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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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 Every Fear,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공포'와 '폭력'!
   히치콕 감독은 영화에서 극적인 전개를 위해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의문에 빠트리는 장치를 미리 보여줘 관객이 스스로 추리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잡지 못하게 하는 히치콕식의 속임수 장치'맥거핀(Macguffin)'이라 하는데 사건, 상황, 인물, 소품 등이 모두 맥거핀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전작인 『죽여 마땅한 사람들』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 피터 스완슨이 이번에는 히치콕 스타일의 서스펜스를 표방하는 소설을 선보였습니다. (사실 히치콕 스타일이 뭔지 몰라서 글로 배웠습니다. 영화를 찾아서 볼 시간은 없었구요.)
   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는데, 304호 여자가 먼저 등장합니다. 데이트폭력으로 악몽에 시달리며 외출 조차 맘 놓고 할 수 없었던 케이트는 6개월 동안 얼굴도 모르는 육촌(원서 표현이 궁금한 단어입니다)과 집을 바꿔서 생활해 보기로 합니다. 런던에서 보스턴으로 날아온 첫 날, 303호 여자가 죽었고 육촌의 집은 바로 304호입니다. ㄷ자 구조의 아파트라 303호 건너편에 있는 312호에서는 303호가 보인다고 합니다. 312호 남자는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거의 집착하듯이 303호 여자를 창문으로 지켜봤다고 고백합니다. 외부인이 출입할 수 없는 탓에, 죽은 여자의 전 남자친구라는 수상한 남자가 아파트 근처를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육촌의 집에서 304호 열쇠까지 나타납니다. 여러 정황들이 그녀의 육촌이 죽은 여자의 남자친구라고 말하고 있는데, 혹시 케이트는 지금 살인자의 집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케이트의 남자친구 또한 케이트를 죽이려고 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이 소설의 특성상 더이상의 줄거리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케이트가 겪고 있는 '공포'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한국어 제목과는 다른 『Her Every Fear』입니다. 케이트는 전 남자친구의 집착과 살해 위협으로 불안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위협할 수 있는 남자친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케이트의 증상은 나아지지가 않습니다. 원래 앓고 있던 공황 장애는 더 심해졌고, 심지어 머릿 속에는 온통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생각 뿐입니다.

   케이트는 유리 테이블을 싫어했다. 물건을 올려놓을 때마다 유리가 박살나거나 적어도 금이 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곧 다가올 비극적인 순간에 살았다. 따라서 낮은 난간 앞에 서거나, 차들로 붐비는 도로를 건너거나, 수북이 쌓인 접시를 들고 가는 웨이터를 보면 질색했다. 짜증 나고 골치 아픈 공포증이었다. 그러다 5년 전, 조지와의 사건이 터지면서 케이트의 삶은 영원히 바뀌었다. 그녀는 일 년 넘게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아니, 단순히 못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나간다고 상상만 해도 공포와 슬픔으로 몸이 마비되었다. 부모님과 심리치료사가 케이트를 서서히 그 구멍에서 끌어냈고, 삶은 한결 나아졌다. 38쪽

   이렇게 조금 나아진 케이트가 겨우 용기를 내어 한 것이 이번 여행인데, 또다시 공포와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나 또한 약간의 불안 증세가 있지만, 이 소설에는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온갖 '공포'가 모두 등장합니다. 살인, 데이트 폭력, 관음증에 가스라이팅까지. (물론 우리 여성이 느낄 수 있는 공포는 훨씬 더 많지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케이트의 '공포'에 얼마나 공감했는지 모릅니다. 우리집이 보스턴에 있는 육촌의 집처럼 여러 개의 방과 창고를 가진, 운동장처럼 넓은 집도 아니며 벽장도 없고 현관 외에는 외부로 통하는 다른 비상구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하지만 샌더스 같은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은 정말 아쉽습니다. 누군가 몰래 숨어들더라도 샌더슨이 있다면 분명 할퀴어 줄테니까요.

   이 소설은 모든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문이 생겼다면, 또 다른 등장인물이 등장해 해결해 줍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매순간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일종의 '맥거핀'을 심어두었기 때문입니다.

