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큼 가까이 -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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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사랑에 대한 정의를 떠올리며 읽게 되는 책.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들. 가끔씩 번역된 문장을 읽는 것처럼 잘 안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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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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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힘!

   "그 어느 소설과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세계 10대 소설로 꼽을 만하다." ─ 서머싯 몸
   "우리가 인간 존재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뿌리째 뒤흔든다." ─ 버지니아 울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 중의 하나" ─ 조르주 바타유

   이것은 수많은 작가와 명사들이 『폭풍의 언덕』에게 보내는 찬사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찬사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폭풍의 언덕』은 에밀리 브론테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뒤, 50년이 지나고나서야 비로소 재조명 받기 시작했습니다. 1847년 이 소설이 처음으로 출간됐을 당시, 평론가들은 '내용이 지나치게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데다 등장인물 또한 흉칙하고 음산하다.'면서 혹평을 퍼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에밀리 브론테를 '야수성을 지닌 작가'라고 비난했고, 어떤 사람은 '이 책에는 구원이 결여되어 있다. 어느 등장인물이나 매우 저주스럽거나, 아니면 그지없이 강렬한 인물이 아닌 자는 하나도 없다.'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폭풍의 언덕』을 읽은 독자라면 당시 평론가들이 왜 이런 평을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히스클리프는 물론이고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얼마나 악다구니를 하는지, 저 또한 이 책을 읽는 내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어야 했습니다. 첫 도입부를 읽고 악몽까지 꿨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강렬한지 지금부터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여러분들은 어금니를 꽉 깨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게는 에밀리 브론테처럼 생생하고 강렬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재주가 없거든요.

   이 소설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는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록우드' 씨가 세입자로 오면서 시작합니다. 그는 언덕 위에 있는 집주인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가는데, 그 집에는 집주인인 '히스클리프'와 그의 며느리 '캐서린', 그리고 관계를 알 수 없는 젊은 남자 '헤어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손님 접대를 할 줄 모르며 불친절하고 퉁명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들끼리 대화할 때도 차갑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은 '워더링 하이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워더링'이란 폭풍이 불면 위치상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야 하는 이 집의 혼란한 대기를 표현한 말이라고 합니다. 눈보라가 치는 밤에 그들의 집을 찾았던 록우드는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하룻밤 묵게 되는데, 그 잠깐 사이에 악몽을 꾸게 됩니다. 록우드는 유령이 나오는 집이라며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 집을 떠나죠.
   집으로 돌아온 록우드는 눈보라 때문에 열병에 걸립니다.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있던 가정부 엘렌 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록우드에게 '워더링 하이츠'와 '드러시크로스 저택'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제서야 록우드는 이상했던 세 사람의 조합에 대해 알게 됩니다.

   지금은 히스클리프가 두 저택 모두를 소유하고 있지만 원래 폭풍의 언덕에 있는 '워더링 하이츠'는 언쇼 집안의 것이었고, 드러시크로스 저택은 린튼 집안의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 힌들리와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씨는 리버풀에 다녀오면서 머리카락과 피부가 새까만 남자 아이 하나를 데려옵니다. 언쇼씨는 이 아이를 '히스클리프'라 부르며 두 남매와 마찬가지로 자식처럼 키우는데, 힌들리는 이런 아버지와 아이가 못마땅합니다. 처음에 캐서린도 히스클리프를 싫어했지만, 어느 순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둘도 없는 짝이 되어버렸습니다. 캐서린은 자라면서 드러시크로스 저택에 있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돈도 없고 교양도 없는 히스클리프 대신 신사다운 '에드거 린튼'과 결혼을 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아껴주시던 언쇼씨는 돌아가시고, 캐서린 때문에 상처 받은 히스클리프는 집을 나갔다가 2년 후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옵니다. 두 집안을 박살내겠다는 복수심까지 안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 좋은 언쇼 어른이 데려다 길러 결국 자신의 재앙의 씨가 된 저 검은 아이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550쪽

