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05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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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그는 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되었나?

   1936년 7월, 스페인에서 공화파와 파시스트 간에 내전이 발발하자 전세계 젊은이들은 스페인으로 향합니다. 그 중에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조지 오웰과 헤밍웨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왜, 특히 헤밍웨이는 왜 그 먼 곳까지 달려갔던 것일까요?

 

   스페인 북부에 있는 '론다'는 아름다운 협곡 위에 세워진 마을입니다.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마을을 찾는데, 바로 120m 협곡 위에 걸쳐져 있는 '누에보 다리'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문학가들도 이 곳을 사랑했습니다. 시인 릴케는 "거대한 절벽이 등에 작은 마을을 지고 있고, 뜨거운 열기에 마을은 더 하얘진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헤밍웨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이 곳을 사랑했는지는, 이 다리 끝 산책로에 붙어있는 '헤밍웨이 길(Paseo de E Hemingway)'이라는 이름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곳을 배경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이곳은 마냥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이 협곡은 인민전선에 대항한 민족주의자들이 처형되었던 장소이며, 다리 한 가운데에는 그들을 가둔 감옥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것을 소설로 남겨 내전의 참상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고나면 스페인까지 달려가야만 했던 헤밍웨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이 이야기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지 1년 정도 지난 1937년 5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부터 화요일 오전까지, 단 며칠 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 몬태나 소재의 대학에서 스페인어 강사로 일하고 있던 로버트 조던은 내전이 발발하자 1년동안 휴가를 내고 국제여단 소속으로 참가합니다. 그는 폭파전문가로, 공화파의 공격이 개시된 직후에 다리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 협곡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협곡에는 원래 게릴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몇 팀 있었는데, 그는 이 게릴라들의 도움을 얻어 다리를 폭파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그의 임무는 성공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릴라 수도 적은데다가 폭파 후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루트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공화파의 공격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는 점.

 

   "그럼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압니까?"  "공격은 정규 사단의 전 병력을 동원하여 시작할 걸세. 사전 작업으로 공중 폭격이 있을 거야. 자네, 귀머거리는 아니지?"

   "그럼 비행기가 폭격을 개시하면 공격이 시작되는 것이로군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봐도 좋아. 이번에는 내가 공격하는 거니까."

   "알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든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로버트 조던이 말했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일세. 이 작전이 마음에 안 들면 지금 말하게. 그리고 해낼 자신이 없어도 지금 말하게."

   "하겠습니다. 잘할 자신은 있습니다."

   "그 다리 위로는 아무것도 올라오면 안 된다는 것, 그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조건일세. 그리고 나는 그걸 사전에 알아야겠네." 골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시시콜콜 지시하는 것을 싫어하네."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19~20쪽

 

   하지만 그 작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뻔히 알면서도 불가능한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걸까? (……)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271쪽

 

   자신은 사전에 확실하게 알아야겠다고 하면서 조던에게는 정확하게 공격 개시일을 알려주지 않는 상관 골스. 다른 어려움은 어떻게든 극복해 볼 수 있을테지만, 이건 정말 곤란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것을 사전에 알 수 있을까요?

 

   아무튼 조던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게릴라들과 계획을 짭니다. 그 사이 게릴라군 대장인 파블로와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다른 게릴라군이 전멸하는 일을 당하기도 하고, 게릴라군에 의해 구출되어 지금은 게릴라군과 함께 지내고 있는 마리아와도 사랑에 빠져 평생 함께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는 자신의 임무로부터 도망쳐 마리아와의 평범한 일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자신의 임무만을 생각합니다. 결국 조던은 다리를 성공적(!)으로 폭파하지만, 그 다리와 함께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이 전쟁이 끝난 뒤에 달리 할 일이 있었다. 이 전쟁에 참가한 것은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사랑했고 또 공화국을 믿었기 때문이다. (…) 그럼 네 정치적 신념은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그런 신념이 없지.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273쪽

 

   대체 이 공격이 왜 필요한지조차 나는 모르지 않나.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권, 141쪽