   반은 코빈의 몫, 반은 내 몫, 둘이 공평하게 반반. 380쪽

   이 문장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문장인지, 이 소설이 얼마나 긴장감이 넘치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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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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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걸까요?

   미친 듯이 웃긴다. 큰 소리로 웃었다. 엄청나게 웃긴다.
   먹방계의 빌 브라이슨 ─ 띠지 카피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라는 부제에 이런 카피 문구가 있으니, 게다가 언젠가 한번쯤 가고픈 북유럽에 대한 탐방기라니,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 그동안 미뤄뒀던 북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당장이라도 끊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 책의 소감을 띠지 문구처럼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미치겠다. 화가 났다. 엄청나게. 그렇습니다. 저는 '거의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귀가 꽤 두꺼운 편이라 홍보문구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편인데, 요즘들어 계속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는 오로라 때문인지 너무 쉽게 속았습니다.
   읽고 또 읽어도, '미친 듯이 웃긴' 포인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빌 브라이슨과 비슷한 어조로 말하는 것 같지만 시니컬하기만 할 뿐 재치가 부족해 보입니다. 마이클 부스는 북유럽 5개국 사람들은 꽤 딱딱하고 지루한 타입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자신도 북유럽 5개국 중 하나인 덴마크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내 때문이지 자신은 영국 사람이라면서 점잔을 떨며 한발 물러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미 북유럽 사람들에게 동화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 역시 딱딱하고 지루하니까요. '먹방계의 빌 브라이슨'이라는 수식어는 정말 과분할 정도입니다. 사실 그도 억울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이런 수식어들은 작가 자신이 아닌 편집자나 출판사에서 붙였을테니까요.

   꽤 두꺼운 편이지만, '미친 듯이 웃긴' 포인트를 찾아 읽고 또 읽은게 아까워서 꾸역꾸역 읽었습니다. 사실은 이 책에 붙은 수식어를 믿고 첫 장부터 과감하게 밑줄을 긋는 바람에 중고책으로라도 팔 수 없어서, 그게 아까워서 읽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핀란드인이나 아이슬란드인은 스칸디나비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는 원래 바이킹의 나라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을 가리키는 용어다. 하지만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바로는 핀란드인은 옛 약탈자 집단에 들어갈지 말지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거기에 어울리기도 하지만, 아이슬란드인은 스칸디나비아로 분류되면 길길이 날뛸 것이란 점이다. 엄밀히 말해 다섯 나라를 통칭하면서 사실 '북유럽 Nordic'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 23쪽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라는 부제 때문에 여행기나 에세이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책은 북유럽의 아름다운 풍경이 담긴 사진 한 장 실려있지 않은 책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전반에 걸쳐 냉소적이지만 진지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는 자연 경관이 멋지고 복지가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기 좋은 곳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살인적인 세금,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아 불편증을 앓고 겨울에는 반대로 해가 뜨지 않아서 만성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 평범하게는 살 수 있지만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의 무덤, 사소한 것까지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답답함과 집착,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생각보다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지 않은 곳. 이 책을 읽고나니 당장 북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대신 눈 내리는 겨울에 가면 밤만 보게 돼서 덩달아 나까지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아 주저하게 됐습니다.

   살인적인 날씨, 극악무도한 세금, 너무 뻔한 단일 민족 사회, 별 볼일 없는 시민 합의에 대한 숨 막히는 집착, 규범을 벗어난 모든 대상과 사람을 향한 공포, 야망을 불신하고 성공을 멀리하는 태도, 처참한 공중도덕, 돼지고기 비계 부위를 향한 끝없는 식탐, 짜디짠 감초사탕, 싸구려 맥주와 마지팬까지. 하지만 나는 경계하면서도 약간은 당혹스러운 시선으로 덴마크의 행복 현상을 주시했다. 10쪽

   '기대'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만약 '미친 듯이 웃긴'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북유럽을 인문학적인 관점에서 다룬 책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것보다는 볼만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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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9-05 2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기대를 많이 하신 것 같습니다 -

기운을 빼고 읽으신다면 나름 재밌을 책인데
˝미친 듯이 웃긴˝ 포인트가 웬쑤네요.

