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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평점 :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서술자!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앞두고 있다. 올해는 과연 어떤 작가가 수상할까? 우리에게도 익숙한 작가가 수상할까? 궁금증을 안고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에세이를 읽었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출간된 토카르추크의 에세이다. 6편의 에세이와 6편의 강연록이 실려 있는데 표제작인 「다정한 서술자」는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기조 강연록이다.
대여섯 살 때, 토카르추크는 엄마의 처녀 적 사진을 보았는데 엄마의 표정이 슬퍼 보였다. 나중에 엄마에게 슬픔의 이유에 대해 묻자 작가의 엄마는 토카르추크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카르추크를 그리워하느라 슬픈 거라고 말했다. 아직 토카르추크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토카르추크를 그리워하냐고 묻자 엄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때로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 우리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 사람이 거기 존재하게 되는 거란다." 334쪽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서술자'를 선물했다고 말한다. 사서인 아버지와 이렇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어머니 사이에서 어떻게 토카르추크가 이야기꾼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배운다고 누구나 서술자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책과 이야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의 영향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책읽기와 글쓰기, 문학의 역할(혹은 기능) 등과 관련해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는데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이고 통찰력 깊은 글들이 많다. 그렇다고 작가의 글들이 문학 속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팬데믹이 오기 전 작가는 여행을 즐겼지만 이제 더 이상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는 여유롭게 휴양을 즐기고 있는 반면 누군가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을 작가는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트렌디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입니다.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대상에 끊임없이 생명령을 불어넣고, 인간의 경험들, 그들이 겪었던 상황들과 기억들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모든 작은 조각과 파편들에 존재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정함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것을 인격화하여 그것에 목소리를 투여하고, 존재하고 표현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선사합니다. (…) 다정함이란 가장 겸손한 사랑의 유형입니다. (…) 다정함은 우리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면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볼 때 구현됩니다. (…) 다정함이란 다른 존재, 그들의 연약함과 고유한 특성, 그리고 고통이나 시간의 흐름에 대한 그 존재들의 나약한 본질에 대해 정서적으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363~364쪽
작가는 그저 이야기를 하는 서술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공감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네는 서술자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유형의 서술 방식인 '사인칭 시점의 서술'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사인칭'이란 단순히 문법적인 구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각 등장인물의 다양한 시각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개별적인 시각의 지평을 넘어설 수 있는 시점"(359쪽)이다. 작가가 꿈꾸는 '사인칭 시점'이 부디 구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는 12편의 에세이를 통해 문학과 생명(인간과 동물을 모두 포함해서)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작가가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어떤 마음으로 쓰게 됐는지 이해됐다. 다정함은 서술자뿐 아니라 독자들, 그리고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을 인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실은 여러 가능한 모습 중 하나이며, 이 또한 우리에게 영구히 주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105~106쪽
인간의 심오한 능력 중 하나로 우리가 대안의 세계를 창조하고 다른 이들의 삶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창조하고, 시험하고, 다른 사람들과 가장 원활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나아가 우리에게 공감을 가르치고,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은 존재이며, 또 닮지 않은 존재인지를 알려준다.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 커다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잠시나마 타자의 삶을 살아 보았기에 보다 폭넓은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112쪽
소설은 일부 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엘리트 예술이 아니라 기차역이나 호텔, 노점에서 뒹구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예술이어야 한다. 115쪽
독서의 이력이 청춘을 맞은 인간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다. 116쪽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책을 읽기 위해서다. 133쪽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