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이 '청소년인문학'이라 그런지 이해하기 쉽고 유익한 내용들로 꾸려지고 있는 기사이다. 내가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곳곳에 도스토옙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가>가 나온다. ㅋㅋ 내가 읽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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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21  현대인들의 ‘말할 수 없는 비밀’ 깨우라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

고등학교 시절 나는 글쓰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논술’은 끔찍이 싫어했다. 서론, 본론, 결론의 틀에 맞춰 꾸역꾸역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글 속에서 ‘나다움’이 사라져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생각들이 피어올랐다. 나는 본문에서는 버려질 것이 빤한 잡생각들을 일일이 메모하며 ‘아, 이런 게 정말 나다운 것인데!’라며 홀로 안타까워했다.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난 다양한 곁가지 생각들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 자꾸만 본문 바깥, 생각의 갓길에서 한껏 노닥거리고 싶은 충동. 글쓰기뿐만 아니라 인간도, 인생도,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닐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잡생각’이, 메인 테마를 벗어난 ‘잡음’ 같은 의외의 사건들이 우리 삶의 계획된 항로를 뒤엎곤 한다. 논리가 이끄는 대로만 충실히 글을 쓴다면 ‘문학’이 탄생할 수 없을 것이고,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이익’이나 ‘합리’를 향해서만 나아간다면 역사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조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글쓰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외성과 불합리를 인간 사유의 근원적 문제로까지 확장시켰다. 그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끊임없이 ‘논지에서 벗어난 것을 용서하라’고 말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무 이유 없이 변칙적으로 논지를 이탈한다. 바로 그 들쑥날쑥함과 셀 수 없는 오류들이 이 소설을 읽는 진정한 매력이며,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19세기 최고의 ‘지하 인간’의 결정적 본성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사유 자체에 내재된 모순과 분열, ‘계몽된 이성’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재단할 수 없는 예측 불능의 인간형을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아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무려 20년 동안 그야말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으로부터 ‘잠수’를 해버린 은둔형 외톨이다. 그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오직 치열한 독백 같은 글쓰기뿐이다. “나는 병자다. 나는 악인이다. 나는 결코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 그런 인간이다”라는 소설의 첫 대목은 마치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주인공이 ‘그칠 줄 모르는 악의’라는 영혼의 불치병을 앓게 된 과정, 그리고 오직 ‘책’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하는 고독한 인간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를 닮은 음울하고 도발적인 목소리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처럼 주옥같은 문명비판의 목소리를 토해낸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19세기 중반 합리주의와 계몽주의가 유행하던 러시아사회에 던지는 거대한 물음표였다. 합리적 이성과 물질문명의 진보에서 희망을 보던 계몽주의자들의 규범적 사유에 맞서, 도스토옙스키는 이성의 지하에 있는 인간, 계몽의 그늘에 있는 인간의 또다른 모습을 그려낸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인간은 결코 ‘이성의 총합’에 그치지 않는다. 의식만큼이나 무의식이, 이성만큼이나 욕망이, 논리만큼이나 불합리가 인간을 움직이고 세계를 변화시킨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은 ‘난 혼자인데 그들은 모두 닮았다!’는 생각 때문에 평생 괴로워한다. 혼자 있을 때조차 이 세상 모두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인간, 그러나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에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지하인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오직 생각 속에서만 소통을 꿈꾸고, 생각 속에서만 세계를 바꾸고, 생각 속에서만 타인을 사랑한다. 그의 유일한 동무는 ‘책’뿐이다. 그는 머릿속에서 마치 레고 조립을 하듯 손쉽게 세계를 창조하고 순식간에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몽상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그가 ‘접속’할 수 없는 유일한 대상 또한 바로 세계다. 그는 참을 수 없이 세계를 갈망하지만 세계와 만날 수 없고, 참을 수 없이 소통을 갈망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지 오늘날 사회문제가 되어버린 ‘히키코모리’의 문화적 원형일 뿐 아니라, ‘함께 있음의 고통’도 ‘혼자 있음의 고립감’도 견디지 못해 남몰래 신음하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가 숨어 사는 ‘지하’는 단지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의미의 ‘지하’다. 우리가 차마 내보이지 못하는 마음의 지하, 그것은 단지 분석과 치료를 기다리는 마음의 질병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순수한 원형이자 버릴 수 없는 무의식의 심연이기도 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인간이 섬뜩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은 그가 숨김없이 토로하는 영혼의 지하감옥이 우리 자신의 ‘말할 수 없는 비밀들’과 소리없이 교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우리들 저마다의 마음에 숨겨진 ‘영혼의 지하실’을 일깨운다. 어제 참은 우리의 분노는, 오늘 겪은 우리의 절망은, 또 어떤 영혼의 지하실에 감금되어 은밀한 부활을 꿈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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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뭐 원채 세상이 겉으로 하는 말이랑 속의 내용이 다르기는 했지만, 지금의 교육과정 개정과 수능과목 축소 논란은 해도해도 너무한다. 내가 지리교사라서 내 밥그릇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책 입안자들의 xxx 속이 궁금하다. 상식적으로 사회탐구 선택과목을 1과목으로 줄인다고 할때, 선택지를 지리는 세계지리와 한국지리 두 권의 책을 봐야 시험을 볼 수 있고, 경제와 한국사는 각 각 한권의 책만 보면 된다면 누가 굳이 힘들게 두 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한 후 수능 지리 과목을 선택하겠는가? 이건 상식이다. 아니면 의도적이든가...프레시안에 실린 박선미 교수의 글을 스크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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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10.8.22  "'통섭'의 시대, 과목 칸막이만 높이는 수능 개편안" 

