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클래식 수업 8 - 차이콥스키, 겨울날의 찬란한 감성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8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리처럼 섬세하고 깨지기 쉬운 감성의 소유자라 오히려 좋아!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은 "연주회에서 누구보다 먼저 당당하게 박수 치고 싶었던 당신, 한 번쯤은 교향곡을 제대로 감상해 보고 싶었던 당신, 클래식을 이해하고 싶었지만 악보만 보면 머리가 아픈 당신, 듣고 나서 "좋다" 말고 다른 표현을 해보고 싶었던 당신, 그리고 음악을 들으면 왠지 마음이 술렁이는 사람을 위한 책"을 표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대학교 작곡과에서 음악 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프랑스 음악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민은기 교수로,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책을 가장 많이 낸 음악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고 한다.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의 8번째 음악가는 '겨울날의 찬란한 감성'을 오케스트라 선율로 표현해 낸 러시아 대표 작곡가 차이콥스키다. 차이콥스키가 작곡한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이 워낙 유명해서 직접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도 대중가요나 광고 등을 통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차이콥스키의 음악뿐 아니라 그보다 덜 알려진 그의 개인사와 러시아 음악사까지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 법학을 전공한 차이콥스키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웠고, 유리처럼 섬세하고 깨지기 쉬운 감성의 소유자였다. 덕분에 우리는 귀 호강을 하고 있지만 차이콥스키 개인에게는 행복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작곡가의 길을 걷던 차이콥스키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콜레라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오를로바라는 음악학자는 '명예 법정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법률학교 동문들이 학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동성애자인 차이콥스키에게 자살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최후의 걸작을 먼저 완성한 뒤에 죽겠다고 약속하고서 <교향곡 6번>을 초연하자마자 비소를 먹고 죽었다는 게 오를로바의 주장이다. 이 비소를 복용했을 때의 증상이 콜레라 증상과 비슷하다고 한다.

클래식 불모지에서 태어나 세계 최고의 음악가로 꼽혔던 차이콥스키가 죽은 후 러시아 음악계는 어떻게 됐을까? 다행히 러시아는 이전의 러시아가 아니었다. 음악원을 통해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꾸준히 한 덕분에 차이콥스키 사후에도 러시아 음악은 계속 성장할 수 있었고, 그의 두를 잇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계속 등장했다. 뛰어난 기교를 가진 라흐마니노프를 비롯해 스크랴빈,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이 바로 그들이다.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은 음악을 바로 찾아 들을 수 있는 QR코드, 사진과 그림 자료가 풍부하게 실려 있어서 입체적으로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쉽게 읽힌다는 것. 심지어 독자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 봐 각 챕터마다 요약한 필기노트도 실려있다.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까지 할 수 있다. 이토록 쉽고 친절한 책이라니! 전 시리즈를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의 연극 을유세계문학전집 130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이 지음, 홍재웅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번 나는 시도해 보았다!

만약 이것이 실패한다면, 그때가 다시 시도할 때일 것이다! _ 31쪽

『꿈의 연극』은 '스웨덴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의 대표작 가운데 두 작품을 묶은 책이다.

「미스 줄리」는 '자연주의'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으로, 당시 보수적이었던 스웨덴 사회가 이 작품의 상연을 허용하지 않아 초연은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연극의 무대는 하지절 전야, 백작의 부엌이다. 백작의 딸 '미스 줄리'가 하인 '장'과 요리사 '크리스틴' 사이에 끼어든다. 하지절 파티 때 장은 크리스틴의 춤 파트너가 되어주기로 약속했는데, 미스 줄리가 자신의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제안한다. 장은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을 걱정하지만 미스 줄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에게 플러팅을 보낸다. 장은 미스 줄리의 플러팅을 사양하는 척하면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다. 미스 줄리를 처음 봤을 때 사랑에 빠졌으며 죽을 결심까지 했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백작의 부엌으로 몰려오자 미스 줄리는 장의 방으로 몸을 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이 벌어진다. 다음날 새벽, 미스 줄리를 취한 장의 태도가 돌변한다. 미스 줄리 역시 돌변한 장의 태도에 당황한다. 자신이 모시던 미스 줄리와 장 사이에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눈치챈 크리스틴은 더 이상 존경할 수 없는 주인을 모실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절은 스웨덴의 전통 명절로, 젊은 미혼 여성이 하지절 전야에 아홉 종류의 꽃을 꺾어서 베개 밑에 넣고 자면 꿈속에서 자신의 미래 배필감을 보게 된다는 전설과 함께 에로틱한 의식이 행해지는 날이라고 한다.