   다시 맨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헤밍웨이 아니 로버트 조던은 왜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스페인까지 달려왔을까요? 사실 그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목숨을 건 다리 폭파를 왜 해야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상관인 골스는 아예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할 일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혹자들은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정치적인 행동 동기가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목숨을 걸고, 심지어 사랑까지 포기하면서 수행해야 했던 임무라면 강력한 동기나 정치적 신념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공에게는 그런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정치적인 인물 혹은 지도자가 아닌 이상, 우리같은 대부분의 개인들에게는 '전쟁'이란 그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오는게 아닐까요? 뚜렷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왜 이 작전을 수행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나라를 위해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

 

   저놈들과 내가 다른 것은 서로 다른 명령을 받아 놓고 있다는 것뿐이야. 저놈들은 파시스트가 아니야. 그런 명칭으로 부르기만 할 뿐 실제로는 아닌 거야. 저놈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녀석들일 뿐이야. 놈들은 우리를 상대로 싸우지 말아야 하는 건데. 나는 살인이라면 생각조차 하기 싫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322쪽

 

   특히, 헤밍웨이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피력합니다. 전쟁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살인, 아무런 속죄 행위 없이도 묵인되는 살인, 살인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 행해지는 살인. 그리고 '상대편'이라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말살되는 인간성. 이런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한 헤밍웨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집필을 시작해 1940년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발표합니다. 그는 직접 전쟁에 참여해 싸우거나 원조를 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의 참상을 하루빨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는 이런 마음으로 스페인까지 달려갔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좋다. 지금 일을 다 끝내면 책을 써야겠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만을, 진실된 것만을, 그리고 깨닫게 된 것만을 써야 한다. 하지만 그럴려면 지금보다 훨씬 훌륭한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전쟁에서 알게 된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412쪽

 

   전쟁이 끝나면 모든 살인 행위에 대한 공식적인 속죄 행위가 있어야 해. 전쟁 후에 종교가 없어지게 된다면 적어도 공식적인 시민 행사 같은 것이라도 조직해서 전쟁 동안의 살인 행위에 대해 속죄를 해야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생 사람답게, 그리고 참답게 살 수 없을 거야. 살인이 필요할 때가 있기도 하지. 그러나 그건 인간으로서는 못 할 짓이야. 이 모든 일이 끝나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리 모두의 잘못을 씻어 줄 속죄 행사가 반드시 있어야 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327쪽

 

 

   "그들은 전쟁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요. 왜 싸우는지 모르는 거죠."

 

   "그건 그래요. 그들이 알고 있는 거라곤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주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뿐이에요."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상권, 74~75쪽

 

   다른 이유는 없어. 바로 그것 때문이야. 그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전쟁에서는 늘 그래야 하지만, 자기 자신 따위는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거야. 전쟁에서 개인적인 느낌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철저히 자아를 배제해야 해.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하권,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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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2-1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거기까지 가신건가요? 우아

뒷북소녀 2018-12-19 09:16   좋아요 1 | URL
네네^^ 헤밍웨이도 좋아하고 미술관보다는 이런 경관을 더 좋아해서 찾아갔어요.^^ 정말 멋진 협곡이더라구요.

카알벨루치 2018-12-19 09:24   좋아요 1 | URL
진짜 작가찾아 삼만리하셨네요 로쟈님처럼 <뒷북소녀의 문학순례>뭐 이런거 찍는거 아닌가요? 열정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굿뜨

뒷북소녀 2018-12-19 13:00   좋아요 0 | URL
저도 로쟈님처럼 러시아문학기행 떠나고 싶어요^^

레삭매냐 2018-12-19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옷 저희 회사 동료분도 저 다리
보러 에스파냐 다녀왔다고 하시더라구요...

대단하십니다 !

뒷북소녀 2018-12-19 13:00   좋아요 0 | URL
ㅋㅋㅋ맞아요. 스페인 갔음 꼭 봐야죠. 다리도 정말 대단하답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4 2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뒷북소녀님 메리 크리스마스 되소서!!!

