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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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다 가난하다 해도 어쩌면 그렇게도 가난한지, 세상에! 31쪽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은 1846년에 발표한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가난한 관리인 마까르는 하숙집 부엌 한쪽에 있는 칸막이 방에 거주하고 있다. 이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좁고 시끄러운 방이지만, 장점이 있다면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바렌까의 방이 보인다는 것. 먼 친척 사이인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편지를 주고받는데, 그 편지 속에는 자신들과 주변 사람들의 가난한 삶이 그대로 담겨 있다.

17살 때 근무를 시작해서 근속 30년째인 마까르(알렉세예비치 제부쉬낀)는 러시아 문학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관리의 전형이다. 9등문관인 그는 '각하'의 문서를 정서하고 있지만, 승진은커녕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가난'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그의 유일한 낙은 먼 친척 아가씨인 바렌까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는 돈이 생길 때마다 바렌까에게 보내거나 선물을 보냈다. 나이 많은 자신이 바렌까와 함께 있으면 바렌까에게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 봐 그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은 절대 방문하지 않았는데, 하숙집에서 그만 그 편지가 발각되어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만다.

12세 때 뻬쩨르부르그로 이사 온 바렌까(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척 아주머니인 안나 표도로브나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산다. 그 집에는 뽀끄로프스끼라는 대학생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하숙비 대신 바렌까와 사촌동생 사샤를 가르쳤다. 바렌까를 늘 어린애 취급했던 뽀끄로프스끼, 바렌까는 그의 생각을 바꾸려면 그가 읽고 있는 책을 자신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렌까 어머니의 병간호와 책을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 그러나 갑작스럽게 뽀끄로프스끼가 죽고 만다. 바렌까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안나 표도로브나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사샤와 바렌까를 망가뜨리려 하자 바렌까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다.

그러나 이사 온 바렌까의 집으로 비꼬프 씨가 1년 만에 찾아와 지난 일은 모두 안나 표도로브나가 나쁜 마음을 먹고 한 짓임을 알았다며 느닷없이 그녀에게 청혼한다. 놀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이 상황(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왜 바렌까는 마까르를 선택하지 않았나?

당신은 제가 쏟아 낸 감정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해하셨더라고요. 제가 느끼는 감정은 부성애입니다. 순수한 부성애 말입니다,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서러운 고아 신세인 당신에게 제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모두 제 진심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혈육의 정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어찌 됐건 저는 당신의 먼 친척입니다. <사돈의 팔촌>이라는 말이 있지만, 어쨌든 친척은 친척이죠. 게다가 지금의 당신에겐 제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고 보호자 아닙니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배신감과 분노만 느꼈지요. 21~22쪽

비록 마까르가 바렌까보다 나이가 많고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그녀를 아끼는 마음이 크다면 돈만 생각하는 비꼬프 씨 대신 그와 결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바렌까는 마까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마까르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가난'했던 게 아니라 정신적(문학적)으로도 빈곤했던 사람이다. 마까르와 바렌까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었던 것은 정신적(문학적)인 면에서의 간극 탓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바렌까가 사랑(동경) 했던 뽀끄로프스끼는 늘 책을 가까이했고, 뿌쉬낀과 같은 작가들의 책을 즐겨 읽었다. 반면 마까르는 바렌까가 읽어보라고 한 고골의 「외투」마저 형편없다고 비난하며 저급한 연애 소설만 읽었고, 바렌까에게 쓴 편지의 문장조차 두서없었다. 마까르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편지를 주고받고, 그녀에게 (작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해서 그녀와 가까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는 늘 마까르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마까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고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바렌까,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느냐고요? 3류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죠.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풍자 작가들은 여기저기 살피고 다니면서 이런 말도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길을 걸을 때 발바닥을 전부 땅에 대고 걷나, 아니면 까치걸음을 하나?> 혹은 <어떤 관청에 다니는 9등 문관 아무개 관리는 신발 밖으로 맨 발가락이 비어져 나왔네. 팔꿈치도 다 해져서 구멍이 났잖아>. 그들은 자기 글에 이런 것을 묘사해 넣고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책이랍시고 찍어 낸단 말입니다…… 129~131쪽

