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흥미로운 책이다. 특히나 보수주의자들의 '수사적무기(rhetoric of reaction)'를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로 정리한 부분은 탁월하다. 나도 때론 내 심정으로는 이해가 가는 부분들을 상대방에게(보수적인) 어떻게 설득하며, 왜 내가 설득당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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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11.27  결정적 순간 보수는 말한다 “관둬라, 소용없다”  

역효과·무용·위험 강조하며 개혁 가로막는 보수의 논리
신자유주의 경제가 지배하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닮은꼴’


보수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앨버트 허시먼(1915~)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는 예컨대 ‘복지국가’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 논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시장개입에 부정적인 경제학적 시각에서 실업자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의 일부를 돌리는 ‘이전지급’이 야기하는 갖가지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그런 이전지급 방식들은 ‘나태와 타락’을 조장하고, 의존을 부추기고, 더 건설적인 국가의 다른 부양제도들을 파괴해서,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든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것은 허시먼이 이 책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개혁이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들이대는 전형적인 ‘수사적 무기’(rhetoric of reaction, 반동의 수사학)로 든 세 가지 명제 가운데 ‘역효과 명제’(perversity thesis)다. “정치·사회·경제 질서의 일부를 향상시키려는 어떤 의도적인 행동도 행위자가 개선하려는 환경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 추천자 우석훈은 이를 “너희들이 뭘 해봤자 역효과만 난다” “그래봐야 너만 더 힘들어진다”는 말로 요약하면서, 차라리 감세가 경제에 더 도움이 된다고 했던 이명박 대선 공약, 세금과 정부 규모를 줄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자며 이를 ‘줄푸세’라 불렀던 박근혜 경제공약이 이 명제 위에 선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둘째 명제는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노력은 효과가 없으며, 그 노력들은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무용 명제’(futility thesis)다. 셋째는 “변화나 개혁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변화나 개혁은 이전에 얻어낸 소중한 성취들마저 오히려 위험에 빠뜨린다”고 주장하는 ‘위험 명제’(jeopardy thesis)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해봤자 소용없어!”라는 얘기다.

역효과 명제와 무용 명제는 인간과 사회의 활동 목적을 보는 관점이 거의 정반대다. 역효과 명제는 인간 세계를 매우 변덕스럽다고 보고 그 때문에 변화 시도가 뜻밖의 반작용을 낳는다고 보는 데 비해 무용 명제는 세계가 고도로 조직화돼 있고 내재하는 법칙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그것을 고치려는 건 소용없는 짓이라고 본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무용 명제가 역효과 명제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역효과가 나더라도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세계와 개입의 여지조차 없는 세계의 차이. 무용 명제는 마르크스주의 사조에 맞서는 무기였고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비판도 무용론 중심으로 전개됐다. 
  
 
» 앨버트 허시먼(1915~) 
 
위험 명제를 들이대는 쪽은 복지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기왕에 얻어낸 성취마저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1944년에 나온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이 근거를 제공한 이 명제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구성원들의 직접적인 동의 위에 구축돼야 하는데 그러자면 사회구성체는 소수단위가 돼야 한다. 그런데 복지를 위한 국가의 역할 증대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며 결국 강제력이 발동되고 예속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유를 가장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는 게 복지국가라는 논리다.

처음엔 미약했던 하이에크 주장의 설득력은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일어난 68혁명, 학생운동과 베트남전쟁, 유류파동(오일 쇼크), 스태그플레이션 등을 거치면서 사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하이에크와 위험 명제 옹호 집단이 강력하게 대두한 것이다. 이 시기는 또한 팍스 아메리카나가 상징하는 앵글로색슨(미국과 영연방) 주도하의 2차대전 이후 자본주의 장기호황이 끝나가던 시기와 일치한다. 월스트리트와 런던 시티 등의 자본가들은 이윤율 저하에 따른 축적 위기를 금융 중심의 신자유주의를 통해 헤쳐나가려 했고 마거릿 대처의 영국 보수당 정권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공화당 정권이 앞장을 섰다.

자유주의자 허시먼이 1985년부터 포드 재단에서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가 다룬 주제를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런 전환기였다. 미국 자유주의자들은 당시 의기양양하게 세를 불려가며 사회보장 정책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가던 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정치적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 행태를 보며 당혹과 불쾌감 속에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며 탄식했다. “과잉복지는 일 안 하고 술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 만든다”거나 ‘복지’를 얘기한다는 이유로 보수정당 리더를 그 정당원들이 ‘빨갱이’라 비난하는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연상시킨다.
포드 재단은 그런 상황에서 ‘복지국가의 위기’ 대응책을 마련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그때 영국 사회학자 토머스 마셜이 1949년에 행한 서유럽의 ‘시민권 발전’에 관한 유명한 강의를 토대로 그가 말한 ‘세 가지 진보적 추진력’ 곧 프랑스 인권선언이 대표하는 18세기의 시민적 시민권, 보통선거권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정치적 시민권, 20세기 복지국가의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연구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허시먼은 세 가지 진보적 추진력들 모두가 언제나 가공할 힘을 지닌 역추진력의 이데올로기와 맞닥뜨려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 “그런 역추진력들이, 계획하고 있던 진보적 프로그램들을 좌절시키고 때로는 수많은 인간의 희생과 불행을 만들어낸 커다란 사회적·정치적 갈등의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복지국가가 지금까지 겪은 격렬한 반발은 18세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주장이나 19세기 정치참여의 확대로 인한 맹렬한 공격과 갈등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편이다.”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는 진보와 개혁을 저지하려던 세력이 18세기 프랑스대혁명 이후 20세기 복지국가 논쟁에 이르는 시기에 동원한 보수주의 담론과 주장, 수사법을 좌우한 ‘논쟁의 규범’들을 역사적·분석적으로 살핀다. 바로 그 가공할 역추진력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역효과·무용·위험 명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장하준 교수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리스트, 조지프 슘페터, 니컬러스 칼도 등과 함께 동아시아국가들 경제성장 기적에 기여한 “다른 종류의 경제학자들” 중 한 명으로 꼽은 허시먼이 이 책을 출간한 것은 1991년이다. 레이건 정권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를 이어받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걸프전쟁’을 지휘하던 당시와 정치적 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횡행하는 지금의 한국 사정이 닮은꼴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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