뒷북소녀 2018-12-26 12: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님.^^
2018년 마무리 잘 하시고, 행복한 새해 맞이하소서.
저는... 해피 뉴이어~^^
 
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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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딸은 대학에서 강의를 합니다. 하지만 보따리 장사와 다름 없습니다. 강의를 하기 위해 낡은 차에 수업자료를 가득 싣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 다닙니다.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 좋을텐데, 딸은 독립해서 자신보다 어린 '그 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나마도 형편이 좋지 않아서 엄마에게 돈을 빌려달라, 집을 담보로 전세 대출을 좀 받아달라, 손을 벌립니다. 
   알고보니 부당하게 강사 자리를 잃은 동료를 돕기 위해 집 보증금을 빼서 썼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싸움을 했는지,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멍투성이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엄마에 대하여!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22쪽

   교사였던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좀 더 잘 키우기 위해 일을 포기했습니다. 남편은 죽었고, 이제 남은 가족은 독립한 딸 하나뿐인데, 육십이 넘은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편하게 살법도 한데, 딸은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해서 엄마에게 손을 벌리기 일쑤입니다. 엄마는 딸이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살기를 원합니다.
   집 보증금이 없다는 딸에게 돈을 모을 동안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했더니,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은 '그 애'를 함께 데리고 들어옵니다.
   요리사인 '그 애'는 무심한 딸과는 달리 집안인도 척척하고 꽤 다정한 말들을 엄마에게 건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애'를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주방에서 '그 애'와 마주치는 것도 불편하고, 딸과 '그 애'가 서로 주고받는 애칭도 듣기 싫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애'가 마련한 집 보증금을 써버린 것도 딸이고, 집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몇 달치 생활비를 선금으로 준 것도 딸이 아닌 '그 애'였기 때문입니다.

   내 딸은 하필이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요.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한번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84쪽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젠'의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족 하나 없이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젠'도 똑똑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았다고 합니다. 치매 때문에 기억도 희미해지고 정신도 오락가락하자 병원에서는 '젠'이 당연히 받아야 할 서비스를 소홀하게 제공합니다. 오히려 학대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심지어 시설이 훨씬 나쁜 곳으로 보내지기까지 합니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걸가.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 128쪽

   도대체 이 여자는 어쩌자고 소중한 젊은 날을 그런 식으로 낭비해 버린 걸까.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세상일에 시간과 열정과 돈을 다 쏟아부어 버린 걸까. 134쪽

  
엄마는 이런 '젠'을 보면서 자신 혹은 딸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려고 요양원에서 '젠'을 데려옵니다. 이런 엄마를 딸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애'는 조용히 도와줍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 동료 강사의 일에 돈을 잃고, 몸을 다쳐가면서도 뛰어다니는 딸을 보며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딸이 언젠가는 자신도 같은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왜 하필이면 딸이 나서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딸과 엄마가 꼭 닮았습니다. 엄마도 자신들의 미래와 '젠'의 모습이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했고, '젠'이 요양병원에서 부당하게 당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 딸이 이렇게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워요.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 169쪽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엄마는 딸과 좀 더 가까워집니다. 딸과 '그 애', 그리고 그 친구들의 일들을 목격하면서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과 차가운 시선에 함께 마주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끝끝내 엄마는 딸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이해해도, 내 딸이니까, 내가 소중하게 키운 하나 밖에 없는 내 딸이니까, 더더욱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194~195쪽

   얼핏 『딸에 대하여』는 제목처럼
'부적격자. 동성애자. 자격 미달. 레즈비언. 비정상.'(143쪽)이라 불리는 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지만 가장의 부재, 여성의 노동,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딸의 사랑, 전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가족 구성원, 가난... 등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엄마'의 입장에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풍경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우리도, 누구나 그 전형적인 풍경 밖으로 튕겨나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튕겨나가서 바둥바둥거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젊은 작가'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렇게 곱씹으며 읽었던 적은 처음입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여러 작품들 가운데 김혜진 작가가 쓴 「동네 사람」이 인상적이어서 그녀의 작품을 골라 읽은 것인데, 좋은 작품을 고르는 제 안목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앞으로 김혜진 작가의 행보를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딸애는 내 딸이니까, 우리는 가족이니까, 결코 그런 다정한 말은 나오지 않는 거겠지. 이 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나 적당한 만큼의 배려와 예의를 보일 수 있는 거겠지. 60~61쪽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 91쪽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가 각오하고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177쪽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197쪽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애들이 다만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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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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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고 확실하게 도착하는 유일한 것은 죽음뿐!