이렇게 에로틱한 의식이 행해지는 날, 신분이 다른 두 남녀(심지어 그들은 꿈도 상반된 꿈을 꾼다)가 서로를 희롱하고 농락했으니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스 줄리 : 가끔 꾸는 꿈이 있는데 지금 그 꿈이 생각나ㅡ기둥 위에 올라가 앉았는데, 내려갈 방법이 없는 거야. 아래를 보면 아찔해. 내려가야 되는데, 뛰어내릴 용기는 없어. 더 이상 내가 있는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 너무 뛰어내리고 싶어. 근데 그게 안 돼. 내려가기 전까진 안식도 없고, 쉴 수도 없어. 내려갈 수만 있다면 날 땅에 묻어 버리고 싶은데 …… 이런 거 혹시 알아?

: 아뇨! 전 어두운 숲속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누워 있는 꿈을 종종 꿔요. 거길 기어오르고 싶어요. 오르고 올라서,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햇빛이 찬란한 경관을 둘러보고, 새 둥지에 있는 황금 알을 훔쳐 보고 싶어요. 전 올라가고, 또 올라가는데 나무는 너무 굵고 미끄럽고, 첫 번째 가지까진 아직도 멀었어요. 첫 번째 가지에만 닿을 수 있다면 꼭대기까지는 사다리 오르는 것처럼 수월하리라는 걸 압니다. 아직 거기 닿진 못했지만, 전 언젠가 그곳에 오를 겁니다. 비록 꿈속에서라도요.

_「미스 줄리」, 48쪽




표제작 「꿈의 연극」은 스트린드베리가 가장 사랑한 작품이자, 연출가라면 누구나 꿈꾸어 보는 작품이라고 할 정도로 어려우면서도 많은 가능성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인드라(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삼주신인 브라흐마, 비슈뉴, 시바를 제외하면 신화 내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신으로 인도 신화에서 신들의 왕으로 불린다.)의 딸이 '사람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가장 어둡고 무거운 땅인 지구로 내려와 경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드라는 딸에게 사람들의 불평을 듣고, 그들이 비통해하는 이유와 원인도 알아보라고 한다. 인드라의 딸은 '자라나는 성'에서 장교를 구해주고, 변호사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이혼한다. '사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시인'을 만나서 '꿈'과 '시'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지막에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각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불에 태워 버린 후 퇴장한다. 인드라의 딸은 신발을 벗어 불속에 넣는다. 이제 사람들의 고통을 모두 들여다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여행을 끝낼 때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작가는 「꿈의 연극」을 "일관성이 없지만 논리적으로 보이는 꿈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은 1901년인데, 1900년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나왔다. 제목에서부터 그들이 말하는 꿈의 특성까지 유사성이 보인다.

프로이트는 "꿈은 일관성이 없고, 가장 큰 모순을 쉽게 조정하며, 불가능한 것을 허용하고, 당대의 영향력 있는 지식을 제쳐두고, 우리가 윤리적, 도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라고 설명한다.

_「해설」, 241쪽

시인 :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것 같아요…….

딸 : 저도요!

시인 : 꿈을 꾼 걸까요?

딸 : 아니면 시를 쓴 건지도요, 어쩌면!

