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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0.3.25 [주거의 사회학](1부)뿌리없는 삶-② 가재울 사람들  

ㆍ‘원주민 내모는 뉴타운’ 1300만원에 19년 삶터 빼앗아
ㆍ세입자 30인의 그 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과 북가좌동에 걸쳐 있는 가재울은 서울의 4대 시장 가운데 하나인 모래내시장과 다가구·다세대주택에 2만1662가구의 서민을 품은 곳이었다. 그러나 2003년 2차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많은 이들이 터전을 떠나야 했다. 대가로 손에 쥔 것은 몇 푼 안 되는 보상비뿐이고,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 법이 그렇다니 영세가옥주와 주거세입자, 상가세입자들은 마땅히 항의할 곳조차 없다. 2013년까지 10~15층 높이의 149개동, 2만541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나, 돈 없는 이들에게는 방 한 칸 허락되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가재울 뉴타운사업을 위해 철거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 남가좌동 118번지 일대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재개발하는 데로 이사 안 가려고 일산으로 이사왔어요. 여기는 신도시잖아요.”

허모씨(47)는 가재울에서 10년 넘게 편의점을 운영했다. 한달에 600만원 벌이를 했다. 편의점에서 50m쯤 떨어진 다세대주택을 전세 5000만원에 구했다. 2003년 뉴타운 사업이 확정된 이후부터 장사는 서서히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집과 가게가 모두 재개발 지역에 포함됐다.

보상금은 낮았다. 보증금과 월세 외에 권리금을 5000만원이나 내고 입주한 가게지만 감정가액은 불과 1800만원. 1년6개월 넘게 투쟁한 끝에 상가에 대한 영업손실보상액이 3600만원으로 늘어났지만 같이 장사를 하던 여동생과 절반씩 나눈 뒤 월세와 생활비로 날렸다. 주거 이전비도 4인 가족을 기준으로 1300만원이 다였다. 그는 지금 일산의 20평 빌라에서 월세를 살며, 3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허씨처럼 재개발사업으로 한층 곤궁해진 세입자 30명의 삶을 들여다봤다.

재개발로 동네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수평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득이 뚝 떨어지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일산에 사는 허씨의 경우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다. 주점을 운영했던 이모씨(55)는 지난해 9월 마지막으로 이주에 합의하면서 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지금은 놀고 있다. 보상금은 2년 넘게 싸우면서 늘어난 빚을 갚는 데 쏟아부었다. 가게를 다시 열 형편이 안 된다. 이렇게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30명 중 7명이다. 23명은 일을 해도 수입이 줄었고, 가게를 열었어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현실성 없는 보상금이다. 16년 동안 벽지 가게를 하던 백모씨(61·여)는 보상금 3000여만원에 합의, 그 돈으로 트럭을 사서 용달업을 하고 있다. 백씨는 “권리금이 너무 비싸서 다른 가게를 구할 수가 없다”며 “보상도 많이 못 받았지, 권리금을 마련할 돈은 없지, 이 나이 먹어서 할 게 뭐가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가재울뉴타운 3구역은 원래 9700여가구였으나 입주 후 3300가구로 줄어들게 된다. 치킨집을 하던 이모씨(35)는 가재울 공사현장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특별시 뉴타운 사업’ 그림을 떠올리며 “그것만 보면 동네가 아주 좋아질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민들 재산을 빼앗아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쓴웃음만 나온다”고 말했다. 이씨는 “뉴타운 얘기가 나오면서 새로운 아파트에는 연봉 5000만원 이상인 ‘수준 높은 사람들’만 입주할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휘황찬란하게 꾸며 놓은 가재울뉴타운 모델하우스에 가 보고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덧붙였다.

신모씨(48)는 “개발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고 돈 때문에 이웃 사이에 칼부림이 날 뻔했다.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게 너무 괴롭다”라고 말했다. 염모씨(49)도 “가끔 가재울을 지나가지만 이제는 뭐…. 잊을 건 빨리빨리 잊어야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이가 많을수록 개발의 피해는 더 크다.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박모씨(63·여)는 가재울에서 노래방을 6년 넘게 했지만 보상금으로는 다른 곳에서 가게를 열 수 없는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며 허탈해했다. 박씨는 “뉴타운을 안 했으면 한 달에 200만원 벌이는 됐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밥벌이를 하겠어. 나이 먹은 사람은 죽으라는 거냐”고 말했다.

서모씨(54)는 “헌법에 기본권이 보장돼 있다지만 19년씩 생활한 사람을 단돈 1300만원에 나가라고 하는 게 실정법”이라며 “이 나라는 업자들을 위해 법을 적용하고 구청장과 공무원들은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2월 당시 현동훈 서대문구청장은 기획부동산업자의 청탁을 들어주고 집무실에서 상습적으로 떡값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가재울은 어떤 곳?… 서울의 대표적 서민동네 

ㆍ모래내·서중시장 중심

가재울은 2003년 11월 뉴타운 사업 지역으로 지정됐다. 1구역부터 6구역까지 모두 6개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1구역은 2008년 12월에, 2구역은 2009년 6월에 준공돼 아파트 입주가 끝난 상황이다. 1, 2구역은 비교적 규모가 작어 사업이 빨리 진행됐기 때문이다. 3구역은 철거를 마친 뒤 지반정비 작업 중이고, 4구역은 철거작업이 91% 진행 중이다. 5, 6구역은 현재 조합이 설립된 상태로 사업시행인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재울은 빈손으로 들어온 서민들이 삶을 일구고 가꾼 곳이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송환되어 온 재일교포들이 먼저 남가좌동에 자리잡았고,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으로 수재를 입은 한강변 이촌동 주민들이 옮겨왔다. 60년대 초반에는 서울시가 도심 정비를 하면서 철거민들을 강북구 미아동과 가재울의 남가좌동 152번지 일대에 마련한 정착촌으로 이주시켰다. 후암동이나 도동 일대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도 이때 들어왔다. 사람이 모여들고 지역이 활기를 띠면서 쓰레기 매립지로 활용되던 곳에 66년, 73년 각각 모래내시장과 서중시장이 들어섰다. 시장이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사람들은 시장을 키워갔다.

경의선 가좌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교통은 시장을 더욱 번창케 하는 요인이 됐다. 또 수색로가 확장되면서 일산과 능곡 등 경기 서북부지역의 값싸고 싱싱한 농산물이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모래내시장은 품질 좋은 고추와 참깨, 들깨로 유명해 고추방앗간, 기름집이 번성했다. 모래내는 일산, 수색 등지를 아우르는 서북부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잡아갔다.