   마지막 내전이 끝난 이후 오십육 년 동안 대령은 기다리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령에게 도착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가 10월이었다. 7쪽

   벌써 15년째. 대령은 금요일마다 편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9년 전, 56년 전에 일어난 천일전쟁(1899년부터 1902년까지 콜롬비아의 집권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국지전에서 전국적 양상으로 번져 약 10만 명이 사망하고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에 참전했던 군인들에게 '참전 군인 연금'을 지급한다는 법령을 의회가 공포했고, 8년 동안 자격 인정 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수혜자 명단에 대령이 포함되었다는 편지를 받기까지 6년이 걸렸으며, 5년 전에 받은 그 편지가 대령이 받은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대령은 금요일마다 우편선이 들어오는 항구로 나가 자신에게 지급된 연금 통지서를 기다리지만, 언제나 그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선거도 하지 않고, 언론은 통제되고, 철저하게 검열된 영화만 볼 수 있는 시대. 9개월 전 하나뿐인 아들 아구스틴이 투계장에서 비밀문서를 유포한다는 이유로 총탄을 맞고 죽었습니다. 부부는 아들이 남긴 유산인 수탉을 정성스레 키우며 일년마다 열리는 투계판이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투계판에서 이기면 부부는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식은 물론이고 커피도 떨어지고, 돈도 떨어졌습니다. 아직 3개월이나 남았는데, 팔만한 것은 모두 팔아서 먹고 사는게 걱정입니다. 이와중에 수탉에게 줄 옥수수까지 사야합니다. 급기야 아내는 수탉을 팔자고 대령에게 제안합니다.
   하지만 대령에게 수탉은 수탉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부당한 정권에 맞서 싸우다 죽은 아들의 대신이기도 하고, 그의 명예이기도 합니다. 사실 수탉은 대령뿐만이 아니라 아구스틴을 알고 있는 친구, 마을 사람 전부의 희망이자 명예이기도 합니다. 수탉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것은 그들 모두가 추구하는 (정치적) 정신의 승리이기도 한 것. 그들은 수탉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팔 수 없으면 어쩔 거예요." 아내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1월 20일까지 기다려야 하오." 대령이 완전히 의식을 되찾고 말했다. "그날 오후에 20퍼센트를 지불하오."
   "그건 수탉이 이길 때 이야기죠." 아내가 말했다. "만일 진다면, 수탉이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어요."
   "절대 질 수 없는 수탉이오." 93쪽

   참다못한 아내가 이제 무엇을 먹고 살거냐고 대령에게 묻자 대령은 '똥'이라고 대답합니다. 차라리 똥을 먹을지언정 그 가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대령은 변비에 걸려 있습니다. 먹고 살 똥도 없다는게 대령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아내는 절망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먹죠." 아내는 이렇게 물으면서 대령이 입은 티셔츠의 칼라를 움켜쥐고 힘껏 흔들었다.
   "말해 봐요. 우리는 뭘 먹죠."
   대령은 이 순간에 이르는 데 칠십오 년의 세월이, 그가 살아온 칠십오 년의 일갈일각이 필요했다. 대답하는 순간 자기 자신이 더럽혀지지 않았고 솔직하며 무적이라고 느꼈다.
   "똥." 95쪽

