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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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토지』 3권은 살인자 김평산의 아내 함안댁의 자살로 시작한다. 그저 인간 노릇 못하는 남편을 둔 죄로 죽은 함안댁이 안쓰럽긴 하지만 눈길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다. 죽은 함안댁이 목을 맨 나무에서 내려지자 사람들은 목을 맨 새끼줄부터 시작해서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 간다.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藥物)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라는데, 그 모습이 살풍경하다. 아마도 사람이 목을 매 죽은 나무를 꺼려하거나 무서워할까봐 만든 말일텐데.

   옮겨지는 시체를 따라 사람들이 방 앞으로 몰릴 때 봉기는 짚세기를 벗어던지고 원숭이같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목맨 새끼줄을 걷어 차근차근 감아 손목에 끼고 난 다음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툭툭 분지른다. 그 소리에 돌아본 몇몇 아낙들이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잠시였다. 어느새 나무 밑으로 몰려들었다. 바우랑 붙들이, 마을의 젊은치들도 덤비듯이 쫓아왔다. 모두 엉겨붙어 나뭇가지를 꺾어 간수하기에 바쁘다. 순식간에 나무는 한 개의 기둥이 되고 말았다. 넋빠진 것처럼 강청댁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서 서방은 주저주저하다가 두만네와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짜고 있는 마누라를 힐끗 쳐다본다. 그는 살며시 땅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옷소매 속에 밀어 넣는다. 노상 횟배를 앓는 마누라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이기이 만병에 다 좋다 카지마는 그 중에서도 하늘병(간질병)에는 떨어지게 듣는다 카더마."
   몽톡하게 된 나무를 올려다보며 봉기는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
  
"죽은 나무라서 우떨란고? 효험이 있이까?"
   아낙 한 사람이 미심쩍게 말했다. 봉기는 씩 웃는다.
죽은 사람의 정기를 받아 약물(藥物)이 된다는 믿음에서 모두들 덤벼들어 꺾은 것인데 죽은 나무여서 과연 정기가 통하겠느냐는 아낙의 의심이다. 병에 효험이 있기로는 목을 매단 끈이나 새끼줄이 제일이라는 것이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말이었다. 『토지』 1부3권 11쪽

   3권에서는 함안댁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들이 죽는다. 호열자가 유행해 김 서방과 강청댁이 죽고, 봉순네와 윤씨 부인까지 죽는다. 심지어 문 의원을 호열자도 피했는데, 낙상해서 죽는다. 신난 건 조준구뿐이다. 그는 서울에서 부인과 아들까지 대동해 내려왔다. 집안을 추스릴 사람이 없어진 최 참판댁에서 조준구는 사랑방을, 그의 부인은 안방을 차지하고 주인 노릇을 한다. 그나마 멀리 떠났던 최치수의 지기 이동진이 돌아왔지만 이내 떠나버려, 서희는 다리 병신이 된 수동과 길상, 어머니를 잃은 봉순이 밖에 의지할 곳이 없다.

  
최 참판댁에서는 김 서방이 죽은 뒤 돌이와 봉순네는 동시에 발병하여 죽었다. 그 다음의 희생자는 윤씨 부인이었다. 길상은 밤길을 타고 읍내까지 문 의원을 데리러 갔다. 문 의원이 와도 이미 허사인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길상은 앉아서 부인의 죽음을 기다릴 수 없었고 수동이도 동의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읍내에 가서 길상이 들은 소식은 문 의원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집에서 말고 출타한 곳, 그러니까 우관스님을 찾아 절에 갔다는 것은 착오였었고 진주에 갔었다가 그곳에서 변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돌아온 길상이 그 사실을 알렸을 때 윤씨 부인은 힘없는 팔을 들어 자기 가슴을 두 번인가 두드렸다. 그리고 숨을 거둘 때는 손목을 잡고 길상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토지』 1부3권 251~252쪽