가재울에 사람이 모여든 또 하나의 계기는 62년 사천교 개통이다. 다리가 수색과 신촌을 이으면서 경기와 서울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였다. 신촌이나 아현동처럼 서울 시내와 가까운 곳보다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가재울로 ‘서울 입성’의 꿈을 안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당시 원주민들은 밭농사를 지어 아현동이나 수색에 내다 팔았고, 농사를 지을 기반이 없던 이주민들은 서울역 주변에서 지게품을 팔거나 건축 현장의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가재울이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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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사세요?'라는 답을 하거나, 은행같은 곳에서 자신의 주소를 쓸 때 몇몇 사람들은 묘한 느낌을 들었을 것이다. 나는 참고로 봉천6동(현재는 행운동은로 개명)에 산다. 자신의 주소명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으로 인한 자신감내지 소외감 같은 따위의 사소한 감정 변화 ... 문제는 이게 내 개인의 예민함에 따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사실이다.

경향신문 2010.3.22 [주거의 사회학]어디 사세요?

서울 동대문의 ‘답십리 뉴타운 16구역’. 골목길이 동네 사이를 휘저으며 다세대주택들을 핏줄처럼 잇고 있다. 한때 가족들을 품었던 단독주택들도 올망졸망 들어서 있다. 지금은 유리창과 문짝이 깨지고 뜯겨나간 채 주택도, 골목길도 온기를 잃었다. 벽과 지붕의 뼈대만 남았다. 철거가 시작되자 주민들이 시나브로 떠나 빚어진 살풍경이다.  

 

 "여기 헐리면 유명 건설회사가 고층 아파트를 올린답니다. 브랜드 중에 제일 비싸다는 그 아파트 말입니다. 세입자만도 1000가구가 넘던 동네인데 이제는 마흔 가구만 남았어요. 지난해 10월, 머뭇거리다간 보증금도 못 받을 수 있다는 풍문이 돌자 주민들이 피란 가듯 급하게 짐을 싸서 떠났죠.” 세입자 대표인 이영수씨의 전언이다.

이씨를 따라 유리 파편과 벽돌 부스러기가 밟히고, 담벼락에는 철거 구호가 난무하는 골목 모퉁이를 돌자 확 트인 언덕배기가 나왔다. 맞은 편 배봉산 자락에는 스무 동 남짓한 고층아파트가 병풍처럼 산을 둘러싸고 있다. 산은 제 모습을 잃었고, 아파트 군락은 서서히 죽어가는 이쪽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듯했다. 3월 현재, 이곳의 철거 작업은 ‘백지동의서로 설립된 조합은 무효’라는 법원 판결에 따라 중단됐다. 헐다만 철거현장이어서인지 더욱 을씨년스럽다.

답십리에서 50년을 살았다는 신모 할아버지(79)처럼 영세 가옥주나 세입자들은 두 배 이상 뛴 주변의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규모를 줄이거나 경기 남양주 등지로 옮겨갔다. 신 할아버지는 “딸한테 2000만원을 빌려 남양주 빌라로 이사를 갔다”며 “내 한 몸 누울 수 있는 공간이면 그만인데…”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동네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청년이 끼어들었다.

“집을 가진 조합원들도 딱하긴 마찬가지죠. 분담금이 처음보다 평당 500만원까지 올랐대요. 그 정도 비용을 감당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재개발이 끝나면 집값이 뛸 것이라는 주민들의 희망과 기대는 꺼지지 않았지만 청년의 말처럼 가옥주라 하더라도 정착률은 20% 안팎인 게 현실이다.

‘집’은 이제 주거 이상이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모든 문제를 농축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당락을 가르는 토건공약, ‘사는 집’이 아닌 ‘파는 집’에 매달려온 건설업체, 여기에 편승해온 우리 안의 욕망이 유착한 결과다. 세입자의 경우 2년마다, 집이 있더라도 5년마다 이사를 가는 ‘신(新) 유목민’ 사회의 주 원인이다. 정치·사회의 지형까지 바꿔놓은 악순환의 3각 고리는 깨지기는커녕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사는 지역과 집 소유 여부, 주택 형태에 따라 계급과 신분이 정해지고, 삶의 질마저 저당 잡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디 사세요?”라는 질문은 ‘현대판 호패’인 양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경향신문은 그러나 그 불편한 질문을 정면으로 던지려 한다. 세계 2위의 집값 상승률, 소득대비 세계 최고 수준의 주택 임차료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집은 무엇인가. 그 집을 욕망하고, 그 욕망에 좌절하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ps : 자신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 보다 돈의 가치를 더 중시하는 실태와 관련하여 한겨레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있어 스크랩한다. 독일 예술가가 우리나라의 재개발 열풍을 풍자한 작품인데, 이 작가가 하는 말이 와 닿는다.   

 

한겨레 신문 2010.5.13 청와대 옆에 ‘떴다방’ 떴다?
독일 작가, 한국 재개발 풍자
통의동에 ‘부동산’ 본뜬 작품  

“청와대 옆동네를 재개발한다고? 대통령 결단이여? 평수는 얼만데?”

“아니, 주민도 모르게 재개발을 하나?”

요즘 청와대, 경복궁의 서쪽 맞은편인 서울 통의동 30번지 주택가에서 이런 대화를 두런거리는 행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지난 7일 이 골목 한귀퉁이에 등장한 컨테이너 부동산 사무소가 이곳 일대를 아파트 단지로 전면 재개발하는 조감도를 내걸면서부터다.

사무소는 ‘로얄 블루 부동산’이란 형광등 간판을 달고 인근 건물 공사장 한쪽에 붙어있다. 특이하게도 정면은 모두 유리창이다. 들여다보면 안벽에 통의동 일대 주택가를 헐고 18층짜리 첨단 아파트 단지 수십여동이 청와대와 마주한 미래 모습을 그린 조감도가 빛난다. 간판 전화번호는 ‘02-77*-8888’. 그러나 걸리지 않는 번호다. 그렇다면 가짜? 그렇다. 이 부동산은 죄다 가짜다. 조감도도 부동산 간판도. 알고보니 속임수를 쓴 예술가의 설치 작품이다. 내부 시설또한 탁자와 의자 2개, 난초 화분과 떨어진 딸기, 꽃이 전부다. 옆 공사장도 전시화랑 건물이라 미묘한 울림을 던진다.