도대체 그런 글은 왜 쓴답니까? 그런 게 왜 필요하대요? 이런 책이 나오면 독자 중 누군가가 외투라도 하나 장만해 준답니까? 새 신발이라도 사준대요? (…) 그런데 이 소설이 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죠? 뭐가 잘됐다는 거예요?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생활에서 시시하고 공허한 한 단면만 썼을 뿐이잖아요. 도대체 당신은 이렇게 이런 책을 저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바렌까, 이건 몹쓸 책이에요.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요. 그런 관리는 있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이런 책은 읽고 나서 반드시 불만을 얘기해야 합니다, 바렌까. 정식으로 항의해야 해요. 117~119쪽

고골의 「외투」에 등장하는 관리 '아까끼'와 마까르는 닮았다. 만년 9등 문관으로 정서 업무를 하고 있고, '외투' 하나 사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다. 아니 아까끼보다 마까르가 더 가난하다. 마까르가 이토록 고골을 비난한 이유는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고골의 소설을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 몹쓸 책이라고 비난하면서 현실성이 결여된 연애소설만 읽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현실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걸작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사관학교에 다니면서 학과 공부보다 문학에 더 열중합니다. 틈틈이 프랑스 소설을 읽고 습작을 하던 시기에 쓴 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리고로비치라는 친구에게 읽어주고, 이 친구가 당시 『동시대인』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이던 시인 네크라소프에게 보여줍니다. 네크라소프가 다시 그 길로 당시 최고의 비평가인 벨린스키에게 달려가 작품을 보여주자 벨린스키가 격찬을 하죠. 그래서 네크라소프와 벨린스키가 한밤중에 무명의 작가 지망생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찾아와서 "자네가 도대체 무슨 작품을 썼는지 알고나 있나?" 하고 감격해 서로 껴안고 했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두고두고 회상하는 장면입니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가장 우쭐했던 시절이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야말로 비존재였는데 당대 최고의 시인과 비평가가 찾아와서 "자네가 쓴 것은 걸작이야"라고 했으니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겠죠.

하지만 그 좋은 시절은 얼마 못 갑니다. 지나치게 우쭐해서 자신이 대작가라도 된 양 거만하게 행세하는 바람에 벨린스키와 투르게네프가 절도 없는 생활을 비난하고 나설 정도였습니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 19세기 푸슈킨에서 체호프까지』, 193쪽

문학이란 정말 좋은 것이더군요. 정말 굉장해요. 문학이란 정말 심오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저기…… 아무튼 문학 속에는 그런 다양한 이야기가 씌어 있어요. 정말 훌륭합니다! 문학은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그림 같고 또 거울 같기도 합니다.(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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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0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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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먼저 '검찰관'을 사칭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어느 지방도시, 비밀 명령을 받은 암행 검찰관이 중앙에서 온다는 소식이 '시장(안똔 안또노비치)'에게 전해진다. 시장을 비롯한 판사, 자선병원장, 교육감, 우체국장 등 이 지방도시의 인사들은 잘못한 것이 없는지 체크하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서로 협의한다. 시장은 누군가가 자신을 밀고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는, 우체국장에게 의심스러운 편지는 뜯어보라고 지시한다.

곧이어 시의 지주 두 사람이 여관에서 검찰관으로 추정되는 관리를 봤다는 소식을 전한다. '훌륭한 풍채에 사복을 입은 사람이 방 안을 서성거리고'(31쪽) 자신들이 연어를 먹고 있는데 접시를 들여다봤다면서 '관찰력이 강해 보였고, 모든 것을 죽 훑어보는 눈치'(32쪽)였다고 한다. 시장은 여행자들의 편의를 시찰 중인 것처럼 가장하여 검찰관으로 추정되는 관리가 묵고 있는 여관을 방문한다. 흘레스따꼬프와 이야기를 나눈 시장은 그가 검찰관이 맞다고 확신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그를 초대한다.