[기고] <경제><한국사>에만 몰릴 것…"시대흐름 역행"

최근 몇 년 사이 고3 교실에서는 아랍어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2005년학년도 모의수능에서 제2외국어·한문 영역 아랍어 응시생은 단 1명이었으나 2009년 수능 응시생 중 42.3%가 아랍어를 선택했다. 아랍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어가 열풍인 이유는 단 한 가지, 영어나 프랑스, 독일어처럼 능통한 학생이 적어 평균점수가 낮은 탓에 점수(표준점수)를 받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비단 아랍어 뿐만이 아니다. 제2 인기 선택과목은 일어(21.2% 선택). 덕분에 십수년을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던 전국의 수많은 선생님들이 손때 묻은 교과서를 버리고 일본어 학원에 다니며 일본어 선생님들로 변신해야만 했다. 이처럼 수능시험 선택과목을 바꿀 때마다 교육현장은 홍역을 앓는다.

2014학년도 수능 개편안이 발표됐다. '수능 부담을 줄인다'는 취지이지만 몇몇 개편 내용은 '교과목 간의 통합적 문제 출제'라는 당초 수능 도입 취지를 훼손해 사실상 학력고사 시대로 돌아가는 내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직 사범대 교수의 문제제기를 싣는다. <편집자>

중장기대입선진화연구회(연구회)가 지난 19일에 발표한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 시안의 핵심은 복수 시행, 수준별 시험 도입, 과목 대폭 축소의 세 가지다. 연구회는 이번 개편이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한 부담을 줄인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 주는 결정적 내용은 아마도 탐구영역에서 단 한과목만 선택하도록 한 항목일 것이다. 탐구영역은 유사 분야끼리 시험과목이 통합되고 응시과목수도 한 과목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친절하고 감사할 만한 배려다. 그런데 사회과 교육을 전공하는 내가 볼 때 이 개편안은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번 개편안은 사회탐구영역에서 학생들의 선택을 특정 과목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현행 수능은 사회탐구 영역에 해당하는 11개 과목에서 최대 4개 과목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개편안에서는 11개 과목을 경제, 한국사, 지리(한국지리ㆍ세계지리), 일반사회(법과 정치·사회문화), 세계사(세계사·동아시아사), 윤리(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등 6개 과목으로 통합한 후 그 중 한 과목만을 선택ㆍ응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6개 과목의 구성을 살펴보면 「경제」와 「한국사」를 선택할 경우 학생들은 한 과목만 공부하면 되지만 지리를 선택한 경우 「한국지리」, 「세계지리」를, 일반사회를 선택한 경우 「법과 정치」,「사회ㆍ문화」를, 세계사를 선택할 경우 「세계사」, 「동아시아사」를, 윤리를 선택할 경우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등 모두 두 과목씩을 공부해야 한다.

