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트베르펜_키파와 다이아몬드 

p.251-254 전설에 따르면, 로마시대 어느 즈음 스헬데강 하구에 드루운 안티곤이라는 거인이 살고 있었다. 그 시절 스헬데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이 거인에게 비싼 통행세를 내야 했다. 통행세를 내지 않는 사람은 그에게 손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드루온 안티곤에 대한 사람들의 원망이 쌓일 무렵, 실비우스 브라보라는 로마 군인이 이 지역에 나타났다. 브라보는 드루온 아티곤을 죽인 뒤 그의 손을 잘라 스헬데강에 내던졌고, 그 뒤 이 지역에선 피 흘림이 멎었다. 

이 전설의 핵심은 '던져진 손'이다. 그래서 '손'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한트'와 '던지다'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베르펜'이 합쳐져 한트베르펜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거기서 첫 자음이 떨어져나가 '안트베르펜'이라는 이름이 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트베르펜 사람들 대부분이 믿고 있는 애기다. 

그러나 브라보 전설을 안트베르펜이라는 이름과 연결시키는 것은 그저 민간어원일 뿐이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사악한' 거인과 '정의로운' 영웅을 대립시키는 이 전설이 역사적 승리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각색됐을 가능성이다. 이 전설에서 영웅 브라보로 대표되는 세력은 아마 외래의 정복자였을 것이고, 흉악한 거인 드루온 안티곤으로 형상화된 집단은 스헬데강 하구의 토착 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손이 잘린 채 괴로워하고 있는 거인은 힘이 달려 정복당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죄가 없는 이곳의 원주민일지도 모른다. 

한때 유럽 최대의 무역항이었고 지금도 그 지위가 크게 추락하지 않은 이 도시의 엔도님은 안트베르펜이지만, 영어 엑소님 '앤트워프'와 프랑스어 엑소님 '앙베르'도 그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 있다. ... 앤트워프는 다른 무엇에 앞서 다이아몬드센터다. 다이아몬드 절삭 산업의 규모가 세계 제일인 도시가 바로 앤트워프다. 중앙역과 이어지는 지하철역 이름이 '디아만트'(다이아몬드)고, 관련업체들이 모여 있는 중앙역 건너편의 서너 블록을 아예 다이아몬드 구역이라고 부를 정도다. 

이 다이아몬드 산업을 주무르는 세력은 유대인들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돌아본 도시들 가운데 유대인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던 곳이 앤트워프다. 그들이 유대인인 줄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들이 키파(정통유대교도들이 쓰는 검은 모자, 아르물케라고도 한다)를 쓰고 다니며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드러내니 아는 것이지 내게 무슨 인종학적 투시안이 있겠는가. 

내가 앤트워프에서 좋아하는 곳들은 대개 구시가지에 있다. ... 그 구시가의 중심이 흐로트 마르크트라 불리는 광장이다. 그 둘레에 시청과 그 유명한 성모대성당이 있다. 그 유명한? 영화와 애니메이션과 연극으로 수없이 각색된 영국 작가 위다의 소설 <플랜더스의 개>('플랜더스'는 '플랑드르'의 영어식 지명이다)가 바로 이 성당에서 슬프게 마무리되기에 한 말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주인공 넬로가 애견 파트라슈를 껴안고 죽는 곳이 이 성당의 루벤스 그림 아래서다. 기실, <플랜더스의 개>가 앤트워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작품에 반해 성모대성당과 루벤스 그림을 보러 이 도시로 몰려든 일본인 관광객들 덕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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