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0.3.25 [주거의 사회학](1부)뿌리없는 삶-② 가재울 사람들
ㆍ‘원주민 내모는 뉴타운’ 1300만원에 19년 삶터 빼앗아
ㆍ세입자 30인의 그 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과 북가좌동에 걸쳐 있는 가재울은 서울의 4대 시장 가운데 하나인 모래내시장과 다가구·다세대주택에 2만1662가구의 서민을 품은 곳이었다. 그러나 2003년 2차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많은 이들이 터전을 떠나야 했다. 대가로 손에 쥔 것은 몇 푼 안 되는 보상비뿐이고,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하기만 하다. 법이 그렇다니 영세가옥주와 주거세입자, 상가세입자들은 마땅히 항의할 곳조차 없다. 2013년까지 10~15층 높이의 149개동, 2만541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나, 돈 없는 이들에게는 방 한 칸 허락되지 않는다. 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가재울 뉴타운사업을 위해 철거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서울 남가좌동 118번지 일대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재개발하는 데로 이사 안 가려고 일산으로 이사왔어요. 여기는 신도시잖아요.”
허모씨(47)는 가재울에서 10년 넘게 편의점을 운영했다. 한달에 600만원 벌이를 했다. 편의점에서 50m쯤 떨어진 다세대주택을 전세 5000만원에 구했다. 2003년 뉴타운 사업이 확정된 이후부터 장사는 서서히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더구나 집과 가게가 모두 재개발 지역에 포함됐다.
보상금은 낮았다. 보증금과 월세 외에 권리금을 5000만원이나 내고 입주한 가게지만 감정가액은 불과 1800만원. 1년6개월 넘게 투쟁한 끝에 상가에 대한 영업손실보상액이 3600만원으로 늘어났지만 같이 장사를 하던 여동생과 절반씩 나눈 뒤 월세와 생활비로 날렸다. 주거 이전비도 4인 가족을 기준으로 1300만원이 다였다. 그는 지금 일산의 20평 빌라에서 월세를 살며, 3년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다. 허씨처럼 재개발사업으로 한층 곤궁해진 세입자 30명의 삶을 들여다봤다.
재개발로 동네를 떠나야 하는 사람들은 수평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소득이 뚝 떨어지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일산에 사는 허씨의 경우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 편이다. 주점을 운영했던 이모씨(55)는 지난해 9월 마지막으로 이주에 합의하면서 몸이 나빠지는 바람에 지금은 놀고 있다. 보상금은 2년 넘게 싸우면서 늘어난 빚을 갚는 데 쏟아부었다. 가게를 다시 열 형편이 안 된다. 이렇게 일자리가 없는 사람이 30명 중 7명이다. 23명은 일을 해도 수입이 줄었고, 가게를 열었어도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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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문제는 현실성 없는 보상금이다. 16년 동안 벽지 가게를 하던 백모씨(61·여)는 보상금 3000여만원에 합의, 그 돈으로 트럭을 사서 용달업을 하고 있다. 백씨는 “권리금이 너무 비싸서 다른 가게를 구할 수가 없다”며 “보상도 많이 못 받았지, 권리금을 마련할 돈은 없지, 이 나이 먹어서 할 게 뭐가 있겠느냐”고 한탄했다.
가재울뉴타운 3구역은 원래 9700여가구였으나 입주 후 3300가구로 줄어들게 된다. 치킨집을 하던 이모씨(35)는 가재울 공사현장을 둘러싸고 있는 ‘서울특별시 뉴타운 사업’ 그림을 떠올리며 “그것만 보면 동네가 아주 좋아질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민들 재산을 빼앗아서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쓴웃음만 나온다”고 말했다. 이씨는 “뉴타운 얘기가 나오면서 새로운 아파트에는 연봉 5000만원 이상인 ‘수준 높은 사람들’만 입주할 수 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휘황찬란하게 꾸며 놓은 가재울뉴타운 모델하우스에 가 보고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덧붙였다.
신모씨(48)는 “개발 때문에 사람들이 싸우고 돈 때문에 이웃 사이에 칼부림이 날 뻔했다. 그 시간들을 기억하는 게 너무 괴롭다”라고 말했다. 염모씨(49)도 “가끔 가재울을 지나가지만 이제는 뭐…. 잊을 건 빨리빨리 잊어야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이가 많을수록 개발의 피해는 더 크다.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박모씨(63·여)는 가재울에서 노래방을 6년 넘게 했지만 보상금으로는 다른 곳에서 가게를 열 수 없는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며 허탈해했다. 박씨는 “뉴타운을 안 했으면 한 달에 200만원 벌이는 됐다. 이 나이에 어디 가서 밥벌이를 하겠어. 나이 먹은 사람은 죽으라는 거냐”고 말했다.
서모씨(54)는 “헌법에 기본권이 보장돼 있다지만 19년씩 생활한 사람을 단돈 1300만원에 나가라고 하는 게 실정법”이라며 “이 나라는 업자들을 위해 법을 적용하고 구청장과 공무원들은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2월 당시 현동훈 서대문구청장은 기획부동산업자의 청탁을 들어주고 집무실에서 상습적으로 떡값을 챙긴 혐의로 구속됐다.
가재울은 어떤 곳?… 서울의 대표적 서민동네
ㆍ모래내·서중시장 중심
가재울은 2003년 11월 뉴타운 사업 지역으로 지정됐다. 1구역부터 6구역까지 모두 6개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1구역은 2008년 12월에, 2구역은 2009년 6월에 준공돼 아파트 입주가 끝난 상황이다. 1, 2구역은 비교적 규모가 작어 사업이 빨리 진행됐기 때문이다. 3구역은 철거를 마친 뒤 지반정비 작업 중이고, 4구역은 철거작업이 91% 진행 중이다. 5, 6구역은 현재 조합이 설립된 상태로 사업시행인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가재울은 빈손으로 들어온 서민들이 삶을 일구고 가꾼 곳이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송환되어 온 재일교포들이 먼저 남가좌동에 자리잡았고, 1959년에는 사라호 태풍으로 수재를 입은 한강변 이촌동 주민들이 옮겨왔다. 60년대 초반에는 서울시가 도심 정비를 하면서 철거민들을 강북구 미아동과 가재울의 남가좌동 152번지 일대에 마련한 정착촌으로 이주시켰다. 후암동이나 도동 일대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도 이때 들어왔다. 사람이 모여들고 지역이 활기를 띠면서 쓰레기 매립지로 활용되던 곳에 66년, 73년 각각 모래내시장과 서중시장이 들어섰다. 시장이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사람들은 시장을 키워갔다.
경의선 가좌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교통은 시장을 더욱 번창케 하는 요인이 됐다. 또 수색로가 확장되면서 일산과 능곡 등 경기 서북부지역의 값싸고 싱싱한 농산물이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모래내시장은 품질 좋은 고추와 참깨, 들깨로 유명해 고추방앗간, 기름집이 번성했다. 모래내는 일산, 수색 등지를 아우르는 서북부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자리잡아갔다.
가재울에 사람이 모여든 또 하나의 계기는 62년 사천교 개통이다. 다리가 수색과 신촌을 이으면서 경기와 서울이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였다. 신촌이나 아현동처럼 서울 시내와 가까운 곳보다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가재울로 ‘서울 입성’의 꿈을 안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당시 원주민들은 밭농사를 지어 아현동이나 수색에 내다 팔았고, 농사를 지을 기반이 없던 이주민들은 서울역 주변에서 지게품을 팔거나 건축 현장의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런 가재울이 뉴타운으로 지정되면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