누가 한 과목만 공부해도 되는 「경제」와 「한국사」를 놔두고 두 과목씩 공부해야 하는 과목을 선택할까? 공부 부담이 다른 과목의 절반에 불과한 「경제」와 「한국사」과목을 다른 과목과 동등하게 배치함으로써 연구회는 학생들의 선택을 특정 과목으로 유도하고 학교에서 배울 내용을 임의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회 구성원들이 아무리 자유시장경제와 민족주의를 선호한다고 해도 원칙도 토론도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특정 과목에 가중치를 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교육은 최소한 그런 방식으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을 유도하거나 결정해서는 안 된다.

둘째, 유사 과목끼리의 통합을 전제로 한 과목을 선택하도록 한 점도 문제다. 학생들은 사실상 한 영역으로 제시된 두 과목만을 공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지리영역을 선택했다면 「한국지리」와 「세계지리」를 공부해야지, 「세계지리」와 「세계사」를 선택할 수는 없다. 화학영역을 선택한 학생은 「화학(Ⅰ)」, 「화학(Ⅱ)」을 공부해야지 「화학(Ⅰ)」, 「물리(Ⅰ)」를 선택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단일화 된 지식의 관점으로 구성된 학문이 학생들의 사고를 제한하고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경험을 분리시키며 따라서 학습과 경험을 단절시킨다고 비판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연구회 안은 영역 간 의 넘나듦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스스로 비판해 왔던 학습과 경험의 단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난 20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저자이자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강의가 있었다. 그의 책은 지난 5월 출간 이후 한국에서 33만부 이상이 팔렸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는데,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롤즈,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난해한 논리를 쉬운 사례를 통하여 명쾌하게 다루면서 정치학, 철학, 경제학, 사회학, 지리학의 경계를 쉼 없이 넘나들고 있다. 우리는 '역시 하버드대학의 교수는 다르다'고 말한다. 몇 년 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출간된 이래 통섭이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를 강타한 일종의 신드롬이 되었다. 우리가 샌델과 윌슨 같은 교수를 원한다면 여러 학문의 넘나듦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번 개편안을 보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커녕 인문사회과학 내에서도 영역 간 칸막이를 더욱 높이고 촘촘히 하여 서로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하지 못하도록 차단시켜 놓았다.

나는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는 것에는 백번 찬성한다. 하지만 학문 영역 간에 칸막이를 쳐서는 안된다. 연구회는 영역별로 한 과목을 선택하도록 한다는 주장을 통해 한 과목이 갖는 수치적 매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시간 축과 공간 축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다 종합적으로 탐구하도록 하는 사회탐구 영역의 교육적 목적과 치환될 만큼의 가치를 지는 것은 아니다. 연구회가 주장하는 한 과목은 솔직히 두 과목이다(물론 경제와 한국사의 경우는 제외하고). 따라서 영역 간 경계 지움을 없애고 두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면 현재 연구회에서 내놓은 안과 비교해도 학습 부담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의 과목선택권은 더 확대될 수 있다. 즉 사회탐구영역의 경우 경제, 한국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법과 정치, 사회문화, 세계사, 동아시아사,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중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과목 두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다.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면서 한국지리와 세계지리만을 선택하도록 강제할 것이 아니라 세계지리와 세계사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는가?
 
/박선미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부교수

ps : 논리적이고 정리가 잘된 글이다.(나도 언제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려나) 올 10월 즈음에 논란에 결정이 난다고 하는데, 부디 기도한다. 글 중간에 박선미 교수가 언급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란 책은 나도 최근에 최재천 교수의 책들을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미국 하버드대의 교수를 지냈으며, 세계적인 개미 연구의 대가라고 한다. 퓰리처 상도 두번이나 받았다. 책소개는 이렇다. "책의 원제는 <Consilience>.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옮긴이는 이를 '큰 줄기'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 <통섭>으로 옮겨 제목을 달았다. 제목이 단적으로 드러내듯 책은 '인간 인식/지식의 대통합'에 대해 논한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지식들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이 주요 주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이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며, 이해란 본래 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지식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분과 학문들 간의 벽을 넘어, 다른 학문에 대한 무지로 인한 오해, 한 용어를 다른 학문의 용어로 옮기는데 있어 비롯되는 혼란 없이 전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얼핏 어려울 듯한 내용을 여러 학문들을 넘나들며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게 바로 지은이가 말하는 '통섭'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세계 이해를 인간 이해를 위해 필요한 학문간 '통섭'을 막고 오히려 시대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오동진씨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 평론가가 되기 위해 영화 책 100권을 읽는 사람은 바보이다. 영화에 대한 전문가가 되려면 영화 책 30권, 사회과학 책 20권, 철학 책 20권, 문학 책 20권, 과학 책 10권을 읽어야 정말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 말에 100% 찬성한다. 내 자신도 지리 전문가가 되기 위한 독서 습관, 노력은 지리 책만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리 관력 서적보다는 철학, 사회과학, 소설, 시, 인문서적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그럼으로 해서 지리에 관한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교육현실은 절망적이다. 아이들에게 '통섭'과 '이해'를 위한 교육이 아닌 '시대역행'적 교육을 하려 하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소주나 한잔 먹어야 겠다.  