   도착하지 않는 참전 군인 연금을, 대령은 어떻게 15년동안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물론 아들이 살아있었던 9개월 전까지는 지금보다 덜 간절했을테고, 그 후 9개월 동안은 아들의 재봉틀을 팔아서 산 양식이 있어서 견딜만 했겠지만,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연금을 어떻게 기다릴 수 있었을까요? 대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커다란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작은 것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41쪽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일상, 이 일상만 도착한다면 '참전 군인 연금 정도'야 똥을 먹으면서도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들이 없는 일상을 견딘다는 건, 똥을 먹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일테니까요. 적어도 그들에게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도착하는 것은 죽음뿐입니다. 연금도, 자유도, 일상도 여전히 도착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도착하는 유일한 것은 죽음뿐입니다, 대령님. 59

   이야기의 끝은 94쪽인데 무려 해설이 132쪽까지 있는 책입니다. 역자는 정말 정성스럽게 쓴 해설이겠지만, 원래 남이 해주는 해설을 싫어하는데다가 읽다가 지쳐서 그냥 덮어버렸습니다. 끝까지 읽었더라면 이 작품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그만큼 재미도 반감시켰을 겁니다. 마르케스의 문장과 해설을 쓴 번역자의 문체가 너무나도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서 마르케스는 헤밍웨이와 비슷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해설을 잠깐 읽어보니, 마르케스도 헤밍웨이처럼 신문에다 글을 썼으며 헤밍웨이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장황하지 않으면서도 문장 속에 뼈가 있는 문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문장. 짧지만 메시지는 강렬해서, 지금부터 마르케스를 좋아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아들의 고아예요. 19쪽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옥수수 죽을 즐기는 거예요.
   인생이란 지금껏 발명된 것들 중에서 최고라오. 60

   당신은 배를 곯아 죽어 가고 있죠.
   체면이 밥 먹여 주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아야 해요.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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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2-05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단가를 비교해 볼 때, 불필요하다고
사료되는 역자 해설 부분을 독자는 강제
로 3,000원 정도 더 주고 산 셈입니다.

비슷한 분량의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의 경우
단가가 7,000원이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출판사의 꼼수라는 생각을 지울 수
가 없습니다.

오래 전에 번역되었지만 시장에서 사라
진 마르케스의 다른 책들의 소개도 기대
해 봅니다, 이번에는 젭알 바가지 없이.

뒷북소녀 2018-12-05 22:03   좋아요 1 | URL
저는 (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굳이 한국까지 끌어와서 해설 쓴게 너무 억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장황한 해설 없이도, 이 짧은 소설만으로도 마르케스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요즘엔 물가인상분이 반영됐는지, 문학전집에 만원 이하 책은 없는 것 같더라구요.
 
직업으로서의 음악가 - 어느 싱어송라이터의 일 년
김목인 지음 / 열린책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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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란 자신에겐 뚜렷하지만 남들에게는 한없이 모호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누군가의 안부를 물을 때 직업이 뭔지,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묻습니다. 특별한 유대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던질 수 있는 안부의 기본이 되는 질문일텐데요,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살짝 곤란해집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공무원, 교사, 스튜어디스, 조종사, 기자, 카피라이터 등으로 분류되는 직종으로 대답하면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곧바로 질문이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많은 직업들처럼 내 직업도 사회 안에서 여러 가지 과장된 이미지, 심지어 실제와 전혀 동떨어진 이미지로 통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이란 자신에겐 뚜렷하지만 남들에게는 한없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21쪽

   저자는 자기소개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라고 얘기한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인 '싱어송라이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싱어송라이터로 자신을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명칭에 나의 일이 가장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종 <싱어송>과 <라이터>의 합성어로 오해받는 이 알쏭달쏭한 단어는 <싱어Singer>와 <송라이터Songwriter>를 나란히 붙인 말이다. 즉 노래하는 이와 노래를 만드는 이가 합쳐진 단어이다.
   프랑스에서는 작사가Auteur, 작곡가Compositeur, 해석자Interprete 세 가지로 구분한 ACI라는 단어도 쓰던데 이쯤 되면 싱어송라이터라는 직업의 어깨가 훨씬 더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21~22쪽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싱어송라이터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어릴 때부터 꿈이 싱어송라이터였을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그의 꿈은 영화감독이었습니다. 그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예체능계가 없고 문과와 이과만 있어서 문과에 갔고, 그래서 연극영화과가 아닌 신문방송학과를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자신의 시나리오를 영상화해 줄 동아리를 찾았지만, 그가 주로 한 활동은 영화 비평이었습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2년 동안 단편영화 한 편을 찍어본 적이 없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지만 제대로 완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시절 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음악을 직접 해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녹음하는 것을 좋아해서 이것 저것 시도를 해보았을 뿐이죠.