작품을 만든 이는 올리버 그림이란 46살의 독일 영상설치 작가다. 건설 현장의 ‘부동산 사무실’과 비슷한 구조물을 설치해 재개발의 ‘몰상식적인’ 아이러니를 표현하려 했다고 한다. 14년전부터 한국에 와 작업하면서 미대 강사로도 일해왔다는 그는 “청와대 앞 재개발 조감도를 보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그들이 재개발의 모순을 새삼 느끼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제가 사는 곳이 용산구 보광동인데, 최근 여기서도 한남 뉴타운 재개발 공사가 서민들 반대에도 막무가내로 벌어지는 걸 보고, 작업을 생각하게 됐어요. 컨테이너를 쓴 것도 재개발 때 버섯 피듯 난립하는 가건물 부동산들에서 영감을 얻었지요.”

작가는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게 툭하면 전통을 외치는 한국인 대부분이 아파트에 사는 걸 좋아하고, 자기 살던 동네를 마구 허물어도 돈만 주면 좋아하는 모습들이었다”면서 “재개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통의동 예술공간 쿤스트독의 공간 프로젝트인 이 설치 작품은 27일까지 ‘영업’한 뒤 철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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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2010.3.22 뿌리 없는 삶 -① 신 유랑시대

ㆍ월세·전세… 반지하·옥탑방 전전, 20년을 살아도 서울은 언제나 ‘타향’

뿌리가 없다. 세입자들은 떠밀린다. 소득보다 더 빨리 오르는 전셋값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세 보증기간인 2년을 채울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집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돈이 될 집, 보다 큰 집, 아니면 자식 교육에 필요한 집을 찾아다니다 보면 5년이 채 안돼 이사를 하는 건 다반사다. 뿌리 없는 삶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풍토병이라 할 만하다. 자신이 속한 동네와 사회에 관심조차 없어진다. 무관심이 우리 사회의 주된 정서가 된다. 주거는 더 이상 ‘살아가는 집’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문제다.

3명 중 1명이 세입자…월세 10명 중 6명이 2년이상 거주못해

“늘‘타향살이’하고 있는 것 같죠. 서울에 정착하려고 올라왔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이 내 땅이란 생각이 안 들어요.” 모상만씨(44·가명·택배업)는 스무살인 1986년 서울로 올라왔다. 24년 동안 8번이나 이사했다. ‘세입자’인 그는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장안동, 신길동, 면목동, 답십리동 등지에서 전세와 월세를 번갈아 살았다. 현재 그의 세 가족이 사는 곳은 동대문구 답십리 1동의 42.9㎡(13평) 크기 옥탑방이다.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4.0%이자 수도권에 94% 이상이 몰려있다는 ‘옥탑 또는 지하’ 거주 63만8000가구(통계청, 2005년 기준) 중 한 가구인 셈이다.

갓 상경했던 24년 전 그는 착실하게 15년쯤 아껴쓰고 저축하면 집을 장만할 목돈이 생길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에게 ‘내 집’은 단지 ‘꿈’에 지나지 않았다. 늘 임대 보증금 상승폭이 월급을 앞질렀다. “집주인이 옆동네 재개발했다더라, 아파트가 들어섰다더라며 그쪽 집값이 올랐으니 우리도 월세를 올려야 한다는데 세입자 입장에서는 그 말이 그렇게 겁나더라고요. 재개발이 아니더라도 연립주택 3~4동을 밀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지으면 그 주변에 금세 여파가 오거든요. 세입자들이 한꺼번에 밀려나니까 인근 월세가 5%쯤 오르는 식이죠. 집주인들끼리 ‘옆동네는 그 평수면 얼마씩 받는다’며 집세 인상을 부추기기도 하죠.”

 

주먹구구식 전·월세 시세는 주변 시세에 따라 춤추기 일쑤다. 몇 ㎡에 얼마 이상은 받을 수 없다는 상한선은 아예 없다.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세입자의 권리도 서러웠다. 반지하가 폭우로 침수돼 누전됐을 때 ‘자연재해 때문인데 왜 나한테 집을 고쳐달라고 하느냐’는 집주인의 말에 울컥했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발소리가 크다며 집주인에게 아이들이 타박당할 때는 속이 상했다. “건물주는 주인으로 돼 있지만 전세로 계약했으면 2년 동안은 나도 공동 공간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따지고 싶었다. 입에 올리지는 못했다. 집주인 앞에서 한사코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세입자의 설움이다.

개발 바람도 세입자들을 고달프게 한다. 그가 살던 답십리 1동 62.8㎡(19평)의 빌라 전셋집은 2008년 2차 뉴타운 계획에 포함되면서 갑작스레 비워야 했다. 원래 갖고 있던 보증금 4000만원에다 친척에게 3000만원을 빌려 7000만원짜리 집을 구해보려 발품을 팔았다. 면목동, 용답동, 장위동, 사근동 일대를 뒤졌다. 방이 없었다. 재개발 여파로 인근 지역의 전셋값까지 함께 뛰었다. 전에 살던 집과 같은 넓이의 집은 1억~1억2000만원이었다. 7000만~8000만원을 대출받기에는 이자 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모씨 가족은 2008년 재개발지역이 아닌 답십리1동의 현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그는 “앞으로 또 집값이 오르고 보증금이 더 오른다면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이웃인 이종섭씨(40·가명·무직)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2000년부터 보증금 7000만원짜리 전세에 살던 이씨의 네 가족은 전셋값이 오르면서 반지하방으로 밀려났다. 2008년부터 답십리 1동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방 두칸이 있는 42.9㎡(13평) 집에서 산다. 지하 또는 반지하에 산다는 서울시 전체 330만9890가구 중 10.7%인 35만5427가구(통계청, 2005년기준) 중 한 가구에 해당한다.

집에 들어서면 습기로 축 처진 장롱 뒤 벽지에는 검은 곰팡이가 얼룩덜룩하다. 집안에서 해가 드는 날이 없어 한낮에도 형광등을 켜야 한다. 환기도 잘 되지 않고 비오는 날이면 하수구 냄새가 흘러든다. 폭우라도 내리면 침수 걱정에 잠이 안온다. 정작 ‘지상’에 방을 얻을 여윳돈이 없다. 중식 요리사인 그는 요즘 일마저 쉬고 있다. “서민 사는 동네가 다 비슷하죠. 정규직이라고 하면 은행에서 대출이라도 받겠지만 비정규직이 어디 은행 문턱을 넘겠어요, 그렇다고 가진 집이 있어서 주택담보 대출을 받겠어요. 집이 없으면 평생 집 없이 사는 세상같아요. 전세 살다가 오르면 월세로 밀려나고, 땅 위에 살다가 반지하나 옥탑으로 떠밀려 가는 거예요.”