흘레스따꼬프는 평소에도 허세가 심하고 비싼 옷들을 입어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진짜 중요 인사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푸시킨과도 친분이 있다고 하고. 흘레스따꼬프를 만나기 위해 소도시의 주요 인사들이 시장의 집으로 찾아온다. 판사, 교육감, 자선병원장, 우체국장, 시의 지주 등등. 흘레스따꼬프는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고, 어차피 뇌물을 바치고 청탁할 작정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서슴없이 돈을 제공한다. 소식을 들은 일반 시민들도 시장의 비리를 고발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다. 그 와중에 흘레스따꼬프는 시장의 아내에게 추파를 던지고, 시장의 딸에게는 청혼까지 한다.

그러나 불안을 느낀 흘레스따꼬프의 하인 오시쁘가 하루빨리 떠날 것을 종용하자 이미 충분한 돈을 챙긴 흘레스따꼬프는 곧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시를 떠난다.

그는 떠나기 전 이곳에서의 일을 한 기자에게 편지를 써 기삿거리로 제공하는데, 훔쳐보기 좋아하는 우체국장이 그 편지를 뜯어본 것이다.(시장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우체국장은 호기심 때문에 평소에도 남의 편지를 훔쳐보았다.) 사실을 알게 된 시장과 사람들, 그들 앞에 헌병이 나타나 '특명을 받고 상뜨뻬쩨르부르그에서 온' 검찰관이 그들을 데려오라는 소식을 전한다.

이 말은 천둥소리처럼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한다. 부인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위치를 바꾸고 화석처럼 굳어버린다. 174쪽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그들은 진짜 검찰관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에 경악하는 사람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적어도 그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여지껏 우리는 자신의 잘못이 뭔지도 모르는 '인사'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웃음과 공포의 환상적인 조화!

ㅡ 이현우,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10쪽

『검찰관』은 푸시킨의 여행담으로부터 나온 이야기다. 흘레스따꼬프가 푸시킨과 친분이 있다고 한 것은 허세였지만, 고글은 실제로 푸시킨과 친분이 있었다. 희곡 소재를 고민하고 있는 고골에게 푸시킨은 자신이 지방 여행을 하면서 검찰관으로 오해 받았던 사건을 들려준 것이다.

사실 흘레스따꼬프는 검찰관을 사칭한 적이 없다.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지레 겁 먹은 시장과 지방 인사들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 (푸시킨도 직접 겪을 정도로) 당시 러시아에서는 종종 있는 일들이었고, 고골은 그것을 웃음으로 고발하고 있다. 황제의 특명으로 초연된 『검찰관』은 보수 언론과 관리들에게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이 희곡을 보는게 불편했을 것이다.

『검찰관』에는 제대로 된(선하거나 정직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 하나같이 비리를 저지르고, 온통 부정적인 인물들 뿐이다. 고골은 이렇게 말한다. "단 하나 긍정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웃음이다"(215쪽)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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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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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발표 소설, 그는 왜 SF를 선택했을까?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긴 칩거에 들어간 가즈오 이시구로는 6년 만에 SF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그는 왜 SF를 선택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는 "의식이 있고 말을 하는 장난감과 아픈 아이가 친구가 되는 동화"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편집자 역할을 맡아온 딸로부터 냉정한 답변을 받게 된다. 그런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거라고 말이다. 그는 딸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를 동화 대신 우화적 SF로 발전시켰다.

결국 마음의 문제!

『클라라와 태양』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표작이자 장기 이식을 목적으로 양성한 복제 인간의 삶과 존엄성을 다룬 『나를 보내지 마』와 주제 의식이 이어지는 SF 소설이다.

가까운 미래,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AF(Artificial Friend), 즉 인공지능 로봇을 개발한다. 소녀 AF인 '클라라'는 B2 4세대 모델로, 햇볕이 잘 드는 쇼윈도에 앉아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클라라는 쇼윈도에 앉아 사람들과 풍경을 관찰한다. 다른 AF보다 관찰력이 뛰어난 클라라는 그렇게 학습하고 공감 능력을 키워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최신 모델인 B3 AF를 더 선호했고, 클라라는 그들에게 밀려 구석진 곳에 진열된다. 클라라는 앞쪽에 진열되지 않아 주인을 만날 기회가 줄어든 것도 안타깝지만, 그보다는 창밖을 관찰할 수 없어서 더 슬프다.