   집에 와 제대로 작곡을 해보려고 책상에 앉아 노래를 써보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25살이 넘어서였다. 그때 알았다. 나로 하여금 그 모든 준비를 하게 했던 것이 <음악>이었다는 것을. 음악은 내게 그런 먼 길을 돌아오게 해놓고 그사이 서울에 인디 씬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몇몇 선구자들이 클럽 공연을 개척했고, 인디 레이블들을 설립해 두었다.
   몇 년 뒤 홍대 인근에서 일하고 활동하며 나는 천천히 인디 씬에서 활동하는 싱어송라이터로 자리 잡아 갔다. 영화를 다시 해볼 생각은 없냐고 하는 질문에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원래 이걸 하려던 것이었는데, 그때는 영화인 줄 알았다고.
   그러니 어린아이에게 뭘 하고 싶으냐고, 직업으로 골라 보라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지 어른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보길 권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계속 옷을 갈아입는 꿈이 뭔지를 자신이 알아보는 것이다. 110~111쪽

   이 책은 제목처럼 '싱어송라이터 김목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직업인 '싱어송라이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가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개인인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가게에 가깝고, 다만 그 가게가 투명해 보이지 않을 뿐"(137쪽)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작은 가게라고 하더라도 가게를 꾸려나가려면 이것 저것 체크할 것들이 많습니다. 저자는 노래를 부르고 만드는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그 외의 일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섭외는 어떻게 당하고, 공연장 체크는 어떻게 하며, 수익은 어떻게 배분하는지. 사실 공연장을 찾을 때마다 제가 궁금했던 부분들도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악기 배치와 아티스트 자리 선정, 조명 연출은 누가 담당하는지, 공연 당일에 앙코르 곡은 어디까지 준비하는지, 늘 궁금했는데 저자가 공연용 큐시트와 무대배치도까지 보여주며 알려줍니다.

   사실 많은 공연자들이 앙코르까지 연출에 넣는다. 하지만 자신이 인기가 좋을 걸 예상해서 그런다기보다는 공연에서는 끝마무리가 중요하고, 실제로는 앙코르까지 그 끝마무리에 포함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96쪽

   나는 앙코르가 공연의 들뜬 기분과 공연 후의 허전함 사이를 부드럽게 연착륙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툭 끝나고 바로 퇴장을 하게 되면 관객들도, 공연자도 그 심리적 허기를 안고 나가게 된다. 그러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풀게 된다. 97쪽

   저자는 공연을 하면서 재미있었던 일화도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강 건너 북콘서트>. 저자가 잭 케루악의 『다르마 행려』를 번역하기도 해서 초대된 것이라고 하는데, 북콘서트 장소가 처음에 예정되었던 시내의 카페도 아니고 서울 근교의 캠프장도 아닌 강원도 근교의 어느 글램핑장이었다고 합니다. 운전을 못하는 저자가 대중교통을 타고 가면 강 건너편에 도착하게 돼서 특별히 운행한 보트를 타고 강을 건넜고, 글램핑이라고 해서 바비큐 파티를 기대했는데 식사로 도시락이 준비되었다는 이야기. 저자는 반나절이나 걸려 도착한 곳인데, 돌아올 때는 다른 작가의 차를 얻어탔더니 1시간 반 만에 집에 도착했다는 것까지. 하나 하나 머리 속에 그려보니 너무 웃겨서, 그 북콘서트가 어디에서 열린 공연인지 찾아보기까지 했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3집 앨범 「콜라보 씨의 일일」을 준비하고 있던 2017년의 단상을 담은 작품입니다. 책 속에서 준비하고 있다던 그 앨범은 이미 나온 상태이구요. 공연을 좋아하는 관객의 입장에서든, 저자와 마찬가지로 직업으로서의 음악가의 길을 꿈꾸는 사람의 입장에서든, 읽어보시면 몇몇 궁금증들은 확실하게 해소시킬 수 있습니다.

