지로 "난 잘 살아, 난 결혼에 후회 안해"라며 자신에게 최면이라도 거는듯 해서, 어색하다. 그럼 사람들이 그런 말들이. 

말 나온김에 서평기사 하나도 추가 스크랩한다.

 

  

오마이뉴스 2009.6.15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남자들의 심리

언젠가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결혼한 부부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질 만한 유치한 질문이건만, 이에 대한 남편의 대답은 정말 웃기다.

"난 다시 태어나면 남자로 안 태어날 거다. 여자, 그것도 아주 예쁜 여자로 태어나서 결혼 안 하고 이 남자 저 남자 속 타게 하며 살아야지. 만약 당신이 남자로 태어나면 내가 계속 애타게 할 거야. 각오하셔, 흐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 좋네. 그런데 당신은 어때?" "나? 나야 당연히 당신하고 결혼하지. 다른 남자랑은 안 살아 봐서 어떤 남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난 우리 남편이 제일 좋더라."

이렇게 대화를 끝맺었지만 지금 다시 물어봐도 내 대답과 남편의 대답은 똑같을 것 같다. 남편이 돌려서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랑 결혼하지는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책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저자처럼 내 남편도 결혼을 가끔 후회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결혼을 후회하는 남자들의 심리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대부분의 남자는 결혼을 가끔 후회하고, 여자는 결혼 생활에 대해 가끔 만족한다. 한마디로 남자는 부정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여자는 긍정적인 측면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특히 한국 남자들이 그렇다.

저자는 자신이 공부한 문화 심리학을 토대로 하여 이런 한국 남자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행복하기 힘든 것일까? 삶은 왜 이다지도 힘겨운 것인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특히나 '삶이 힘들다'고 부르짖는 한국 남성이라면 말이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사는 게 재미없는 남자들'에서 찾는다. 온갖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구호 뒤에 숨겨진 적개심, 분노, 공격성의 실체는 '재미없는 삶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남편이 다음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싶은 이유도 '우리 사회에서 남자로 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 같다. 그럼 이렇게 힘든 남자들이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잘 놀고 재미를 찾으면 된다고 말한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무미건조한 한국 남자들에게 삶의 재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한번 들여다 보자. "행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행복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침실의 '백열등 부분 조명'과 '하얀 침대시트'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 대학의 다니엘 카네만 교수는 행복을 아주 '심플하게' 정의한다. 행복이란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기분 좋은 시간이 많으면 저절로 찾아온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기분 좋은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행복 요인을 분석하고 그 요인을 많이 접하면 된다. 저자는 집에서는 별로 만족하지 못하던 결혼 생활이 왜 호텔에만 가면 낭만적으로 느껴지는지를 분석했다.  

호텔의 백열등 조명이 아내의 얼굴을 더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고 하얀 침대 시트에 누워 자면 더 로맨틱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을 알자, 그는 집의 조명과 시트를 바꾸자고 아내를 조른다. 단순한 인테리어의 변화지만 호텔처럼 바꾸고 나니 잠을 잘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매일 밤이 행복하다.

저자는 사람이 죽을 때 '껄, 껄, 껄' 하며 세상을 떠난다고 말한다. '많이 베풀 껄, 미워하지 말 껄, 재미있게 살 껄' 하고 말이다. 어차피 한 번 살다 갈 인생인데 왜 그토록 소유한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그 행복을 느낄 여유도 갖지 못하고 재미없게 살다가 가야 하는가! 저자는 재미있으려 노력하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재미는 자신이 유쾌해지는 상황과 느낌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막연하게 좋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은지 찾다 보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밤새 잠 못 들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그 쓸데없는 일에 대한 억압과 집착을 버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사실 모든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알고 보면 종잇장 한 장 차이로 아주 쓸데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무조건 집을 벗어나 행복한 일들을 생각해 보자.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 저자의 예를 들자면 망사 스타킹의 여인, 웃는 여자, 김혜수의 가슴 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모든 고민은 쉬워지지 않던가. 특히 지나치게 일에 매달리며 가정을 도외시하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다들 착각한다. 열심히 일해 은퇴하면 행복한 가정에서 다복한 노후를 즐길 수 있으리라.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해지자!' 구호 외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몸은 함께 살았지만, 평생토록 함께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는 부부가 어찌 갑자기 '함께'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뭐 뻔한 얘기 같지만 결론은 '사는 게 재미없는 한국 남자들이여, 행복은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재미를 찾는 데서 오는 것이라오'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재미와 행복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구체화하는 데에서 그 가치를 느낄 수 있다. '난 마누라가 웃으면 그냥 행복해.' '우울한 뉴스 말고 개그 콘서트를 보면 즐거워.' 등의 구체적인 행복찾기야말로 이 시대 남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청량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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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하루살이를 하찮게 여기겠는가. 100년을 살고도 하루만도 못한 것이 어찌보면 인간이겠다. 반성해야겠다. 하루를 위해 불꽃처럼 지는 수많은 하루살이를 위해, 이 땅의 하루살이처럼 피고 지는 민초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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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0.8.5  하루살이 군무 

올해는 여름 곤충의 출현이 늦다. 매미는 이제야 울기 시작하고 모기도 예년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들었다. 아마도 늦여름 모기의 대대적인 공습이 있을 것이다. 불 속으로 돌진하는 하루살이의 어지러운 군무도 아직은 미미하다. 원인은 지난 봄날이 너무 추워서 곤충들의 변태(變態)가 늦어졌기 때문이란다. 일리가 있는 분석이다.