두 이웃은 서로의 처지를 자조하며 “‘반지하’ 이씨는 햇빛을 못봐 얼굴이 떴고, ‘옥탑방’ 모씨는 햇빛을 너무 받아 말라간다”며 웃었다.

집 가진 사람들도 투자·교육 때문에 5년에 한 번 이사

세입자들이 한 동네에서 안정적으로 주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005년 인구총조사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총 1589만가구 중 전세는 333만가구, 월세는 305만가구에 달한다. 전체 가구의 40%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세입자들이 한 동네에서 오래 사는 경우는 많지 않아서 월세 사는 사람 10명 중 6명이 한 곳에서 2년 미만 거주한다.(통계청, 2008) 월소득이 179만원 이하인 저소득층일수록 ‘집세가 비싸서’, ‘집주인이 나가라고 해서’ 집을 옮기는 경우가 많다. 국토연구원의 ‘2008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비자발적 이동 비율은 저소득층이 8.62%로 고소득층 3.46%의 2배가 넘는다. 월소득 179만~350만원인 중소득층도 7.12%가 자기 뜻과 상관없이 떠밀려 이사했다.

임대료는 성큼 성큼 오르는데 소득은 거북이 속도로 느는 게 주 원인이다. ‘월소득 대비 임대료 비율’(RIR)은 수도권이 2006년 19.9%에서 2008년에는 22.3%로, 같은 기간 광역시는 18.5%에서 19.3%로 상승했다. “1억원짜리 빌라에 전세사는 데 집주인이 계약 만료를 앞두고 2000만원을 올려달라는 데 목돈 구하기 힘들다”(서울 강북구 한모씨)거나 “출산을 앞둔지라 집주인이 8500만원짜리 전세보증금을 2000만원씩이나 갑자기 올려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기도 힘들었다”(경기 구리시 이모씨)는 이웃들의 하소연을 어렵잖게 접한다.

임대 가격은 얼마나 올랐을까. 국민은행 주택가격지수 자료에 따르면 2000년 1월부터 2010년 1월까지 아파트 전세금은 전국적으로 76.6%, 그중 서울은 81.3%(강북 75.7, 강남 84.9) 올랐다. 서민이 많이 사는 연립주택의 경우도 같은 기간 전국적으로 52.3%, 서울의 경우 55.6%가 올랐다. 평균 잡아서 10년 전 1억원짜리 아파트 전세가 올해에는 1억7000만~1억8000만원, 연립주택은 1억5000만원이 된 셈이다.

서민은 울상이다. 2006~2008년 두 해 사이만 해도 수도권 전셋값이 꿈틀거리면서 8.2%가 올랐다. 1999~2001년 사이에 아파트, 연립주택, 단독주택 모두 임대료 상승률이 해마다 두자릿수였던 적도 있다. 서울에서 ‘싼 전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닥터아파트’는 수도권 안의 1억원 이하 전세아파트가 3월 기준으로 지난해보다 10만237가구 줄어든 109만199가구라는 조사 결과를 최근에 내놨다.

세입자가 ‘주택 보유자’가 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일하는 사람 3명 중 2명이 비정규직일 정도로 고용불안이 심화된데다 물가 상승, 집값 상승이 겹치면서 내 집 마련을 위해 돈을 모으기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다.

연 가구소득 대비 주택가격비율(PIR)을 봐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사는 1분위 저소득층이 주택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1분위 가격의 주택을 구입하려 할 경우 안 먹고, 안 쓰고, 안 입고, 꼬박 소득을 모아도 무려 19.3년이 걸린다.(2009년 9월 기준) 3분위 중산층이 평균적 가격의 주택을 사는 데도 12.2년이 걸린다. 유엔은 3년에서 5년 정도 연수입을 모으면 집을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한다. 우리는 유엔 권고치의 3~4배를 웃돌고 있다.

전셋값을 잡겠다며 정부와 시장에서는 주택 공급량을 늘렸으나 집값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전세 살던 세입자들이 허리띠를 졸라 집세를 더 내거나, 집을 줄이거나, 외곽으로 이사하거나, 월세로 내려앉거나, 반지하나 옥탑방 등 열악한 주거로 밀려나는 현상이 벌어진다.

<부동산 계급사회>의 손낙구씨는 “2000~2005년에 셋방 사는 가구 비율이 43%에서 41.4%로 1.6% 줄어들었지만, 셋방 사는 가구수는 615만에서 657만으로 42만가구가 더 늘어났다”면서 “같은 기간 주택이 175만가구가 늘었지만 셋방 사는 가구는 증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사갈텐데…” 공동체 관심 없는 이방인의 삶
 

“셋방 가구 중에서 전세 가구가 48만이 줄어든 반면, 월세 가구가 90만이나 늘어난 것”이라는 그의 진단은 주거비용 상승으로 겪는 서민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사실 세입자와 주택보유자를 불문하고 우리나라는 인구의 19%가 해마다 이사를 다닌다.(한국도시연감, 2008) 전 인구 5명에 1명꼴, 한 해에 약 870만여명이 이삿짐을 싸고 푼다는 얘기다. 산술적으로 볼 때는 5년이 지나면 한 동네가 낯모르는 이방인으로 채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연간 ‘읍·면·동’의 경계를 넘는 비율인 17.8%라는 숫자는 일본(4.3%)의 네배에 달한다.

집 가진 사람들도 5년에 한번 꼴로 이사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재산 증식을 고려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경기 김포의 풍무동에 거주하는 주부 윤모씨(38)는 지난 10년간 4번 이사했다. 목돈을 만지는 데 부동산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다. “1999년에 결혼하면서 오피스텔 전세로 신혼을 시작했는데, 집을 못사면 평생 전세를 전전할 것 같아서였죠.” 그는 이어 2001년 경기도 평택에 32평짜리 아파트를 7250만원에 매입했다. 2005년에는 이 집을 되팔아 2배 가까운 이윤을 남기고 서울로 이사했다.