다행히 클라라가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을 때 클라라를 눈여겨 본 '조시'가 클라라를 데리러 온다. 조시는 자신의 집이 어떤 곳인지, 가끔씩 자신이 어떤 상태가 되는지 클라라에게 미리 알려주며 함께 가고 싶은지 의향을 묻는다. 조시의 어머니는 최신 모델들을 더 선호하는 것 같았지만, 클라라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진 후 클라라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클라라를 데려가는데 동의한다.

내 머릿속이 조시에 대한 걱정, 특히 왜 해가 거지 아저씨와 개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시에게도 특별한 도움을 주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다시 가득 찼기 때문이다. 모건 폭포에 가기 전에도 조시가 아플 때면 나는 해가 조시를 도와주기를 바랐지만, 그때는 어쩌면 해가 지금은 좀 더 두고 보겠다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시가 훨씬 약해졌고 앞날의 많은 것들이 불분명해졌는데도 왜 해가 마냥 꾸물거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조시 말고도 해의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아무리 해라고 해도 조시처럼 어머니, 가정부, 에이에프에게 돌봄을 잘 받는 듯 보이는 아이까지는 미처 챙기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174~175쪽

조시는 가끔씩 아프다. 상태가 매우 안 좋아질 때도 있어서 클라라는 (아니 조시 주변 사람들은 모두) 늘 조시의 건강을 걱정하며, 조시도 자신처럼(클라라의 동력은 '태양열'이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자양분을 충분히 받아 건강해지길 원한다. 사람들은 모르는 태양의 힘, 클라라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너는 똑똑한 에이에프야. 어쩌면 우리가 못 보는 걸 보는지도 모르지. 네가 희망을 갖는 게 맞는 일일 수도 있지. 네가 옳을지도." 165쪽

'릭'은 어릴 때부터 조시와 함께 자란 이웃집 소년이다. 조시와 릭은 평생 함께 하기로 약속하지만, 조시와 릭은 다른게 있다. 조시는 '유전자 편집의 혜택'을 받아 '향상되는 것'을 선택했고, 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릭이 선택할 수 있는 학교나 교류 모임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사실 조시에게는 '샐'이라는 이름의 언니가 있었다. 샐 역시 '향상되는 것'을 선택했지만, 잘못되어 죽었다. 조시가 현재 아픈 것도 샐과 같은 이유다. 조시의 어머니와 친구 사이인 릭의 어머니는 말한다. 샐을 잃고도 어떻게 조시까지 향상시킬 생각을 했냐고. 만약 우리에게 '향상될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실 클라라가 필요했던 건 조시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만약 조시가 샐처럼 자신의 곁을 떠난다면, 클라라가 완벽하게 조시를 구현해 곁에 있어 주기를 원했다. 아무리 기술이 좋고 클라라의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AF인 클라라가 자신의 딸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클라라가 조시를 대체하는 것이 진정 조시와 어머니를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클라라는 알고 있다.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직장에서 로봇에게 대체 당해 일자리를 잃은 조시의 아버지도 알고 있다. 결국 이것은 '마음의 문제'다.

"너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걸 믿니? 신체 기관을 말하는 건 아냐. 시적인 의미에서 하는 말이야. 인간의 마음.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람을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 만약에 정말 그런 게 있다면 말이야. 그렇다면 조시를 제대로 배우려면 조시의 습관이나 특징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걸 알아야 하지 않겠어?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하지 않아? (…) 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건 능력 밖일 거야. 아무리 신통하게 해낸다 해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을 테니까. 조시의 마음을 배워야, 그걸 완전히 알아야 하지, 아니면 너는 절대로 조시가 될 수 없어." 320~321쪽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441~442쪽