  
무엇보다도 윤씨 부인의 죽음이 허망했다. 그렇게 단단히 최 참판댁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죽음에 이르는 길은 순간이었다. 게다가 책에서는 단 몇 줄로만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일이란, 사람의 생이란 그런 것이다. 
   3권에서도 역시 용이의 우유부단한 처신은 끝나질 않는다. 호열자로 강청댁이 죽고, 임이네는 용이의 아들을 낳았지만 용이는 다시 돌아온 월선을 찾아간다. 임이네는 호열자로 두 아들을 잃었지만 용이의 마음이 월선이에게 향할까봐 전전긍긍이다. 아무리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지만, 어미로서 자신을 잃은 안타까움을 전혀 보여주지 않아 정이 가지 않는다. 우악스럽긴 하지만, 강청댁의 죽음에 마음이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1~3권 주요 사건별 인물 정리

■ 윤씨 부인 : 최 참판가의 안주인이며 최치수의 어머니. 큰 키, 곧은 상체, 두드러진 뼈대에 선비 같은 느낌을 주는 여성으로 당당하게 집안의 권위와 재산을 지켜나간다.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기도드리러 갔다가 휴양차 와 있던 김개주에게 겁탈당한다. 문 의원과 월선네의 도움으로 무사히 김환을 낳고 이 사건은 집안의 비밀로 묻어버린다. 불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최치수에게 냉정한 어머니가 되며, 김환에 대한 어미로서의 죄책감 때문에 찾아온 그를 하인으로 곁에 두며, 며느리 별당아씨와의 불륜을 용인한다.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은 저울의 추처럼 갈등을 안겨주어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김개주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조준구의 장기 거주에 불안을 느껴 비밀리에 서희에게 금, 은괴를 남겨주고 호열자로 죽는다.

■ 최치수 : 호는 석운. 최 참판가의 당주. 불륜에 대한 죄의식으로 냉엄한 어머니에 의해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며 방약무인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또한 부정적이고 인간혐오적인 선비 장암 선생의 영향을 깊게 받아 매사에 냉소적이다. '온갖 신경질과 우수가 감도는 모습', '당장에 눈을 부릅뜨고 고함칠 것 같은 위태위태한 분위기',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을 가진 인물로 표현된다.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여자를 혐오하여 별당아씨를 냉정하게 대하며, 조준구와 어울려 자학적으로 여자들을 상대함으로써 남성을 잃는다. 또한 속박 당하지 않기 위해 집안의 재산관리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별당아씨가 구천과 도망한 후, 총을 구해 그들을 찾아나서지만 결국 그냥 돌아오고 만다. 귀녀의 음모를 눈치채고 강 포수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김평산에게 살해되고 만다.

■ 김환 : 구천. 윤씨 부인이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들. 준수한 용모에 고귀한 풍모와 인품을 지녔으며, 우관은 '삭발 안 한 비구요 투구 없는 장수'로 비유한다. 연곡사에서 성장하다 동학혁명 당시 아버지인 김개주를 따라다닌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추척의 눈을 피해 방랑하다가 윤씨 부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최 참판가에 찾아간다.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갔을 때 성만을 말하고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무주구천동에서 왔다 하여 구천이로 불린다. 별당아씨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윤씨 부인의 도움을 얻어 산으로 도망한다.

■ 김개주 : 호는 해월(海月). 중인출신이며 우관 스님의 동생. 형인 우관 선사가 있는 연곡사에 휴양차 와 있는 동안, 그곳에 불공드리러 온 윤씨 부인을 겁탈하여 아들 김환을 얻는다.

■ 간난 할매 : 바우 할아범의 처. 윤씨 부인의 몸종으로 최 참판가에 와서 일생을 보낸다. 자식이 없어 조카뻘이 되는 김이평의 둘째 영만을 양자로 삼아 대를 잇는다. 최치수 부친의 죽음과 삼수 할아버지(쇠돌)의 죽음, 최 참판가의 손이 귀하게 된 까닭 등의 내력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윤씨 부인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며, 독자에게 김환의 정체를 알리는 역할을 한다.

