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등불, 사상의 은사. 그를 부르는 말들이다. 요즘 들어 흔히 말하는 시대의 '어른'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누구한테는 그렇지 않겠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예전에 사 놓았던 대담집 생각이 났다.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언젠가는 직접 사인을 받고 싶었는데 영영 그럴수 없게 됐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돌아가신분을 느껴봐야 겠다. 

기사는 오마이뉴스의 리영희 선생의 죽음에 관한 각각 다른 신문의 태도를 보여주는 기사이다. 뭐 당영한거지만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기사를 스크랩해 놓는다.

오마이뉴스 2010.12.7  조중동, 리영희 선생 부고를 다르게 썼구나  

[주장] 부고기사에 드러난 <조선일보>의 이중성  

<중앙>, '색깔' 멀리하고 지식인의 삶 부각 
 
  
▲ 6일자 중앙일보 
ⓒ 중앙일보 PDF  리영희 

한 면을 모두 털어 전날 타계한 리영희 선생을 자세히 소개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하다"는 한명숙 전 총리 반응까지 함께 전했다. '조중동'이란 표현에서 <중앙일보>를 빼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6일자 <중앙>이 그러했다.

'양(量)'보다는 '질(質)'에서 더욱 돋보였다. 그 제목부터 '이 땅의 메마른 사상 지평 넓힌 전환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저자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별세했다"는 <조선>이나 <동아>와는 확실히 격이 다른 제목이었다.

그 내용에서도 <중앙>은 '색깔'을 멀리했다. 그보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부각하는 데 주력했다. 처음부터 "민주화운동사에서 이름 석 자로 통하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으며 "기자·교수·사회운동가 등 여러 직함이 있지만 '지식인'이란 호칭이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고 '못 박았다'.

"약한 펜으로 군사 독재의 '강한 벽'을 허무는데 앞장섰다"고 했는가 하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우상에 대한 이성적 해체를 시도했다"고, "우상 파괴자를 자임했다"고도 소개했다. 고인에 대한 평가에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 점도 돋보였다.

"대한민국을 부정했다고 보는 이들은 그를 사회주의 옹호자로 몰아세운 반면, 그를 변호하는 이들은 대한민국을 건강하게 만든 계몽주의자로 자리매김했다"고 표현했다. 특히 사회주의 진영 붕괴 당시 '변절'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선생의 행적을 평가하는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보수 진영에선 운동권 대부의 '전향'으로, 진보 진영에선 '변절'로 몰아갔다. 양측 모두 자신의 정파적 이념 투쟁에 그를 활용할 뿐, 그가 보여준 지식인의 '지적 성실성'에 대해선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 


<동아>, 부고 기사 색깔은 다소 진했지만 그래도...
 
  
▲ '다만' 인내는 거기까지였다. 부고기사가 실린 같은 날, 6일자 '횡설수설'란을 통해 이정훈 논설위원은 '종북 세력인 리영희 키즈'등 표현을 써가며 '색깔 본색'을 드러냈다 
ⓒ 동아일보 PDF  리영희 

이와 비교하면 <동아일보> 부고기사 '색깔'은 다소 진했다. "좌파 진영의 대표적인 사상가"란 표현부터 일단 눈에 띈다. "2000년 뇌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저술 활동은 자제했지만 사회 참여와 진보적 발언으로 여전히 좌파 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대목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래도 <동아> 역시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소개하는데 지면을 할애했다. 기사 첫 문장에서 고인을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학자"라고 했으며, "해직과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소신 있는 권력 비판과 사회 비평으로 일관했던 고인"이란 설명과 함께 '사상의 은사'라는 <르 몽드> 표현도 함께 전했다.
 
그런데 <중앙>과 <동아>, 위 두 기사에 공통으로 나타나지 않는 '팩트'가 있다. 선생이 잠시 <조선일보>에 몸을 담았던 약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선생이 겪었던 필화를 대표하는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사례가 바로 <조선일보> 시절의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선생은 1964년 <합동통신>에서 <조선> 정치부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제안 준비'란 기사를 썼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다. 이 필화를 두 신문 모두 전하면서도 <조선일보>란 매체 이름만 쏙 빼놓고 있다. 경쟁 매체가 부각되는 효과를 차단하기 위한 것일까? 