노르웨이가 엄청난 산유국이라는 점,
스웨덴을 비롯한 노르딕 칸츄리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지천국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 정도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뒷북소녀 2018-09-06 10:4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기대를 너무 했던 것 같아요.
사실... 내용은 좋았어요.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것과는 너무 다른 나라여서요.
그런데... 정말 미친 듯이 웃긴 포인트는 없었단 말이죠.
왜 먹방계의 빌브라이슨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사실... 음식 이야기는 많이 안 다루고 있잖아요.
제가 봤을 땐 출판사 편집사가 100% 잘못한 거 같아요.
그래도 이 책... 레삭매냐님 글 보고 읽었다는. 감사합니다.^^
 
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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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는 진심!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진심!
   인터넷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갑질 사건'이 올라옵니다. 육군 대장도 모자라 그의 부인까지 공관병과 운전병에게 온갖 잡일을 시키고, 땅콩 하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고 비행기를 돌리라고 하질 않나, 라면 하나 잘못 끓였다고 폭행을 합니다. 그렇게 지체 높은 분들이, 그런 상스러운 짓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합니다.

   B항공사의 2년 차 스튜어디스였던 '유나'는 비즈니스 객실의 한 손님으로부터 정말 황당한 질문을 받습니다.

   ─ 스튜어디스는 중력 때문에 가슴이 처졌다던데. 사실이오? 30쪽

   유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유나는 행동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따귀를 맞았습니다. 유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그 질문을 받은 사람이 승무원이 아니라 같은 승객이었다면, 질문을 한 손님이 성희롱으로 처벌을 받았을까요?
   그렇게 B항공사에서 5년을 버텼던 유나는 어느 날 차를 몰고 저수지로 향합니다. 저수지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저수지로 내달렸습니다. 그동안 유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내몰만큼 힘든 일이었을까요?

   유나가 왜 혼자 그 길을 걸어야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유나는 차를 몰고 편도 1차선 도로를 달렸고 그대로 저수지에 들어갔다. 부검 결과 역시 명백하게 익사였다. 블랙박스를 판독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으나 모든 결과는 유나가 스스로 저수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었다. 17쪽

   유나의 아버지 '정근'은 공군에서 불명예 제대한 이후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10년 만에 들은 딸의 소식이 '자살'이었습니다. 유나는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일기를 남깁니다. 유나는 왜 아버지에게 일기를 남겼을까요?

   아빠, 여기서 실패하면 군말 없이 삶으로 돌아갈게요.
   빛 들지 않는 방으로.
   직장으로 갈게요. 9쪽

   장례식장에서 만난 유나의 친구들과 함께 '정근'은 딸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의 이야기로는, 유나가 유부남인 부기장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 때문에 회사로부터 추궁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부기장을 만나지만, 부기장은 그저 유나가 친했던 스튜어디스 동료를 꼭 만나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유나의 동료는 끝끝내 그들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유나가 중학생이었을 때, 공군 대령이었던 아버지에게는 운전병이 있었습니다. 운전병은 아버지 뿐아니라 유나까지 데려다 주곤 했고 유나 엄마의 차도 운전했습니다. 그 운전병에게는 임신한 아내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유나의 집에서 유나의 엄마와 함께 틈틈히 이런 저런 일들을 했습니다. 
   어느날 집에 혼자 있던 운전병의 아내에게 통증이 찾아왔습니다. 아내의 소식을 들은 운전병은 아버지에게 먼저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화를 내며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날밤 운전병의 아내는 유산을 하고 맙니다. 대령의 가족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랐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결국 상처 뿐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던 유나는 운전병과 그의 아내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대신 사과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운전병과 그의 아내는 유나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대령 가족을 위해 애쓰는 일들을 유나는 당연하다는듯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나는 고마워하고 미안해 했고, 두 사람은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B항공사에 입사한 유나는 그곳에서 조종사 노조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부기장, 그러니까 20년 전의 운전병 아저씨를 다시 만납니다. 운전병 아저씨는 1년동안 정직을 당했고, 그의 아내는 뺑소니 사고를 당해 2년째 중환자실에 누워 있습니다. 여전히 힘들게 살고 있는 그들을 본 유나는, 또다시 미안해집니다.