■ 김길상 : 고아로 구례 연곡사 우관 스님에게 거두어져 자라며, 금어(金魚)인 혜관에게서 그림을 배워 자신도 금어가 될 꿈을 키운다. 최 참판댁의 심부름꾼으로 소년기를 보낸다.

■ 귀녀 : 최 참판댁의 계집종. 상전인 어린 서희의 모욕에 '원한과 저주가 이글이글 피어오르는 눈길'을 쏟을 만큼 노비 신분에 대한 열등감과 양반에 대한 원한이 가득하다. 별당 아씨가 사라지자 최치수의 사랑을 얻어 아이를 낳음으로써 면천하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김평산, 칠성과 모의하여 보복의 의지를 불태운다. 임신을 위해 자수당에서 칠성과 '추악하고 비인간적인' 밀회를 거듭하던 중, 뒤따라 온 강 포수와 하룻밤을 보낸다. 귀녀의 임신사실과 음모를 눈치 챈 최치수가 강 포수와 강제로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여자로서 물리침을 당한 원한', '노비로서 짓밟힘을 당한 원한'에 사무쳐, 서둘러 김평산으로 하여금 최치수를 교살하게 한다. 최치수가 성불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최치수의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결국 윤씨 부인에게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당당하게 사실을 실토한다. 강포수의 헌신적인 옥바라지에 감동하여 모든 죄를 뉘우치고 옥중에서 아들 강두메를 낳은 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는다.

■ 김평산 : '개다리'(무반) 출신의 몰락양반으로 학식도 경제력도 없으면서, 일은 하지 않고 노름판이나 기웃거리는 인물. 게으르며 탐욕스러울 뿐 아니라, 중인출신의 아내 함안댁을 수시로 구타하고, 손버릇이 나쁜 큰아들 거복의 행동을 은근히 조장하는 등 악행을 일삼아 마을사람들로부터 천시당한다. 최치수에 대해 같은 양반 출신으로서의 이상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조준구의 암시를 받아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귀녀와 함께 최치수 살해모의를 하고 삼끈으로 교살하나, 윤씨 부인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잡힌 후에 자신의 죄를 끝까지 부인하며 떠넘기는 등 비굴한 모습을 보인다.

■ 조준구 : 몰락양반의 후예로 최치수의 재종형. 작가가 지적한, 『토지』의 가장 속악한 인물이다. 기질적으로 간교하고 음험하며 교만하다. 먼 친척인 최 참판가에 유하면서 김평산에게 최치수의 살해를 넘지시 암시하여 최치수 살해에 간접적으로 관여한다.

홍씨 : 조준구의 처. 사나운 눈꼬리에 희미한 눈빛, 번들거리는 입술과 어딘지 모르게 불결한 느낌을 주는 외모를 가졌다. 패악스럽고 욕심이 강하며 사치스럽다.

삼월 : 최 참판가의 계집종. 구천을 사모했으나 별당 아씨와 도망간 후 상실감에 젖는다. 조준구가 득세한 후, 그에게 몸을 버리고 홍씨에게 핍박받는다.

삼수 : 최 참판가의 하인. 할아버지 쇠돌이 권한 노루고기를 먹고 최치수의 부친이 죽은 사건 때문에 내내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조준구가 득세하자 그의 하수인으로 최 참판가에 복수하고 신분상승할 욕망을 가진다.

수동 :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우직하고 정이 깊으며 사려 깊다. 마음이 혼란한 구천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으나, 구천이 달아나자 그를 잡으러 최치수의 산행에 따라가는 운명에 처한다. 산행중에는 젊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기도 한다. 구천을 발견하자 놓아주고 강 포수의 오발사고로 성난 산돼지에게 다리를 다친다. 최치수와 윤씨 부인이 죽은 후 조준구로부터 서희를 지키려 한다.


강포수 : 지리산 일대에 이름난 명포수. 무성한 구레나룻에 완강한 골격, 힘줄이 솟은 큰 손등을 가졌다. 이 빠진 주막집 할머니가 주어다 길러 그 성을 따라 강씨이다. 노루사냥설화로 생명의 존귀함을 깨닫고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 최치수가 구천을 쫓으러 산에 갈 때 수동과 함께 동행하며, 오발사고로 수동을 다치게 한다. 이 일로 최 참판가에 머물면서 귀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귀녀가 옥에 갇힌 후 헌신적이고 순수한 사랑을 바치다가 옥중에서 출생한 아이를 거두어 사라진다.