<조선>, 사실관계 틀리고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 없어
 
  
▲ 6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PDF  리영희 

그렇다면 세 신문 중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조선>은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최소한의, 아니 '당사자'로서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잘못 전달하고 있다.

<조선>은 선생이 "1965∼1971년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지냈다"고 전했다. 두루뭉술하고 이조차 틀린 것이다. 선생이 <합동통신>에서 <조선> 정치부로 옮긴 것이 1964년이고, <조선>을 떠나 다시 <합동통신>으로 돌아간 것이 1968년 7월이다.

선생의 '유엔 필화 기사'가 실린 것이 1964년 11월 21일 자 <조선>이었으니, 일종의 '자기 부정'이 돼버리는 셈이다. 물론 실수일 수 있다. 허나 한사코 선생에게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 쓰지 않는 것은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인다. 

<중앙>이나 아니 적어도 <동아>와 같은, 고인을 지칭하는 그 어떤 수식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다 못해 <연합>등 거의 모든 매체에서 쓴 '사상의 은사'란 표현도 찾아볼 수 없다. 그야말로 '무색무취'다. 그저 '드라이(dry)'하게 쓴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 'UN 필화‘로 신문 압수 소식 등을 전하고 있는 1964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 
ⓒ 조선일보 PDF  리영희 

그렇게만 보기 어렵다. 2004년 <조선>이 발행한 <조선일보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평가가 가장 잘 담겨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조선>은 선생의 지식인적인 풍모를 다양하게, 또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단 유별나게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평가가 눈에 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북괴'라는 말 대신 '북한'이라고 쓰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결코 '친북'이나 '종북'이란 표현은 쓰지 않는다.

또 "지면도 좁은데 왜 정치기사만 1면 머리에 가느냐? 국제 관계 기사나 사회부 기사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주장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일하는 외신부장이었다고 했고, '티티(텔레타이프라이터)'가 토해 놓는 기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정보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도 표현했다.

"정부 자료실을 뒤지며 북한과 공산권 관계 자료를 찾고, 각국 대사관을 다니며 중국의 신화통신 등 서방의 통신사와는 다른 시각에서 나온 정보도 섭렵했다. 외국 책과 잡지도 많이 읽었다. 그 당시 외신부원들은 부장이 영어와 일어로 된 책을 한 아름 사 들고 들어오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다."

선생의 부고기사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생생한 '경험담'이다. '당사자'로서 그들 스스로 기록한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의 면모다. 비록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지만, 고인에게 '지식인'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음을, 적어도 <중앙>이나 <동아>보다는 잘 알고 있을 거란 뜻이다.

선명한 이중성, <조선일보>은 어떤 신문인가
 
  
▲ <조선> 시절 리영희 선생 
ⓒ <조선일보 사람들>  리영희 

그럼에도 <조선> 부고기사는 '인색했다'. '지식인'이란 표현 하나도 아깝다는 투로 일관했다. <중앙>만큼은 아니더라도 <동아>정도의 수식어조차 선생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사와 직결된 기본 사실조차 틀리는 '무성의'도 함께 선보였다. 왜?

<동아>처럼 좌파 색깔을 입히기에는 선생의 <조선> 이력이 부담스러웠을 게다. 그렇다고 <중앙>처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수많은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것이 뻔하니까. '어제'와 '오늘' 사이에서 <조선일보>의 이중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익신문이라면 <동아>처럼 썼어야 한다. 보수신문이라면 <중앙>처럼 자유주의의 미덕을 보여줬어야 한다. 그러니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조선>은 무슨 신문인가? 적어도 보수지는 아니다. 리영희 선생 부고기사를 통해 드러나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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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망 바야르종의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기사를 스크랩하며 생각난 기사이다. 얼마전 북한의 김정은 3대 세습관련 여론 조사 내용인데, 북한 세습문제가 핵심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여론조사'가 주제이다. 신문과 뉴스에 나오는 '통계'수치와 관련된 아주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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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지 못한 민노당의 3대 세습 여론조사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는 10월18일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북한의 3대 세습 및 그와 관련된 민노당의 '중립적'인 논평을 두고 진보 진영 내부의 논란이 가라앉지 않던 시점이었다(< 시사IN > 제161호 기사).