   긴 번민의 시간과 소심한 자아가 작품이 되고, 이제 공동의 것으로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부담감이 밀려온다. 제작진들의 노고는 몇 개의 파일로 압축되어 조그만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고, 음원은 단 몇 초 만에 웹에서 전송될 것이다. 이 과정의 각 단계들은 해마다 점차 간소해지고, 가벼워지고, 생략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뭔가를 만들고, 주고받고, 들어 보는 기쁨이 이어지길 기대하는 것. 메모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확장되길 기대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하고 있는 일이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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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소설 보다
김봉곤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한 손에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시리즈 『소설 보다』
   소설 보다』는 참 아기자기한 시리즈입니다.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을 묶은 단행본 시리즈로, 1년에 네 권씩 출간된다고 합니다. 계절의 리듬에 따라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빠르게 선사하며, 한국 문학의 현재와 호흡할 것이며 취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첫 책은 봄과 여름, 두 계절의 선정작들을 담고 있습니다.

김봉곤 「시절과 기분」 :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일부의 독자들을 위한
   서점에서 '나'의 책을 발견했다며 거의 5년만에 날아온 혜인의 문자. '나'는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 부산으로 내려가 직접 사인해서 줄테니 사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산해보니 혜인과는 2011년, 그녀가 졸업할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친구와의 만남은 이토록 허무하고, 쉽고, 단박에 잡혔다 안부도 없이 기별도 없이 용건만 말하고 끊었지만 그게 부족했다거나 미안하지 않았다는 것마저 익숙했다. 「시절과 기분」, 14쪽

   이렇게 불쑥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아도 어색하지 않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자주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런 친구들도 참 좋은 친구들입니다.
   아무튼 각설하고, 혜인은 '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입니다. 책 속에는 '나'의 사연과 취향이 담겨 있는데, 적어도 혜인에게는 직접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책을 사겠다는 그녀를 저지하고 다급하게 약속을 잡은 것입니다.

   책을 뿌리겠다는 말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제보'라는 단어에 지레 움칠해 나는 전화를 건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 사람은 다 알았다. 등단 소감에도, 소설에도, 잡문에도 제발 좀 알아달라고 봐달라고 온갖 떼를 다 써놨는데 모를 수가. 그건 때론 대수였고 대체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혜인에게만큼은 꼭 내입으로 직접 말하고 싶었다. 「시절과 기분」, 13쪽

   부산까지 내려간 '나'는 혜인과 함께했던 '그 시절과 기분'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그곳들을 돌아다닌다. 직접 사인한 책도 그녀에게 전달하지만,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하지 못한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릴테니 그때 이야기하자고 말합니다.
   '나'가 떠올리는 그 시절 속에는 뚜렷한 사물(소재)들이 등장합니다. 훌리건천국, 스페셜포스, 나프나프, 에고이스트, 숨마쿰라우데, 개념원리... 언뜻 떠오르는 것도 있지만 짐작 조차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절을 이야기하는건지, 그때의 기분은 어떤 기분인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작가 김봉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좋다고 말합니다.