박수동 : 최 참판가의 하인으로 우직하고 정이 깊으며 사려 깊다. 마음이 혼란한 구천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으나, 구천이 달아나자 그를 잡으러 최치수의 산행에 따라가는 운명에 처한다. 산행중에는 젊은이로서의 욕정에 시달리기도 한다. 구천을 발견하자 놓아주고 강 포수의 오발사고로 성난 산돼지에게 다리를 다친다.

또출네 : 평사리의 미친 여자. 아들이 동학당으로 포살되자 실성하여 마을을 떠돈다. 최치수가 살해당하던 날 그곳에 불을 질러 함께 죽는다.


■ 이용 : 평사리의 상민. 부드럽고 자상하며 인색하지 않고 여자를 위해 주는 성품. 월선을 사랑하나 신분차이로 헤어지고, 강청댁과 결혼하나 정을 못 붙이고 자식도 없이 살아간다. 조강지처를 박대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해 결혼에 실패하고 돌아온 월선을 바라보고만 사낟. 하동에서 주막을 하던 월선이 강청댁의 질투로 떠나버리자 심한 갈등을 겪으며 일시적인 무력감에 빠진다.

■ 공월선 : 무당 월선네의 딸로, 백부 공 노인이 사는 용정으로 서희 일행을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용과 평생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는 인물로서 내성적이고 소극적이다. 이용과 서로 사랑하나 천민의 딸이라는 이유로 헤어지고, 이용은 강청댁과 결혼한다. 20살 연상의 봇짐장수에게 시집갔으나 살지 못하고 돌아와, 하동 읍네에서 주막집을 하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이웃집 사내아이인 천석을 양자로 삼으려고 하기도 한다. 가끔 용이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던 중, 강청댁의 행패에 못 이겨 백부인 공 노인을 따라 용정에 가기도 한다.

※ 출처 : 『박경리대하소설 토지 인물사전』
이 인물 사전에는 더 많은 내용들이 실려 있지만, 2권에 나왔던 내용들로만 정리했다. 왜냐하면 이 인물 사전에는 엄청난 스포일러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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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용도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마크 마리 지음 / 1984Books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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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그녀가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가 흔히 찍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 놓치고 싶지 않은 풍경, 맛있는 음식을 담은 사진이 아닙니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에는 '저녁 식사 후에 치우지 않은 식탁, 옮겨진 의자, 전날 밤 섹스를 하다가 아무 데나 벗어던져 엉켜 버린 옷들'(9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M이 떠난 후 잠에서 깨어났다. 계단을 내려와 햇살 속에서 옷가지들과 속옷, 신발이 복도 타일 위에 흩어져 있는 것을 봤을 때, 나는 고통스러운 감정과 아름다움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욕망과 우연이 낳은, 결국 사라져 버릴 이 배열을, 나는 카메라를 가지러 갔다. 내가 했던 일을 M에게 말했을 때, 그 역시 이미 그런 욕구를 느꼈음을 털어놓았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사진 찍기를 계속했다. 섹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물질적인 표상을 보존해야만 했다. 어떤 것들은 관계 직후에 찍었고, 또 어떤 것들은 다음 날 아침에 찍기도 했다. 그 마지막 순간은 가장 감격스러웠다. 우리의 몸에서 벗겨져 나간 것들은 그들이 쓰러져 장소에서 추락한 자세 그대로 밤을 보냈다. 그것은 이미 멀어진 축제의 허물이었고, 낮에 그것들을 다시 본다는 것은 시간을 체감하는 일이었다. 아니 에르노, 9~10쪽

