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_언어의 전장
p.264-267브뤼셀은 플랑드르 지역 안에 있지만, 네덜란드어(플라망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쓴다. 방금 예로 든 표지판들만이 아니라, 이 도시의 모든 공적 텍스트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두 가지로 표기된다. 두 언어 가운데 하나로 표기된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두 언어로 병기된다는 말이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이 도시에서 대등하다는 뜻이다. 브뤼셀은 언어사회학자들이 바일링구얼리즘(2개 언어 병용)이라 부르는 현상을 실현하고 있는 드문 도시이다.
어떤 공동체가 두 개 언어를 쓰는 현상에는 바일링구얼리즘 말고 다이글로시아가 있다. 다이글로시아는 어떤 공동체가 두루 쓰는 언어가 그 사회적 기능과 공적 위세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를 가리킨다. 2개 언어 병용은 대부분 다이글로시아 형태로 실현된다. 이를테면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는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사용되지만, 사회적 기능과 공적 위세에서 영어는 스페인어를 크게 압도한다.
다이글로시아 지역에 사는 사람이 주류 언어를 모어로 익혔을 때는 다른 언어를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되지만, 그가 비주류 언어를 모어로 익혔을 땐 주류 언어를 배워야 한다. ...
그런데 브뤼셀은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대등하게 사용되는 바일링구얼도시다. 그래서 프랑스어가 모어인 브뤼셀 시민이든 네덜란드어가 모어인 브뤼셀 시민이든 굳이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 한 통계에 따르면, 브뤼셀 시민 가운데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를 둘 다 모어처럼 쓸 수 있는 사람은 열에 하나 남짓밖에 안 된다. 제2언어를 배울 때 프랑스어 화자가 꼭 네덜란드어를 고른다거나 네덜란드어 화자가 꼭 프랑스어를 고르는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 한 언어만 알아도 브뤼셀에서 사는 데 큰 불편함이 없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두 언어가 대등하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로는 프랑스어의 위세가 더 크다. 프랑스어만을 모어로 삼고 있는 브뤼셀 시민이 절반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 이것은 브뤼셀 안의 플라망어 공동체어만이 아니라 브뤼셀 바깥의 플랑드르 사람 일반에게도 씁쓸한 일일 것이다.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브뤼셀 시민 대다수는 네덜란드어 사용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랑드르 사람들은 브뤼셀을 자신들의 '잃어버린 수도'라고 애도하곤 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브뤼셀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네덜란드어의 우위는 19세기 내내 잦아들었다. 프랑스어의 문화적, 정치적 위세에 이끌려 네덜란드어 화자들이 자발적으로 자식들의 모어를 프랑스어 쪽으로 바꾸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