다행히 클라라의 믿음처럼, 조시는 건강해졌고 집을 떠나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게 된다. 이제 클라라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집을 떠난 조시 대신 어머니와 함께 사는 걸까? 그렇지 않다. 클라라는 야적장에 버려진다. 유기당했다. 나는 《토이 스토리》처럼 아름다운 이별을 상상했지만, 소설은 영화보다 더 가혹하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딸이 동화로 출판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도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필요할 때는 '인공지능 로봇 친구'를 표방하고, 완벽하게 인간을 구현해 내기를 원하면서, 그렇지 않을 때는 철저하게 '물건'처럼 취급한다. 예를 들면, 인간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등을 돌리고 차가운 벽을 향해 서있게 하거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없어서 다용도실이나 구석진 곳에 서 있어야 하고, 친구라면서 나란히 걷지도 못하게 한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공감해 주기를 원하면서 이런 대우라니.

인간과 로봇, 로봇과 인간.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공존할 수 있을까?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결국 마음 혹은 윤리의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혹은 윤리)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하곤 한다. 비록 SF라는 타이틀이 달려있지만, 이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가까운 미래,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인간과 로봇의 차이는 결국 '마음'이라고 말하는 『클라라와 태양』. 그러나 소설 속 몇몇 인간들은 클라라보다 더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인간의 비정함에 가슴이 아릿해지는 소설이다. 미안해, 클라라!

※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귓가를 맴돌던 노래 한 곡(♪어쩔 수 없어요, 결국 당신 마음의 문제이니까.)이 있다. 그래서 이 리뷰의 제목으로 차용해 보았다. 브로콜리너마저의 <마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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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1 1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마음을 다룬 책이라는데 공감이 가네요 ㅎ 너무 좋다는~ 브로콜리너마저 노래랑도 딱 어울리네요^^

뒷북소녀 2021-04-22 09:07   좋아요 0 | URL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과 로봇의 가장 큰 차이가 마음인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오히려 인간들이 마음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ㅠ
브로콜리너마저 노래는 정말 좋아요~ㅋ

레삭매냐 2021-04-2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뜬금 없지만, 삶은 브로콜리를 매우
좋아합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 진리를 찾아 나선 인류의 지적 모험에 건네는 러셀의 나침반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석봉 옮김 / 사회평론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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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보다 더 강력하게 과학을 옹호하고 종교에 반대하는 책은 결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11쪽

버트런드 러셀은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철학자이자 수학자, 교육 혁신가, 성해방 옹호자, 무정부주의자, 반전주의자였던 그가 다른 상(이를테면, 노벨평화상이라든지)도 아닌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데 큰 영향을 준 책이 바로 『과학이란 무엇인가』이다.

러셀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두 측면, 즉 종교와 과학이 그동안 어떻게 관계를 맺고 대결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오랫동안 다져왔던 종교의 벽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과학은 그 벽을 허물지 못해 긴 시간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시대 이후로 지난 400년 동안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 벌어진 가장 주목할 만한 갈등을 천문학, 생물학, 의학,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영역을 아울러 소개하며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 모든 갈등의 승자는 결국 과학이었다.

「서문」을 쓴 과학철학자 마이클 루스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논할 때 네 가지 입장이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종교와 과학은 실재에 대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하는 대립이나 투쟁 관계로 보는 입장, 두번째는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물음에 질문하고 답하는 완전히 다른 분야의 경험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입장, 세번째는 과학과 종교는 별개의 문제들을 다루지만 겹치는 부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입장, 마지막으로 과학과 종교의 통합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러셀은 종교와 과학이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대립 관계에 있다고 보았으며, 종교를 거부하고 과학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 때문에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가 내세우고 있는 것만큼 편파적이지는 않다. 그는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질문에 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영역에서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과학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은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을 굳이 부정하지 않겠다고 양보한다. 184쪽

J. 아서 톰프슨 경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과학은 '왜'라는 의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가 그에 대해 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3쪽

새로운 진리는 때로는 불편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야말로 잔인함과 편협함으로 물든 기나긴 역사 속에서 지적이고 총명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우리 인류가 일궈낸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다. 262쪽