새세상연구소는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중 54.6%가 김정은 후계 체제 구축을 용인하고 있으며, 응답자의 50.7%가 민노당의 신중한 접근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라고 밝혔다. 새세상연구소는 "대다수 국민은 남북 관계가 상호 체제를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진행되기를 바라고 있고, 민노당의 태도도 긍정적으로 본다"라고 조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의도하든 아니든, 질문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만으로도 결과가 확 달라지는 것이 여론조사다. < 시사IN > 은 조사의 신뢰성을 따져보기 위해 여론조사 질문지를 받아, 서로 다른 유력 여론조사 업체에 종사하는 전문가 세 명과 여론조사를 전공한 대학교수 한 명(강흥수 국민대 교수)에게 보내 평가를 받아봤다. '동종업계'를 평가하는 일이니만큼 현직 종사자들은 익명 처리를 요청했다.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았던 두 문항, 즉 3대 세습에 대한 평가와 민노당의 대응에 대한 평가 항목을 대상으로 했다.

먼저 3대 세습에 대한 평가를 묻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문제:김정은 후계 작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보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북한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 체제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결과

:39.4% / 30.8% / 23.8%

네 전문가는 아래와 같은 의견을 보내왔다.

A 실장
:해당 선택지 3개는 서로 의미하는 차원이 다르다. 북한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면서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일 수도 있는데, 마치 셋이 서로 배타적인 양 나눠놓은 것은 부적절하다.

B 팀장
:첫 문항은 긍정적인 태도 보기가 둘, 부정적인 태도 보기가 하나다. 만약 본 설문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아니라 각각의 세 가지 시각으로 보는 경우라면 세 보기가 모두 가치 중립적·배타적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C 대표
:1번은 북한에 비판적인 보기이고, 2·3번은 북한에 우호적인 보기다. 이럴 경우 보기의 수가 많은 쪽으로 (결정이) 기울어진다. 공직선거 관련 여론조사였다면 이처럼 대등하지 않은 보기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강흥수
(국민대 정치대학원 외래교수):언뜻 보면 '북한이 스스로 결정'이라는 보기가 중립점이고 그 좌우에 반대와 찬성 보기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반대함' 보기 하나에 '반대하지 않음' 보기가 두 개로 불균형이다.

네 명이 입을 모아 보기 구성이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민노당 새세상연구소는 '북한이 스스로 결정할 일'과 '체제가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결정' 두 응답을 합쳐 '54.6%가 3대 세습을 용인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다음으로 3대 세습에 대응하는 민노당의 태도를 평가하는 항목은 다음과 같다. 
 

  
 

문제:민주노동당은 정부의 허가를 받아 북한의 조선사회민주당과 공식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러한 정당 교류와 남북 화해를 고려하여 북한의 후계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기

:남북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므로 바람직한 태도이다 / 남북 관계가 더 악화되더라도 공개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결과

:50.7% / 35.1%

전문가 네 명은 아래와 같은 답을 보내왔다.

A 실장
:질문에서 과도한 정보 제공으로 응답자가 독립적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한다. 선택지에서 '신중하게 접근해야'라고 한 것은 응답자가 이른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답'을 고르도록 유도한다. 남북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늘 옳으니만큼 그 보기를 고를 수밖에 없도록 했다.

B 팀장
:질문은 민노당의 현재 입장이나 상황에 대한 사실만을 제시하여 그 입장에서 응답할 우려가 있다. 두 번째 선택지에서 '남북 관계가 악화되더라도'라는 문구는 부정 상황이어서 응답자가 선택하기를 주저할 수 있다.

C 대표
:질문에 '허가' '공식 교류' '남북 화해'라는 용어가 응답자로 하여금 이미 첫 번째 보기를 선택하도록 절반은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보기 역시 '신중·바람직'이라는 표현과 '악화·비판'이라는 표현을 대조시켜 전자 쪽으로 유도한다.

