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6.14  23:44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오후에 회의가 있어 밥도 먹지 못하고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회의를 했다. 내가 출제한 문제와 다른 선생님들이 출제한 문제를 가지고 상호 검토하는 회의였다. 나를 제외한 다른 2분 선생님들은 나이도 있으시고 경력도 워낙 풍부한 선생님들이었다. 뭐, 결론적으로 애기하면 엄청나게 깨졌다. 내가 수정해야할 분량이 엄청나게 생겼다. 그런데, 놀라웠다. 나의 문제에 대해 이러저러한 애기를 하는 선생님들의 의견에 대해 내가 메모를 하며 "네. 네, 알겠습니다. 수정해보겠습니다."라며 애기를 하고 있는게 아닌가. 내가 보기에도 이런 내 자신의 모습이 너무 어색(?)하며 사실 조금은 대견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창피한 일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무지 '거만'했다. 조금 순화시켜 '자신만만'했다. 다른 부분이 아닌 내 '전공'분야에 대해서. 그런데 공부를 조금씩 하고 여러 내공있는 사람들을 만날수록 내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들어난 나의 '부족'함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그런 부족함을 일깨워준 이들에게 반감이 들었던게 사실이다. 온전히 나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오늘 좀 우울했다. 나의 마지막 남아있는 자존심의 마지노선이 무너진듯 하여... 생각해보니 난 욕심도 많고 약간의 허영심도 있으며 야망이라는 것도 조금은 있는듯 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생각에 나의 기본적인 스펙이, 학벌이 미치지 못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난 지방 국립대 출신이다.) 

재수를 했다. 2교시 수리탐구 영역 시험 답안지 작성때 실수를 해서 밀려서 마킹을 했다.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겠지. 내내 아쉬운 마음이 컸다. 무려 10년도 지난 지금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제대로 시험만 봤어도...

내가 이렇게 일을 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서울대 출신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고려대. 그러다 보니 나의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발령받고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시기에 '학벌'문제에 유독 관심이 많았었다.(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라든가 현재의 와이프도 이 문제를 가지고 언쟁을 한 경우가 많았다. 둘 다 나의 '학벌'문제에 대한 생각에 대해 '콤플렉스'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여자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물론 글을 쓰는 지금도 우리나라의 '학벌'문제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5년 전 나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의 지향성에는 많은 변화가 발생햇다. 오늘 이렇게 글을 쓰고 싶은 욕구의 발생 가능성도 그 '지향성'의 변화에 대한 나의 인식(깨달음)에 있는것 같다.

일정부분 '콤플렉스'였던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다른 면은 보지 않은채 '콤플렉스'때문이야 라고 단정지어버리는 건. 잔인한 언행이다. 지금이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듯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 그럴수 없었다. 콤플렉스를 나의 치부를 치유하는 데에는 나름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듯이, 나에게도 몇 년의 시간과 많은 사건이 필요했다.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여지는 것 같다. 학생들이 '오늘 하루만 놀자'라는 선택의 순간에 있듯이 나 또한 그렇다. 특히 술을 먹은 상태에서는 많은 감정적 출렁임에 나도 어쩔수 없는 상황에 내던져지곤 한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오늘도. 그런데, 캔 맥주 하나와 춥파숩스 오렌지 맛 하나가 유혹의 바다에서 구해주었다.  

  



밤 늦은 야심한 시각. 귀를 감싸고 있는 헤드폰에는 말러의 교향곡 5번 5악장이 여유있게 흘러나오고 있고, 입에는 막대사탕 하나가 사치스럽게 나의 입안에서 혀와 놀고 있다. 또한 나의 오른손에는 볼펜이 나의 머리와 가슴의 애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틈틈이 나의 목을 적셔주는 맥주도 옆에 있다. 이 모든 나의 친구들은 내가 부르면 언제든 나에게 달려오는 놈들이다. 바쁘다고 너무 늦었다고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 부르면 언제나 '콜'하는 나의 영원한 친구들이다. 그 친구 덕분에 오늘도 기분좋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ps : 그래도 진짜 친구가 보고싶은건 어쩔 수 없다.

ps2 : 오랜만이다. 캔맥주 + 춥파춥스. 찰떡궁합이다, 나에게는. 남들은 이 애기하면 기겁하더라. ㅋㅋ

ps3 : 글을 쓰기 시작한지 30분이 지났다. 맥주 1,800원, 춥팝춥스 200원. 글을 다 쓴 지금도 춥파춥스의 절반이 나의 입안에 있다. 너무 행복하다, 웃기다. 200원짜리 행복.

ps4 : 집에 가서 맥주 한 캔을 더 깔까? 지금 입에 남아 있는 춥파춥스를 안주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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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6-24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빛눈물님 ~
캔맥주 + 츄파춥스가 찰떡궁합이군요 +_+ 한번 실험해봐야겠습니다. 좀 아니다 싶음 와서 떼쓰는 댓글 달지도 몰라요 ~ ㅎ

햇빛눈물 2011-06-27 16:22   좋아요 0 | URL
ㅋㅋ '떼쓰는 댓글'도 바람결님의 것이라면 환영입니다. 하하~~

마녀고양이 2011-06-27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주와 츄파춥스의 궁합.. 좋은데요.

학력 컴플렉스, 저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있구요.
사회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대학 갈 사람만 가면 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제 문제만 되면 가혹한 이중 잣대를 들이밀게 됩니다.
제 한계라 할 수 있고, 완화시켜야 할 부분이이고 합니다만,
없애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이 가끔 제 추동력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콜하면 오는 친구들이라니, 너무 부럽습니다.

햇빛눈물 2011-06-27 16:23   좋아요 0 | URL
때론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현실의 인간들에게 긍정적인 추동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마고님처럼 이 부정적인 것을 없애버릴 생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