마저 에드워드 윌슨의 책들을 스크랩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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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현재 대한민국은 마이클 샌델 돌풍이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인문사회과학 서적으로는 보기 드물게 최고의 판매고를 올리고 이어서 지나간 샌델의 저서까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에는 내한해 경희대에서 강연까지 했다는데, 엄청난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하버드대에서 그의 유명세는 어디가나 통하는 듯 하다. 마이클 샌델의 유명세와는 무관하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던지고자 하는 의제가 무엇인가 고민해야 할 듯 하다.

한겨레신문 2010.8.21  정의의 잣대로 유전공학을 따지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는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사진)의 2007년 저작이다. 화제가 된 다른 저작 <정의란 무엇인가>보다 2년 먼저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샌델은 생명공학·유전공학의 발전으로 논란이 커지고 있는 ‘생명윤리’ 분야의 철학적 쟁점을 검토한다. 유전학 기술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지은이의 진지한 고민과 답변은 이 질문이 생명윤리 분야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임을 보여준다.  



샌델은 자신이 이 주제와 관련해 밀도 높은 경험을 했음을 이 책에서 밝히고 있다. 2001년 말 조지 부시 정부가 만든 대통령생명윤리위원회에 위원으로 위촉된 것인데, 이 몇 년 동안 그는 배아 줄기세포 연구, 인간 복제, 유전공학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전체 17명으로 이루어진 이 위원회는 최대 쟁점이었던 ‘배아 줄기세포 복제 연구’ 허용 문제에서 10 대 7로 연구를 금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샌델은 이때 7명의 소수파에 속했다. 인간 복제를 금지하되 줄기세포 연구는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었다. 2006년 조지 부시 대통령은 위원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줄기세포 연구 지원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샌델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부시 대통령의 결정에 담긴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부시는 ‘줄기세포 연구 지원에는 반대하지만 연구 자체는 막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지원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고한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일에 돈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배아를 파괴하는 일이 인간 생명을 앗아가는 일, 곧 살인이라면 줄기세포 연구 자체를 금지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줄기세포 복제를 허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이 책의 핵심 주제인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포함해 좀더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유전공학 자체가 야기하는 윤리학적 문제를 따져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언제나 그렇듯이 샌델은 이 책에서도 생생한 사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프리미엄 난자’를 찾는 광고를 소개한다. 하버드대를 비롯해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 학보에 키 175㎝ 이상, 튼튼하고 날씬한 몸매, 대학수학능력시험 점수 1400점 이상의 여성에게 난자를 받는 대가로 5만 달러를 지불하겠다는 광고였다. “그 광고에는 꺼림칙한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특정 유전형질을 겨냥해서 아이를 고르는 부모의 행동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샌델의 결론을 먼저 말하면, 우수한 아이를 얻으려고 아이의 유전자를 고르거나 조작하는 일은 ‘선물로 주어지는 삶’이라는 삶의 원초적 조건을 파괴하는 일이다. 탄생의 신비를 정복하려는 부모의 충동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다시 만들어내려는 ‘프로메테우스적 열망’이자 일종의 ‘우생학적 욕망’이다. 샌델은 생명을 부모가 마음대로 조작해서는 안 되는 ‘자연의 선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역할을 신의 역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 주목할 것은 인간이 ‘행운’을 선택할 수 있을 경우에 생기는 문제다. 자연이나 신이 나의 존재 조건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주는 이점은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샌델은 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를 우스꽝스러운 사태를 가정한다. “농구선수가 리바운드를 놓쳤을 때 코치가 야단치는 것은 선수가 제 위치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어떨까? 유전자 치료 좀 받지, 키가 작아서 리바운드도 못 받는 거 아니냐고 야단치지 않을까?” 불가피한 운명에 좌우되던 존재 조건이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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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펭귄클래식 19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최진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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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 소설을 잘 읽지 않았다. 그러나 작년부터 소설이 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차현숙의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등 써놓고 보니 다 우울한 내용이다. 난 왠지 이런류의 책들이 좋고 재미있다. <자유로에서 길을 잃다>를 읽고 처음으로 '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우울증 환자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펭귄클래식 시리즈로 구입했는데, 책 표지가 너무 맘에 든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표지도 정말 죽인다. 내가 알고 있는 몇몇 러시아 화가 중 하나인 일리야 레핀의 '여름 풍경'을 표지로 삼고 있다. 책의 제목과 책의 표지에서 느껴지는 묘한 일치감. 표지의 그녀가 혹시 <첫사랑>의 '지나이다'는 아닐까? 