곤충의 변태는 생각할수록 참으로 신비롭다. 알에서 유충으로, 다시 번데기에서 성체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생명의 외경’ 그 자체이다. 매미의 유충은 짧게는 7년, 길게는 17년 동안 땅 속에 있단다. 우리 도시에 여름마다 매미가 찾아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것은 도시에 아직 희망이 있음이다. 매미들 울음은 가로수를 더욱 푸르게 하고 우리네 도시를 살아 있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도시의 소음 때문에 차들의 경적보다 더 날카롭게 울어야만 짝을 부를 수 있음이 안쓰럽다.

하루살이의 일생은 더욱 치열하여 눈물겹다. 하루살이는 호수 밑에서 그날을 기다린다. 알이 성충이 될 때까지는 대략 천일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허물을 25번이나 벗는다고 하니, 수많은 변신을 해야만 단 하루를 얻을 수 있다. 천일 동안 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하루에 할 일을 점검할 것이다. 하루살이는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단 하루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루살이가 천일 동안 하루를 준비한다면 지상의 하루는 생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루살이에게는 입이 없단다. 하기야 하루를 보내는데 먹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날기만 한다니 하루살이의 어지러운 비상(飛翔)을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하루살이는 그렇게 정신없이, 쉬지 않고 날아다니는지도 모른다. 하루살이는 하루 동안 종족을 번식시키는 등 물속에서 계획한 모든 일을 해치워야 한다. 불만 보면 뛰어드는 하루살이, 그것은 물속에서 태어나 불 속에 생을 태우는 ‘가장 극적인 죽음’인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천일, 지상에서 하루. 하루살이와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 어느 삶이 더 치열한 것인가. 긴 것이 무엇이고 짧은 것이 무엇인가. 하찮은 것이 무엇이고 또 귀한 것이 무엇인가. 한여름밤 하루살이의 군무, 참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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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방학중 자율학습 감독이어서 학교에 갔다가 경향신문,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이렇게 4개를 아주 오랜만에 훝어 보았다. 그중에 기사 몇개를 스크랩한다.  

딱히 난 사라 장을 좋아하는 바이올리스트는 아니지만(뭐 아직 호불호가 생길만큼 고전음악을 많이 듣지는 않았다) 그래도 대한민국 출신의(하긴 이것도 어떤지는 모르겠다. 미국에서 태어났고 교육도 거의 미국에서 받았는데, 사라 장을 대한민국 출신이라고 하는게 맞는건지, 국적도 아닌 듯 한데, 하여튼 그래도...) 세계적인 바이올리스트라는 건 자랑스러운 건 맞다. 이런 분들이 더 많이 배출되었음 한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뭐 경제인, 운동선수들 말고, 순수예술분야에서. 내 개인적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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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0.8.5  사라 장 "브람스 곡엔 절제된 드라마가 숨어있어요" 

뉴욕에서 전화를 받은 사라장은 “얼마 전 스위스 연주회에 다녀왔다”면서 “지금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협연 중”이라고 했다. 아직도 두 차례 더 협연을 남겨놓은 상태다. 이어서 곧바로 “(로키산맥에서 열리는) 아스펜 음악제로 떠난다”고 했다. 쉼없이 몰아치는 일정이다. 서른살의 사라장은 여전히 그렇게 바빴다.  



하지만 한국 연주회는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다음달 17일 예술의전당에서 런던필하모닉과 함께 연주할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뉴욕시간으로 밤 9시에 전화를 받은 사라장은 “요즘 한국은 아주 덥다면서요? 난 더운 게 정말 좋은데”라고 했다. 이어지는 말이 재밌었다. “제가 요즘 다니는 도시들은 너무 추워요. 그래서 도코리를 입어야 해요.” 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이 어눌한 사라장의 입에서 일본어인 ‘도코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은 목이 긴 스웨터를 ‘터틀 넥’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다들 그렇게 불렀다. 아마 외할아버지나 모친에게서 전수받은 단어인 듯한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사라장의 입에서 ‘도코리’라는 말은 뜻밖이었다.

“브람스와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을 가장 좋아해요. 이번에 한국에서 바로 그 브람스를 연주할 거예요.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브람스의 협주곡은 지금까지 작곡된 모든 바이올린 협주곡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이죠. 그런데 이 곡은 듣기도 어렵고 연주하기도 어려워요. 테크닉과 음악성은 물론이고 오케스트라와 완벽한 앙상블을 이뤄야 하죠. 활 테크닉이 현란한 곡은 아니지만, 절제된 드라마 같은 것이 음악 속에 숨어 있어요.”