아이 학교와 남편 통근거리도 감안했지만 “부동산으로 한번 큰 돈을 벌고 나니 서울에서 더 큰 이윤을 남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구의동에 25평짜리 아파트를 대출 7000만원을 끼고 산 뒤 2008년에는 경전철 확정 발표가 난 김포 풍무동에 다시 대출을 끼고 2억5000만원짜리 아파트를 구입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1가구 2주택자’인 한모씨(49)도 “집만큼 좋은 투자대상이 없다”며 4년에 한번 꼴로 이사했다. 1996년 논현동의 30평짜리 아파트에서 시작해 같은 아파트의 50평형, 그 다음에는 대치동의 50평대 아파트를 5억원의 은행대출을 받아 구입했다. 이자로 한 달에 몇백만원이 나가지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의든 타의든 잦은 이사는 ‘이방인’들을 낳는다. ‘재테크’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윤씨도 “한편으로는 잃은 것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여긴다. 새 동네에 이사갈 때마다 마트와 약국, 빵집을 찾는 사소한 일까지 적응하는 것은 스트레스다. “아이의 경우 유치원에서 ‘친구하자’는 또래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는 이사가기 싫다고 울기까지 해서 미술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어요.” 그는 한동네 살면서도 이웃과 유대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다. 반상회에 가도 무관심해진다. ‘또 이사갈 텐데’라는 태도가 몸에 밴 것 같다고 고백했다. 답십리의 모씨는 “주거 안정이라는 게 (임대계약인) 2년으로 정해져있는데, 이후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애향심이 생기겠느냐”고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 동네 정치를 누가 하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속된 말로 ‘해쳐먹든지’, 국회에서 싸움질을 하든지 의미가 없다니까요. 내 표가 귀중한 표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요.”

ps : 그래도 나에게는 '고향'이라는 마음의 장소가 남아있다. 물론 물리적인 공간은 없어져 버렸지만...위 글에서 나오는 "뿌리 없는 삶은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풍토병"이라는 말은 일종의 '심상적 고향'의 부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 인간의 '뿌리'를 고향에 한정지을 수는 없지만 '고향'이라는 공간에 내재되어 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인간 관계가 끼치는 영향을 고려할때 현대인들의 '고향'의 부재는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맛있는 빵집 찾는 일에서부터 아이들의 친구 사귀는 문제까지...이런 내용에 참고가 될만한 논문이 대한지리학회 제35권 3호에 '한국인의 고향관: 그 지리학적 요인과 정서(ethos)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아마도 1990년대 이후 출생한 사람들은 잦은 이사로 인해 고향이란 단어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까 한다. 이와 관련해서 읽어보고 싶은, 그리고 읽으려 예전에 구입했던 책이다 얼른 읽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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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좋은 기획기사 하나가 있어 차례차례 스크랩할까 한다. 제목이 '주거의 사회학'이다. 관심있는 도시지리학쪽 주제이기도 하다. 찾아보니 기사가 꽤 불량이 많다. 스크랩하면서 정독해야겠다. 

경향신문 2010.3.22 고시원 쪽방에 몰리는 88만원 세대

ㆍ옆동네 재개발로 고삐풀린 집세 갑자기 올려달라니 또 이사할 수밖에
ㆍ서울지역 고시원 수 2년 만에 20% 증가
ㆍ숙박 목적 거주자만 6만2000명 넘어

사원 전모씨(31)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고시원에서 5개월째 살고 있다. 전씨는 “좁은 것에 대한 답답함을 감수한다면 고시원이 단칸방보다 훨씬 낫다”고 말한다. “보증금과 공과금이 필요없고 출퇴근 교통비가 절약되는데다 월 35만원에 쌀밥과 김치, 라면을 제공하니 혼자 살기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너무 비좁은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자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적응하면 괜찮다”며 웃었다. 그런 그도 자신의 삶을 단 두 평의 공간에 압축해 놓은 듯한 고시원 생활을 하다보면 가끔 “‘관’(棺)에 들어온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현재 기거하는 고시원은 처음 생활했던 고시원보다는 1.65㎡(반평) 남짓 넓다. 샤워가 가능한 화장실까지 갖춰져 있다. 2007년부터 1년6개월간 살던 신촌의 월세 24만원짜리 고시원은 “건넌방의 기침소리, 옆방의 알람 소리에 잠을 깨는 곳”이었다. 좁디좁은 취업에 몇차례나 좌절한 뒤 한때 낙향했던 그가 지난해 말부터 홍보대행사에서 수습사원으로 근무하면서 누리는 ‘호사’이다. 한달 급여는 130만원. ‘88만원 세대’를 자칭한 그는 “전·월세 보증금을 모을 때까지는 고시원에서 살 것”이라고 말했다.
 
전씨처럼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근로 계층이 증가하고 있다. 고시원 시설이 예전보다 ‘고급화’한 것은 고시원 수요자들이 달라진 데 따른 변화다. 1980~90년대 고시생과 소외계층을 위한 ‘도시형 쪽방’ 고시원은 이제 직장인과 학생들이 주요 고객으로 바뀌고 있다. 비정규직 젊은이인 88만원 세대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현재의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로는 기존의 전·월세를 감당하기 힘들다. 2008년 기준으로 비정규직의 월평균 급여는 118만원. 정규직(215만원)의 절반 수준이다. 그 달 벌이로 그 달을 먹고 사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을 마련할 돈을 모으기에는 턱없이 적다.

 

비정규직과 고시원의 상관 관계는 각종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비정규직은 지난해 8월 575만명으로 1년 전에 비해 5.7%가 늘었다.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고시원 역시 2007년 3111곳에서 2년 만에 3738곳으로 늘어나 20% 증가했다. 강남·서초·동작·구로·송파구 등 직장인이 몰리는 곳에 43%가 밀집해 있다. 서울에서 고시원에 사는 사람은 약 10만8000명. 이중 순수 ‘숙박형’이 6만2000명에 달한다. ‘고시텔’, ‘원룸텔’, ‘레지던스’ 등 이름만 다를 뿐 고시원은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직장인을 위한 숙박촌으로 자리 잡아가는 추세다.

한국고시원협회 김두수 이사는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크게 늘어난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은행권에서 전·월세 보증금을 대출받기가 어렵다. 이들이 주거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지낼 수 있도록 ‘틈새’ 시장에 맞춰 진화한 숙박 시설이 고시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시원에 거주하는 직장인은 대부분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비정규직”이라며 “고시원 수요는 앞으로도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광진구에서 원룸텔을 운영 중인 한 건물주는 “예전엔 형편이 좀 어렵더라도 아껴쓰며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정서가 강했지만 요즘 들어선 집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젊은층의 소득 수준은 크게 떨어지다보니 아예 포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정부가 1인 가구를 대상으로 공급 예정인 ‘도시형 생활주택’ 전망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몇천만원씩 들여 도시형 생활주택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반문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88만원 세대’의 추락이 미래에 끼칠 영향이다. 김수현 세종대 교수(부동산학)는 “중대형 주택을 매입하는 것은 40대에 가장 왕성한데, 젊은 세대의 소득이 불안정하면 주택 구매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88만원 세대의 현 상황은 자신들의 미래는 물론 장기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불황 등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ps : 88만원 세대를 책 목록에 추가하려 '88만원'으로 검색하니 아래의 책이 검색된다. 제목으로도 책의 내용이 대충 어떤것인지 짐작은 간다. 뭐 개인적으로 이런류들의 책을 '기만형'이라 생각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위안형'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래는 출판사 소개글이다.