신학이든 과학이든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러셀은 과학은 가치의 문제들을 결정지을 수 없으며,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학기술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신학이 그랬던 것처럼 과학이 그런 오류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기술이 과학적 정신보다 더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과학적 정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철학자인 그가 과학에 대해 논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과학적 정신은 신중하고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자기가 모든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가 획득한 최상의 지식조차도 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은 어떤 이론도 조만간 수정이 필요하며, 이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탐구와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255쪽

과학기술을 활용하는 실무 전문가들과 그들을 고용하는 정부나 대기업은 과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된다. 즉 무한한 권력을 지닌 듯한 도취감, 오만한 확신, 인적 자원을 조종하는 쾌감 등이 엿보인다. 이는 과학적 성향과는 정반대 지점에 있지만, 과학이 이를 조장하는 데 일조해왔음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56쪽

마지막으로 제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원제는 『Religion and Science』다. 그런데 번역서는 왜 '과학'만 강조하고 있을까? 한때 우리나라에서 '…이란 무엇인가' 류의 제목이 유행한 탓일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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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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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밖에서도 연대의 힘을 보여준 윤이형 작가

2020년 1월, 윤이형 작가는 『붕대 감기』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절필을 선언했다. 2020년 '이상문학상'의 우수상 수상자로 선정된 김금희 작가가 불공정한 저작권 계약으로 수상을 거부했고, 최은영, 이기호 작가도 연대 의사를 밝히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2019년 수상자인 윤이형 작가도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며 절필을 선언한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외치는 연대들

'진경'과 '세연'은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붕대 감기'의 짝꿍이 된 이후로 사십 대가 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다. 그러나 그저 소식을 끊지 않고 지낼 뿐 서로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나누는 그런 친구 사이는 아니다. 그들은 SNS로 이어져 있었고, 댓글을 달아주거나 좋아요를 눌러주는 사이로만 지냈다. 전업주부인 '진경'과 비혼을 선택한 '세연'이 시시콜콜하게 공유하고 공감할 공통의 주제가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십 대 중산층 여성(처럼 보이는) 진경은, 페미니스트 편집자이자 작가인 친구 세연에게 끊임없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된다."(153쪽) "친구가 친구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비혼 여성이 기혼 여성을 평가하고 있다."(53쪽)

세연이 갑자기 계정을 닫았다. 몇 주 후 다시 계정을 연 세여은 더 이상 일상 포스팅을 하지 않았다 공유하는 글들의 성격이 달라졌고, 자주 댓글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달라지더니, 쓰는 글들의 결도 달라졌다.

(…) 자신이 실제로 했고 앞으로 분명히 할 일들에 대해서만 짧게 또박또박 적어 올리는 세연을 보면 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미스트'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칙칙 소리가 나게 미스트를 뿌려주고 싶었다.

진경은 여전히 세연을 좋아했고 존경할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세연아, 너의 물기들은 어디로 갔어? 바람이 조금 빠진 자전거 타이어처럼 눌러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던 너의 여유는, 농담들은, 꿈꾸는 듯한 문장들은 어디로 간 거야? 그건 너와 내가 공유하던 빛나는 보물이었는데. 왜 이렇게 지상의 삶에 밀착되어 자갈과 흙과 모래 들만 바라보는 사람이 된 거야? 그 돌들끼리 부딪칠 때면 이를 가는 것처럼 진절머리가 나는 소리가 나던데, 어떻게 그것들을 쉬지도 않고 다 듣고 있는 거야? 진경은 그렇게 묻고 싶었다. 세연은 결코 들을 일도 대답할 일도 없겠지만. 49~51쪽

세연은 진경의 포스팅에 댓글을 달 수 없었다. 계속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그 말들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게 자신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끊임없이 그 말들을 늘어놓는 주체가 다름 아닌 자신의 공포라는 것을 알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17쪽

한편, 전업주부인 '진경'과 영화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워킹맘 '은정'도 대조적이다. 8개월 전 은정의 아들 '서균'이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된 이후 그녀는 일을 그만두고 아이의 간병만 하고 있다. 지금 은정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하지만, 그녀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동안 일 때문에 아이 엄마들 모임에도 나가지 않았고, 일과 관련된 일 외의 다른 일들은 소모적이라며 아예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가끔씩 놀이터에서 아이 엄마들을 만나더라도 살가운 대화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은정의 손에는 언제나 책이 들려 있었고, 미용실을 갈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런 은정에게 말을 거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정이라는 적금을 필요할 때 찾아 쓰려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적립을 해뒀어야 했다. 19쪽