나의 첫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딱히 기억하고 싶지 않다. 난 헛 살았나 보다. 난 <첫사랑>을 읽으며 나의 '첫사랑'을 기억하려 하기 보다. 하나의 사랑이 기억났다. 모든 남성들의 사랑과 추종을 받으며 그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아름답고 오만한 지나이다와 같은, 아니 비슷한. 어쩌면 나 혼자만 이렇게 생각, 느끼는 것일수도 있겠지만...볼로댜도 지나이다로부터의 추억이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 되었듯이, 나 또한 내 인생의 자그마한 흔적과 교훈을 남긴 하나의 사랑이 기억난다.

시간이 되면 나머지 책들도 간단하게라도 글을 썼으면 좋겠다.(기억이 거의 나지 않지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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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핀의 모습과 유명한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을 옮겨 놓는다. 미술사에 관련된 어떤 책을 보다 알게 었는데, 그림 인물들의 표정이 강렬하다 못해 살아있는 듯 하다.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꼭 보고 싶다. 러시아 소설에 그림 여기에 차이콥스키나 림스키 코르사코프 음악을 들으면 한 트가 될 듯 하다.

 일리야 레핀.

 

▲ < 볼가강에서 배를 끄는 인부들>, 1870-1873년, 캔버스에 유채, 131.5×281cm, 러시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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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와 미국사에 관한 괜찮은 책인 듯 하다. 특히나 옮긴이의 말처럼 국제정치, 사회과학분야에 역사학적 관점을 도입 책이라고 하니, 좀 더 읽기 수월할 듯 하기도 하다. 물론 비전공자인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겠지만. 비판적인 관점에서 세계지리 수업을 하려 할 때 요긴할 듯하다!! 검색해보니 대충 끌리는 책들은 이 정도이다. 이 중에서 예전에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수탈된 대지>는 구입해 놓았다. 지마지고전천출에서 나온 <라틴아메리카 자본주의 발달사>도 읽어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책소개를 찾아보니 "국내 초역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때, 종속이론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자본주의는 외부(서구)에 종속되어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러한 종속이론을 정면에서 비판한다. 지은이는 종속이론이 사회의 진정한 모순인 내적 계급 모순을 경시하고, 지나치게 종속과 같은 외적 요인에서만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고 비판한다. 원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만 발췌 번역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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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21  사냥하는 독수리는 발톱을 감춘다  

미-라틴아메리카 200년 관계사
미국의 ‘호전적 팽창주의’ 설명
초국적 단결·교섭력 증진 강조 

민주주의는 미국이 다른 나라 내정에 군사 개입을 할 때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온 명분이다. <라틴아메리카, 미국, 세계>를 읽노라면 ‘민주주의 수출’ 논리의 원형이 1차대전 뒤 ‘민족자결주의’를 내걸어 식민지 국가들에 독립 열망을 불어넣었다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서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군사 개입이 고결한 정치적 과업, 민주주의를 하기에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 속한 미주 대륙의 남반부 곧 라틴아메리카(중남미)를 향해서는 “헌정 정부 옹호”를 외쳤다. 1913년 윌슨 독트린은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비(非)헌정 정부에 승인을 거부했다. 윌슨의 ‘민주주의 십자군 운동’이다.