88세대에게는 과연 희망이 존재하는가?
월 88만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돈으로는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은다고 해도 평생 집 한 채도 장만하지 못할 것이다. 점점 더 암울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기성세대들은 거품 경제로 인한 수많은 부채를 보이지 않게 후세대에게 전가하고 있다. IMF 이후 망가진 경제 상황은 경기부양책이라는 이름 아래 구조조정과 신입사원의 수를 줄였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땅값, 집값 등 물가를 치솟게 하여 이 땅의 서민과 신세대들의 설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막대한 부채로 떠받치고 있는 기업과 가계의 부담은 88세대의 노동력 착취로 전환된다. 비정규직을 미끼로 새로운 세대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러한 기성세대들의 한마디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올바른 목표를 세워 과감히 창업에 도전하라고 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운 선택이다. 하지만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며, 온 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충분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결과가 온 다는 것을 대박신화의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전달한다.

월 880만원에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어떤 비결이 있었을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속의 주인공을 통해 대박신화의 주인공들을 만나본다. 뚱뚱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큰 사이즈의 옷을 파는 쇼핑몰로 성공한 사람, 좋은 회사에 입사하기엔 초라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 길거리 소시지 장사를 결심해 월 880만원의 매출을 이룬 사람, 와인바를 낼 돈이 없어 공원 벤치에서 장사를 시작해 지금은 프랜차이즈까지 꿈꾸는 사람까지 현재 88세대와 비슷한 처지에서 시작해 대박을 이룬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다.
월 880만원이라는 매출을 가능했던 사람들에게는 일련의 공통된 노하우가 있다. 작가는 독자를 위해 이를 억지로 주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깨우칠 수 있도록 이야기 속에 녹여 전달한다. 대박신화의 주인공들의 성공 스토리와 극 중 등장인물들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지금의 88세대에게 충분한 용기와 희망을 안겨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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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지역의 환경 파괴 문제는 여러 매체에서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다. 오늘 스마트폰으로 Spb 뉴스를 보다가 기사가 하나 있어 스크랩해둔다.   

 

경향신문 2010.5.5 [주거의 사회학](3부) 주거와 정치·사회…③ 토건사회의 그늘 - 환경 파괴

ㆍ짓고 부수고 버리는 동안 멍든 산·바다, 석회석 채굴 26년 자병산, 110m 깎여
ㆍ돌산 깎아 자갈 만들고 마구잡이 바닷모래 채취, 생태계 파괴 심각

아파트를 지으려면 콘크리트가 필요하다. 콘크리트는 산을 깎고 파헤쳐 만들어진 석회석과 골재, 강과 바다에서 빨아올린 모래로 만들어진다.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동안 산과 해안선은 되돌릴 수 없도록 파괴되고 있다. 집들이 100년 이상 사용된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이익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재개발·재건축은 20~30년 단위로 되풀이된다. 이러한 주택개발문화는 환경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땅도 병들게 하고 있다.

-2004년 9월 위성촬영된 자병산의 모습. 당시 20년째 석회석을 채굴하면서 주변 산림과 달리 헐벗은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 있다. | 구글어스 제공 

봄은 왔지만 자병산에는 봄이 오지 않았다. 지난 4월 초 찾은 자병산에는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고, 뿌연 흙먼지만 피어올랐다. 석회석 채굴이 시작된 지 26년.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었던 자병산은 본모습을 잃고 황폐한 돌산처럼 보였다. 자병산 능선에서 석회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환경단체 회원들은 ‘자병산의 눈물’이라고 표현했다.

강원 정선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첩첩산중 속 꼬불꼬불한 42번 국도를 지나는 관광객들은 왼편으로 나타나는 헐벗은 산자락에 놀란다. 녹음이 짙어가는 다른 산들과 달리 자병산은 26년째 석회석 채굴이 이뤄지고 있다. 1985년부터 올해까지 (주)라파즈한라가 이곳에서 채굴한 석회석은 1억4000만~1억5000만t이다. 약 220㏊에서 이 같은 양을 채굴하면서 원래 해발 872.5m의 자병산은 2010년 현재 760m 정도로 깎여나갔다. 시멘트 채굴이 끝날 것으로 예상되는 30여년 후에는 50m가량 더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자병산이 헐벗게 된 것은 아파트 건설에 필수적인 시멘트 때문이다. 70년대와 80년대 말 신도시 건설 등 전국적인 대규모 개발이 이뤄질 때마다 시멘트업체들은 별다른 제재 없이 석회석이 매장된 백두대간을 파들어갔다. 백두대간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기 전까지 아예 제재조차 없었던 탓이다.

  

-강원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에 걸쳐있는 자병산에서 특수차량들이 석회석을 채굴하고 있다. 백두대간 보호법률이 제정 되기 전까지 석회석 개발이 마구잡이로 이루어졌다. | 백두대간보존회 제공

산림골재 채취량은 연도별 주택공급 실적에 따라 오르내렸다. 연도별 주택공급실적이 58만5382가구로 크게 늘어났던 2003년을 기점으로 살펴보면 2002년 5835만1000㎥, 2003년 6478만1000㎥, 2004년 6365만2000㎥에 달했다. 그나마 현장확인이 가능한 자병산의 경우 환경단체와 라파즈한라의 노력을 통해 석회석 채굴이 끝난 지역 중 일부를 주변 산림 수준으로 복구하고 있다.