강흥수
:질문 중 '정부의 허가를 받아' '공식 교류' '남북 화해를 고려하여'와 같은 표현은 민노당의 방침이나 언행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깔아준다. 사안을 민노당의 입장에서만 보도록 프레이밍한다.

역시 네 명 모두 보기가 적절하지 않게 구성되었다는 의견이었다. 질문지의 유도 효과를 지적하는 의견이 많았고, 보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판단했다.

이번 조사에 대한 총평도 부탁해보았다.

A 실장
:특정 방향을 노리는 의도가 보인다. 여론조사의 속성을 잘 알수록 이런 시도를 하곤 한다. 진보적 조직에서 오히려 그럴 때가 많다.

B 팀장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조사 자체가 대단히 무리가 있거나 큰 오류를 가졌다고 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

C 대표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논거를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기획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의뢰처보다 조사업체인 리서치앤리서치가 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의뢰처를 위해서라도 설문 구성을 바로잡아주어야 했다.

강흥수
:이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의 의견을 걸러내고, 의견의 강도나 주목도도 잡아내야 한다. '무관심층'의 응답이 많을수록 이번 질문지와 같은 프레이밍에 잘 걸려든다. 3대 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대응 문제를 관심 갖는 시민이 사실 얼마나 되겠나.  

문항의 적절성에 대해 조사업체인 리서치앤리서치는 "질문지는 새세상연구소가 보내왔고, 내부 토론을 거쳐 큰 문제는 없다고 판단해 미세 조정만 했다"라고 밝혔다.

여론조사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결과를 뽑아내도록 '마사지'를 한 질문지는 정치권에서 종종 눈에 띈다. 단어 한두 개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바꾼다거나, 보기 제시 순서를 유리하게 정한다거나, 핵심 질문에 앞서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는 질문을 먼저 한다거나 하는 등 방법도 무척 다양하다. 특히 1~2% 포인트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기 일쑤인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서는, 사소한 문구 하나 때문에 협상이 완전히 엎어지기도 한다. 여론조사 경험이 많은 선거통들이라면 새로울 것이 없는 얘기다.

하지만 이번 새세상연구소의 조사 문항은 이런 관행을 '살짝' 넘어섰다는 점에서 논란을 낳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한 기획통은 설문 문항을 두고 "그거 '선수들'이 보면 한눈에 무리수인 거 아는데, 왜 엉터리 조사를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시사INLive |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 입력 2010.10.2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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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KBS의 어떤 시사프로그램에서 동성애자들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그런데 TV를 보며 내내 불편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질병'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향'한 예전 동성애자들을 인터뷰하며 '니들도 이들처럼'될 수 있다. '노력'해라 뭐 이딴식이다. 참고로 난 절대적인 '이성애자'이다. 그러나 '동성애' 인정론자이기도 하다. 그들이나 나나 같은 사람이다. 그 프로에서 동성애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것이 나오는데 아마추어인 내가 봐도 어딘지 의심스러운 통계였다. 특히 표본추출에서. 만 15세 이상 15,000명을 인터넷으로 설문했다는데, 의심스러웠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뉴스와 신문의 내용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다. '신문에 나와', '뉴스에서 그렇게 나오던데'하고. 이 말이 참이되기 위해서는 그 '신문'과 그 '뉴스'가 진실만을 옳은 내용만을 전달할 경우에만 해당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절대로. 아래 책도 그러겠지만 학교의 교사의 큰 책무중 하나가 봐로 이런 문제들을 현실의 모습을 옳바르게 알려주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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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2.4  당신 머릿속에 ‘촘스키’를 키워라 

올바른 현실인식을 방해하는
정보의 조작과 왜곡 ‘분별법’

광고 속 오류·통계의 맹점 등
미디어 통한 ‘세뇌’ 사례 탐구 

붉은색 사과를 본 사람은, 그 사과를 비추는 조명을 바꿀 경우 사과 빛깔이 달라지는데도 여전히 붉다고 생각한다. 신경학자 테런스 하인스의 실험이다. 사과를 상자 안에 넣고 그것이 사과라는 걸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일부분만 보이게 조그만 구멍을 뚫어 피실험자에게 보여준다. 그런 뒤 그 사과를 비추는 조명을 바꾸고 다시 그것을 보여주면 피실험자는 그걸 다른 색으로 인식한다. 상자 속의 사과가 사과인 줄 몰랐기 때문에 ‘사과는 붉은색’이라는 배경지식(고정관념)에 좌우되지 않은 것이다. ‘지각의 항상성’이라고 한다. 이는 지각이 구성작용의 결과란 것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봤다고 믿는 ‘지각의 왜곡’도 일어난다.