이 논리는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내정에 대한 지속적이고 자의적인 간섭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민족자결주의는 미국의 처지에서 보면, 세계 식민지 나라들에서 유럽 열강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정책이었던 셈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피터 스미스가 쓴 <라틴아메리카, 미국, 세계>는 미국 독립 직후인 1790년부터 2007년 부시 집권기까지 200년에 걸친 미국-라틴아메리카의 관계사를 해설한 책이다. 1996년 출간된 초판의 원제목은 <독수리의 발톱>인데, 알다시피 독수리는 미국의 국조(國鳥)인바, 제목 ‘독수리의 발톱’은 미국의 호전적 팽창주의를 뜻한다. 2008년에 부시 정권의 대테러전쟁까지를 반영하여 ‘라틴아메리카, 미국, 세계’라는 부제목을 넣은 제3판이 출간됐는데, 이번에 국내 출간된 책은 이 제3판을 번역한 것이다.

피터 스미스는 라틴아메리카 연구의 석학으로 꼽히는 학자다. 정치학에서 역사학의 복원을 주창해온 학자답게 그는 ‘역사정치학’의 방법론을 통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200년 관계사를 미시적으로 짚어가면서 그 안에서 큰 흐름을 조망하고 있다. 옮긴이의 말대로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라는 거울을 통해 미국을 볼 수 있는 책”이다. 

지은이는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관계에는 일정한 구조, 일관된 패턴이 있다고 말한다. 이를 게임의 규칙이라고 그는 칭한다. 그는 게임 규칙의 변화에 따라 200년을 네 시기로 나눈다. 179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가 제국 시대, 1940년대 말~1980년대 말은 냉전 시대, 1990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 그리고 2001년 9·11공격 이후부터 책이 집필된 2007년 말 현재까지가 테러와의 전쟁 시대다. 시대마다 변화한 게임 법칙은 라틴아메리카를 향한 미국의 행동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반응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지은이의 기본 개념틀이다. 

‘제국 시대’는 갓 태어난 미국이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서 얼마나 기민하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준다. 이 시기 게임의 규칙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균형 경쟁과 식민지 확보를 위한 다자주의적 각축이다. 미국은 독립하자마자 각축전에 동참했다. 미주 대륙에 민주주의를 퍼뜨려야 한다는 복음을 앞세워 팽창주의 정책을 정당화했다. 그렇게 플로리다와 멕시코 북부 등을 야금야금 장악했고, ‘애송이’ 미국은 이 대륙에서 경쟁자 없는 세력권의 기틀을 마련했다.

2차대전 뒤 시작된 ‘냉전 시대’ 게임의 규칙은 글로벌 차원의 미국과 소련의 양자 경쟁이다. 이데올로기와 안보를 내세운 이 경쟁에서 미국은 봉쇄 독트린을 통해 미주 대륙에서 정치적 우위를 확장했다. 소련 붕괴 뒤인 1990년대 ‘탈냉전기’는 미국이 세계 유일 초강국이지만 경제 분야에선 하강세를 보였다. 일본과 유럽이 성장하며 (경제의) 다자주의 경쟁을 재촉하는, 힘의 불일치와 불확실성의 시기다.

‘테러와의 전쟁 시대’는 2001년 9·11공격 이후 형성된 구조다. 피해에 대한 복수, ‘대테러 글로벌 전쟁’이다. 이 규칙은 유일한 초강국 미국이 전세계에 작동시키는 게임 법칙이 되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는 이 시기 게임 법칙을 신랄한 어조로 이렇게 정리한다. “첫 법칙은 국가들이 테러리스트에 맞서 무차별 공격을 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는 실정법이자 자연법이었다. … 냉전시대의 군사독트린은 폐기됐지만 반테러 안보 투쟁은 냉전기의 투쟁과 근본적으로 닮게 되었다.”