   히스클리프는 자신을 내쫓았던 힌들리에게 도박으로 집을 빼앗은 다음, 힌들리와 그의 아들 헤어튼 언쇼를 하인 부리듯 합니다. 갈수록 정신까지 피폐해진 힌들리는 헤어튼을 죽일 뻔까지 하는데, 아버지로부터 사랑이나 어떤 돌봄도 받지 못한 헤어튼 또한 거칠게 성장합니다.
   한편, 에드거 린튼과 결혼한 캐서린은 딸 캐서린 린튼을 낳자마자 죽습니다.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는 어느새 히스클리프에게 빠져 그와 함께 야반도주했다가 히스클리프의 진짜 모습을 보고는 다시 도망쳐 나옵니다. 혼자 멀리 도망친 이사벨라는 아들을 낳아 키우다가 죽습니다. 그녀의 아들 또한 에드거에게 맡기는데, 이 소식을 들은 히스클리프가 아들을 강압적으로 데려갑니다. 에드거는 딸 캐서린이 히스클리프와 에드거를 만나지 못하도록 '폭풍의 언덕' 근처도 못가게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가지 말라고 하면 더 가고 싶은게 자식들의 마음인지라, 캐서린 또한 히스클리프 부자를 만나게 됩니다.
   야속하게도 에드거의 아버지는, 손자가 아닌 손녀에게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만약 에드거가 죽게 되면, 그들이 살고 있는 집 또한 히스클리프 아들이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좀 더 합당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 병약한 아들이 병에 걸린 에드거보다 먼저 죽기 전에, 캐서린을 납치해 강제로 결혼을 시킵니다. 아들 히스클리프와 에드거가 모두 죽게 되자, 결국 히스클리프와 그의 며느리 캐서린, 그리고 헤어튼이 이상한 조합으로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몇 달 뒤에 이 마을을 다시 찾은 록우드 씨는 이 세 사람의 이후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태도가 바뀐 히스클리프는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리고, 함께 살면서 전우애 같은 것을 느꼈던 두 사촌, 그러니까 헤어튼과 캐서린은 결혼을 하게 됩니다.

   "히스클리프 씨, 당신은 아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잖아요. 아무리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저씨의 그 잔인한 성격은 아저씨가 우리보다 훨씬 비참하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풀려요. 아저씨는 비참해요, 그렇지 않아요? 악마같이 외롭고 시기심이 많은 거죠. 아무도 아저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저씨가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을 거예요! 저는 아저씨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478쪽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는 그들의 가정부 엘렌 딘이 세입자 록우드 씨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의 『폭풍의 언덕』은 제목 그대로 이야기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칩니다. 어떤 지인은 이 책의 페이지 수를 보고는 이내 못 읽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는데, 『폭풍의 언덕』은 두꺼운 페이지 수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책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새 푹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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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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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작가가 된다. 믿음을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쓴다면!
   어떤 분이 30분만에 『문맹』을 완독했다고 해서, 아무리 얇다고는 하지만 과연 30분만에 읽을 수 있을까? 게다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쓴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인데? 이런 생각으로 첫장을 넘기게 되었는데, 저 역시 30분만에 완독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분량이 200자 원고지로 200매도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적고, 문장이 매우 깔끔하고 간결해서 읽는데 버퍼링이 걸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겪어야 했던 상실감과 고독은 그대로 전해지는 책, 그녀의 자전적 소설 『문맹』을 소개합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로 이름을 알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독일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헝가리에서 그녀는 모국어 대신 적국의 언어로 배우고 써야했습니다. 게다가 무언가를 읽고 있으면 어른들의 타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매일 읽기만 해."
   "쟤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몰라."
   "저건 소일거리 중에서도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야."
   "저건 게으른 거지."
   "쟤는 ……을 하는 대신에 읽기만 해." 13쪽

   1956년 혁명을 외쳤던 헝가리 시민들이 소련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되자 그녀는 태어난지 넉 달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을 데리고 헝가리의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향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도착한 스위스에서 그녀는 한동안 읽고 말하고 쓸 줄을 몰랐습니다. 5년 정도 지나자 프랑스어는 익혔지만, 여전히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녀가 마음 붙일 구석 하나 없는 이국에서 읽고 쓰기 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독했을까요? 그녀는 어떻게 읽지 않고 5년이나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내 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더 어렵고, 더 가난했겠지만, 내 생각에는 또 덜 외롭고, 덜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어쩌면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서건 어떤 언어로든지 나는 글을 썼으리라는 사실이다. 82쪽

   아이가 학교에 가게 되자 그녀 또한 뇌샤텔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프랑스 수업에 등록해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우수한 성적으로 프랑스어 교육 수료증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다시 읽게 되었을 때, 특히 빅토르 위고, 루소, 볼테르, 사르트르, 카뮈, 사드와 같은 작가들의 글들을 번역없이 다시 읽게 되었을 때 프랑스어로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프랑스어를 쓰는 작가들처럼은 프랑스어로 글을 결코 쓰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쓸 것이다.
   이 언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운명에 의해, 우연에 의해, 상황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언어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그것은 나에게 강제된 일이다. 이것은 하나의 도전이다.
   한 문맹의 도전. 112~113쪽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과 『문맹』은 이렇게 쓰여진 책입니다.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사전을 곁에 두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소설입니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103쪽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쓴다면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당신도 멈추지 마세요. 당신의 언어로, 당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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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0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치에서 이번에 새로 리커버로
대표작이 나온 것 같은데, 이 참에
그 책을 읽어봐야 싶네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로군요.