   늘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 글을 써왔던 아니 에르노.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을 꺼내놓고, 그와 함께 글을 썼습니다. M과의 관계 후 남겨진 흔적들을 카메라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인위적으로 옷이나 신발의 위치를 바꾸지 않고, 벗어놓은 그대로 찍습니다. 그렇게 찍은 40장의 사진 중 14장을 골라낸 뒤 각자의 글을 씁니다. 그 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 서로에게 공유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둘 사이에 규칙이 생겼다. 옷의 배치에 손대지 않을 것. 하이힐이나 티셔츠의 위치를 바꾼다는 것은 거짓을 조작하는 일이고 ─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기장 속 단어의 순서를 바꾸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다 ─, 우리 사랑 행위의 실재를 해치는 방식이었다. 아니 에르노, 10쪽

   사진 속 피사체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입니다. 낡은 부츠, 하이힐, 청바지, 셔츠, 원피스, 속옷... 그러나 그것들의 무질서한 배열을 보고 있으면, 격렬했던 그들의 지난밤이 그려집니다. 침실도 아닌 현관 복도 앞에 흩어져 있는 옷들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격정적이었는지, 신발끈을 풀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부츠 때문에 그의 마음은 또 얼마나 조급했을지.
   그들은 이렇게 내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일상적인 물건들만 사진 속에 담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들은 더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상대방이 어떤 글을 썼는지도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나는 우리가 그보다 더 나은 것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 그것은 하나가 되었다가 또다시 분리되는 행위다. 가끔 두렵기도 하다. 글이라는 자신의 공간을 내놓은 일은 자신의 성기를 내놓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다. 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어떤 무의식적인 전략이 이미 실행되었을까. 단어와 문장을 견고하게, 꿈적이지 않는 문단을 만드는 것. 어린 시절 가끔 내 몸이 돌이 되었던 것처럼, 그리고 방의 벽들이 끝없이 멀어졌던 것처럼 ─ 나중에 철학 수업 시간 이것이 조현병 증상이란 것을 배우게 됐는데, 놀라기는 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아니 에르노, 49쪽

   M을 만났을 때, 그녀는 유방암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발을 쓰지 않은 머리도, 치료 때문에 기구를 끼고 있는 가슴도 M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녀는 "그가 암을 뛰어넘는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70쪽)했습니다. 그러면서 "옛날 결핵이 그러했듯이 암도 로맨틱한 병이 되어야 한다고"(101쪽)도 말합니다. M과 함께했던 그 시절의 그녀는, 분명 로맨틱했습니다. 그녀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진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을 구현하는지는 알지만 용도는 알지 못한다. 마크 마리, 168쪽

   사진을 찍은 당사자도 모르겠다고 한 『사진의 용도』에 대한 의문점은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1940~)와 마크 마리(1962~)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이 이야기도 언젠가는 그녀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을까요? 사실 근황보다는 어떻게 만났는지가 더 궁금하긴 합니다만.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이다! ─ 조르주 바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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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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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
   파우스트는 괴테가 24세에 쓰기 시작해 죽기 직전인 82세에 완성한 인생작입니다. 이런 거대한 작품을 단 며칠만에 읽고 몇 자로 정리한다는 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다음을 위해 지금의 생각들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분명 몇 년 후 다시 읽게 되면 다른 생각들이 떠오를테니까요.)

   『파우스트』는 12,111행에 달하는 희곡으로 작품 전체의 서곡에 해당하는 「헌사」와 단장, 전속 시인, 어릿광대가 등장하는 「무대에서의 서연」, 그리고 주님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가 소개되는 「천상의 서곡」으로 시작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 내기를 할까요? 당신은 결국 그 자를 잃고 말 겁니다.
   허락만 해주신다면
   녀석을 슬쩍 나의 길로 끌어내리리이다.