지은이는 그러나 이 시기에 미국은 국제적으로 점차 고립되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워싱턴의 관심사가 남아시아와 중동으로 좁혀지자 ‘미국 뒤뜰’ 라틴아메리카에서 중도좌파를 표방한 핑크빛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라틴아메리카 전문가로서 지은이는 부시 정권이 전략적 정책보다는 임시변통 대응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목소리를 강화시켰고 반미감정을 키웠다고 분석한다. 이것이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해쳤다는 것이다. 일방적인 게임보다는 라틴아메리카의 목소리와 열망에 귀 기울이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은이는 미국인들의 정형화된 관념, 곧 라틴아메리카는 미국의 뒤뜰일 뿐이라는 관념도 통박한다. 라틴아메리카는 200년 관계사 속에서 수동적인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율성을 높이려 노력해왔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 시몬 볼리바르(1783~1830)가 지폈던 라틴아메리카 통합론은 성공을 거뒀다. 제국 시대엔 불간섭 원칙을 내세워 저항 문화를 만들었으며, 냉전기엔 다른 강국과의 관계를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했다. 아르헨티나(19세기)와 브라질이 지역 헤게모니를 추구하는가 하면, 다른 3세계 국가들과 ‘남남단결’과 사회주의혁명을 추구하기도 했다.

지은이는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의 패러독스는 국가간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는 공통된 걱정거리인 미국의 지나친 힘에 초점을 맞추는 한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은이가 보기에 라틴아메리카의 중심 과제는 집단적 단결이다. 이 지역 국가들이 통합될수록 미국을 상대로 한 교섭력은 증가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 옮긴이와 함께 / 이성형 교수 인터뷰

“이론 이전에 역사 있다”

미 대외정책사 큰흐름 조망…중미 통치 매뉴얼 볼 수 있어 

 
» 이성형 교수 

우리가 국제정치를 가르치고 배웠으나, (정치학 텍스트들의) 문제가 역사적 차원을 너무 경시한다는 겁니다. 사회과학에서 역사를 추방한 거죠. 지나치게 이론 위주로 가르칩니다. 이론을 가르친 뒤 사례를 가르치는 식입니다. 오히려 역사를 배우고 이론으로 가야 합니다. 이 책은 역사에 바탕해서 귀납적으로 이론을 추론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제 생각과 상통합니다. 양질의 텍스트들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번역을 하게 되었지요.”

<라틴아메리카, 미국, 세계>를 홍욱헌 교수와 함께 번역한 이성형(사진)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는 이 책을 “역사정치학의 모범적 텍스트”라고 말했다. “미국 대외정책사의 큰 흐름을 조망하고 역사 속에서 그 흐름 안의 특징적 패턴을 찾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론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론을 놓고 현실주의다, 자유주의다, 신현실주의다, 구성주의다 하는데요, 이론을 놓고 역사적 소재를 끼워맞추는 형국이죠.”

그는 지은이 피터 스미스는 미국-라틴아메리카 관계를 양자관계가 아니라 글로벌 체제의 하위체제로 놓고 분석한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체제에 변화가 생기면 하부도 변화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죠. 기존 미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글로벌 체제 안에서 중국, 유럽, 러시아 등 강대국의 성장이 라틴아메리카에 자연스레 반영되겠지요. 라틴아메리카의 자율성은 제고될 수밖에 없어요. 라틴아메리카의 몸값은 계속 높아집니다.”

책이 부시 정권까지만을 다루고 있기에 지은이는 오바마 정권의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질문에 이 교수는 “지은이는 말하자면 민주당 좌파 입장인데요. 오바마 대통령에 기대가 많고, 좀더 라틴아메리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죠. 막상 정치 현실에선 실행이 어렵죠. 오바마는 부시의 외교의 유산을 해결해야 합니다. 역시 다시 라틴아메리카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겁니다. 오바마 1년이 그랬지요. 미국내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이 실망해서는 오바마를 두고 ‘나토’(노 액션, 토크 온리)라고 비판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이 교수는 미국사나 대외정책 전공자뿐 아니라 한국사 전공자들도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미군정시대 통치를 이해하려 한다면 중미 카리브해 통치에 대한 매뉴얼이 이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미군정의 행태가 알고 보면 매뉴얼에 따른 겁니다.”

그는 지난해 7월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새로이 연구 보금자리가 된 이 연구소에 대한 강한 애정을 피력했다. “기존 분과학문에서 소외된 지역들 그러니까 라틴아메리카, 인도, 중동 등 지역 연구가 깊어져야 합니다. 이런 연구를 지원하는 인문한국(HK) 사업이 대단히 중요해요.” 그가 몸담은 라틴아메리카 연구소는 이 지역 연구 성과를 담아 매년 연보 발간과 함께 외국 석학 초청, 번역 사업도 활발히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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