시인 : 시를 쓴 건지도요!

딸 : 그러면 당신은 시가 무엇인지 알겠군요!

시인 : 나는 꿈이 무엇인지 알아요!

딸 : 전에 우리가 다른 곳에 서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시인 : 그러면 현실이 무엇인지 곧 알아낼 수 있어요!

딸 : 아니면 꿈!

시인 : 아니면 시!

_「꿈의 연극」, 쪽

'스트린드베리'라는 이름이 다소 낯설 수도 있는데, 우리에게 낯선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해 소개하는 것이 <을유세계문학전집>의 매력이다. 고전의 멋스러움을 더하는 브라운 톤의 표지 디자인은 덤이다. 앞으로도 <을유세계문학전집>을 통해 다른 세계문학전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작품들을 볼 수 있기를 응원한다.

✎ 밑줄긋기

인생이 그렇지! 무언가 아름다운 것을 행하면 항상 추한 것이 옆에 있고…… 무언가 선함을 행하면, 다른 사람에겐 유해하지. _「꿈의 연극」, 115쪽

인간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대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요. _「꿈의 연극」, 176쪽

모든 인생은 재연일 뿐이에요……. _「꿈의 연극」, 177쪽

모든 사람이 똑같을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요? _「꿈의 연극」, 18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교만한 우리에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가끔 자신의 고통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이다. 과연 이해할 수 있다, 공감한다, 이런 말을 감히 건네도 되는 건지. 혹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들려줘도 되는 건지.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은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고통이 가지고 있는 성질 때문이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정돈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를 한다.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자신의 고통을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고통에 대해 가지런히 정리해서 전달한다면 냉정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문장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읽다 보면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 집중이 되지 않고,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해서 산만하고 당황스러운데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고통스러운 경험을 듣게 된다면 바로 그런 식으로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장 자체가 고통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소련 하르키우에서 태어나 10대 때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와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함께 탐구하며 그 과정을 독특한 산문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주목받았다.




<암실문고>는 '서로 다른 색깔의 어둠을 하나씩 담아 서가에 꽂아 두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암실문고> 시리즈는 처음인데 저자의 문장만큼 디자인이 독특하다. 처음에는 컨셉인 줄도 모르고 인쇄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깜짝 놀랐다. 이것 역시 의미가 있는 컨셉일까? 이를테면 희미했던 일들이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선명해진다는 그런 의미일까.


인간들은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그 고통이 참을 수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모든 선택지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언제 찾아올까? 철조망 속에 갇힌 상황에서는 어디로 움직여야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_1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키는 소설가이면서 여러 작품을 번역해서 발표한 번역가이다.

그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집 마이로스트시티였고, 몇 권의 소설집을 엮어 낸 후에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 내가 피츠제럴드와 개츠비를 알게 된 것도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통해서였다. 이 소설에는 개츠비를 애정하는 인물이 한 명 등장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개츠비를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지"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10월의 일이었다.


나가사와 선배는 잘 알면 알수록 묘한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이한 사람과 만나고, 서로 알고, 스쳐 지나왔지만, 그처럼 기이한 사람을 만난 적은 아직 없다. 그는 나 같은 사람은 따라잡을 수도 없을 정도의 굉장한 독서가였는데, 죽어서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에는 원칙적으로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 외에는 신용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뿐이지. 인생은 짧아."


_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58~60쪽



나의 책읽기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후부터 달라졌다. 나 역시 이전에는 현대문학을 신뢰하지 않았고, 특히 고전이 아닌 외국 현대문학은 읽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기준이 달라져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는 하루키가 고른 8편의 단편소설과 5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다. 이 조합을 어떻게 안 읽을 수가 있을까. 나는 이 조합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좋아하는 작가를 향한 애정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든, 번역을 통해서든 맘껏 뽐낼 수 있는 하루키가 부럽다. 