8개월 만에 미용실을 찾은 은정을 진경의 딸 '율아'가 발견한다. 율아는 서균의 안부를 묻고싶어 하지만, 진경은 조심스러워한다. 아픈 아이의 안부를 묻는게 조심스럽기도 할테지만, 평소 은정의 성격을 알고 있다면 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왜 조심스러워야 돼?

율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만약 엄마가 많이 아파서 누워 있다면 율아는 누구든 엄마가 다 나았느냐고 물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아무도 물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린이집에 다니지도, 밥을 먹지도 못할 것 같았다. 먹더라도 다 토해버릴 것 같았다. 엄마는 서균이 엄마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 서균이를 싫어하는건가. 42쪽

'……아이는 아직 모른다. 달착지근한 마카롱 몇 개나 갑작스럽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같은 것으로는 괜찮아지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 아주 많다는 것을.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 점점 더 겁나는 모험처럼 느껴진다. 결과가 안 좋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굳이 물어보았다. 나 역시 누군가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종종 장미가 비를 기다리듯이 기다리게 되므로.' 46쪽

은정은 해미의 미용실을 다녔다. 패션지 대신 늘 자신이 가지고 온 책을 읽었던 손님, 올 때가 됐는데 오지 않는다. 은정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 해미가 선물한 책 한 권 때문일까? 그 책은 할레드 호세이니의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었고, 해미의 '인생 소설'이기도 했다.

마침 은정이 몸이 아파 출근을 못했을 때 은정이 다녀갔다고 한다. 해미 대신 지현이 은정의 머리를 커트했고, 아이가 아파서 최근까지 못 읽다가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고 해미에게 전해달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은정이 서균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미용실을 방문했을 때, 소란 피우는 아이를 방치한 은정을 비난하는 트윗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아이의 소식을 들은 지현은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친구 미진의 이야기를 꺼냈다. 미진은 불법촬영 피해자였는데, "친구가 감당하고 있는 정신적 무게를 같이 짊어지기가 버거워서 손을 놓아버렸다."(28쪽)고 했다. 지현은 그 죄책감을 덜어버리기 위해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된 뒤로 지현은 내적 갈등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업으로 하고 있는 '미용사'라는 직업이 그런 운동과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현에게 해미는 그저 기도를 하자고 한다. 자신들의 일에 집중할 수 있게 걱정을 덜어달라고.

이 외에도 『붕대 감기』를 채우고 있는 인물들이 많다. 이혼 후 고향에서 소소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사진작가 윤슬, 그녀는 가끔씩 서울에 들러 진경과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당돌하게 교수인 경혜에게 친구하자고 먼저 손을 건넨 채이는, 경혜의 동료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채이의 후배 형은은 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데, 마침 엄마의 직장 후배인 효령에게 연락이 온다. 엄마가 큰 병이라도 났을까봐 걱정했던 형은에게 엄마 명옥과 효령은 노후를 함께 하겠다고 한다. 아직은 그런 법이 없지만 '생활동반자법'이 생기면 재산이랑상속 관계도 좀 더 정확하게 정리할 수 있을거라고 하면서.

그녀들은 때론 대립을 하고, 또때론 연대를 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페미니즘들'을 외치고 있다. 그녀들의 연대 혹은 대립을 심진경 문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소문자 페미니즘들'을 만드는 일이며, 그럴 때라야 비로소 여성 연대는 가능할 것이다. 이때 여성연대란 단수적이기보다는 복수적이고, 통합적이기보다는 해체적이고, 무질서하고 개방적인, 그래서 非연대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될지도 모른다. 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여성들끼리의 화해와 연합이 아닌,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끝나는 것은 이런 인식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진짜 페니미즘'을 넘어서:윤이형의 『붕대 감기』가 페미니즘'들'에 대해 말하는 방법」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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