2003년부터는 주민, 환경단체와 협의해 허가받은 부분만 채굴한다. 백두대간보존회 김경한 사무국장은 “동해시 인근에서 ㅆ업체, ㄷ업체 등이 대규모로 석회석 채굴공사를 하면서도 현장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자병산과 달리 쉽게 볼 수 있는 곳도 아니어서 얼마큼 환경파괴가 진행됐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골재 채취로 인한 환경파괴는 자병산과 같은 큰 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작은 돌산들 역시 깎여나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콘크리트 재료로 강에서 퍼올리던 자갈이 80년대 들어 고갈되자 아예 산을 깎아내 건설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 경기 양주에서는 (주)삼표산업이 86년부터 가납리 도락산 일대 59만여㎡에 대해 채석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발파작업으로 인한 소음과 환경훼손 등으로 인해 주민들이 공사에 반대하는 상황에서 삼표 측이 2037년까지 총 133만여㎡를 개발하는 안을 새로 추진하면서 주민들과 업체, 양주시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고 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이작도 인근 해역에서 모래 채취선이 바닷모래를 퍼올리면서 바닷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 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주민들은 “도락산을 추가로 개발하는 것은 산을 그대로 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고, 양주시도 ‘추가 개발은 안 된다’는 의견을 한강유역환경청에 전달한 바 있다. 김경한 사무국장은 “이름 없는 돌산 중에는 사라진 채 아무런 복원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곳도 있다”며 “강원도 동해 인근의 한 돌산은 소규모 업체가 개발하다 부도가 나면서 그대로 방치돼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폐해는 바다도 예외가 아니다. 80년대 건설붐에 따른 무리한 채취로 강모래가 소진되자 바닷모래까지 채취하기 시작했다. 염분을 없애면 건축자재로 쓸 수 있다지만 노태우 정부 당시 지어진 분당 신도시의 경우 소금기가 빠지지 않은 모래가 사용되면서 콘크리트 균열이 발생해 ‘불량자재’ 논란이 일었다. 현재 서해안의 모래 채취현장에서는 수중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근 섬 해변의 백사장이 축소되면서 주민들의 생활까지 위협하는 상황이다.  

지난 4일 찾은 인천의 송도신도시 인근 해변에서는 바닷모래 채취선이 한창 모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인천 옹진군 앞바다에서 채취한 바닷모래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있었다. 옹진군 앞바다는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한강 하구의 특성과 서울로 운송하기가 편리한 장점 때문에 바닷모래 전체 생산량의 약 60%를 쏟아내고 있다. 인근 섬 주민들과 환경단체 등의 반대운동으로 2003년 한때 작업이 중단됐으나 2006년 초부터 채취가 재개됐다.

바닷모래 채취 작업이 바다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이유는 바지선에서 파이프를 통해 모래를 빨아올리고 바닷물은 그대로 흘러내리도록 하는 방식 때문이다. 어폐류의 주요 산란처인 모래가 빨아올려지면서 어폐류의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고, 물이 빠지면서 2차 오염까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인천환경운동연합 조강희 사무국장은 “바닷모래 채취 이후 인근 해역의 어류가 4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더 이상의 환경파괴를 막기 위해 6·2 지방선거 인천지역의 후보를 단일화해 주요 공약 중 하나로 바닷모래 채취 금지를 넣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ps : 한겨레21 2010.01.22 제795호에도 자병산 관련 환경문제 기사가 있어 같이 스크랩한다. 석회암광산 관련 환경문제에서 자병산은 단골 손님인가보다... 

겨우 남은 자병산, 똑똑히 보라
[신백두대간기행 21.백복령∼닭목이재]
시멘트 채광으로 무너져내리는 산… 라파즈한라는 식목사업으로 환경 훼손 만회하려 

세상이 열리기 전인 까마득한 옛날, 마고할미가 살았다. 백두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한라산에 다리가 닿을 정도로 장대한 할머니에겐 아주 귀한 반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반지를 잃었다. 그 반지를 찾느라 온 땅을 헤집어 결국은 스스로도 헤집어놓은 땅속에 묻히게 됐다는 게 강원 영월 지역에 전하는 절벽의 유래다. 

 

» 자병산 석회석 채광 현장. 왼쪽 꼭대기가 자병산이 있던 곳이다. 

10년 전처럼 가는 내내 맑은 하늘


시멘트를 만들기 위해 석회석을 캐내느라 절벽으로 변한 자병산에서 영월에서 들었던 마고할미 전설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왜일까? 저녁이면 노을빛을 받아 붉게 빛나 신령스러웠다는 자병산을 수백m 낭떠러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탐욕 때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더 좋은 아파트와 더 빠른 고속도로를 향한 욕심은 자병산을 사라지게 하고 우리가 기대어 살아왔고 살아갈 수많은 산들을 파헤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병산을 찾아오는 길. 하루 종일 발길이 무거웠던 이유도 10년 전 만난 그 참혹함을 다시 봐야 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자병산으로 가던 날은 올겨울 가장 추운 날이었고 서쪽 바닷가 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대설경보로 바뀔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 날이었다. 그러나 길을 떠나 동쪽으로 오는 내내 하늘은 맑았다. 바람조차 없어 쌓인 눈이 녹아내릴 정도로 기온이 높았다.

똑똑히 보고 제대로 전하라는 뜻인가? 10년 전 자병산을 찾던 날에도 며칠을 두고 내리던 비가 갑자기 멎었다. 다 잘려나간 자병산의 귀퉁이에 섰다. 10년 전 자병산에 처음 올랐을 때 섰던 자리보다 적어도 수십m는 더 낮아졌다. 다만 걱정하던 마루금 관통은 이뤄지지 않았다. “저기 나무가 없는 곳이 보이지요. 채광 허가를 받았지만 채광 직전 환경단체들의 요구로 채광을 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라파즈한라 최용호(49) 부장이 가리키는 사면은 다른 지역과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나무가 없었다. 그 사면 뒤로 해는 이미 기울고 쌓인 눈으로 산은 푸르게 빛나며 백두산으로 가는 마루금을 연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이라 했다. 자병산은 사라졌지만 물은 어차피 낮은 데로 흐르니 다른 능선이 마루금을 잇는다. 그 마루금을 좇아 시선을 옮긴다. 왕관처럼 솟은 저 산이 석병산이고 그다음 하얗게 빛나는 눈밭은 지난해 여름 고랭지 배추를 키워낸 안반데기 어디쯤일 것이다. 저 언덕을 넘으면 대관령이 보일 터이고, 동양 최대 목초지라는 삼양대관령목장을 지나면 오대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강원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의 라파즈한라시멘트 공장. 과거에 달빛이 아름다워 ‘조울뜰’로 불리던 마을이 있었던 자리다. 