연평도에 간 집권당 대표가 보온병 잔해를 북이 쏜 포탄 껍질로 착각하고 장성 출신의 측근이 그 착각을 더욱 희극적으로 만든 그럴듯한 설명까지 덧붙인 것도 이 지각의 구성작용 탓이라고 봐야 할까. 환상과 착시의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현상인가. 아니면 관찰된 객관적 사실과 자신의 신념이 충돌하는 모순으로 인한 불안과 거북함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인지 부조화’ 탓일까. 그 사건을 특정 방송의 의도된 연출 탓으로 몰아간 신문기사는 전형적인 ‘연막치기’인가 물타기인가.  

나폴레옹이 말한다. “주세페, 저 병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나? 터무니없는 소리만 해대는데.” “폐하, 저 병사를 장군으로 승진시키십시오. 그럼 그의 말이 흠잡을 데 없이 들리실 겁니다.” 이건 ‘권위에 호소하기’의 역설이다. 동료 피실험자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고압 전류인줄 알면서도 연구원의 지시에 따라 전압을 계속 높여가는 ‘밀그램의 실험’도 잘 알려진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 사례다.  

‘애시의 실험’이라는 것도 있다. 카드에 그려진 같은 길이의 직선을 맞히는 그 실험에서 다수의 실험 참가자들이 실험 기획자와 사전에 몰래 약속한 대로 전혀 엉뚱한 답을 내놓자 이게 짜고 하는 것인 줄 모르는 피실험자는 눈치를 보다가 뻔한 정답을 버리고 그들 다수를 따라간다.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 인간의 뇌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때부터 ‘모르겠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라는 말을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얘기도 상통한다. 박사학위는 받는 사람의 뇌에만 이상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뇌도 바꿔버린다. 똑같은 말도 박사학위라는 권위의 세례를 받기 전과 받은 뒤에 전혀 다르게 들리게 만드니까. 
  
 
» 노엄 촘스키(1928~ ). 에드워드 허먼과 미디어의 프로파간다 모델을 만들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군중에 호소하기’도 있다. 예컨대 “×를 마셔보세요.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니까!”, “자동차 Y. 설마 수백만의 운전자가 잘못 판단했겠습니까?” 같은 광고문구들이 대표적이다. 그 맥주나 자동차가 가장 많이 팔리고 있다는 게 그것들의 품질이 가장 좋다는 걸 보장하진 않는다. 그 둘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왜 ××일보를 가장 많이 볼까요?”라는 광고문구도 다르지 않다. 부분이 옳으면 전체가 옳다고 주장하는 ‘구성의 오류’, 그 반대로 전체가 옳으면 부분도 옳다고 주장하는 ‘분할의 오류’도 있다.

대안적 가치를 추구해온 캐나다 퀘벡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노르망 바야르종의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은 이런 흥미로운 사례들을 무수히 제시한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은 신비주의나 초과학, 뉴에이지 등이 횡행하고 학계와 지식계가 성찰과 판단력과 합리성을 잃어버린 채 추락해버린 현실이 야기하는 인식론적 문제, 그리고 정치적인 문제를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민주시민으로서 이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하게, 또 다양한 방향에서 제공받고 있을까? …많은 사람이 걱정하듯이, 나도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린 언론의 실상이 걱정스럽다. 이처럼 언론이 시장지향의 경향을 띠는 것도 걱정스럽지만, 어떻게든 우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보 폭탄과 말 폭탄을 쏟아부으며 수행하고 있는 프로파간다적 역할도 무척 우려된다.”