   유나와 동갑이었지만 3년 늦게 입사한 후배는 유나를 잘 따랐습니다. 자기가 이전 직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왜 승무원이 되었는지 속 깊은 이야기까지 유나에게 들려줬습니다. 자신에게 할당된 면세품 판매 실적을 다 올리지 못하면 회사를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B항공사에는 엑스맨 제도가 있습니다. 승무원들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것인데, 면세품 판매 실적이 좋지 않았던 후배는 엑스맨 제도에서 성과를 올리기 위해 유나가 유부남인 부기장과 불륜 관계라고 허위 고발을 합니다. 유나가 따져 묻자 그녀는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유나에게 오히려 서운하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내게 접근했던 까닭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면 뭐 하러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했을까. 왜 진심 그대로를 표현했을까. 회사의 사주를 받아 팀원으로서 내게 접근한 것도, 친하게 지낸 것도 다 감시하기 위해서였다면 어째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자기 과거까지 털어놓은 걸까요. 217쪽

   유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공군 방산 비리에 연루돼 불명예 제대한 아버지를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고등학생 때 인터넷을 통해 아버지의 사건을 알게 된 유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은 채, 아버지를 비난합니다. 그날 아버지는 유나를 심하게 때렸고, 그날 이후로 그들은 더이상 함께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운전병을 그저 운전병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던 유나에게 진심이 있었듯이, 임신한 운전병의 아내에게 이런저런 일을 시키며 그녀를 챙긴 유나의 엄마에게도 어떤 진심이 있었듯이, 그녀의 아버지에게도 나름의 진심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진심 같은 것 말이죠. 사람들은 딸이 죽고나서야 아버지 행세를 하려 든다고 그를 비난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지의 진심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유나도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아버지에게도 어떤 진심이나 어쩔 수 없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사과할 기회를,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차릴 기회를, 누군가에게 진심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테니까요.

    어릴 적 본 「캐빈 어텐던트」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잊어지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주인공인 승무원이 플라이트 백을 놓고 나왔다가 하루 종일 '미스 플라이트'라는 놀림을 받는 겁니다. 과장되기야 했겠지만 사무장, 부사장을 포함해 기장, 부기장까지 하루 종일 그녀를 놀려 댑니다.
   어린 나는 '미스'가 뜻하는 것이 '놓쳐 버리다'인지, '미혼 여자의 성 앞에 붙이는 호칭 또는 지칭'인지 구분하지 못했고, 어쩐지 후자에 더 가깝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니었지만요.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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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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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이란 건 누구나 다 구질구질한 냄새를 풍기는 것!
   마흔 즈음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마흔 이후에도 똑같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미리 미리 다른 준비를 해야하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건달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가지고 있는게 없다면 더더욱이요.

   마흔! 깡패짓을 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희수는 생각했다. 하지만 마흔하나에도 마흔둘에도 별수없이 깡패짓을 해야 할 것이다. 열여덟에 이 바닥에 들어와서 이 나이를 처먹도록 아직 집 한 칸도 장만 못했다. 결혼도 못했고, 모든 돈도 없었다. 모은 돈은커녕 도박빚만 잔뜩이었다. 이 짓을 때려치우고 나가서 먹고살 만한 마땅한 기술도 없었다. 설령 다른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나이에 어딜 가서 새로 시작할 것인가. 마흔, 변두리 지역 깡패들의 중간 간부, 만리장 호텔의 지배인, 집 한 칸 없이 호텔방에 빌붙어 살며 부하들 몰래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전과 4범의 사내. 그게 희수의 현주소였다. 54쪽