뒷북소녀 2018-08-20 17:32   좋아요 0 | URL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읽어보시면 분명 마음에 들어하실거예요.
좀 길긴 하지만, 읽으면서 머리를 좀 써야 되긴 하지만,
어떻게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이렇게 쓸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될실거예요. 근데, 이 책을 먼저 읽고 읽어보시는게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해요.
작가의 히스토리를 먼저 알 수 있으니까요.
 
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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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 조각모음이 시급한 인공지능 컴퓨터 같은 책!
   이번에 <책중독자> 회원들과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눠볼 책으로 선정된 정재승 교수의 『열두 발자국』. 게다가 이 책을 함께 읽자고 추천한 사람이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이라서 리뷰를 쓸 때도 말을 아껴야 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사람의 본성이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으므로 평소처럼 솔직하지만 매우 비판적으로 리뷰를 써봅니다.

   새로고침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로고침을 하려면 여러분의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습관을 바꾸는 데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지요. 새로운 습관을 얻기 위해 탐색해야 하고,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반복적 수행을 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여러분의 새해 결심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고, 여러분의 삶은 어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고, 작년 이맘때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겁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 걸까요?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 삶을 예측 가능하게 해주고, 안전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142쪽

   『열두 발자국』은 정재승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했던 강의들 중에서 호응이 좋았던 강연 12개를 선별해 책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이 책의 특징이 되는 정보가 이 짧은 책소개에 담겨 있었는데, 이 정보를 간과하고 말았습니다. 연속으로 이어진 강연도 아니고, 호응이 좋았던 강연을 뽑은 것이니 당연히 단편적일 수 밖에 없고, 전문적인 과학 지식보다는 대중적인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책소개를 통해 눈치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같은 깊이의 과학책을 기대하며 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좋은 부분보다는 좋지 않았던 부분들이 더 부각되어 읽혔는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책만큼은 문과가 아닌 이과생답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디스크 조각모음이 시급한 인공지능 컴퓨터"를 본 느낌입니다.
   각 강연마다 소개되어 있는 연구사례가 흥미롭기는 하지만 너무 단편적이어서 어떤 주제로 정리되지가 않습니다. 또, 냉철한 과학자의 시선 대신 강연을 듣는 사람들에게 늘 한곁같이 따뜻한 어조로 말하고 있어서 얼핏 자기계발서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반입니다. 딱 시리나 아리가 말하는 것처럼 말이죠. 시종일관 따뜻하고 공손한 인간의 어조로 말하고 있지만 단편적인 대답 밖에 하지 못하는 인공지능 컴퓨터 말입니다. 이 컴퓨터 디스크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정보 조각들을 모아서 정리를 해줬더라면 더 좋았을텐데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가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을 먼저 봐서 그렇지, 그렇다고 좋은 점이 전혀 없는 책은 아닙니다. 다만, 책의 내용이 제가 기대했던 깊이에 도달하지 못했을 뿐 TV나 대중적인 강연의 내용으로는 흥미로운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평소에 제가 생각하고 있던 부분과 일치하는 의견이 많아서 반가웠습니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부분이 통쾌할 정도로 일치합니다. 아무리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일자리를 위협하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인간 나름의 역할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데이터로만 움직일 수 있는 컴퓨터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리가 없죠.

   빅데이터 전문가들은 '앞으로 미래에 사라질 직업들'을 선정하면서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지만, 제 생각에 제일 빨리 사라질 직업 중 하나가 '빅데이터 전문가'입니다. (……) 인공지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 전문가라는 건 '워드프로세서 자격증'만큼이나 쓸데없고 우스꽝스러운 단어가 될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누구나 사용하기 편리하게 인공지능 API가 공유될텐데, 정말 중요한 건 그걸 이용해서 실질적으로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 질문에 해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미래를 이끌 겁니다. 바로 여기에 미래의 기회가 있습니다. 261쪽