그는 “고객중심의 사고방식과 경제지상주의”가 판치는 교육계도 참여민주주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심각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교육’을 ‘세뇌’로 바꿔 읽는 것이 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노엄 촘스키의 얘기에 동의한다. 이 책은 이런 현실에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로 맞설 수 있도록 해주는 기초적인 생각의 무기, 성찰의 수단을 제공하겠다는 의도로 씌었다. 원래 제목 ‘Petit Cours D’Autodefense Intellectuelle’은 ‘지적인 자기방어 능력을 키우기 위한 단기 코스’ 정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비판적 사고 훈련 입문서다. 따라서 어렵지 않다. 언어, 숫자, 경험, 과학, 미디어 등 5개의 장으로 나눠 요령있게 펼치는 악성 프로파간다 깨부수기 훈련과정은 흡인력이 있다.

통계상의 표준편차를 설명한 뒤 이런 예를 든다. 1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도는 53%였는데, 3월의 같은 여론조사에서는 56%였다. 이를 토대로 대통령 지지율이 올라갔다고 보도해도 문제가 없을까? 이 조사의 정확도가 95%, 표준오차 범위 ±5%라면 그 보도는 거짓일 수 있다. 이 표준오차 범위라면 1월 지지율은 48~58% 사이고 3월은 51~61% 사이다. 따라서 1월에 58%였던 지지율이 3월엔 51%로 추락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숫자 공포증을 치유하는 10가지 비법’에는 이런 얘기도 있다. 지난해 ㄱ시와 ㄴ시에서 각각 50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5년 전엔 ㄱ시에 42건, ㄴ시에선 29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5년간 두 도시 살인사건 증가율을 백분율로 표시하면 ㄱ시는 19%, ㄴ시는 72%다. 따라서 ㄱ시 쪽 치안이 더 나을까?

지은이는 신문을 볼 때 이것만 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ㄱ시는 지난해 인구가 60만이었고 5년 전에는 55만이었다. ㄴ시는 지난해 80만, 5년 전에는 45만이었다. 따라서 인구증가속도까지 고려한 지난해 살인사건 발생률은 ㄱ시가 10만명당 8.33명, ㄴ시가 10만명당 6.25명이었다. 따라서 ㄴ시가 오히려 더 안전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까지만 봐서도 안 된다. 5년 전 두 도시 살인사건 발생률을 마찬가지 인구비례로 계산하면 ㄱ시는 10만명당 7.64명, ㄴ시는 10만명당 6.44명이다. 따라서 5년 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ㄱ시는 증가율이 높아졌고 ㄴ시는 낮아졌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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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도 나름 조금씩 그리고 비논리적이고 문제적이긴 하지만 글을 쓰려 노력한다. 책을 읽은 느낌을 밖에서 보는 여러가지 현상들을, 느낌을 그리고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 아들과의 일들에 대해 쓰려 노력하고 있다.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생각은 많지만 왜 그 생각들이 글로는 잘 써지질 않는걸까하는 의문과 이제까지 나이 먹으면서 이 정도밖에 안되는가 하는 자괴심이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라는 말처럼, 나도 이제는 조금 더 정교해졌으면 한다. 정교해졌으면 그때는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으면 한다. 최소한 내 아들이 철이 들기 전까지 그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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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2.6  여기가 로두스다⑶ : 글쓰기

만약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교하게 한다”는 말이 맞다면, 우리네 학교는 왜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서와 토론뿐만 아니라 글쓰기를 거의 하지 않는 곳이 우리 학교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생들을 풍요롭게도, 정교하게도 형성하지 않는다면, 학교는 왜 존재할까? 대학이나 기업이 요구하는 ‘학생 줄세우기’를 위해서인가?  

