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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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딸은 대학에서 강의를 합니다. 하지만 보따리 장사와 다름 없습니다. 강의를 하기 위해 낡은 차에 수업자료를 가득 싣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 다닙니다.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면 좋을텐데, 딸은 독립해서 자신보다 어린 '그 애'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나마도 형편이 좋지 않아서 엄마에게 돈을 빌려달라, 집을 담보로 전세 대출을 좀 받아달라, 손을 벌립니다. 
   알고보니 부당하게 강사 자리를 잃은 동료를 돕기 위해 집 보증금을 빼서 썼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싸움을 했는지,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멍투성이로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엄마에 대하여!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22쪽

   교사였던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좀 더 잘 키우기 위해 일을 포기했습니다. 남편은 죽었고, 이제 남은 가족은 독립한 딸 하나뿐인데, 육십이 넘은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편하게 살법도 한데, 딸은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해서 엄마에게 손을 벌리기 일쑤입니다. 엄마는 딸이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살기를 원합니다.
   집 보증금이 없다는 딸에게 돈을 모을 동안 집에 들어와서 살라고 했더니, 자신이 허락하지도 않은 '그 애'를 함께 데리고 들어옵니다.
   요리사인 '그 애'는 무심한 딸과는 달리 집안인도 척척하고 꽤 다정한 말들을 엄마에게 건넵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애'를 도저히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주방에서 '그 애'와 마주치는 것도 불편하고, 딸과 '그 애'가 서로 주고받는 애칭도 듣기 싫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 애'가 마련한 집 보증금을 써버린 것도 딸이고, 집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몇 달치 생활비를 선금으로 준 것도 딸이 아닌 '그 애'였기 때문입니다.

   내 딸은 하필이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요.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한번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84쪽

   엄마는 요양병원에서 '젠'의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족 하나 없이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젠'도 똑똑했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았다고 합니다. 치매 때문에 기억도 희미해지고 정신도 오락가락하자 병원에서는 '젠'이 당연히 받아야 할 서비스를 소홀하게 제공합니다. 오히려 학대 수준이라고나 할까요. 심지어 시설이 훨씬 나쁜 곳으로 보내지기까지 합니다.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걸가.
  
마음은 왜 항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 128쪽

   도대체 이 여자는 어쩌자고 소중한 젊은 날을 그런 식으로 낭비해 버린 걸까.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세상일에 시간과 열정과 돈을 다 쏟아부어 버린 걸까. 134쪽

  
엄마는 이런 '젠'을 보면서 자신 혹은 딸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르지만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주려고 요양원에서 '젠'을 데려옵니다. 이런 엄마를 딸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애'는 조용히 도와줍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 동료 강사의 일에 돈을 잃고, 몸을 다쳐가면서도 뛰어다니는 딸을 보며 엄마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딸이 언젠가는 자신도 같은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당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왜 하필이면 딸이 나서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딸과 엄마가 꼭 닮았습니다. 엄마도 자신들의 미래와 '젠'의 모습이 다르지 않을거라 생각했고, '젠'이 요양병원에서 부당하게 당하는 모습을 참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 딸이 이렇게 차별받는 게 속이 상해요. 공부도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그 애가 일터에서 쫓겨나고 돈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난 속에 처박히고 늙어서까지 나처럼 이런 고된 육체노동 속에 내던져질까 봐 두려워요.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 169쪽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엄마는 딸과 좀 더 가까워집니다. 딸과 '그 애', 그리고 그 친구들의 일들을 목격하면서 그들이 받고 있는 부당함과 차가운 시선에 함께 마주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끝끝내 엄마는 딸을 이해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이해해도, 내 딸이니까, 내가 소중하게 키운 하나 밖에 없는 내 딸이니까, 더더욱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194~195쪽

   얼핏 『딸에 대하여』는 제목처럼
'부적격자. 동성애자. 자격 미달. 레즈비언. 비정상.'(143쪽)이라 불리는 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지만 가장의 부재, 여성의 노동,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딸의 사랑, 전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있는 가족 구성원, 가난... 등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는 '엄마'의 입장에서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풍경들이 낯설지 않습니다. 그 형태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우리도, 누구나 그 전형적인 풍경 밖으로 튕겨나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튕겨나가서 바둥바둥거리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젊은 작가'로 분류되는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렇게 곱씹으며 읽었던 적은 처음입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집』에 실린 여러 작품들 가운데 김혜진 작가가 쓴 「동네 사람」이 인상적이어서 그녀의 작품을 골라 읽은 것인데, 좋은 작품을 고르는 제 안목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앞으로 김혜진 작가의 행보를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딸애는 내 딸이니까, 우리는 가족이니까, 결코 그런 다정한 말은 나오지 않는 거겠지. 이 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나 적당한 만큼의 배려와 예의를 보일 수 있는 거겠지. 60~61쪽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음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 91쪽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가 각오하고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177쪽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197쪽

   누군가를 보살피는 것의 수고로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돌보는 것의 지난함. 실은 나는 아름답고 고결해 보이는 이런 일의 끔찍함과 가혹함을 딸애와 그 애에게 알려 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 애들이 다만 책에서 읽거나,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직접 경험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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