“이제 백두대간보전회와 더 이상 다툼은 없습니다. 상생의 관계지요.” 자병산은 백두대간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다. 1990년대 백두대간 종주 바람이 불면서 사람들은 잘려나간 자병산을 보고는 자지러졌다. 마고할미의 손톱 자국보다도 더 참혹한 생채기 앞에서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보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척 두타산 인근 주민들과 산악인들이 참여한 백두대간보전회가 앞장섰다. 채광을 중지하라는 요구와 기업활동을 방해하지 말라는 요구가 충돌했다. 백두대간보전회는 겨우 남은 자병산 정상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였다. 시멘트 산업이 과잉 생산으로 구조조정을 겪으며 기업의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직원들이 맞섰다. 채광을 중지하면 당장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다. 분규는 계속되고 기업과 환경단체의 골은 깊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라시멘트가 새로운 주인을 만났다. 그렇게 10여 년 이미 채광 지역으로 허가를 받아둔 백두대간 마루금까지는 확대하지 않는 선으로 한라시멘트가 물러섰다. 지역단체는 기존 광구를 중심으로 지하로 채광을 더 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라시멘트 ‘에코 백두대간 2+’의 탄생

노태우 정부 시절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들먹이며 시멘트 생산을 독려한 탓에 시멘트 공장은 자산가치가 1조원이 넘을 정도로 커진데다 지역경제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문을 닫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도 옥계초등학교 재학생의 절반 정도는 라파즈한라시멘트 직원 자녀들이다. 석회석 채광 중지는 곧 옥계 지역 경제의 끝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2003년인가요 제가 보전회를 찾아갔어요. 환경 훼손을 인정했지요. 그렇다고 시멘트를 만들지 않을 수도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환경에 기여할 길을 달라고 했어요.” 최용호 부장이 설명하는 ‘에코 백두대간 2+’ 운동 탄생의 배경이다. 라파즈한라는 기금을 출연하고 시민사회단체는 실행 계획을 세워 진행하는 ‘에코 백두대간 2+’ 운동은 그동안 백두대간 훼손 지역 45ha에 나무를 심고 가꿔왔다. 지난해에는 대관령 인근 안반데기 지역에 시민단체인 ‘강릉 생명의 숲’과 함께 생태숲을 조성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나무를 심는 일과 함께 미래의 주역인 학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러주는 사업도 진행한다. 지금까지 35회에 걸쳐 학생 2500여 명이 현장에서 교육을 받았다. 환경부와 함께 행사도 벌이고 동부지방산림청의 숲가꾸기를 지원하는 것도 ‘에코 백두대간 2+’ 운동의 주요한 사업들이다.

채광지 현장의 복구사업도 모든 것을 투명하게 정리했다. 복구사업 자체를 외부 컨설팅을 받아 외부 기업이 진행하도록 하고, 다른 시멘트 기업에는 없는 광산복구모니터링위원회도 구성했다. 위원회에는 시민단체와 학계와 관계기관이 참가한다. 라파즈한라는 위원으로 참석하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실행 가능한 평가를 받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백두대간보전회가 현장을 감시할 수 있도록 문도 열어놓았다.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시작된 지역 및 환경단체 등과의 분규가 얼마나 많은 기회비용을 내게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1999년 이후 10년 만에 찾은 잘려나간 자병산 귀퉁이. 872m였던 산은 760여m로 내려앉았다. 앞으로 60여m 더 낮아질 것이라 했다. 귀퉁이만 남은 산 정상이 자꾸만 낮아지는 이유는 지하로 내려가면서 붕괴를 막기 위해 일정한 각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 백복령 도로 중간쯤에 선 백복령 옛길 표지석. 강원 정선군 임계장으로 동해의 산물을 나르던 고갯길이다. 

산업역군에서 환경파괴자로, 아버지의 의무

아무리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겨울의 복판이다. 능선 너머로 해가 넘어가면서 바람이 찾아온다. 강하지 않지만 견디기 어렵다. 바람은 막고 습기는 배출하는 고기능성 옷으로도 겨울바람은 견디기 어렵다. 이 추위 속에서도 발 아래 까마득한 곳에서 작업 차량들은 쉬지 않아 채광 지역에는 눈이 쌓일 틈도 없다. 저 분주함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의 의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아버지의 의무는 자신의 자리가 ‘산업역군’에서 ‘환경파괴자’로 변해도 포기할 수 없는 의무다. 자병산은 사라지기 전에도 아버지의 의무를 다하려는 이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던 땅이다.

자연에 기대어 살던 시절 자병산은 대접받는 산이었다. 가뭄이 오래돼 천수답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게 되면 사람들은 제물을 싸들고 자병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렸다. 노을빛이 닿으면 산 정상은 너무나 신령스러운 빛을 발해 ‘산계8경’으로 꼽히던 아름다운 자병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빽빽했던 도장나무도 “까마귀가 자병산 고욤을 마다하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넘치던 고욤나무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숲이 사라지면서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생명의 터전도 잃었다. 이제는 기억하는 이조차 없어 지명유래집 정도에나 남아 있는 자병산 인근 골짜기의 이름은 유난히 자연환경에서 따온 이름이 많다.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기 전 자병산 골짜기에는 9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이 중 80여 가구가 이어오던 삶의 터전을 시멘트 공장에 내줬다. 지금의 시멘트 공장 자리는 달빛이 유난히 아름다워 ‘조울뜰’(照月平)으로 불리던 마을이 있던 곳이라 했다.

자연은 사람이 없어도 존재하지만 사람은 자연 없이는 살 수 없다. 채광 지역의 일부지만 복원 활동도 성과를 내고 있다. 폐석에 흙을 덮고 다지고 기다리고 몇 번의 갈아심기를 반복한 뒤에야 석회석을 캐낸 사면에서 나무는 다시 숲을 이뤘다. 한쪽에서는 나무젓가락만 한 나무들이 겨울바람을 이기며 뿌리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펼치고 있었다.

라파즈한라는 이제 환경 활동을 중요한 공익 마케팅으로 인식하고 있다. 적자를 내는 해에도 지역발전기금을 출연하고 장학재단을 유지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역의 민심은 1975년 한라시멘트가 들어서던 시절처럼 큰 기대를 걸지는 않지만 함께 기대고 살아가야 할 공동체로 라파즈한라를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미 파헤쳐진 자병산 능선은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지역 주민들은 폐광 지역에 대체산업이 들어서 옥계면의 일자리를 계속해서 유지해주기를 희망한다. 일부에서는 그대로 수십 년간을 지켜보면서 자연천이에 의한 복구와 환경을 교육하는 시설로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몇몇 환경단체는 법대로 원상 복구할 것을 주장한다. 이미 깎아낸 산을 다시 세우려면 또 그만한 흙과 바위를 어디선가 가져와야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게다.

길어야 100년이면 석회석 바닥 드러내

기왕의 채광 지역 복구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석회석 자원도 100여 년 뒤면 고갈된다는 걸 함께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병산 지역은 현 상태의 채광을 유지하면 30여 년, 우리나라 전체로는 앞으로 100여 년이면 석회석이 바닥이 난다고 한다. 100년 이후에도 계속 태어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동해·강릉=글·사진 윤승일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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