얼마 전 모든 학생들에게 신분 석차를 매기는 수능시험이 지났는데, 초등학교부터 12년 동안 정규교육을 받은 고3 학생들 중 대학이 요구하는 자기소개서를 스스로 쓰는 학생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우리 학교의 참담한 실상이다. 다른 글도 아닌 자기소개서를 말이다. 이 엽기적인 현실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육부 관료들이나 학교 관리자들, 교사들 또한 엽기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우리 학생들을 자기 언어조차 갖지 못한, 도무지 자기 생각이 없는 존재로 만들고 있는 이 ‘경쟁의 아수라’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잘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따라, 우리는 사람과 사회에 관해 공부한다. 내가 속한 사회에서 주체적 자아로 살기 위해서다. 마치 “고래는 포유동물이다”라는 명제로부터 고래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고래와 포유동물에 관해 공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우리가 국어를 비롯해 역사, 지리, 사회, 경제, 윤리, 철학 등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자명한데, 그런 공부의 일상에서 필수적인 게 글쓰기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은 정답을 요구하는 정밀과학이 아니라, 사고력, 논리력, 인식능력과 감수성을 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 글쓰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곧 인문사회과학 공부가 사라졌다는 것에서 멀지 않다.

글쓰기는 각자가 자기 생각을 정리·형성하는 과정으로서 주체성과 다양성의 토대가 된다면, 주입식 암기는 학생 모두에게 같은 내용을 주입·숙지하도록 하는 과정으로서 기존 질서와 체제에 대한 자발적 복종과 획일성을 낳는다. 우리 사회에서 세상을 보는 눈을 뜨는 소수의 사람들이 학교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배를 통해 그런 계기를 갖는 것도, 글쓰기가 사라진 것으로 알 수 있는, 학교에서 인문사회과학을 죽인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군국주의 일제 치하의 제도교육이 지배세력이 강제한 이념과 의식을 주입·암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민주공화국의 공교육에서는 글쓰기를 살렸어야 마땅했으나 일제 부역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위에 대학 서열화에 학문을 적응시키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사실 글쓰기는 자기표현의 한 방식으로서 사회적 존재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질 수 있는 본원적 욕구의 하나다. 그런데 대부분은 ‘나중에’ 쓴다고 말한다. 그 나중은 끝까지 나중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나중에 쓴다고 할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쓸 일이다. 또 글을 최종적으로 나오게 하는 신체부위가 엉덩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우리 학생들이 글쓰기에 공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생각(주장·견해)을 써야 함에도 정답을 찾으려 애쓰기 때문이며(없는 정답을 찾으려 하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글쓰기 훈련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 그것은 주체적 자아 형성에서 빠질 수 없는 과정이다. 이른바 국격을 높이고 싶은가. 그 길은 먼 데 있지 않다. 모든 학교에서 암기 대신 글쓰기를 허하라. 국격을 넘어 문화사회로의 발돋움이 바로 거기에 있다. (이 글을 쓰는 중에 리영희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사상의 은사로 불리는 선생은 나에겐 감히 덧붙인다면 루쉰, 사르트르와 함께 글쓰기의 스승이었다. 삼가 선생의 명복을 빈다.)

홍세화 기획위원 hongsh@hani.co.kr  

ps : 내가 또는 사람들이 항상 마음속으로라도 '글쓰기'에 대한 욕구를 갖는 것이 "사회적 존재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질 수 있는 본원적 욕구의 하나"라고 하는 글에서 나의 욕구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ps : 퍼뜩 생각나는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이다. 집에 있는 책도 있으니 기회되면 찬찬히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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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특히나 보수주의자들의 '수사적무기(rhetoric of reaction)'를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로 정리한 부분은 탁월하다. 나도 때론 내 심정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들을 상대방에게(보수적인) 어떻게 설득하며, 왜 내가 설득당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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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1.27  결정적 순간 보수는 말한다 “관둬라, 소용없다”  

역효과·무용·위험 강조하며 개혁 가로막는 보수의 논리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닮은꼴’