   주님 :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 
   (…) 그의 영혼을 그 근원으로부터 끌어내어,
   만일 그것을 붙잡을 수 있다면,
   어디 너의 길로 유혹하여 이끌어보려무나.
   하지만 언젠가는 부끄러운 얼굴로 나타나 이렇게 고백하게 되리라.
   착한 인간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 잘 알고 있더군요, 라고.
   ─ 「천상의 서곡」, 23~24쪽

   주님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인간 '파우스트'를 두고 내기를 합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 파우스트를 메피스토펠레스가 온갖 방법으로 유혹해 쾌락 혹은 타락의 길로 빠트리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인간 '파우스트'의 본성을 믿었기 때문에 파우스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어떤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유야 어찌됐든 주님의 이런 방식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결국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한 인간의 삶에 개입하게 된 것이니까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을 허락하면서 말이죠.

   다음으로 이어지는 「비극 제1부」에서는 회의에 빠진 파우스트가 등장합니다. 그는 학문을 통해서는 우주의 본질을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합니다.

   파우스트 : 내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신은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움직일 수 있지만,
   내 모든 힘 위에 군림하는 신은
   바깥을 향해선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리하며 내겐 존재한다는 것이 짐이 되고,
   죽음이 바람직할 뿐, 인생이 역겹구나.
   「비극 제1부」 90쪽

   그때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파우스트에게 제안을 합니다. 이 세상에선 자신이 파우스트의 종이 되어 파우스트가 온갖 즐거움과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줄테니 저 세상에서는 반대로 파우스트가 자신의 종이 되어 똑같은 일을 해달라는 겁니다. 이미 이 세상에서 회의에 빠진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합니다.

   메피스토펠레스 : 이 세상에선 내가 하인 노릇을 하며
   당신의 지시에 따라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그 대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땐,
   당신이 내게 같은 일을 해주셔야 합니다.
   파우스트 : 저 세상 따위는 개의치 않네.
   자네가 우선 이 세상을 박살내 버린다면,
   다음에 어떤 세상이 생겨나든 무슨 상관이겠나.
   이 땅에서만 나의 기쁨이 샘솟고,
   이 태양만이 내 고뇌를 비춰줄 뿐일세.
   이것들과 우선 헤어질 수 있다면
   그 다음엔 무슨 일이든 될 대로 되라지.
   미래에도 증오와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 세상에도 역시
   상하의 구분이 존재하는지,
   그런 이야길랑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네.
   「비극 제1부」 94쪽

   파우스트 : 이건 엄숙한 약속이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한다면,
   그땐 자네가 날 결박해도 좋아.
   나는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비극 제1부」 95쪽

   메피스토펠레스는 우선 파우스트에게 마녀의 약을 마시게 해 그를 청년으로 만들어 줍니다. 20대 청년이 된 파우스트는 아름답고 순수한 처녀 그레트헨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레트헨은 한 눈에 메피스토펠레스가 악마임을 알아보았고, 그레트헨의 순수함은 쾌락에 빠진 파우스트의 마음까지 정화시켜 줍니다. 이에 메피스토펠레스가 농간을 부려, 그레트헨은 어머니를 죽이고 파우스트는 그녀의 오빠를 죽이게 만듭니다. 파우스트는 감옥에 갇힌 그레트헨을 구하러 가지만, 그레트헨은 파우스트를 용서하며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때 메피스토펠레스는 그녀가 심판받았다고 말하지만, 위로부터 들려온 목소리는 "구원받았노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비극 제1부」는 그레트헨의 비극으로 끝이 납니다.

   파우스트 : 무지개는 인간의 노력을 비춰주는 거울.
   그것을 보고 생각하면,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하리라.
   인생이란 채색된 영상 속에서 파악된다는 사실을.
   「비극 제2부」 16쪽

   「비극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전 속 최고의 미녀인 헬레나와 사랑에 빠져 아들 오이포리온까지 낳지만, 오이포리온은 이카루스처럼 추락해 죽고 헬레나도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파우스트는 엄청난 땅과 재산을 가졌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만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는 늙은 노인들이 쉬고 있는 보리수 나무 그늘까지 욕심냅니다.