그녀는 브람스 협주곡을 지난해 11월 이미 음반(EMI)으로 선보인 바 있다. 쿠르트 마주어(83)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필하모닉과의 협연이었다. 그녀는 “마주어 선생과 처음 만난 게 20년 전이었는데, 내가 브람스를 연주하는 걸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분”이라고 설명했다. “아직 어리다”는 것이 이유였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브람스 협주곡에 숨어있는 열정과 드라마를 완전히 네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연주할 수 없다”는 것과 “무대에서 스스로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반대하던 마주어는 5년 전에야 첫 연주를 허락했다. 다만 한가지 조건이 따라 붙었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배운 브람스는 다 잊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드디어 음반이 나왔다.

“제 음반들은 라이브 레코딩이 많아요. 쇼스타코비치, 시벨리우스, 랄로의 협주곡을 다 그런 식으로 녹음했죠. 하지만 브람스는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한데 마주어 선생이 브람스 협주곡의 서주 부분을 1시간30분이나 반복하는 거예요. 저는 한 소절도 연주하지 않은 채 옆에서 계속 서 있기만 했구요. 생각해보세요? 다리가 얼마나 아팠겠어요? 휴식시간에 제가 칭얼대니까, 선생이 그러셨어요. 브람스의 협주곡은 오프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음악의 의미가 아예 없어진다고요.”

그녀는 그렇게 ‘음악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노장 지휘자 마주어에게서 브람스를 배웠다. 하지만 이번 내한은 마주어가 지휘하는 드레스덴 필하모닉과의 조합이 아니라, 러시아 태생의 지휘자 바실리 시나이스키(63)가 지휘하는 런던 필하모닉과의 조우다. 시나이스키는 모스크바 필하모닉에서 명지휘자 키릴 콘드라신(1914~81)의 부지휘자로 일하면서 지휘계에 들어선 인물. 2012년부터 볼쇼이극장의 음악감독 및 상임지휘자로 예정돼 있다.

“런던 필하모닉은 실내악적 색채가 아주 강하죠. 다른 오케스트라에 비해 앙상블이 좋다는 뜻이에요. 이런 악단은 정말 드물 거든요. 솔직히 말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봉을 잘 바라보지 않아요. 자기 악보만 눈이 뚫어지게 들여다보죠. 그런데 런던 필하모닉은 달라요. 단원들이 지휘자와 솔리스트를 항상 바라보거든요. 연습이 되었건 연주가 되었건 언제나 그렇게 눈빛을 교환해요. 서로 주고받는 느낌을 중시하는 거죠. 그래서 함께 연주하는 게 아주 편해요. 이번에 한국에서 연주할 때 잘 관찰해보세요. 단원들의 눈길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대개 사라장이 ‘까칠한 공주’에 가까울 거라고 여긴다. 짙은 메이크업에 무표정한 얼굴이 담긴 음반 사진들이 그런 편견을 부채질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사라장에게서 잰 체하는 태도를 발견하긴 어렵다. 오히려 그녀는 털털한 쪽에 가까워 보인다. 음악에 대해 설명할 때는 몸을 상대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편이다. 특히 음악적으로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나면 이야기에 한층 신이 오르기도 한다. 그녀는 “쉬지 않는 연주여행의 고단함을 어떻게 견디느냐?”는 질문에 “잠을 많이 잔다”며 깔깔 웃었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모친과 “음악에 대한 대화도 종종 나누느냐?”고 묻자,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엄마의 역할은 아주 컸다(huge)”면서도 “음악적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는다. 요즘 우리 엄마는 내 사생활과 친구들에게 불만이 아주 많다”며 또 한번 소리내 웃었다. 다음달 17일 공연에서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외에 베버의 ‘오베론 서곡’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8번이 함께 연주될 예정. 시나이스키와 런던 필하모닉은 하루 전인 1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브와도 협연할 계획이다.
 

ps : 평소에 나도 궁금했던 것 중 하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어찌보면 지휘자의 표정과 몸짓을 잘 지켜봐야 할텐데, 대부분의 단원들은 자기 악보만 열심히 본다. 그리고 지휘자도 자기 총보만 열심히 본다. 혹은 자기 흥에 겨워 갖가지 표정과 몸짓을 짓거나. 하지만 단원들은 악보만 본다. 좀 보기 민망할때도 있다. 런던필하모닉의 앙상블이 좋다고 하니 보면 좋을듯 하다 하지만. 난 못본다. 표값이 상상을 초월하기때문. ㅋㅋㅋ 싼게 10만원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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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 페이퍼를 작성한 김에 리스트를 작성해본다. 2005년 방한했을때 보았던 기억으로는 참으로 푸근한 할배 인상이었는데, 지금 살아계실려나? 부디 오래사셨으면 좋겠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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