   '구암'이라는 부산 바닷가를 꽉 잡고 있는 패거리의 넘버투를 담당하고 있는 희수. 그는 손영감 밑에서 온갖 궂은 일들을 하며 호텔 지배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손영감이나 패거리가 아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나 이권은 없습니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손영감에게 조금씩 받아쓰는 용돈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마흔을 앞두고 있는 희수는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게다가 다른 가족이 없는 손영감에게는 '도다리'라는 조카가 한 명 있는데, 손영감은 부모가 없는 이 조카를 가엾게 여겨 희수가 대부분 관리하고 있는 이 호텔도 손영감이 죽으면 조카의 몫이 될 확률이 큽니다.
   예전에 희수처럼 손영감 밑에서 일을 했지만 지금은 독립해서 자신만의 사업을 하고 있는 '양동'의 스카웃 제의를 받은 희수는, 손영감이 던진 말 한마디에 불쑥 호텔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손영감은 살짝 아쉬워하는 눈치지만, 그렇다고 희수의 미래를 보장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거나 붙잡지는 않습니다.

   구암(拘巖)의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는다. 9

   구암의 바닷가에서 활동하는 건달들은 아무도 양복을 입지 않습니다. 구암을 주름잡고 있는 손영감의 말 때문입니다. 손영감은 '양복 입고 설쳐대는 건달들이 추리닝을 입고 설쳐대는 건달보다 더 먼저 감옥에 가고 더 오래 감옥에 있더라'고 말합니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도 그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추리닝을 입을 건달보다는 양복을 입고 있는 건달들이 더 큰 인물들일테니까요.
   손영감의 호텔의 뛰쳐나와 양동과 함께 전자오락 사업을 시작한 희수는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오래된 에스페로 대신 비싼 벤츠를 타고 다닙니다.

  부산의 가상마을 '구암'에서 펼쳐지는 건달들의 활극이라고 하기에는 낯설지 않습니다. 시커먼 양복 대신 추리닝을 입고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건달들, 아무리 험한 말들을 입에서 내뱉어도 생활의 언어처럼 느껴집니다. 직업이 건달이고, 사채꾼에 창녀일 뿐인지 그들의 몸 속에서도 우리와 같은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김언수 작가가 어릴 적에 살았던 바닷가 마을의 풍경이 소설 속 '구암'과 닮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희수가 양복을 입고 벤츠를 타고 다니면서부터 낯설어집니다. 희수는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이기 위해 보통의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는 곳에 사무실을 얻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평범한 사람들과는 더욱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희수가 이권 다툼에 끼어 들었다가 배신을 당해 상대 편 건달들에게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손영감은 자신의 호적에 희수의 이름을 올리고, 호텔을 희수 앞으로 넘겨줍니다. 바로 그날 손영감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지만, 희수는 무사히 풀려나게 됩니다. 아무리 건달이라고 해도 합법적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건물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피』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전국의 건달을 잡아 들였던 시절, 199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희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이것은 누아르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우리 안에서 늘 끓어넘치고 있는 그 뜨거운 것들에의 송가다. 뒷표지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홍보문구와 다른 책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홍보문구 그대로입니다. 이 소설은 '누아르'가 아닙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은 건달인 '희수'에게서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고민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뭔 냄새가 이리 많이 나노."
   "다 생활의 냄새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활이란 건 누구나 다 구질구질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라고, 사우디아라비아 공주라도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질구질할 거라고 희수는 생각했다. 146~147쪽

   인간이란 게 그렇게 훌륭하지 않다. 별로 훌륭하지 않은 게 훌륭하게 살려니까 인생이 이리 고달픈 거다. 305쪽
   무능하고 착한 것은 나쁜 것이다. 사람은 나빠서 나쁜 것이 아니고 약하기 때문에 나빠지니까. 4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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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26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부러워라. 기필코 행복하셔야해요. 뒷북소녀님 ^^

뒷북소녀 2018-08-28 20:53   좋아요 0 | URL
ㅋㅋㅋ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설해목님과 함께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 오면 참 좋을텐데요.^^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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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는내내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는 책. 읽고나면 왜 사은품으로 맥주컵을 줬는지, 분위기가 다른 글을 쓰는 두 작가인 김연수와 김중혁이 왜 친구인지 알게 된다. 덕분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과 가고 싶은 곳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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