   파우스트 : 저 언덕 위의 노인들을 몰아내고
   보리수 그늘을 내 자리로 삼고 싶다.
   내가 갖지 못한 저 몇 그루 나무들이
  세계를 차지한 보람을 망치고 있구나.
   저곳에서 사면을 둘러보도록
   나뭇가지 위에 발판을 만들고 싶다.
   멀리까지 시야가 터지게 해서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바라보겠다.
   현명한 뜻으로 백성을 위해
   넓은 복지의 땅을 마련해 준
   인간 정신의 걸작품을
   한눈에 둘러보고 싶단 말이다.
  
   부유한 가운데 결핍을 느낀다는 건
   우리의 고통 중에 가장 혹독한 것이다.
   「비극 제2부」 348~349쪽

   백 살 가까이 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실현시켜 준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순간의 쾌락은 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에게 땅을 마련해 주기 위해 드넓은 땅을 비옥한 땅으로 개간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외칩니다. 오래전 메피스토펠레스와 자신이 한 계약을 매듭짓는 외침을 말입니다.

   파우스트 :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에 둘러싸이더라도 여기에선
   남녀노소가 모두 값진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군중을 지켜보며,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과 살고 싶다.
   그러면 순간을 향해 이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이같이 드높은 행복을 예감하면서
   지금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있노라.

   메피스토펠레스 : 어떤 쾌락도 행복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변화무쌍한 형상들만 줄곧 찾아 헤매더니,
   최후의 하찮고 허망한 순간을
   이 가련한 자는 붙잡으려 하는구나.
   내게는 억세게도 항거한 놈이지만,
   세월 앞엔 별수없이 백발이 되어 모래 위에 누웠구나
   시계는 멈추었다 ─
   「비극 제2부」 363~364쪽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죽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갖지 못합니다. 구원 받은 그레트헨이 파우스트도 구원해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와 맺은 계약만 마무리된 것이지 사실 주님과 맺은 내기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가 진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그렇게 유혹했는데도 결국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길로 가지 않았고, 주님은 살아있는 동안만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파우스트가 죽은 이후에 개입해 그를 구원해 준 것도 내기의 기본 룰을 어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쓴 작품이라 배경이나 메시지가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지 못하고 다소 산만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대에서의 서연」에서 이미 단장의 입을 통해 살짝 주지시켜 준 부분이기도 합니다.

   단장 : 우리 독일 무대에서는
   누구나 원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으니
   오늘은 배경이건 소도구건
   마음대로 사용해 보자고.
   (…) 천국에서 현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기까지.
   「무대에서의 서연」 17~18쪽

   아무리 괴테의 인생작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한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썼을 때의 괴테의 나이와 상황을 생각한다면, 또 비슷한 시기와 상황을 지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연결시켜 본다면 새겨두고픈 문장들도 많습니다.
   괴테가 그랬듯이, 『파우스트』를 읽는 우리들도 단 며칠동안 단숨에 읽어버릴 것이 아닌,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공들여 읽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첫째 여인 : 내 이름은 결핍이에요.
   둘째 여인 : 나는 죄악이라고 해요.
   셋째 여인 : 내 이름은 근심이에요.
   넷째 여인 : 나는 곤궁이라고 하고요.
   셋이 함께 : 문이 닫혀서 들어갈 수 없군요.
   안에는 부자(富者)가 살고 있어서 들어가기 싫네요.
   근심 : 언니들은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서도 안 돼요.
   근심인 나는 열쇠구멍으로 살짝 들어가지만요.
   「비극 제2부」 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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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뒷북소녀 > 고문(古文)과 금문(今文) 중 어느 것을 따라야 할 것인가.

11년전 11월 15일엔 참 부지런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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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1-15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땐 ‘알라딘 서재‘가 있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저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남기고 계셨군요. ^^
 
 전출처 : 뒷북소녀 >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이선 프롬,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용기

알라딘서재에 새로 생긴 기능인가?
11년 전 오늘, 내가 쓴 리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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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앙마 2018-11-16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 요거 어찌 하는 거임? ㅋㅋㅋㅋ

뒷북소녀 2018-11-16 18:13   좋아요 0 | URL
요거 페북처럼 예전에 제가 쓴 날짜되니까 자동으로 뜨더라구요. 북플 어플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