보수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앨버트 허시먼(1915~)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는 예컨대 ‘복지국가’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 논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시장개입에 부정적인 경제학적 시각에서 실업자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의 일부를 돌리는 ‘이전지급’이 야기하는 갖가지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그런 이전지급 방식들은 ‘나태와 타락’을 조장하고, 의존을 부추기고, 더 건설적인 국가의 다른 부양제도들을 파괴해서,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것은 허시먼이 이 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이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들이대는 전형적인 ‘수사적 무기’(rhetoric of reaction, 반동의 수사학)로 든 세 가지 명제 가운데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다.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환경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 추천자 우석훈은 이를 “너희들이 뭘 해봤자 역효과만 난다” “그래봐야 너만 더 힘들어진다”는 말로 요약하면서, 차라리 감세가 경제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던 이명박 대선 공약,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며 이를 ‘줄푸세’라 불렀던 박근혜 경제공약이 이 명제 위에 선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둘째 명제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무용 명제’(futility thesis)다. 셋째는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에 얻어낸 소중한 성취들마저 오히려 위험에 빠뜨린다”고 주장하는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봤자 소용없어!”라는 얘기다.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는 인간과 사회의 활동 목적을 보는 관점이 거의 정반대다. 역효과 명제는 인간 세계를 매우 변덕스럽다고 보고 그 때문에 변화 시도가 뜻밖의 반작용을 낳는다고 보는 데 비해 무용 명제는 세계가 고도로 조직화돼 있고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그것을 고치려는 건 소용없는 짓이라고 본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무용 명제가 역효과 명제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역효과가 나더라도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세계와 개입의 여지조차 없는 세계의 차이. 무용 명제는 마르크스주의 사조에 맞서는 무기였고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비판도 무용론 중심으로 전개됐다. 
  
 
» 앨버트 허시먼(1915~) 
 
위험 명제를 들이대는 쪽은 복지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왕에 얻어낸 성취마저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1944년에 나온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 근거를 제공한 이 명제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직접적인 동의 위에 구축돼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회구성체는 소수단위가 돼야 한다. 그런데 복지를 위한 국가의 역할 증대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결국 강제력이 발동되고 예속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를 가장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는 게 복지국가라는 논리다.

처음엔 미약했던 하이에크 주장의 설득력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일어난 68혁명, 학생운동과 베트남전쟁, 유류파동(오일 쇼크), 스태그플레이션 등을 거치면서 사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하이에크와 위험 명제 옹호 집단이 강력하게 대두한 것이다. 이 시기는 또한 팍스 아메리카나가 상징하는 앵글로색슨(미국과 영연방) 주도하의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장기호황이 끝나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월스트리트와 런던 시티 등의 자본가들은 이윤율 저하에 따른 축적 위기를 금융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통해 헤쳐나가려 했고 마거릿 대처의 영국 보수당 정권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공화당 정권이 앞장을 섰다.

자유주의자 허시먼이 1985년부터 포드 재단에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가 다룬 주제를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런 전환기였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의기양양하게 세를 불려가며 사회보장 정책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던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정치적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 행태를 보며 당혹과 불쾌감 속에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며 탄식했다. “과잉복지는 일 안 하고 술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 만든다”거나 ‘복지’를 얘기한다는 이유로 보수정당 리더를 그 정당원들이 ‘빨갱이’라 비난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연상시킨다.
포드 재단은 그런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위기’ 대응책을 마련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때 영국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이 1949년에 행한 서유럽의 ‘시민권 발전’에 관한 유명한 강의를 토대로 그가 말한 ‘세 가지 진보적 추진력’ 곧 프랑스 인권선언이 대표하는 18세기의 시민적 시민권, 보통선거권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정치적 시민권, 20세기 복지국가의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허시먼은 세 가지 진보적 추진력들 모두가 언제나 가공할 힘을 지닌 역추진력의 이데올로기와 맞닥뜨려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 “그런 역추진력들이, 계획하고 있던 진보적 프로그램들을 좌절시키고 때로는 수많은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커다란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복지국가가 지금까지 겪은 격렬한 반발은 18세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주장이나 19세기 정치참여의 확대로 인한 맹렬한 공격과 갈등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편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진보와 개혁을 저지하려던 세력이 18세기 프랑스대혁명 이후 20세기 복지국가 논쟁에 이르는 시기에 동원한 보수주의 담론과 주장, 수사법을 좌우한 ‘논쟁의 규범’들을 역사적·분석적으로 살핀다. 바로 그 가공할 역추진력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역효과·무용·위험 명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등과 함께 동아시아국가들 경제성장 기적에 기여한 “다른 종류의 경제학자들” 중 한 명으로 꼽은 허시먼이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91년이다. 레이건 정권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를 이어받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쟁’을 지휘하던 당시와 정치적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횡행하는 지금의 한국 사정이 닮은꼴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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