   "빛을 알아볼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 오히려 그 특수함을 발견하고 알아주는 독자를 만나고 싶어요." 「인터뷰 : 김봉곤 X 황예인」 53~54쪽

  "전적으로 나에 기대어, 나를 재료 삼아 쓰는 글쓰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배려하지 않는 배타성, 그 배타적임으로 생기는 내밀함을 나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름, 스피드』 중

조남주 「가출」 : 가부장의 부재, 아버지가 사라진 가정
  
아버지가 가출했다.(61쪽) 「가출」의 첫문장입니다. 일흔 둘의 아버지가 이제라도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다며 가출을 한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가 가출한지 한달이 다 되어가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뒤늦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아버지 집에 모여서 밥을 먹고 의견을 나눕니다.
   아버지에게는 막내딸인 '나'가 주어준 신용카드가 한 장 있는데, 아주 가끔씩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 '나'의 폰으로 날아옵니다. '나'는 그게 아버지가 보내는 메시지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이곳은 경치가 좋구나. 너무 걱정 마라. 엄마에게 말하지 마라."(85쪽) 이렇게 말이죠.

김혜진 「다른 기억」 
   학교 신문사에서 활동했던 '나'와 '너'. 신문사 주간 교수였던 임 교수가 각종 비리와 횡령에 연루돼 학교와 신문사를 떠나게 되자 그들의 사이에는 틈이 생깁니다. '나'는 임 교수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 혹은 사실들을 받아들였지만 '너'는 다른 사정이 있을거라며, 그렇게 좋은 교수님이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며 신문사를 떠납니다.

   낡지도 닳지도 않는 책.
   뭐 하러 그런 것을 다 기억하고 있나. 그러다가도 한 번씩 내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좋은 것을 좋은 대로 두는 일.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두는 일. 망치거나 훼손하지 않고 간직하는 일. 시간을 거슬러 가서 그 모든 일을 없던 것처럼 무너뜨리지 않는 일.
   나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지 묻고 싶었다 선생님을 따라다니는 세간의 말들을 무시하고 좋았던 순간들만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네가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다른 기억」, 119~120쪽

   내 것이었고 내 것이 될 수 있었던 어떤 추억에 대해. 관계를 망가뜨린 것에 대해. 내가 깨부수지 않아도 좋았을 어떤 신뢰와 믿음에 대해.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순간도 불쾌한 기억으로 남을지 몰랐다. 그래서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면 내 안의 무언가가 이날의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릴지도 몰랐다. 「다른 기억」, 121쪽


   '너'는 교수님과의 좋았던 기억, 교수님의 좋은 부분만 떠올리며 비리가 드러났는데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여기고 있는데, 다른 사람 때문에 그 관계가 벌어진 것이 서운할 뿐입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나빴던 부분도 퇴색되어 예전처럼 나쁘게만 여기지 않게 되는 경우가 있긴 한데, 바로 눈 앞에 드러난 것을 외면하고 좋았던 기억만 간직할 수 있을까요? '너'는 선생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런 식으로 회피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요?

정지돈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1968년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해 서울에 올라왔고 그 전까지 영천에서 살았으며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133쪽) 나온 태순과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연세대 대학원에 입학한 양코씨"(133쪽). 그 시절에 그들은 비슷한 처지여서 친하게 지냈지만 양코씨는 1970년 9월 연세대 대학원을 중퇴했고, 태순은 한국 남성과 결혼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립니다. 이 소설은 오랜만에 한국에 들른 태순의 회상을 담고 있는데, 회상을 끝내며 태순은 이렇게 말합니다.

   반복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는 미래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 평생을 다 쓴 것 같으데 지금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반복된다면 그것을 미래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 154쪽   
   '일상'에 관심이 없다는 정지돈 작가. 이 소설의 기획 자체가 2018년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 「스테이트 아방가르드의 유령」전을 위해 제작된 것이었듯이, 문장은 상당히 아방가르드하고 그것을 채우고 있는 소재들은 상당히 낯섭니다. 그는 소설 속에 현실을 그려놓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싶다고 말하는데, 소설은 물론이고 인터뷰까지 그만의 세계가 있어 보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그때 다시!
   봄엔 김봉곤과 조남주의 소설이, 여름엔 김헤진과 정지돈의 소설(하필이면 두 작가 모두 뜨거운 여름의 상징, 대구 출신입니다.)이 '이 계절의 소설'로 선정되어 실려있습니다. 『소설 보다』에는 각각의 작품들에서 봄과 여름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에는 또 어떤 작가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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