    정재승 교수는 어린 시절에는 칼 세이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중적 관계 맺기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그의 학문적 성취가 과소평가되거나 폄하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그의 학문적 성취가 충분히 빛날 수 있도록, 좀 더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요하는 독자들을 위한 책도 써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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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심령학자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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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도 기록된 적 없다면, 그 시절을 살았었던 혼령에게라도 물어봅시다!
   그 어떤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역사 속 사건이 있다면, 조금 오싹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았지만 지금은 죽어서 혼령이 된 존재를 불러내어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존재가 입은 옷차림만 잘 분석해도 민속학적인 자료가 되지 않을까요?
   고고심령학이란, 고고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심령현상들을 과학적으로 측정해 역사 연구의 끊어진 고리를 연결해주는 학문입니다. 예를 들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혼령을 불러내어 관찰한 뒤 그 혼령이 살았던 시대의 생활양식이나 그들이 사용했던 오래된 언어들을 고증하는 것이죠. 고증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학문인 고고학에서 심령현상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니 다소 아이러니하기는 하지만 기발한 방법인 것 같기는 합니다.

   소백산 천문대에는 이렇게 고고학을 연구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문인지 박사와 그의 제자, 조은수. 그곳에서 그들은 고대에 살았던 아이 혼령을 불러내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인지 박사가 갑자기 죽고 나자 더 이상 아이 혼령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은수는 혹시 박사의 죽음에 아이 혼령이 관여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산속 천문대에 있던 은수를 서울로 불러낸 것은 서울 한복판에 난데없이 출몰한 거대한 성벽입니다. 이 성벽은 실제로 볼 수 있거나 어떤 관측 장비로 찍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곳에 거대한 성벽이 있었다고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마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성벽과 마주쳤을 때는 성벽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그것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성벽이 출현한 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매사에 냉철하고 좀처럼 감정 기복이 없던 은수조차 성벽에 가로막혔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막막해서 좌절하고 주저앉고 맙니다.
   은수는 문인지 박사와 친분이 있었던 스위스 학자 한나 파키노티에게 힌트를 얻어 성벽이 나타날 때는 항상 코끼리와 눈이 함께 있었다는 걸 발견하고, 이른바 '혼령 3종 세트'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고고심령학'은 어디에도 없는, 배명훈 작가가 만들어 낸 학문입니다. 더운 계절에, 이렇게 오싹한 상상력을 발휘해줘서 박수라도 쳐주고 싶을 지경인데 끝을 향해 갈수록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 소설입니다. 시작은 SF를 표방하며 장대했으나 끝은 동화로 마무리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소재와 전개는 좋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뜬금없고 물음표를 던지게 만듭니다.
   게다가 작가는 꽤 불친절한 편입니다. 해마다 문인지 박사가 이끌고 있는 이 고고심령학과에는 '조은수'라는 이름의 학생이 들어왔따고 하는데, 왜 '조은수'여야만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설명 없이 설정된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메모지를 든 발굴 전문가나 훈련된 고고심령학자가 일반인 목격자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같은 것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그 밑바탕은 물론 공부였다. 역사학, 인류학, 언어학, 건축학, 종교학, 그리고 때로는 미술사나 공학까지도. 170쪽

   이것은 저와 같은 의문을 가진 독자들에게 작가가 던지는 변명 같습니다. 우리 같은 독자들은 똑같은 힌트를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고고심령학자들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뜬금없어 보이더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 소설은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게 해줍니다. SF 소설, 과학소설이라고 하면 으레 공상과학이나 사이버 같은 환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그런 SF가 아니라는 사실. 또, 등장인물들에 중성적인 이름을 적용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흔히, 고고학 같은 학문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으레 남자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특히 중성적인 이름을 가진 과학자들은 모두 여자라는 사실. 유일하게 처음부터 성별을 알 수 있었던 이한철 대표는 문인지 박사나 조은수와는 달리 고고심령학을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무리 작은 천체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천문학자라도 어느 밤 권태에 지쳐 그 일을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 됐다. 그가 보지 않으면 인류 전체를 통틀어 그 별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지 모른다. 하필 그 순간 그 천체가 무슨 특별한 신호를 발산하기라도 한다면, 불운하게도 인류는 그 신호를 놓치고 마는 셈이다. 33~34쪽

   『고고심령학자』를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부분입니다. 권태에 지쳐 함부로 내팽개쳐서는 안되는 일. 이 문장을 여러 일에 적용해 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책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어느 날 권태에 지쳐 함부로 내팽개쳐 둔 책 속에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 축에는 경사가 져 있었다. 시간은 한쪽으로만 흐르는 강이었고, 그 위에 놓인 존재는 누구나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방향이 한쪽으로만 정해져 있었다. 과거로는 갈 수 없고, 미래 쪽으로는 누구나 느린 속도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여행.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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