✏️

이 책을 위해 내가 고르고 옮긴 작품은 주로 그가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축내며' 살았던 암울한 시대에 내놓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깊은 절망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그리고 어떻게든 희미한 광명을 움켜쥐려는 긍정적인 의지가 줄곧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피츠제럴드의 작가로서의 강인한 본능일 것이다. 자기 연민이나 자기기만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을 이 책에 수록된 작품에서 독자가 느끼고 읽어낼 수 있다면, 번역자로서 이보다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_ 하루키, 36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짜 환자, 로젠한 실험 미스터리 -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정신의학사의 위대한 진실
수재나 캐헐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온전한 정신과 정신이상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저자 수재나 캐헐런은 스물네 살에 삶을 뒤흔드는 오진을 경험한다. 그녀의 실제 병명은 '자가면역 뇌염'이었지만 의사들은 '조현병'이라고 진단했다. 정신병원에 입원할 뻔했지만 한 의사 덕분에 진단을 정정 받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그녀는 궁금했다. 자신은 운 좋게도 유능한 의사를 만나 오진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신과는 달리 오진의 희생자가 된 환자가 있지 않을까? 그러던 중 그녀는 스탠퍼드 대학의 교수였던 데이비드 로젠한 이 발표한 실험에 대해 알게 된다.


정신질환이란 대체 무엇일까? 온전한 정신과 정신이상을 구별하는 문제, 심지어는 정신질환을 정의하는 문제조차도 그저 의미를 따지는 문제를 넘어선다. 집중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떤 전문가들이 여러분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게 되느냐를 넘어서는 문제다. 이런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느냐 아니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즉 약물을 어떻게 처방할지, 어떻게 치료할지, 보험 처리를 어떻게 할지, 병원에 입원시켜 어떻게 감시하고 누구를 감금시킬지 정하는 기준이 된다. 의사들이 나를 정신질환이 아니라 기질성 질환이라고 진단했을 때, 그 말은 내가 다른 의학으로부터 격리되지 않고 목숨을 살리는 치료를 받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_ 23쪽


"온전한 정신과 정신이상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까?" 데이비드 로젠한은 이런 의문을 품고 실험을 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당시만 해도 객관적이고 일관된 척도 없이 오직 의사의 판단으로만 정신질환을 진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젠한은 8명의 가짜 환자를 정신질환자로 위장해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다음 그 실험 결과를 세계적인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게재했다. 그럴 것이라고 짐작만 하고 있던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고, 그로 인해 정신의학은 큰 위기를 맞이한다.

이 실험에 참여한 가짜 환자들의 행방을 추적하던 캐헐런은 놀라운 사실과 마주한다. 로젠한이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실험 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로젠한을 존경해서 그의 실험을 추적하던 캐헐런에게는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의학자도 아닌 로젠한은 왜 결과까지 조작하면서 이런 논문을 발표한 것일까.


데이비드의 명성은 많은 업적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빛나는 하나가 있습니다. <사이언스>에 발표한 그의 글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내기」의 첫 문장은 그의 영원한 정체성인 예시바 학생이 경전을 낭독하듯이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온전한 정신과 정신이상이 존재한다면…… 대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까?"_429쪽


이 책에는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자주 언급된다. 켄 키지의 소설 역시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가짜 환자 맥머피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정신의학이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보다 사회의 편에 서서 사용되고 있는 방식에 근본적인 불신을 보여주며, 정신의학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강화시켰다고 한다.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 대신 지역사회와 가정으로 돌려보내서 적응할 수 있도록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신병원 수만 줄어 들었고 그들은 오히려 지역사회에서 방치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신질환 진단도 바뀌고 있지만, 정신질환을 겪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늘어가고 있다. 과잉진단과 과잉처방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진단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다. 정신질환은 아주 작은 차이만으로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캐헐런은 정신의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돌봄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로젠한의 실험을 추적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의 정신의학 실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유익한 책이었다.


믿음은 정신 의학이 잃어버린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_42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